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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5)

통감절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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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甲申]太寧二年이라 〈趙光初七年이요 後趙六年이라
五月 王敦 疾甚하니 矯詔拜王應注+[原註]敦兄含子 敦無子하야 以應爲嗣하니라하야 爲武衛將軍하야 以自副하고 以王含으로 爲驃騎大將軍하다
錢鳳 謂敦曰 脫有不諱注+[通鑑要解] 或然之辭인댄 便當以後事付應耶잇가 敦曰 非常之事 非常人所能爲 且應年少하니 豈堪大事리오
我死之後 莫若釋兵散衆하고 歸身朝廷하야 保全門戶 上計也
退還武昌하야 收兵自守하야 貢獻不廢 中計也
及吾尙存하야 悉衆而下하야 萬一僥倖 下計也니라
鳳謂其黨曰 公之下計 乃上策也라하고 遂與沈充定謀하야 俟敦死하야 卽作亂하다
○ 司徒導聞敦疾篤하고 率子弟하야 爲敦發哀注+[頭註]欲討敦이라가 知其物情所畏하고 乃僞言敦死하니 衆以爲敦信死라하야 咸有奮志러라
於是 尙書謄詔下敦府注+[頭註] 傳也 敦府 敦之官府하야 列敦罪惡하니 見詔甚怒而病轉篤하야 不能自將하고 以王含爲元帥하야 以誅姦臣溫嶠注+[附註] 嶠爲劉琨使江東할새 其母不欲이어늘 嶠絶裾而行이러니 旣至 不得還하니 終身恨之하다 帝旣親任하니 敦惡之하야 請爲左司馬어늘 嶠乃詐爲勤敬하고 進密謀하야 以附其欲이라 深結錢鳳하고 爲之聲譽하야 每曰 錢世儀精神滿腹이라하니 嶠素有藻鑑之名일새 鳳甚悅하다 會丹陽尹缺이어늘 嶠言於敦曰 京尹 咽喉之地 公宜自選이니이다 敦然之하야 問誰可者오한대 嶠薦鳳하니 鳳亦推嶠 嶠僞辭하니 遂表用之하야 使覘朝廷이라 嶠與敦別할새 洒(灑)涕러니 嶠至建康하야 盡以敦逆謀告帝하고 與尙書令庾亮으로 畫計討之한대 敦聞之하고 大怒曰 吾乃爲小物所欺라하니라으로 爲名하고 水陸五萬 奄至江寧南岸이라
諸軍하야 出屯南皇堂하고
夜募壯士하야 遣將軍段秀等하야 帥甲卒千人하야 渡水掩其未備하고 平旦 戰於越城하야 大破之하고 斬其前鋒將何康하다
敦聞含敗하고 大怒曰 我兄 老婢耳
門戶衰하니 世事去矣로다
我當力行호리라하고 因作勢而起라가 困乏復臥
尋卒하니 敦黨 悉平이라
有司發王敦하야 出尸하야 焚其衣冠하고 跽而斬之하다


태령太寧 2년(갑신 324) - 나라 광초光初 7년이고, 후조後趙 6년이다. -
5월에 왕돈王敦이 병이 위독하니, 조명詔命을 사칭하고 아들 왕응王應注+[原註]왕응王應왕돈王敦의 형인 왕함王含의 아들이니, 왕돈王敦이 아들이 없어서 왕응王應을 후사로 삼았다. 을 임명하여 무위장군武衛將軍으로 삼아서 자신의 로 삼고 형 왕함王含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
전봉錢鳳왕돈王敦에게 이르기를 “만일 숨길 수 없는 일(王敦의 죽음)이 있게 되면注+[通鑑要解]은 혹시나 하고 의심하는 말이다. 후사後事왕응王應에게 맡겨야 합니까?” 하니, 왕돈王敦이 말하기를 “비상非常한 일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요, 또 왕응王應이 나이가 어리니 어찌 큰일을 감당하겠는가.
내가 죽은 뒤에는 병기를 버리고 무리를 해산하고 조정에 몸을 의탁하여 문호門戶를 보전하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상책上策이요,
물러가 무창武昌으로 돌아가서 군대를 거두어 스스로 지키면서 공헌貢獻(貢物의 헌납)을 폐하지 않는 것이 중책中策이요,
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 병력을 통솔하고 동쪽으로 내려가서 만에 하나 요행을 바라는 것이 하책下策이다.” 하였다.
전봉錢鳳이 그의 동당同黨에게 이르기를 “하책下策이 바로 상책上策이다.” 하고는 마침내 심충沈充과 계책을 정하여 왕돈王敦이 죽기를 기다려 곧 난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사도司徒 왕도王導왕돈王敦이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가서 왕돈王敦을 위해 부고訃告를 발표하니,注+[頭註]왕도王導왕돈王敦을 토벌하고자 하다가 물정物情(사람들의 마음)이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왕돈王敦이 죽었다고 거짓으로 말한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왕돈王敦이 참으로 죽었다고 여겨서 모두 분발하려는 뜻이 있었다.
이때에 상서尙書가 조칙을 등서謄書하여 왕돈王敦관부官府에 내려 보내어注+[頭註]은 전함이요, 돈부敦府왕돈王敦관부官府이다. 왕돈王敦의 죄악을 열거하니, 왕돈王敦이 조서를 보고 매우 노하여 병이 더욱 도져서 스스로 군대를 거느릴 수가 없으므로 왕함王含원수元帥로 삼아, 간신 온교溫嶠注+[附註]처음에 온교溫嶠유곤劉琨을 위해 강동江東으로 사신 갈 때에 그 어머니가 가지 못하게 하자 온교溫嶠가 옷자락을 끊고 갔었는데, 도착한 뒤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니 종신토록 한하였다. 황제가 온교溫嶠를 친애하고 믿자, 왕돈王敦이 그를 미워하여 자신의 좌사마左司馬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온교溫嶠가 이에 거짓으로 왕돈王敦관부官府의 일을 열심히 하고 공경히 하였으며 은밀한 계책을 올려서 그의 바람을 맞춰 주었다. 온교溫嶠전봉錢鳳과 깊이 교분을 맺고 그를 칭찬하여, 말할 때마다 “전세의錢世儀(錢鳳)는 신채神彩가 전신에 꽉 차 있다.” 하니, 온교溫嶠가 평소에 사람을 알아본다는 명성이 있었으므로 전봉錢鳳이 매우 기뻐하였다. 마침 단양윤丹陽尹의 자리가 비자, 온교溫嶠왕돈王敦에게 말하기를 “경윤京尹은 매우 중요한 자리이니, 이 직접 선발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왕돈王敦이 옳게 여겨 누가 적임자인지 묻자 온교溫嶠전봉錢鳳을 천거하니, 전봉錢鳳이 또한 온교溫嶠에게 사양하였다. 온교溫嶠가 거짓으로 사양하니, 왕돈王敦이 마침내 표문表文을 올려 온교溫嶠를 등용해서 조정을 엿보게 하였다. 온교溫嶠왕돈王敦과 작별할 적에 거짓으로 눈물을 흘렸는데, 온교溫嶠건강建康에 이르러서는 왕돈王敦의 반역하려는 계책을 모두 황제에게 아뢰고 상서령尙書令 유량庾亮과 함께 왕돈王敦을 토벌할 계책을 세우니, 왕돈王敦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 마침내 하찮은 놈에게 속임을 당했다.” 하였다. 등을 죽이는 것을 명분으로 삼고 수군水軍육군陸軍 5만 명이 강녕江寧남안南岸에 갑자기 이르렀다.
황제가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나와 남황당南皇堂에 주둔하였다.
밤에 장사壯士를 모집하여 장군將軍 단수段秀 등을 보내서 갑병甲兵 천 명을 거느리고 물을 건너 아직 대비하지 못했을 때에 기습하게 하여 해뜰 때 월성越城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고 전봉장前鋒將 하강何康을 목 베었다.
왕돈王敦왕함王含이 패전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은 퇴물이다.
가문이 쇠하니 대세가 이미 글렀다.
내 마땅히 억지로라도 가야겠다.” 하고는 인하여 불끈 힘을 주어 일어나다가 기력이 부쳐 도로 누웠다.
왕돈王敦이 얼마 후에 죽으니, 왕돈王敦이 모두 평정되었다.
유사有司왕돈王敦을 매장한 무덤을 파서 그의 시신을 꺼내어 의관衣冠을 불태우고 꿇어앉혀서 목을 베었다.


역주
역주1 : 솔
역주2 : 예

통감절요(5)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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