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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3)

통감절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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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三年이라
匈奴呼韓邪單于來朝하다
班固匈奴傳贊曰
하고 하고 하니 久矣 夷狄之爲患也
自漢興으로 忠言嘉謀之臣 曷嘗不運籌策하야 相與爭於廟堂之上乎
高祖時 劉敬이요 呂后時 樊噲季布 孝文時 賈誼鼂錯 孝武時 王恢韓安國朱買臣公孫弘董仲舒 人持所見하야 各有同異
이나 總其要하면 歸兩科而已
縉紳注+[頭註] 或作搢하니 揷也 帶也 謂揷笏於帶也之儒則守和親하고 介冑之士則言征伐하니 要皆偏見一時之利害하고 而未究匈奴之終始也
自漢興으로 以至於今 有修文而和親之矣 有用武而克伐之矣 有卑下而承事之矣 有威武而臣之矣하야 詘(屈)伸異變하고 强弱相反이라
是故 其詳 可得而言也
昔〈和親之論 發於劉敬하니 是時 天下初定하고 新遭平城之難이라
從其言하야 約結〉和親하고 賂遺匈奴하야 冀以救安邊境이러니 孝惠高后時 遵而不違로되 〈匈奴冠盜不爲衰止〉而單于反加驕倨
至于孝文하야는 與通關市하고 妻以漢女하며 增厚其賂로되 而匈奴背約束하야 邊境屢被其害
是以 文帝中年 赫然發憤하야 遂躬戎服하고 親御鞍馬하야良家材力之士하야 馳射上林하고 講習戰陣하며 聚天下精兵하야 軍於廣武하고 顧問馮唐하야 與論將(師)[帥]하고 喟然歎息하야 思古名臣하니 此則和親無益 已然之明效也
仲舒親見四世之事注+[頭註]四世 高帝高后文景也로되 猶復欲守舊文하야 頗增其約하야
〈以爲義動君子하고 利動貪人하니 如匈奴者 非可以仁義說也 獨可說(悅)以厚利하고 結之於天耳
〉 與之厚幣하야 以沒其意하고 與盟於天하야 以堅其約하고 質其愛子하야 以累其心이니 〈匈奴雖欲展轉이나 奈失重利何 奈欺上天何 奈殺愛子何리오
夫賦斂行賂 不足以當三軍之費 城郭之固 無以異於貞士之約이라
而使邊城守境之民으로 父兄緩帶하고 稚子咽哺하야
胡馬不窺於長城하고 而羽檄不行於中國이면 不亦便於天下乎아하니
察仲舒之論하고 考諸行事하면 迺知其未合於當時而有闕於後世也
當孝武時하야 雖征伐克獲이나 而士馬物故亦略相當이요 匈奴人民 每來降漢이면 單于亦輒拘留漢使하야 以相報復하야 其桀尙如斯하니 安肯以愛子而爲質乎
此不合當時之言也
〈若不置質하고 空約和親이면 是襲孝文旣往之悔 而長匈奴無已之詐也
夫邊城 不選守境武略之臣하야 修障隧備塞之具하고 厲長戟勁弩之械하야 恃吾所以待邊寇하고 而務賦斂於民하야 遠行貨賂하고 割剝百姓하야 以奉寇讐하야 信甘言하고 守空約하야 而幾胡馬之不窺 不已過乎
至孝宣之世하야 承武帝奮擊之威하고 値匈奴百年之運하야 因其壞亂幾亡之厄하야 權時施宜하야 覆以威德하니
然後 單于稽首臣服하고 遣子入侍하야 三世稱藩하야 賓於漢庭이라
是時 邊城晏(閑)[閉]하고 牛馬布野하야 三世無犬吠之警하고 黎庶無干戈之役이러니 後六十餘載 遭王莽簒位하야 始開邊隙하니 單于由是歸怨自絶한대
〈莽遂斬其하야〉 邊境之禍構矣
〈故 呼韓邪始朝於漢이어늘 漢議其儀할새 而蕭望之曰 戎狄荒服 言其來服 荒忽無常하야 時至時去 宜待以客禮하야 讓而不臣이라
如其後嗣遁逃竄伏하야 使於中國 不爲叛臣이라하니라
及孝元時하야 議罷守塞之備할새 侯應以爲不可라하니 可謂盛不忘衰하고 安必思危하야 遠見識微之明矣
至單于咸棄其愛子하고 昧利不顧하야는 侵掠所獲 歲鉅萬計어늘 而和親賂遺 不過千金하니 安在其不棄質而失重利也리오
仲舒之言 漏於是矣
夫規事建議 不圖萬世之固하고 而婾(偸)恃一時之事者 未可以經遠也
若乃征伐之功 秦漢行事 嚴尤論之詳矣注+[頭註]嚴尤論 在十五卷辛未年이라
是故 聖王 禽獸하야 不與約誓하고 不就攻伐하니 約之則費賂而見欺 攻之則勞師而招寇
其地 不可耕而食也 其民 不可臣而畜也
是以 外而不內하고 疎而不戚하야 政敎不及其人하고 正朔不加其國이라
來則懲而御之하고 去則備而守之하며 其慕義而貢獻이면 則接之以禮讓하고 羈縻注+[釋義]馬曰羈 牛曰縻 言制四夷 要如馬牛之受羈縻也不絶하야 〈使曲在彼〉 是聖王制御蠻夷之常道也니라
先是 自烏孫以西 至安息諸國 近匈奴者 皆畏匈奴而輕漢이러니 及呼韓邪單于朝漢後 咸尊漢矣러라
○ 上 以戎狄賓服이라하야 思股肱之美하야 乃圖畵其人於麒麟閣注+[頭註]武帝獲麒麟하야 作此閣하고 圖畵其像하고 遂以爲名하니라하야 法其形貌하고 署其官爵姓名호되 唯霍光 不名하고 曰大司馬大將軍博陸侯姓霍氏라하고 其次 張安世, 韓增, 趙充國, 魏相, 丙吉, 杜延年, 劉德, 梁丘賀, 蕭望之, 蘇武凡十一人이니 皆以功德으로 知名當世
是以 表而揚之하야 明著注+[頭註] 表也 題也 圖畵功臣 自此始中興輔佐하야 列於方叔, 召虎, 仲山甫焉이러라
〈出趙充國傳〉
[新增]養心吳氏曰
慶元注+[頭註]漢無慶元하니 未詳이라間中興輔佐孰優論云 定策如博陸하고 濟治如丙魏하고 靖邊如充國 寘之前列이면 夫誰曰不然이리오
安世 以謹厚聞하고 延年 以安和著하고 蕭望之梁丘賀 以文學顯이어니와 其他如韓如劉 亦不過一藝一能之士 未見有卓然之功也어늘 而蘇武大節凜然 乃寘之於群臣之後
武之守節 如彼其堅也 起敬於夷狄 如彼其久也어늘 序列 如彼其卑也하니 帝豈無見於此哉
蓋麒麟之圖繪 正遠人觀聽之所係
彼其平日之所畏慕者 知有武而已러니
一旦顧瞻傑閣하고 歷數元勳할새 而疇昔敬畏之人 乃渺然特居群臣之後하면 必相顧駭愕하야 私相告語호되
以中郞之大節如此로도 且居群臣之下하니 則凡偃然其右者 其功德 顧可量歟아하야
將益信中國人才之盛하야 而隱然有虎豹在山之勢矣리라
夫如是 寧不足以示中國之大而杜外夷窺伺之心耶
詔諸儒하야 講五經同異注+[釋義]王氏曰 施讐論易하고 周堪, 孔霸論書하고 薛廣德論詩하고 戴聖論禮하며 公羊則嚴彭祖 穀梁則尹更始 同異者 謂與經旨合否也한대 蕭望之等 平奏其議注+[釋義] 謂無所可否[通鑑要解]平 評也 平其不平曰評이라어늘 親稱制臨決注+[釋義]七制解云 稱制 卽制曰 是已 自臨視其論議而斷決可否하고
乃立梁丘易注+[釋義]梁丘 複姓이니 名賀 字長翁이라 琅琊諸〈城〉人이니 從京房受易이러니 帝聞京房易明하고 求其門人而得賀하니라, 大小夏侯尙書注+[釋義]夏侯 複姓이니 大夏侯 名勝이요 字長公이니 東平人이라 其先夏侯都尉 從濟南張生하야 受尙書하야 以傳族子始昌하고 始昌傳勝하니라 小夏侯 名建이요 字長卿이니 勝之從父子也 勝以書受建하고 建又事歐陽高 由是 尙書有大小夏侯之學하니라, 穀梁春秋注+[釋義]穀梁 複姓이니 名淑(俶)이요 一名赤이요 字元始 魯人이라 何休曰 孔子至聖이라 却觀無窮하사 知秦將必燔書 故以春秋之說 口授子夏하고 子夏授穀梁하고 穀梁爲經作傳하야 以授孫卿하고 卿授申公하고 申公授江翁이라 其後 榮廣大善穀梁하야 以傳蔡千秋러니 宣帝好穀梁하야 乃擢千秋爲郞하니라博士하다
〈出本傳〉


감로甘露 3년(경오 B.C.51)
흉노匈奴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와서 조회하였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 말하였다.
“《서경書經》에는 만이蠻夷중하中夏를 어지럽힌 것을 경계하였고 《시경詩經》에는 융적戎狄을 응징한 것을 칭찬하였으며 《춘추春秋》에는 천하天下가 있으면 지킴이 사이四夷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적夷狄이 중국의 우환이 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나라가 일어난 이후로 충성스러운 말을 하고 훌륭한 계책을 세우는 신하들이 어찌 일찍이 좋은 계책을 내어 묘당廟堂의 위에서 서로 논쟁하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고조高祖 때에는 유경劉敬, 여후呂后 때에는 번쾌樊噲계포季布, 효문제孝文帝 때에는 가의賈誼조조鼂錯, 효무제孝武帝 때에는 왕회王恢한안국韓安國주매신朱買臣공손홍公孫弘동중서董仲舒가 사람마다 소견이 있어서 각각 같고 다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요점을 총괄해 보면 두 가지로 귀결될 뿐이다.
을 꽂고 큰 띠를 맨注+[頭註]은 혹 으로 쓰니 꽂음이고 은 띠이니, 을 띠에 꽂음을 이른다. 문신文臣들은 화친和親을 주장하고, 투구와 갑옷을 입은 무신武臣들은 정벌征伐을 말하였으니, 요컨대 모두 편벽되게 한때의 이해利害만을 보았고 흉노匈奴을 연구하지는 못하였다.
나라가 일어난 뒤로부터 지금까지 흉노匈奴문덕文德을 닦아 화친和親한 경우도 있었고, 무력武力을 써서 공격하고 정벌한 경우도 있었고, 몸을 낮추어 받들어 섬긴 경우도 있었고, 위엄으로 굴복시켜 신하로 기른 경우도 있어서, 굴신屈伸이변異變이 있고 강약强弱상반相反되었다.
이 때문에 그 상세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 화친和親하자는 의논이 유경劉敬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이때에 천하天下가 처음 평정되었고 새로 평성平城의 난리를 만났다.
그러므로 그의 말을 따라 화친和親을 약속하고 흉노匈奴에게 뇌물을 주어 변경을 안정시키기를 바랐는데, 효혜제孝惠帝고후高后(呂后) 때에는 이를 따르고 어기지 않았으나 흉노匈奴의 침략이 줄어들거나 그치지 않았고 선우單于가 도리어 교만하고 방자하였다.
효문제孝文帝 때에 이르러서는 흉노匈奴관문關門에 교역하는 시장을 열고 나라 왕실의 딸을 시집보내었으며 뇌물을 더 늘렸으나 흉노匈奴가 자주 약속을 배반하여 변경邊境이 누차 폐해를 입었다.
이 때문에 문제文帝중년中年혁연赫然히 분발하여 마침내 몸소 군복軍服을 입고 친히 안장 얹은 말을 몰고서 육군六郡양가良家에 재주와 힘이 있는 용사들을 수행시켜 상림원上林苑에서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전투하는 방법과 진법陣法을 익혔으며, 천하天下의 정예병을 모아 광무廣武에 주둔시키고 풍당馮唐에게 의견을 물어 함께 장수를 논하고는 크게 탄식하여 옛날의 유명한 무장武將들을 생각하였으니, 흉노匈奴와 화친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예전의 분명한 징험이다.
동중서董仲舒는 직접 4의 일注+[頭註]사세四世고제高帝, 고후高后, 문제文帝, 경제景帝이다. 을 보았으나 오히려 다시 옛 문덕文德을 지켜서 자못 그 약속을 더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군자君子를 감동시키고 이익은 탐욕스러운 사람을 감동시키니, 흉노匈奴와 같은 자는 인의仁義로 설득할 수 없고, 오직 많은 이익으로 기쁘게 하고 하늘에 약속을 맺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많은 폐백을 주어서 그 마음을 혹하게 하고, 함께 하늘에 맹세하여 그 약속을 굳게 하고, 사랑하는 자식을 인질로 삼아 그 마음을 얽어매야 하니, 이렇게 하면 흉노匈奴가 비록 마음을 바꾸고자 하나 중한 이익을 잃음을 어찌하며 상천上天을 속임을 어찌하며 사랑하는 자식을 죽임을 어찌하겠는가.
세금을 거두어 흉노匈奴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 삼군三軍의 비용에 미치지 못하고, 성곽城郭의 견고함이 올바른 선비의 약속과 다름이 없다.
그리하여 변방의 국경을 지키는 백성들로 하여금 부형父兄이 편안하고 어린 자식들이 배불리 먹게 하여,
호마胡馬장성長城을 엿보지 않고 격문檄文중국中國에 행해지지 않게 한다면 천하天下에 편리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동중서董仲舒의 의논을 살펴보고 행한 일을 고찰해 보면 당시에 부합하지 못하고 후세에 결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효무제孝武帝 때에는 비록 흉노匈奴를 정벌하여 이기고 사로잡았으나 군사와 말이 죽은 것이 또한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며, 흉노匈奴의 백성들이 매번 와서 나라에 항복하면 선우單于가 또한 그때마다 나라 사신을 구류하여 서로 보복해서 거칠고 사나움이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어찌 사랑하는 자식을 인질로 삼으려 하였겠는가.
이는 당시에 부합하지 않는 말이다.
만약 인질을 삼지 않고 빈말로 화친和親을 약속한다면 이는 효문제孝文帝가 예전에 했던 후회를 답습하고 흉노匈奴의 끝없는 속임수를 조장하는 것이다.
변방의 무용武勇지략智略이 있어 국경을 지킬 수 있는 신하를 선발해서 보루堡壘와 요새의 적을 방비하는 도구를 수리하고 긴 창과 강한 궁노와 같은 기계를 비축하여 우리가 변경의 오랑캐를 대비하는 방책을 세우지 않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많이 거두어서 멀리 뇌물을 바치고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원수를 받들어서 감언이설甘言異說을 믿고 헛된 약속을 지키면서 호마胡馬가 국경을 엿보지 않기를 바란다면 너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효선제孝宣帝 때에 이르러서는 무제武帝의 분발하여 공격하는 위엄을 계승하고 흉노匈奴가 백 년 만에 쇠퇴하는 운수를 만나 그들이 파괴되고 혼란하여 거의 멸망하게 된 액운을 틈타 때를 저울질하여 마땅하게 시행해서 위엄과 덕을 보여 주었다.
이렇게 한 뒤에야 선우單于가 머리를 조아리고 신하로 복종하며 자식을 보내어 입시入侍하게 해서 3대 동안 번신藩臣을 칭하여 나라 조정에 굴복하였다.
이때에 변방의 이 편안하고 소와 말이 들에 널려 있어서 3대 동안 개 짖는 소리가 없었고 백성들이 창과 방패를 메는 부역이 없었는데, 그 후 60여 년 사이에 왕망王莽이 천자의 지위를 찬탈하여 비로소 변방의 틈을 열어 놓으니, 선우單于가 이 때문에 원망하고 스스로 국교國交를 끊었다.
이에 왕망王莽이 마침내 그 시자侍子를 목 베어 변경邊境가 발생하였다.
그러므로 선제宣帝 때에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처음 나라에 조회 오자 나라에서 그 의식을 논의하였는데, 소망지蕭望之는 말하기를 ‘융적戎狄황복荒服은 와서 복종하는 것이 헤아리기 어려워 일정함이 없어서 때로 왔다가 때로 가니, 마땅히 손님의 로 대우해서 사양하고 신하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후사後嗣들이 달아나 숨어서 중국中國에 반역하는 신하가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효원제孝元帝 때에 변방을 지키는 수비를 파할 것을 의논하자, 후응侯應이 불가하다 하였으니, 그의 말은 융성해도 쇠할 때를 잊지 않고 편안해도 반드시 위태로울 때를 생각하여, 멀리 내다보고 기미를 아는 밝은 지혜라고 이를 만하였다.
선우單于가 사랑하는 자식을 모두 버리고 이익에 눈이 멀어 돌아보지 않음에 이르러서는 침략하여 얻는 것이 1년에 거만鉅萬이었는데 화친和親하여 뇌물을 받는 것은 천금千金에 불과하였으니, 인질을 버리지 않고 중한 이익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동중서董仲舒의 말의 결함이 여기에서 드러났다.
일을 계획하고 의견을 내놓을 때에 만대토록 견고함을 도모하지 않고 구차하게 한때의 이익만을 믿는 것은 오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정벌征伐하는 공으로 말하면 시대에 행한 일을 엄우嚴尤가 상세히 논하였다.注+[頭註]엄우嚴尤의 의론은 뒤의 15권 신미년조辛未年條(11 신망新莽 3년)에 있다.
이 때문에 성왕聖王금수禽獸로서 오랑캐들을 길러 그들과 맹약하지 않고 공격과 정벌을 가하지 않았으니, 맹약하면 뇌물을 주고 속임을 당하며 공격하면 군사를 수고롭게 하고 침략을 초래하였다.
그들의 땅을 경작하여 먹을 수가 없고 그들의 백성을 신하로 기를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밖으로 삼고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소원히 하고 가까이하지 않아서 정교政敎가 그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고 정삭正朔이 그 나라에 가해지지 않았다.
오면 징계하여 어거하고 가면 대비하고 지켰으며, 를 사모하여 와서 공물貢物을 바치면 겸양謙讓으로 대하고 기미羈縻(얽어맴)注+[釋義]말에게 씌우는 것을 (굴레)라 하고, 소에게 씌우는 것을 (고삐)라 하니, 사방의 오랑캐를 제어하기를 말과 소가 굴레와 고삐에 제어당하는 것과 같이 하고자 함을 말한 것이다. 하여 끊지 않아서 잘못이 저들에게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성왕聖王만이蠻夷를 제어하는 떳떳한 방도方道이다.”
이보다 먼저 오손烏孫 서쪽으로부터 안식국安息國 등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흉노匈奴에 가까운 자들이 모두 흉노匈奴를 두려워하여 나라를 경시하였는데,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나라에 조회 온 뒤로부터 모두 나라를 높이게 되었다.
융적戎狄이 조공을 바치고 복종한다 해서 고굉股肱(신하)이 보좌한 아름다운 공로를 생각하여 마침내 그들의 모습을 기린각麒麟閣注+[頭註]무제武帝기린麒麟을 잡은 다음 이 을 짓고 공신功臣들의 화상畵像을 그리고는 마침내 기린각麒麟閣이라 이름하였다. 에 그려서 그 모습을 본뜨고 그 관작官爵성명姓名을 서술하되 오직 곽광霍光만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 박륙후博陸侯 성곽씨姓霍氏’라 하였고, 그 다음은 장안세張安世, 한증韓增, 조충국趙充國, 위상魏相, 병길丙吉, 두연년杜延年, 유덕劉德, 양구하梁丘賀, 소망지蕭望之, 소무蘇武 등 모두 11명이었으니, 모두 공덕功德으로 당대에 이름이 알려졌다.
이 때문에 표출하여 드날려서 그들이 나라를 중흥中興하는 데에 보좌한 공로를 밝게 드러내어注+[頭註]는 표함이고 씀이니, 공신功臣들을 그리는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라 때의 방숙方叔, 소호召虎, 중산보仲山甫에 나열한 것이다.
- 《한서漢書 조충국전趙充國傳》에 나옴 -
[新增]養心吳氏가 말하였다.
경원간중흥보좌숙우론慶元間中興輔佐孰優論(慶元注+[頭註]나라 때에는 경원慶元이라는 연호가 없으니, 자세하지 않다. 연간年間중흥中興보좌輔佐한 공이 누가 나은가를 논한 글)에 이르기를 박륙후博陸侯(霍光)와 같이 좋은 계책을 결정하고, 병길丙吉위상魏相과 같이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고, 조충국趙充國과 같이 변경을 편안히 한 자를 앞줄에 두는 것은 누가 옳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장안세張安世는 삼가고 후덕함으로 알려졌고, 두연년杜延年은 편안함과 화목함으로 드러났고, 소망지蕭望之양구하梁丘賀문학文學으로 드러났지만 기타 한증韓增유덕劉德 같은 자는 한 가지 기예와 한 가지 재능을 가진 선비에 지나지 않았고 드높은 공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는데 큰 절개가 늠름한 소무蘇武를 마침내 여러 신하의 뒤에 두었다.
소무蘇武가 절개를 지킨 것이 저와 같이 견고하고 오랑캐 땅에서 더욱 공경받은 것이 저와 같이 오래되었는데도 서열序列이 저와 같이 낮았으니, 선제宣帝가 어찌 이에 대하여 소견이 없었겠는가.
기린각麒麟閣에다가 공신功臣들의 초상을 그림은 바로 먼 오랑캐 사람들이 보고 들음에 관계되는 것이다.
저들이 평소에 두려워하고 사모한 것은 오직 소무蘇武가 있음을 알 뿐이었는데,
하루아침에 훌륭한 기린각을 돌아보고 큰 공이 있는 자들을 일일이 헤아려 볼 때에 옛날 자신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던 사람이 도리어 까마득히 여러 신하들의 뒤에 있으면 반드시 서로 돌아보고 놀라서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소중랑蘇中郞(蘇武)의 큰 절개가 이와 같은데도 여러 신하들의 아래에 있으니, 그렇다면 모든 그 위에 버젓이 있는 자들은 그 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장차 중국中國인재人才가 많음을 더욱 믿어서 은연중 호랑이와 표범이 산에 있는 형세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와 같다면 어찌 족히 중국中國의 큼을 보여 주어 오랑캐들의 기회를 엿보는 마음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는가.”
여러 유자儒者들에게 명하여 오경五經동이同異를 강론하게 하였는데,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시수施讐는 《역경易經》을 논하고, 주감周堪공패孔霸는 《서경書經》을 논하고, 설광덕薛廣德은 《시경詩經》을 논하고, 대성戴聖은 《예경禮經》을 논하였으며, 《공양전公羊傳》은 엄팽조嚴彭祖이고 《곡량전穀梁傳》은 윤경시尹更始였다. 동이同異경서經書의 뜻과 부합하는가 부합하지 않는가를 이른다.” 소망지蕭望之 등이 그 의논을 평주平奏하자,注+[釋義]平奏의 가부可否하는 바가 없음을 이른다. [通鑑要解]平은 논평함이니, 공평하지 않은 것을 고르게 함을 이라 한다.이 친히 를 칭하여 직접 나와서 결정하였다.注+[釋義]칠제해七制解》에 이르기를 “칭제稱制는 바로 ‘제왈制曰’이 이것이니, 황제가 직접 임석하여 그 의논을 보고 가부를 결단하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양구하梁丘賀의 《역경易經》,注+[釋義]양구梁丘복성複姓이니, 이름이 이고 자가 장옹長翁이다. 낭야琅琊제성諸城 사람이니, 경방京房에게 《역경易經》을 배웠는데, 황제가 경방京房이 《역경易經》에 밝다는 말을 듣고 그 문인門人을 찾아 양구하梁丘賀를 얻었다. 대하후大夏侯(夏侯勝)와 소하후小夏侯(夏侯建)의 《상서尙書》,注+[釋義]하후夏侯복성複姓이니, 대하후大夏侯는 이름이 이고 자가 장공長公이니 동평東平 사람이다. 그 선조인 하후도위夏侯都尉제남濟南장생張生에게서 《상서尙書》를 전수받아 족자族子시창始昌에게 전하였고, 시창始昌에게 전하였다. 소하후小夏侯는 이름이 이고 자가 장경長卿이니, 종부從父(숙부)의 아들(사촌 형제)이다. 하후승夏侯勝은 《상서尙書》를 하후건夏侯建에게 전수하고, 하후건夏侯建은 또 구양고歐陽高를 사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상서尙書》에 대하후大夏侯소하후小夏侯의 학설이 있게 되었다. 곡량穀梁의 《춘추春秋注+[釋義]곡량穀梁복성複姓이니, 이름이 이고 일명一名이며 자가 원시元始이니 나라 사람이다. 하휴何休가 말하였다. “공자孔子는 지극한 성인聖人으로 무궁한 후세를 관찰하여 나라가 장차 반드시 서적을 불태울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의 내용을 말로 자하子夏에게 전수하였고, 자하子夏곡량穀梁에게 전수하였고, 곡량穀梁을 위하여 을 만들어서 손경孫卿에게 전수하였고, 손경孫卿신공申公에게 전수하였고, 신공申公강옹江翁에게 전수하였다. 그 뒤에 영광榮廣이 《곡량전穀梁傳》을 매우 잘하여 채천추蔡千秋에게 전하였는데, 선제宣帝가 《곡량전穀梁傳》을 좋아하여 마침내 채천추蔡千秋를 발탁하여 으로 삼았다.” 박사博士를 세웠다.
- 《한서漢書 소망지전蕭望之傳》에 나옴 -


역주
역주1 書戒蠻夷猾夏 : 《書經》 〈舜典〉에 “帝舜이 말씀하기를 ‘皐陶야! 蠻夷가 中夏를 어지럽히며 약탈하고 죽이며 밖을 어지럽히고 안을 어지럽히므로 너를 士로 삼는다.’ 하였다.[皐陶 蠻夷猾夏 寇賊姦宄 汝作士]”라고 보인다.
역주2 詩稱戎狄是膺 : 《詩經》 〈魯頌 閟宮〉에 “융적을 이에 막으며, 형서를 이에 징계한다.[戎狄是膺 荊舒是懲]”라고 보인다.
역주3 春秋有道 守在四夷 : 《春秋左傳》 昭公 23年條에 ‘古者天子守在四夷 天子卑 守在諸侯 諸侯守在四隣 諸侯卑 守在四境’이라고 보이며, 《淮南子》 〈泰族訓〉에는 ‘天子得道 守在四夷’라고 보이는 바, 守在四夷는 사방 오랑캐들을 융화시켜 中國의 호위로 삼음을 이른다.
역주4 : 휵
역주5 : 삭
역주6 六郡 : 《漢書》의 顔師古 註에 이르기를 “六郡은 隴西, 天水, 安定, 北地, 上郡, 西河를 이른다.” 하였다.
역주7 : 오
역주8 侍子 : 屬國의 王이나 혹은 諸侯가 아들을 보내어 入朝하여 天子를 모시게 하는 바, 이를 侍子라 한다.
역주9 : 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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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오] 3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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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오] 3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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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오] 3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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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오] 3년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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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오] 3년 725

통감절요(3)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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