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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6)

통감절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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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丑]十三年이라 〈恭帝侑義寧元年이요 長樂王竇建德丁丑元이요 魏公李密元이요 定楊可汗劉武周天興元이요 梁王梁師都永隆元이요 秦王薛擧秦興元이요 梁王蕭銑鳴鳳元이라
○ 是歲 幷楚하야 凡八國이라
正月 杜伏威注+[附註]齊州人이라 少豪蕩盜羊이러니 捕急한대 亡命爲盜하야 據歷陽하고 自稱總管하니라 世民 討王世充할새 遣使招懷한대 乃獻款하니 高祖授以吳王하니라起兵하야 據歷陽하니 江, 淮間小盜 多附之러라
○ 二月 馬邑劉武周注+[頭註]驍勇任俠하야 爲鷹揚府校尉 斬太守王仁恭하고 收兵得萬餘人하야 自稱太守하고 遣使하야 附于突厥하다
○ 李密 說翟讓曰 洛口倉 多積粟하니 將軍 若親帥大軍하고 輕行掩襲하야 發粟以賑窮乏이면 遠近 孰不歸附리오
百萬之衆 一朝可集하리이다
遂將精兵七千人하야 襲(回)[興]洛倉破之하고 開倉하야 恣民所取하니 老弱襁負하야 道路相屬이라
於是 推密爲主하고 號爲魏公하다
○ 四月 薛擧注+[附註]蘭州人이라 善射殖産하고 結納邊豪하야 爲金城校尉러니 與其子仁杲 劫囚其令而開倉賑施하고 招集群盜하야 自號西秦霸王하고 遂僭帝號하니라自稱西秦霸王하고 盡有隴西之地하다
○ 李密 移檄郡縣하야 數煬帝十罪하고 且曰 罄南山之竹이라도 書罪無窮이요 決東海之波라도 流惡難盡이라하니 祖君彦注+[頭註]李密以爲이라之辭也러라
○ 內史舍人封德彛 諂附虞世基하야 以世基不閑吏務注+[通鑑要解] 習也라하야 密爲指畫하고 宣行詔命하야 諂順帝意
世基之寵 日隆하고 而隋政益壞하니 皆德彛所爲也러라
○ 初 唐公李淵 生四男하니 建成, 世民, 玄霸, 元吉이라
世民 聰明勇決하고 識量過人이러니 見隋室方亂하고 陰有安天下之志하야 傾身下士하고 散財結客하야 咸得其歡心이러라
晉陽宮監裴寂 與劉文靜注+[頭註]晉陽令이라同宿이라가 見城上烽火하고 寂歎曰 貧賤如此어늘 復逢亂離하니 將何以自存이리오 文靜笑曰 時事 可知
吾二人相得이면 何憂貧賤이리오
文靜 見李世民而異之하야 深自結納하고 謂寂曰 此 非常人이라
豁達 類漢高하고 神武 同魏祖注+[頭註]魏祖 曹操하니 年雖少 命世才注+[頭註]見二十六卷이라라하더라
〈本紀云 世民年四歲 有書生見하고 異之曰 龍鳳之姿 天日之表
其年幾冠 必能濟世安民이라하니 乃採其語하야 名曰世民하니라
文靜 坐與李密連昏하야 繫太原獄注+[通鑑要解]密反하야 據洛倉故也 俗昏字與婚同하니 古惟昏字 取婦以昏時하니 取陽往陰來之義러니 後人加女作婚하니라이러니 世民 就省之한대 文靜曰 天下大亂하니 非高, 光之才注+[頭註]高, 光 漢高祖與光武 不能定也니라
世民曰 安知其無리오
但人不識耳니이다
我來相省 非兒女子之情이요 欲與君議大事也 計將安出이닛고 文靜曰 今主上 南巡江, 淮 李密 圍逼東都하니 群盜殆以萬數
當此之際하야 有眞主驅駕而用之 取天下 如反掌니라
太原百姓 皆避盜入城하고 文靜 爲令數年 知其豪傑하니 一旦收集이면 可得十萬人이요
尊公所將之兵 復且數萬이니 一言出口 誰敢不從이리오
以此 乘虛入關하야 號令天下하면 不過半年 帝業 成矣리라
世民 笑曰 君言 正合我意라하고 乃陰部署賓客하니 不之知也러라
世民 乘間屛人하고 說淵曰 今主上無道하야 百姓困窮하고 晉陽城外 皆爲戰場하니
大人 若守小節이면 下有寇盜하고 上有嚴刑하야 危亡無日이라
不若順民心하야 興義兵하야 轉禍爲福이니 天授之時也니이다 大驚曰 汝安得爲此言
明日 世民 復說淵曰 今盜賊 日繁하야 遍於天下하니 大人 受詔討賊이라도 賊可盡乎잇가
願大人 勿疑하소서 淵乃歎曰 吾一夕思汝言하니 亦大有理
今日 破家亡軀 亦由汝 化家爲國 亦由汝라하니라
○ 先時 裴寂 以晉陽宮人으로 侍淵이러니 從寂飮하야 酒酣 從容言曰
二郞注+[頭註]世民 乃淵之第二子 云二郞이라 陰養士馬하야 欲擧大事하니 正爲寂以宮人侍公이라가 恐事覺幷誅일까하야 爲此急計耳
衆情 已協하니 公意如何 淵曰 吾兒誠有此謀하니 事已如此 當復奈何
正須從之耳라하니라
及劉武周據汾陽宮하야는 世民 言於淵曰 大人 爲留守어늘 而盜賊 竊據離宮하니 不早建大計 禍今至矣리이다
乃命世民하야 與文靜等으로 各募兵이러니 遠近 赴集하야 旬日間 近萬人이라
劉文靜 勸淵호되 與突厥相結하야 資其士馬하야 以益兵勢하라하니 從之注+[通鑑要解]高祖自爲手啓호되 卑辭厚禮하야 遺始畢可汗云 欲大擧義兵하야 遠迎主上하야 復與突厥和親 如開皇之時라하니 始畢 得啓하고 謂其大臣曰 隋主爲人 我所知也 若迎以來하면 必害唐公而擊我無疑矣리라 苟唐公自爲天子인댄 我當不避盛暑하고 以兵馬助之하리라하고 卽命以此意爲復書하니라하다
范祖禹唐鑑曰
匹夫欲自立於鄕黨에도 猶不可不自重也어든 況欲圖王業, 擧大事 而可以不正啓之乎
太宗 陷父於罪而脅之以起兵하고 高祖 昵裴寂之邪하야 受其宮女而不辭하고 又稱臣於突厥하야 倚以爲助하니 何以示後世리오
夫創業之君 其子孫 則而象之 如影響之應形聲하니 不可不愼擧也
是以 唐世人主無正家之法하고 夷狄多猾夏之亂注+[頭註] 亂也하니 蓋高祖以此始之也일새라
古之王者 行一不義하고 殺一不辜而得天下라도 不爲也
太宗 恐高祖之不從하고 懼突厥之爲患이면 終守臣節 可也 豈有脅父臣虜하야 以得天下而可爲乎
〉 則亦無所不至矣
惜乎
太宗 有濟世之志, 撥亂之才注+[頭註] 治也로되 而不知義也로다
裴寂等 乃請尊天子注+[頭註]煬帝하야 爲太上皇하고 立代王注+[頭註] 卽恭帝爲帝하야 以安隋室이라
移檄郡縣하니 西河郡 不從淵命이어늘
使世民으로 將兵擊西河하다 郡丞高德儒 閉城拒守어늘
攻拔之하고 執德儒至軍門하야 世民 數之曰 汝指野鳥爲鸞하야 以欺人主하야 取高官하니 吾興義兵 正爲誅佞人耳라하고 遂斬之하다
自餘 不戮一人하고 秋毫無犯하고 各慰撫하야 使復業하니 遠近 聞之大悅이러라
建成等 引兵還晉陽하니 往返 凡九日이라
淵喜曰 以此行兵이면 雖橫行天下라도 可也라하고 遂定入關之計하다
開倉하야 以賑貧民하니 應募者日益多
裴寂等 上淵號爲大將軍하다
○ 秋七月 以子元吉 爲太原太守하야 留守晉陽宮하고
帥甲士三萬하고 發晉陽하야 立軍門誓衆하고 幷移檄郡縣하야 諭以尊立代王之意하니 西突厥阿史那大奈注+[頭註]阿史那 突厥 三字姓이요 大奈 名也亦帥其衆以從이라
代王侑遣宋老生注+[頭註]虎牙郎將이라하야 帥精兵二萬하야 屯霍邑하고 屈突通 將驍果注+[頭註] 勇也數萬하야 屯河東하야 以拒淵이라
積雨하야 不得進하다
○ 淵 以書招李密하니 自恃兵强하고 欲爲盟主하야 使祖君彦復書曰
所望 左提右挈하고 戮力同心하야 執子嬰於咸陽注+[釋義]秦二世兄子 公子嬰也 立爲秦王이라 沛公入咸陽 子嬰道旁이어늘 乃以屬吏하니라[頭註]子嬰 指代王이라하고 商辛於牧野注+[釋義] 殺死也 商帝辛 天下謂之紂 周武王 伐之한대 紂距之牧野어늘 武王斬之하니라[頭註]商辛 指煬帝 豈不盛哉
且欲使淵으로 以步騎數千으로 自至河內하야 面結盟約이어늘
得書하고 笑曰 密 妄自矜大하니 非折簡注+[頭註]卽尺書, 尺牘也可致
吾方有事關中하니 若遽絶之 乃是更生一敵이니 不如卑辭推獎하야 以驕其志하야 使爲我塞成皐之道注+[頭註]江都使信不通이라하고 綴東都之兵注+[頭註]不得西應長安이라이면
我得全意西征하리니 俟關中平定하야 據險養威하고 徐觀之勢하야 以收漁人之功注+[釋義] 蛤也 知天將雨鳥也 戰國策 趙伐燕이어늘 蘇代爲燕하야 謂趙惠文王曰 今者臣來過易水할새 蚌出方曝이어늘 而鷸啄其肉한대 蚌合而拑其喙 鷸謂蚌曰 今日不雨하고 明日不雨하리니 卽有蚌脯리라 蚌亦謂鷸曰 今日不出하고 明日不出이면 必有死鷸이리라 蚌鷸不肯相舍라가 漁人得而幷擒之하니이다 今趙且伐燕하니 燕, 趙久相支하야 以敝大衆하면 臣恐强秦之爲漁父也하노이다 未爲晩也니라 乃使溫大雅注+[頭註]記室參軍이라復書曰 天生烝民 必有司牧이니 當今爲牧 非子而誰
老夫 年踰知命注+[頭註]知命 五十而知天命이라하니라하니 願不及此
欣戴大弟하야 하노니 唯弟 早膺圖注+[釋義] 籍也 圖讖云 李氏當王故云이라하야 以寧兆民하라
宗盟之長 屬籍注+[釋義] 附也 簿籍也 謂所附宗籍이라[附註]屬籍 宗屬之籍이니 李密書曰 與兄派流雖異 根系本同이라 故云然也 唐公 隴西成紀人이요 遼東襄平人이니 是異派也 所謂根系 但同姓耳見容하야 復封於唐이면 斯榮足矣
殪商辛於牧野 所不忍言이요 執子嬰於咸陽 未敢聞命이라
汾, 晉注+[頭註]汾州及晉陽이니 唐公所據左右 尙須安輯이니 盟津之會注+[原註]盟津 卽孟津也[釋義]孟者 河北也 各於其地置津하야 謂之孟津이라 一說 武王伐紂할새 八百諸侯於此盟이라 故曰盟津이니 河內咸陽縣 是也 未暇卜期로다
得書甚喜하야 以示將佐曰 唐公 見推하니 天下 不足定矣로다
自是 信使往來不絶이러라
○ 雨久不止하니 淵軍中糧乏하고 劉文靜 未返注+[頭註]使突厥請兵而未返이라이라
或傳호되 突厥 與劉武周 乘虛襲晉陽이라하야늘 召將佐하야 謀北還하니
裴寂等 皆以爲不如還救根本하야 更圖後擧라한대 世民曰 今禾菽被野하니 何憂乏糧이리오
老生注+[頭註]卽宋老生이라 輕躁하니 一戰可擒이요 李密 顧戀倉粟하니 未遑遠略이요 武周 與突厥 外雖相附 內實相猜하니 武周雖遠利太原이나 豈可近忘馬邑注+[頭註]劉武周 馬邑人이라이릿고
本興大義 奮不顧身하야 以救蒼生이니 當先入咸陽하야 號令天下어늘
今遇小敵하야 遽已班師 恐從義之徒 一朝解體 還守太原一城之地 爲賊耳 何以自全이릿고
淵不聽하고 促令引發한대 世民 將復入諫이러니 會日暮하야 淵已寢이라
世民 不得入하고 號哭於外하니 聲聞帳中이라
淵召問之한대 世民曰 今兵以義動 進戰則克하고 退還則散하리니
衆散於前하고 敵乘於後 死亡無日하리니 何得不悲리잇고 淵乃悟하다
世民 乃與建成으로 分道夜追하니 左軍復還注+[頭註]右軍未發하고 左軍去 亦未遠故 追之하고 太原運糧 亦至러라
[新增]胡氏曰
武王伐商 數紂之罪則多矣어늘 煬皆有之하고 而弑父殺兄注+[頭註]見上帝崩於大寶殿註 則紂之所未有 其當討無疑矣
李淵 聲其大逆不道之罪하야 而擧兵討之 則雖德非成湯이나 亦無愧於自亳之載注+[頭註] 始也 書伊訓 作哉 造攻 自鳴條어늘 朕哉自亳이라하니라하니 世民 不必用宮人私侍注+[頭註]裴寂 以晉陽宮人으로 侍淵이라以劫父也 不必詐爲勅書發民以鼓怨也注+[附註] 怨也 是年 裴寂 促淵起兵한대 淵乃使劉文靜으로 詐爲勅書하야 發太原, 西河, 雁門, 馬邑民年二十以上爲兵하야 擊高麗하니 由是 人情恟恟하야 思亂者衆하니라 不必稱臣突厥也 不必尊江都注+[頭註]煬帝在江都러니 請尊爲太上皇也而立代王也 不必推獎李密以驕其志也
堅守晉陽하야 收召豪傑하고 厚集其衆하야 分擊二京이면 義聲旣震 群盜自下하리니
乃遣良將하야 總銳師하고 南指楊土 則不逾旬時하야 罪人斯得하야 天下歸唐하리니 其孰能禦之리오
惜乎
世民 有安天下之志하고 才足以撥亂이로되 而無湯, 武反身之學하고 劉文靜 智謀之士耳 裴寂 又出其下
雖乘時擧事하야 不旋踵成功이나 而用智術하야 違義理者 多矣니라
八月 雨霽어늘 命軍中하야 注+[原註]曬也鎧仗行裝하고 趣霍邑注+[釋義]王氏曰 霍邑 漢彘縣也 後漢改永安縣하고 隋改霍邑하니라 今霍州 有霍邑하니 屬平陽이라[頭註]時 隋將宋老生 屯霍邑하니라하다
建成, 世民 將數千騎하고 至城下하야 擧鞭指麾하야 若將圍城之狀하고注+[原註]詬罵也하니 老生하야 引兵三萬하야 分道而出이라가 兵大敗하다
老生 下馬投塹注+[通鑑要解] 遶城水也 出廣韻이라이어늘 劉弘基注+[頭註]大業中 爲勳侍라가 亡命하니 使募兵하고이라就斬之하고 遂克霍邑하다
○ 李淵 欲引兵西趣長安호되 猶豫未決이라
裴寂曰 屈突通 擁大衆하야 憑堅城하니 吾捨之而去라가 若進攻長安不克이면 退爲河東所踵注+[頭註]隋遣屈突通하야 將兵屯河東하니 見上七月이라하야 腹背受敵하리니 危道也
不若先克河東然後 西上이니이다
長安恃通爲援하니 通敗 長安 必破矣리이다 世民曰 不然하다
兵貴神速하니
吾席累勝之威하고 撫歸附之衆하야 鼓行注+[釋義]兵以鼓進이라而西하면 長安之人 望風震駭하야 智不及謀하고 勇不及斷하리니 取之若振葉耳니이다
若淹留自敝於堅城之下 彼得成謀하야 脩備以待我하리니 坐費日月하야 衆心離 則大事去矣리이다
且關中蜂起之將 未有所屬하니 不可不早招懷也
屈突通 自守虜耳 不足爲慮니이다
兩從之하야 留諸將圍河東하고 自引兵而西하니 京兆諸縣 多遣使請降이러라
○ 淵 帥諸軍濟河하니 關中士民歸之者如市하고 世民所至 吏民及群盜 歸之如流
世民 收其豪俊하야 以備僚屬하다
淵女李氏適柴紹者 亦將精兵萬餘하고 會世民於渭北하야 與柴紹 各置幕府하고 娘子軍注+[附註]柴紹之赴太原也 謂其妻李氏曰 尊公擧兵하니 今偕行則不可 留此則及禍리니 奈何 李氏曰 第速行하라 我一婦人이니 易以潛匿이라한대 紹遂行하다 李氏歸鄂縣別墅하야 散家財하야 聚徒衆이라 淵濟河어늘 李氏遣使迎之하니 淵使柴紹 將數百騎하고 迎李氏한대 將精兵萬餘하고 會世民於渭北하니라이라하다
隰城尉注+[頭註]漢百官志曰 大郡曰守 小郡曰尉房玄齡 謁世民於軍門이어늘 世民 一見如舊識하야 署記室參軍하고 引爲謀主하니 玄齡 亦自以遇知己라하야 罄竭心力하야 知無不爲러라
世民 引兵頓于阿城注+[頭註] 次也하니 勝兵 十(二)[三]萬이라 軍令嚴整하야 秋毫不犯이러라
○ 十月注+[附註]{太傅}後梁宣帝詧之曾孫也 煬帝以外戚이라하야 擢爲羅川令하다 巴陵尉董景珍等 謀據郡叛하니 衆共推景珍爲主한대 景珍曰 吾素寒賤하야 不爲衆服이라 羅川令蕭銑 梁室之後 寬仁大度하니 請奉之하야 以從衆望하노라 乃遣使報銑한대 銑從之하고 聲言討賊하야 召募數千人하니라 起兵巴陵하야 自稱梁王하다
○ 十一月 李淵 克長安하고 與民約法十二條하야 悉除隋苛禁하다
馬邑郡丞李靖注+[通鑑要解]三原人也 素與淵有隙이러니 收靖將斬之한대 靖大呼曰 公興義兵 欲平暴亂이어늘 而以私怨으로 殺壯士乎
世民 爲之固請한대 乃捨之하니 世民 因召置幕府하다
○ 淵 備法駕하야 迎代王侑하야 卽皇帝位於하니 時年十三이라
大赦改元하고 遙尊煬帝하야 爲太上皇하고
以淵假黃鉞, 都督內外諸軍事하고 進封唐王하다
己巳 以李建成으로 爲唐世子하다
歷年圖曰
文帝注+[頭註]隋高祖楊堅이라之於周室 非有元功厚德 素洽於人이요 直以天元注+[頭註]周宣帝贇이라暴崩 嗣君幼弱하고 姦臣矯命하야 徼幸得之
이나 明敏儉約하야 勤於政治하며 隨才任官하고 信賞必罰이라
能取江南三百年之國 易於反掌하야 使天下復爲一統하야
百姓繁庶하고 衣食豐衍하야 突厥, 室韋注+[頭註]見下卷이라, 靺鞨注+[頭註]北狄別種이니 古肅愼氏之地, 林邑注+[頭註]國名이니 在交趾南이라, 高昌注+[頭註]見下卷이라, 女國注+[頭註]其國無男하야 照水而孕이라之屬 莫不稽顙稱臣하고 奉珍入貢하니 雖兩漢全盛之時라도 不能過也
向使後嗣僅得中材之主以守之런들 十世之內 未易亡也리라
煬帝以悖逆詐謀 坐承富强之業하야 志驕氣溢하야 慨然慕秦皇, 漢武之爲人이라
窮侈極欲하야 兵連四夷하고 政煩賦重하야 盜賊蜂起어늘 而猶巡遊不息하야 以樂滔憂注+[頭註] 左傳作慆하니 悅也하고 惡聞直言하야 喜自壅蔽하니
率是道也 雖禹湯文武之子孫이라도 未或不亡이어든 況隋無積善之基乎
右隋 四帝 合稱帝三十年이라
[史略 史評]史斷曰
恭帝爲李淵所立이라
當是時하야 四海土崩하고 群盜蜂起하니 雖欲爲隋 庸可得乎
迹其禍亂之原하고 尋其覆亡之兆하면 楊堅得國之初 不越月間하야 旣弑其君하고 又赤其族하야 使宇文氏 灰飛煙滅하야 蕩無遺燼하니 近代滅國之禍 未有若是其烈者
楊廣 當父病하야 淫烝父妾하야 行甘鳥獸하고 曾不旋踵 弑父殺兄하야 禍出不測하고 逾年之後 一日而殺其猶子者 七人이라
이러니 晩年 身死人手하야 至撤床簀以裹尸하니 受禍之烈 亦前代罕有
語曰 이라하니 隋祚之不長 未爲不幸也
隋之創業 大抵與秦皇略同이요 而其再世亡國 亦如之
이나 秦皇 焚書하야 而五帝三皇以來六經之學 遂亡하고 隋皇 焚讖書하야 而秦漢晉魏以來讖記之學 遂亡하니 其利害之相反 亦足有可稱談者焉이로다


대업大業 13년(정축 617) - 공제恭帝 양유楊侑의녕義寧 원년元年이고, 장악왕長樂王 두건덕竇建德정축丁丑 원년元年이고, 위공魏公 이밀李密원년元年이고, 정양가한定楊可汗 유무주劉武周천흥天興 원년元年이고, 양왕梁王 양사도梁師都영륭永隆 원년元年이고, 진왕秦王 설거薛擧진흥秦興 원년元年이고, 양왕梁王 소선蕭銑명봉鳴鳳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나라(林士弘)까지 아울러 모두 여덟 나라이다. -
정월에 두복위杜伏威注+[附註]두복위杜伏威제주齊州 사람이다. 젊어서 호탕하여 을 훔쳤는데, 급히 체포하려 하자 도망하여 도적이 되어서 역양歷陽을 점거하고 스스로 총관總管이라 칭하였다. 이세민李世民왕세충王世充을 토벌할 적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회유하자 마침내 귀순하니, 고조高祖오왕吳王을 제수하였다. 가 군대를 일으켜 역양歷陽을 점거하니, 사이에 있던 좀도둑들이 대부분 그에게 귀부歸附하였다.
○ 2월에 마읍군馬邑郡 사람 유무주劉武周注+[頭註]유무주劉武周는 날래고 용감하고 호협하였으며 응양부鷹揚府교위校尉였다. 태수太守 왕인공王仁恭의 목을 베고 병력을 거두어 만여 명을 얻고는 스스로 태수太守라 칭하고, 사자를 보내어 돌궐突厥귀부歸附하였다.
이밀李密적양翟讓을 설득하기를 “낙구창洛口倉에 쌓여 있는 곡식이 많으니, 장군將軍이 만약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경무장하여 빨리 가서 습격하여 창고의 곡식을 꺼내어서 궁핍한 백성들을 구휼한다면 원근의 백성들이 누군들 귀부歸附하지 않겠습니까.
백만의 무리를 하루아침에 모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정예병 7천 명을 거느리고 흥락창興洛倉(洛口倉)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곡식을 가져가게 하니, 노약자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끌고서 곡식을 지고 가는 자들이 길에 끊이지 않았다.
적양翟讓이 이에 이밀李密을 추대하여 군주로 삼고 위공魏公이라 칭하였다.
○ 4월에 설거薛擧注+[附註]설거薛擧난주蘭州 사람이다. 활쏘기를 잘하고 재산을 불렸으며 변경의 호걸들과 교제를 맺어서 금성교위金城校尉가 되었는데, 아들 설인고薛仁杲와 함께 현령縣令을 위협하여 가두고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여러 도적들을 모아서 스스로 서진패왕西秦霸王이라고 칭하고는 마침내 황제의 칭호를 참칭하였다. 가 스스로 서진西秦패왕霸王이라 칭하고, 농서隴西 지역을 모두 차지하였다.
이밀李密군현郡縣격문檄文을 보내어 양제煬帝의 열 가지 죄를 나열하고 또 말하기를 “남산南山의 대나무를 모조리 베어 죽간竹簡을 만든다 해도 그의 죄악을 다 쓸 수가 없고, 동해의 물을 터놓는다 해도 그의 죄악을 다 씻을 수가 없다.” 하였으니, 이는 조군언祖君彦注+[頭註]이밀李密조군언祖君彦기실記室로 삼았다. 이 쓴 글이다.
내사사인內史舍人 봉덕이封德彛가 아첨하여 우세기虞世基에게 붙어서 우세기虞世基가 관리의 사무에 익숙하지注+[通鑑要解]은 익숙함이다. 못하다 하여 은밀히 일을 꾸미고 조명詔命을 선포해서 황제의 뜻에 맞추었다.
그러므로 우세기虞世基의 총애가 날로 융성해지고 나라 정사가 날로 더욱 파괴되었으니, 이는 모두 봉덕이封德彛의 소행이었다.
○ 처음에 당공唐公 이연李淵이 아들 4형제를 두었으니, 건성建成세민世民현패玄霸원길元吉이다.
세민世民은 총명하고 용맹하여 결단력이 있으며 식견과 도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는데, 나라 황실이 막 혼란해지는 것을 보고는 은밀히 천하를 안정시킬 뜻을 품어서 자기 몸을 낮추어 선비들을 예우하고 재물을 털어 빈객들과 교제를 맺어서 그들의 환심을 모두 얻었다.
진양궁감晉陽宮監 배적裴寂유문정劉文靜注+[頭註]유문정劉文靜진양령晉陽令이었다. 과 함께 잠을 자다가 위에 봉화불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배적裴寂이 탄식하기를 “이와 같이 가난하고 천한데 다시 난리까지 만났으니, 장차 어떻게 스스로 생존한단 말인가.” 하니, 유문정劉文靜이 웃으며 말하기를 “세상일을 알 만하다.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이 맞으면 어찌 빈천함을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유문정劉文靜이세민李世民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와 깊이 교제를 맺고 배적裴寂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활달함은 나라 고조高祖(劉邦)와 같고 신무神武함은 나라 태조太祖(曹操)注+[頭註]위조魏祖조조曹操이다. 와 같으니, 나이는 비록 적으나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인재注+[頭註]명세재命世才는 해설이 26권에 보인다. 이다.” 하였다.
- 《신당서新唐書》 〈태종본기太宗本紀〉에 이르기를 “이세민李世民의 나이 네 살 적에 어떤 서생書生이 그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봉황鳳凰 같은 뛰어난 자질이요, 하늘의 해처럼 사해四海에 군림할 의표儀表이다.
나이가 거의 약관弱冠에 이르면 반드시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이다.’ 하니, 마침내 그의 말을 따서 이름을 세민世民이라 했다.” 하였다. -
유문정劉文靜이밀李密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죄에 걸려서 태원太原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注+[通鑑要解]유문정劉文靜이밀李密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죄에 걸려서 태원太原의 감옥에 갇힌 것은 이밀李密이 반란을 일으켜 낙구창洛口倉을 점거하였기 때문이다. 시속時俗에서 혼자昏字혼자婚字와 같으니, 옛날에는 혼자昏字뿐이었다. 에 아내를 맞이하는 것을 저녁때에 하였으니, 이 가고 이 오는 뜻을 취한 것인데, 후인後人들이 혼자昏字여자女字를 붙여 으로 썼다. 이세민李世民이 찾아가서 안부를 묻자 유문정劉文靜이 말하기를 “천하가 크게 혼란하니, 고조高祖광무제光武帝注+[頭註]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이다. 같은 재주가 아니면 평정할 수 없다.” 하였다.
이세민李世民이 말하기를 “어찌 그런 인물이 없을 줄 알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이 알지 못할 뿐입니다.
내가 와서 안부를 묻는 것은 아녀자의 으로서가 아니라 과 대사를 의논하고자 해서이니, 장차 어떻게 계획을 세워야 하겠습니까?” 하니, 유문정劉文靜이 말하기를 “지금 주상主上(煬帝)이 남쪽으로 가서 지방을 순행하는데 이밀李密동도東都를 포위하여 핍박하니, 도둑떼가 거의 만으로 헤아려진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진정한 군주가 이들을 부려서 쓴다면 천하를 취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
태원太原의 백성들이 모두 도적을 피하여 안에 들어와 있고 내가 현령이 된 지 여러 해여서 그중의 호걸들을 알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이들을 모은다면 10만 명을 얻을 수 있다.
존공尊公(李淵)께서 거느린 병력이 또 수만 명은 될 것이니, 한 마디만 입에서 내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이 병력을 가지고 빈틈을 타서 관중關中에 들어가 천하를 호령하면 반년이 지나지 않아 제왕帝王의 업적을 이룰 것이다.” 하였다.
이세민李世民이 웃으며 말하기를 “의 말씀이 나의 뜻에 부합합니다.” 하고, 마침내 은밀히 빈객들을 부서에 배치하니, 이연李淵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이세민李世民이 틈을 타서 사람들을 물리치고 이연李淵을 설득하기를 “지금 주상主上께서 무도無道하여 백성들이 곤궁하고 진양성晉陽城 밖은 모두 싸움터가 되었으니,
대인大人께서 만약 작은 절개를 지키신다면 아래에는 도적떼가 있고 위에는 준엄한 형벌이 있어서 머지않아 대인大人은 위태롭고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민심民心에 순응하고 의병義兵을 일으켜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로 삼는 것만 못하니, 이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입니다.” 하니, 이연李淵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 이런 말을 하느냐?” 하였다.
다음 날 이세민李世民이 다시 이연李淵을 설득하기를 “지금 도적들이 날로 많아져서 천하에 퍼져 있으니, 대인大人께서 조명詔命을 받아 도적들을 토벌한다 해도 도적들을 다 소탕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대인大人께서는 의심하지 마소서.” 하니, 이연李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밤새 너의 말을 생각해 보니, 또한 매우 일리가 있다.
오늘 집안을 망치고 몸을 죽이는 것도 너 때문이요, 대부大夫의 집안을 변화시켜 새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는 것도 너 때문이다.” 하였다.
○ 이에 앞서 배적裴寂진양晉陽궁녀宮女를 시켜 이연李淵을 모시게 하였는데, 이연李淵배적裴寂을 따라 술을 마셔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에 배적裴寂이 조용히 말하기를
“둘째 아드님(李世民)注+[頭註]이세민李世民이 바로 이연李淵의 둘째 아들이므로 이랑二郞이라고 한 것이다. 이 은밀히 병사와 말을 길러 대사大事를 거행하고자 하니, 이는 바로 제가 궁녀宮女를 시켜 을 모시게 했다가 이 일이 탄로나면 함께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이처럼 급한 계책을 세운 것입니다.
여러 사람은 이미 마음을 하나로 모았으니, 의 의향은 어떠하십니까?” 하니, 이연李淵이 말하기를 “내 아들이 진실로 이러한 모의를 하여 일이 이미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다시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다만 모름지기 따를 뿐이다.” 하였다.
유무주劉武周분양궁汾陽宮을 점거하자, 이세민李世民이연李淵에게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유수留守로 계신데 도적들이 몰래 이궁離宮을 점거하였으니, 만약 일찍 큰 계책을 세우지 않으시면 이제 가 닥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연李淵이 마침내 이세민李世民에게 명하여 유문정劉文靜 등과 함께 각각 병력을 모집하게 하였는데, 원근의 장정들이 달려와 집결해서 열흘 사이에 만 명 가까이 모였다.
유문정劉文靜이연李淵에게 돌궐突厥과 결맹하여 그들의 군사와 말을 이용해서 군대의 명성과 위세를 장대하게 하라고 권하니, 이연李淵이 그 말을 따랐다.注+[通鑑要解]고조高祖(李淵)가 손수 를 짓되 말을 겸손하게 하고 예물禮物을 후하게 갖추어 시필가한始畢可汗에게 보내고 이르기를 “내 의로운 군대를 크게 일으켜 멀리 가서 주상主上(煬帝)을 맞이하여 개황開皇 연간처럼 다시 돌궐突厥과 화친하고자 한다.” 하였다. 시필가한始畢可汗를 받고 대신大臣에게 이르기를 “수주隋主(煬帝)의 사람됨을 내가 알고 있으니, 만약 그를 맞이하여 돌아오면 반드시 당공唐公(李淵)을 해치고 나를 공격할 것이 틀림없다. 만일 당공唐公이 스스로 천자天子가 된다면 내 마땅히 더위를 무릅쓰고 병마兵馬를 이끌고 가서 그를 돕겠다.” 하고는 즉시 명령하여 이러한 뜻으로 답장을 쓰게 하였다.
범조우范祖禹의 《당감唐鑑》에 말하였다.
필부匹夫가 향당에서 스스로 입신立身하고자 할 때에도 오히려 자중自重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왕업王業을 도모하고 대사大事를 일으키고자 하면서 올바르지 못한 일로 계도啓導해서야 되겠는가.
태종太宗(李世民)은 아버지를 죄에 빠뜨리고서 위협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고조高祖(李淵)는 간사한 배적裴寂을 가까이하여 궁녀를 받고 사양하지 않았으며 또 돌궐突厥에게 신하를 자청하여 그들에게 의지해서 도움을 구하였으니, 어떻게 후세에 모범을 보여주겠는가.
창업하는 군주는 자손들이 본받고 따라하는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는 것과 같으니, 신중히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나라 때에 군주가 집안을 바로잡는 이 없고 오랑캐들이 중국中國을 어지럽히는注+[頭註]은 어지러움이다. 난리가 많았으니, 고조高祖가 이로써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옛날에 왕자王者들은 한 가지라도 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고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서 천하를 얻을 수 있더라도 하지 않았다.
태종太宗이, 고조高祖가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돌궐突厥후환後患이 될까 두려워했다면 끝내 신하의 예절을 지키는 것이 옳으니, 어찌 아버지를 위협하고 오랑캐에게 신하 노릇 하여 천하를 얻으려 한단 말인가.
이러한 일을 만일 할 수 있다면 또한 하지 못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애석하다.
태종太宗은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과 난을 다스릴注+[頭註]은 다스림이다. 수 있는 재주가 있었으나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
배적裴寂 등이 마침내 이연李淵에게 천자天子(煬帝)注+[頭註]천자天子양제煬帝이다. 를 높여서 태상황太上皇으로 삼고 대왕代王 양유楊侑注+[頭註]대왕代王양유楊侑이니, 바로 공제恭帝이다. 를 세워서 황제로 삼아 나라 왕실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에 군현郡縣격문檄文을 돌리니, 서하군西河郡이연李淵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연李淵이세민李世民으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서하군西河郡을 공격하게 하니, 서하군西河郡 고덕유高德儒가 성문을 닫고 항거하였다.
이세민李世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고덕유高德儒를 잡아 군문軍門에 이르러서 이세민李世民수죄數罪하기를 “네가 들새를 가리켜 난새라 하여 인주人主를 속여서 높은 벼슬을 취하였으니, 내가 의병義兵을 일으킨 것은 바로 너와 같이 아첨하는 사람을 주벌하기 위해서이다.” 하고는 마침내 그의 목을 베었다.
그밖에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추호도 범함이 없었으며 각각 백성들을 위무하여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게 하니, 원근의 백성들이 이 사실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이건성李建成 등이 군대를 이끌고 진양晉陽으로 돌아오니, 왕복하는 데 걸린 날짜가 모두 9일이었다.
이연李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렇게 군대를 운용한다면 비록 천하에 횡행橫行하더라도 가능하겠다.” 하고, 마침내 관중關中에 들어갈 계책을 정하였다.
이연李淵이 창고를 열어서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니, 모병募兵에 응하는 자가 날로 더욱 많아졌다.
배적裴寂 등이 이연李淵에게 대장군大將軍이라는 칭호를 올렸다.
○ 가을 7월에 이연李淵이 아들 이원길李元吉태원태수太原太守로 삼아서 진양궁晉陽宮에 남아 지키게 하였다.
이연李淵갑사甲士 3만 명을 거느리고 진양晉陽을 출발하여 군문軍門 앞에 서서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함께 군현郡縣에 격문을 돌려서 대왕代王을 높여 세운다는 뜻으로 효유曉諭하니, 서돌궐西突厥아사나대내阿史那大奈注+[頭註]아사나阿史那돌궐突厥의 세 글자로 된 이고, 대내大奈는 이름이다. 가 또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수행하였다.
대왕代王 양유楊侑송노생宋老生注+[頭註]송노생宋老生호아낭장虎牙郎將이었다. 을 보내어 정예병 2만 명을 거느리고 곽읍霍邑에 주둔하고, 굴돌통屈突通은 날래고 용감한注+[頭註]는 용맹함이다.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하동河東에 주둔해서 이연李淵을 막게 하였다.
이때 마침 장맛비가 내려서 이연李淵이 전진하지 못하였다.
이연李淵이 편지로 이밀李密을 부르니, 이밀李密이 자신의 군세가 강함을 믿고 맹주盟主가 되고자 하여, 조군언祖君彦을 시켜 답서를 보내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좌우에서 잡아주고 끌어주며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합쳐서, 함양咸陽에서 자영子嬰을 사로잡고注+[釋義]秦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의 아들이 공자公子 이니, 조고趙高가 세워 진왕秦王이 되었다. 뒤에 패공沛公함양咸陽에 들어갔을 때에 자영子嬰지도軹道의 곁에서 항복하자, 마침내 관리에게 맡겼다.[頭註]子嬰은 대왕代王 양유楊侑를 가리킨다. 목야牧野에서 상신商辛을 죽이는 것이니,注+[釋義]殪는 죽임이다. 나라 임금 을 천하 사람들이 라 하였다. 나라 무왕武王를 정벌하자 목야牧野에서 막았는데, 무왕武王이 그의 목을 베었다.[頭註]商辛은 양제煬帝를 가리킨다. 이렇게 한다면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연李淵으로 하여금 보병步兵기병騎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스스로 하내河內에 와서 대면하여 맹약을 맺게 하고자 하였다.
이연李淵이 편지를 얻어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이밀李密이 망령되이 스스로 자랑하고 잘난 체하니, 한 통의 편지注+[頭註]절간折簡은 바로 척서尺書척독尺牘이다. 로 오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현재 관중關中에 일이 있는데, 만약 그를 대번에 끊어버리면 마침내 또다시 하나의 적을 만드는 것이니, 말을 낮추어 추대하고 장려해서 그의 뜻을 더욱 교만하게 만들어 나를 위해 성고成皐의 길을 막고注+[頭註]이밀李密성고成皐의 길을 막아서 강도江都사자使者가 통행하지 못하였다. 동도東都의 군사를 견제注+[頭註]이밀李密동도東都(洛陽)의 군사를 견제하여 서쪽으로 장안長安과 호응하지 못하였다. 하게 하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 하면 온전히 내 뜻대로 서쪽을 정벌할 수 있을 것이니, 관중關中이 평정되기를 기다린 뒤에 우리가 험고한 곳을 점거하고 위엄을 길러서, 양측이 조개와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는 형세를 관망하다가 앉아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챙겨도注+[釋義]觀蚌鷸之勢 이수어인지공以收漁人之功:은 조개이고, 은 날씨가 장차 비가 올 것을 아는 새이다. 《전국책戰國策》에 나라가 나라를 정벌하자, 소대蘇代나라를 위하여 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이르기를 “지금 역수易水를 지나올 적에 조개가 나와서 막 햇볕을 쬐고 있었는데, 새가 조개의 속살을 쪼아 먹으려 하자 조개가 껍질을 꼭 다물어 새의 부리를 물었습니다. 새가 조개에게 이르기를 ‘오늘도 비가 오지 않고 내일도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조개포가 될 것이다.’ 하니, 조개도 새에게 이르기를 ‘오늘도 놓아주지 않고 내일도 놓아주지 않으면 반드시 죽은 새가 될 것이다.’ 하여 조개와 새가 서로 버티고 놓아주지 않다가 어부에게 모두 잡혀갔습니다. 지금 나라가 나라를 정벌하려 하니, 나라와 나라가 서로 오래 버텨서 많은 병력을 피폐하게 하면 신은 강한 나라가 어부漁父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늦지 않다.” 하고, 온대아溫大雅注+[頭註]온대아溫大雅기실참군記室參軍이었다. 를 시켜 답장을 보내기를 “하늘이 백성을 냄에 반드시 사목司牧이 있으니, 당금에 사목司牧이 될 자는 바로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노부老夫는 나이가 이미 지명지년知命之年(50세)注+[頭註]지명知命은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쉰 살이 되어서는 천명天命을 알았다.” 하였다. 을 넘었으니, 소원이 이에 미칠 수가 없다.
내 기꺼이 아우를 추대하여 용의 비늘을 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고자 하니, 부디 아우는 속히 도참圖讖에 응하여注+[釋義]은 책이니, 도참서圖讖書에 “이씨李氏가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억조 만백성을 편안히 하라.
그대가 종맹宗盟이 되어 나를 종적宗籍(王室의 족보族譜)에 올려주고注+[釋義]屬은 붙이는 것이고 부적簿籍이니, 속적屬籍종적宗籍(王室의 족보族譜)에 올리는 것을 이른다.[附註]屬籍은 종속宗屬이니, 이밀李密의 편지에 “유파流派는 다르지만 근계根系(근본이 되는 혈통)는 본래 같다.”고 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당공唐公농서隴西 성기成紀 사람이고 이밀李密요동遼東 양평襄平 사람이니, 이는 가 다른 것이다. 이른바 근계根系라는 것은 다만 동성同姓일 뿐이다. 다시 에 봉해 준다면 나는 이러한 영광으로 만족한다.
목야牧野에서 상신商辛을 죽이는 일은 내가 차마 말할 수 없고, 함양咸陽에서 자영子嬰을 사로잡는 일은 내가 감히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다.
분주汾州진양晉陽注+[頭註]분주汾州진양晉陽이니, 당공唐公이 점거한 곳이다. 일대는 아직도 모름지기 안무按撫하여 다스려야 하니, 맹진盟津회맹會盟注+[原註]盟津은 바로 맹진孟津이다.[釋義]孟은 하북河北이니, 각각 그 지역에 나루를 설치하여 이를 맹진孟津이라 이른 것이다. 일설一說에 “무왕武王를 정벌했을 때에 8백 명의 제후가 이곳에서 맹약하였기 때문에 맹진盟津이라 한다.” 하였으니, 하내河內함양현咸陽縣이 이곳이다. 은 기일을 정할 겨를이 없다.” 하였다.
이밀李密이 편지를 받고는 매우 기뻐하여 장수와 보좌들에게 편지를 보이며 말하기를 “당공唐公이 나를 추대해 주니, 천하는 굳이 평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로부터 서신을 전달하는 사자使者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 비가 오랫동안 그치지 않으니, 이연李淵의 군중에 양식이 떨어지고 〈군대를 요청하러 돌궐突厥에 사신 간〉 유문정劉文靜은 돌아오지 않았다.注+[頭註]유문정劉文靜이 군대를 요청하러 돌궐突厥에 사신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혹자가 전하기를 “돌궐突厥유무주劉武周와 함께 빈틈을 노려 진양晉陽을 습격하려 한다.” 하니, 이연李淵이 장수와 보좌들을 불러 북쪽으로 돌아갈 것을 상의하였다.
배적裴寂 등이 모두 말하기를 “돌아가서 근본根本(晉陽)을 구원하고 다시 후일의 거사를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는데, 이세민李世民이 말하기를 “지금 벼와 콩이 들에 널려 있으니, 어찌 양식이 떨어진 것을 근심하십니까.
송노생宋老生注+[頭註]노생老生은 바로 송노생宋老生이다. 은 경솔하고 조급하니 일전一戰이면 사로잡을 수 있고, 이밀李密은 창고의 곡식을 돌아보고 연연해하니 멀리 경략할 겨를이 없을 것이며, 유무주劉武周돌궐突厥과 겉으로는 친하지만 속으로는 서로 시기하니 유무주劉武周가 비록 멀리 태원太原(晉陽)을 이롭게 여겨 취하려 한다 해도 어찌 가까운 마읍馬邑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注+[頭註]유무주劉武周마읍馬邑 사람이다.
우리가 본래 대의大義를 일으킨 것은 분발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고 창생蒼生을 구하고자 해서이니 마땅히 먼저 함양咸陽(關中)에 들어가 천하를 호령해야 할 터인데,
지금 작은 적을 만나서 급히 회군回軍한다면 를 따라 궐기한 무리들이 하루아침에 해체될까 두려우며, 우리가 돌아가서 태원太原만을 지킨다면 역적이 될 뿐이니, 어찌 자신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연李淵이 듣지 않고 재촉하여 군대를 이끌고 출발하려 하자 이세민李世民이 다시 들어가 간하려 하였는데, 마침 해가 저물어 이연李淵이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이세민李世民이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통곡하니, 소리가 장막 안에까지 들렸다.
이연李淵이 불러서 묻자, 이세민李世民이 말하기를 “지금 군대가 대의大義로써 출동함에 전진하면 승리하고 후퇴하면 흩어질 것입니다.
무리가 앞에서 흩어지고 적이 뒤에서 틈을 타서 공격하면 사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니,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이연李淵이 비로소 깨달았다.
이세민李世民이 마침내 이건성李建成과 함께 길을 나누어 밤에 뒤쫓아가니 좌군左軍이 다시 돌아오고,注+[頭註]우군右軍은 아직 출발하지 않았고 좌군左軍은 떠났으나 또한 아직 멀리 가지 않았기 때문에 추격한 것이다. 태원太原에서 운반하는 양식이 또한 이르렀다.
[新增]胡氏가 말하였다.
무왕武王나라를 주벌할 때에 의 죄를 나열한 것이 많았는데 나라 양제煬帝가 이러한 죄를 모두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를 시해하고 형을 죽인 것注+[頭註]양제煬帝가 아버지를 시해하고 형을 죽인 것은 앞의 ‘제붕어대보전帝崩於大寶殿에 보인다. 가 저지른 적이 없었던 것이니 마땅히 토벌해야 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연李淵이 그의 대역무도한 죄를 성토하여 군대를 일으켜 토벌했다면 비록 자신이 성탕成湯과 같은 이 있는 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으로부터 정벌을 시작함注+[頭註]는 시작함이다. 《서경書經》 〈이훈伊訓〉에 ‘’字로 되어 있으니, “공격을 시작함은 명조鳴條로부터 하였는데, 우리(湯王)가 을 닦은 것은 박읍亳邑으로부터 시작했다.” 하였다. 에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이니, 그렇다면 이세민李世民이 굳이 궁녀宮女에게 은밀히 이연李淵을 모시게 해서注+[頭註]배적裴寂진양궁晉陽宮의 궁녀로써 이연李淵을 모시게 하였다. 아버지를 위협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굳이 거짓으로 칙서勅書를 만들어 백성들을 징발해서 원망을 살注+[附註]는 원망함이다. 이해에 배적裴寂이연李淵을 재촉하여 군대를 일으키게 하자, 이연李淵이 마침내 유문정劉文靜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칙서를 만들어 태원太原서하西河안문雁門마읍馬邑의 백성 중에 나이가 20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군졸로 삼아 고구려高句麗를 공격하게 하니, 이 때문에 인심이 흉흉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는 자가 많게 되었다.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굳이 돌궐突厥에게 신하를 칭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굳이 강도江都에 있는 양제煬帝를 높여 태상황太上皇으로 삼고注+[頭註]양제煬帝강도江都에 있었는데, 이연李淵에게 양제煬帝를 높여서 태상황太上皇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대왕代王을 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굳이 이밀李密을 추대하고 장려해서 그의 뜻을 교만하게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진양성晉陽城을 굳게 지키면서 호걸들을 거두어 부르고 무리를 많이 모아서 장안長安낙양洛陽도성都城을 나누어 공격했다면 의로운 명성이 이미 진동함에 도적떼가 스스로 항복하였을 것이다.
이에 어진 장수를 선발하여 정예병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양주楊州 지방으로 향하게 했다면 열흘이나 한 철이 못 되어 죄인(煬帝)을 잡아서 천하가 나라에 돌아갔을 것이니, 그렇다면 그 누가 이것을 막겠는가.
애석하다.
이세민李世民은 천하를 편안히 할 뜻이 있었고 재주가 충분히 난리를 다스릴 만하였으나 임금과 무왕武王처럼 자기 몸을 돌이켜 살피는 학문이 없었으며, 유문정劉文靜은 지모 있는 선비였을 뿐이고 배적裴寂은 다시 그보다 못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기회를 타고 거사하여 곧바로 성공하였으나 지혜와 술수를 써서 의리에 위배됨이 많았던 것이다.”
8월에 비가 개자, 이연李淵군중軍中에 명하여 투구와 무기와 행장을 말리게注+[原註]은 햇볕에 쬐어 말리는 것이다. 하고 곽읍霍邑注+[釋義]王氏가 말하였다. “곽읍霍邑나라 체현彘縣이니, 후한後漢 때에 영안현永安縣으로 고쳤고 나라 때에 곽읍霍邑으로 고쳤다. 지금 곽주霍州곽읍霍邑이 있으니, 평양平陽에 속한다.”[頭註]이때 나라 장수 송노생宋老生곽읍霍邑에 진을 치고 있었다. 으로 달려갔다.
이건성李建成이세민李世民이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아래에 이르러 채찍을 들고 지휘하여 마치 을 포위하려는 것처럼 하고 또 송노생宋老生을 욕하니,注+[原註]는 욕하고 꾸짖는 것이다. 송노생宋老生이 노하여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길을 나누어 출동하였다가 군대가 대패하였다.
송노생宋老生이 말에서 내려 참호로 뛰어들자,注+[通鑑要解] 둘레에 파놓은 물이니, 《광운廣韻》에 나온다. 유홍기劉弘基注+[頭註]유홍기劉弘基대업大業 연간에 우훈시右勳侍로 있다가 망명亡命해 오니, 이연李淵이 그로 하여금 군대를 모집하게 하고 통군統軍을 삼았다. 가 나아가 목을 베고 마침내 곽읍霍邑을 점령하였다.
이연李淵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장안長安으로 달려가고자 하였으나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배적裴寂이 말하기를 “굴돌통屈突通이 큰 병력을 보유하고 견고한 성에 의지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들을 버리고 떠나갔다가 만약 장안長安으로 진격하여 이기지 못하면 후퇴할 때에 하동河東굴돌통屈突通에게 추격당하여注+[頭註]나라가 굴돌통屈突通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하동河東에 주둔하게 하였으니, 앞의 7월조月條에 보인다.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을 것이니, 이는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먼저 하동河東을 함락시킨 다음에 서쪽으로 올라가는 것만 못합니다.
장안長安에서는 굴돌통屈突通을 구원부대로 믿고 있으니, 굴돌통屈突通이 패하게 되면 장안長安은 반드시 격파될 것입니다.” 하니, 이세민李世民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군대는 신속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여러 번 싸워 여러 번 승리한 기세를 타고 귀순하는 무리들을 어루만져 북을 울리면서 전진하여注+[釋義]고행鼓行은 군대가 북을 울리며 전진하는 것이다. 서쪽으로 가면 장안長安 사람들이 소문만 듣고도 놀라고 두려워하여 지혜로운 자도 미처 도모하지 못하고 용맹한 자도 미처 결단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장안長安을 취하는 것은 마치 낙엽을 흔들어 떨어뜨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견고한 성 아래에서 지체하다가 스스로 피폐해진다면 저들은 계책을 이룰 수 있어서 방비를 하고 우리를 상대할 것이니, 우리들이 앉아서 날짜를 허비하여 군사들의 마음이 이반하고 사기가 꺾이면 대사大事가 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관중關中에서 봉기한 장수들이 아직 소속된 곳이 없으니, 일찍 이들을 불러 회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굴돌통屈突通은 자기 소굴을 지키는 오랑캐일 뿐이니, 굳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연李淵이 두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여러 장수들을 남겨 하동河東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니, 경조京兆의 여러 사자使者를 보내 항복을 청하는 자가 많았다.
이연李淵이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황하黃河를 건너가니 관중關中의 선비와 백성 중에 귀의하는 자들이 시장에 모이는 장꾼처럼 많았고, 이세민李世民이 이르는 곳에는 관리와 백성 및 도둑떼들이 귀의하여 흐르는 물처럼 끊이지 않았다.
이세민李世民이 그중에 호걸과 준걸들을 거두어서 자신의 요속僚屬으로 삼았다.
시소柴紹에게 시집간 이연李淵의 딸 이씨李氏도 정예병 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세민李世民위수渭水 북쪽에서 회동하여 시소柴紹와 함께 각각 막부幕府를 설치하고 이름을 낭자군娘子軍注+[附註]시소柴紹장안長安에서 태원太原으로 달려갈 적에 아내 이씨李氏에게 이르기를 “존공尊公(李淵)께서 군대를 일으키셨는데, 지금 함께 가자니 불가不可하고 이곳에 남아 있으면 화가 미칠 것이니,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하니, 이씨李氏가 말하기를 “부디 속히 가십시오. 저는 한낱 부녀자이니 몰래 숨기가 쉽습니다.” 하므로 시소柴紹가 마침내 길을 떠났다. 이씨李氏악현鄂縣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가서 집안의 재물을 털어 무리를 모았다. 이연李淵황하黃河를 건너오자 이씨李氏가 사자를 보내어 맞이하니, 이연李淵시소柴紹로 하여금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이씨李氏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이씨李氏가 정예병 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세민李世民위수渭水 북쪽에서 회합하였다. 이라 하였다.
습성위隰城尉注+[頭註]한서漢書》 〈백관지百官志〉에 이르기를 “대군大郡을 맡아 다스리는 관원을 라 하고, 소군小郡을 맡아 다스리는 관원을 라 한다.” 하였다. 방현령房玄齡이세민李世民군문軍門에서 뵙자, 이세민李世民이 처음 만났지만 오래 사귄 벗처럼 친밀하게 여겨 방현령房玄齡기실참군記室參軍에 임명하여 모주謀主로 삼으니, 방현령房玄齡 또한 스스로 지기知己를 만났다 하여 마음과 힘을 다해서 아는 것은 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세민李世民이 군대를 이끌고 아성阿城에 주둔注+[頭註]은 머무름이다. 하니 전투할 수 있는 군사가 13만 명이었는데, 군령軍令이 엄격하고 정돈되어 털끝만큼도 범하지 않았다.
○ 10월에 소선蕭銑注+[附註]소선蕭銑후량後梁 선제宣帝 소찰蕭詧증손曾孫이다. 양제煬帝는 그가 외척이라 하여 발탁해서 나천령羅川令으로 삼았다. 파릉위巴陵尉 동경진董景珍 등이 모의하여 을 점거하고 배반하니, 무리들이 동경진董景珍을 함께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았는데, 동경진董景珍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가난하고 천하여 사람들에게 복종받지 못한다. 나천령羅川令 소선蕭銑나라 황실皇室의 후손이요, 너그럽고 인자하고 도량이 크니, 그를 받들어서 중망衆望을 따를 것을 청한다.” 하였다. 이에 사자를 보내어 소선蕭銑에게 알리자 소선蕭銑이 이를 따랐고, 역적을 토벌한다고 크게 말하여 수천 명을 불러 모집하였다. 파릉巴陵에서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양왕梁王이라 칭하였다.
○ 11월에 이연李淵장안長安을 함락하고 백성들과 열두 조목의 법을 약속하여 나라의 까다로운 법령을 모두 제거하였다.
마읍군馬邑郡 이정李靖注+[通鑑要解]이정李靖삼원三原 사람이다. 이 평소 이연李淵과 틈이 있었는데, 이연李淵이정李靖을 잡아 목을 베려 하자 이정李靖이 크게 고함치며 말하기를 “의병義兵을 일으킨 것은 포악하고 혼란시키는 자를 평정하고자 한 것인데,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장사壯士를 죽인단 말인가.” 하였다.
이세민李世民이 그를 위하여 굳이 살려 주기를 청하자 이연李淵이 마침내 놓아주니, 이세민李世民이 인하여 불러서 막부幕府에 두었다.
이연李淵법가法駕를 갖추어 대왕代王 양유楊侑를 맞이해서 천흥전天興殿에서 황제에 즉위하게 하니, 이때 황제의 나이가 13세였다.
천하에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개원改元하였으며 멀리 양제煬帝를 높여 태상황太上皇으로 삼았다.
황제가 이연李淵을 임명하여 가황월假黃鉞도독내외제군사都督內外諸軍事로 삼고 당왕唐王에 진봉하였다.
기사일己巳日(11월 22일)에 이건성李建成나라 세자世子로 삼았다.
역년도歷年圖》에 말하였다.
문제文帝(楊堅)注+[頭註]문제文帝나라 고조高祖 양견楊堅이다. 나라 황실에 있어서 큰 공과 후한 덕을 베풀어 평소에 백성들을 흡족하게 함이 있지 않았고, 다만 천원황제天元皇帝注+[頭註]천원天元나라 선제宣帝 우문빈宇文贇이다. 가 갑자기 죽은 뒤에 사군嗣君이 유약하고 간신姦臣이 왕명을 사칭하였기 때문에 요행으로 천하를 얻었을 뿐이다.
그러나 명민하고 검약하여 정사에 부지런히 힘썼으며, 재주에 따라 관직을 맡기고 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렸다.
그러므로 300년 된 강남江南나라를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쉽게 취하여 천하로 하여금 다시 통일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많고 의식이 풍족하여 돌궐突厥실위室韋注+[頭註]실위室韋하권下卷에 보인다. 말갈靺鞨注+[頭註]말갈靺鞨북적北狄별종別種이니, 옛날 숙신씨肅愼氏의 지역이다. 임읍林邑注+[頭註]임읍林邑은 국명이니, 교지交趾의 남쪽에 있다. 고창高昌注+[頭註]고창高昌하권下卷에 보인다. 여국女國注+[頭註]여국女國은 나라에 남자가 없어서 물에 비춰보면 잉태한다. 등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신하라 칭하며 진기한 보물을 받들어 조공을 바치니, 비록 양한兩漢전성全盛시대라 해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하였다.
그때 만일 후사後嗣가 겨우 중간 정도의 재주가 있는 자를 얻어 지켰더라면 10 안에는 쉽게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양제煬帝패역悖逆과 속임수로 가만히 앉아서 부강한 기업基業을 계승하여 뜻이 교만하고 기운이 넘쳐서 개연慨然 시황始皇 무제武帝의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그리하여 지극히 사치하고 욕심이 끝이 없어 병란兵亂이 사방 오랑캐 지역에 이어지고, 정령政令이 번거롭고 부역이 무거워서 도적들이 봉기하였는데도 오히려 순행하고 유람하기를 그치지 않아서 근심을 잊고注+[頭註]는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라고 되어 있으니, 기뻐하는 것이다. 정직한 말을 듣기 싫어해서 스스로 총명을 막고 가리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아!
이 방법을 따른다면 비록 우왕禹王탕왕湯王문왕文王무왕武王의 자손이라 해도 멸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인데, 더구나 을 쌓은 기반이 없는 나라에 있어서이겠는가.”
이상 나라는 네 황제에 황제를 칭한 것까지 합하여 30년이다.
[史略 사평史評]史斷에 말하였다.
공제恭帝이연李淵에 의해 옹립되었다.
이때를 당하여 온 천하가 흙이 무너지듯 와해되어 민란이 일어나고 도적떼가 봉기하였으니, 비록 나라를 지키고자 하더라도 될 수 있었겠는가.
화란禍亂의 근원을 살펴보고 멸망의 조짐을 찾아보면 양견楊堅이 나라를 얻은 초기에 한 달이 못 되어 이미 그 군주를 시해하였고, 또 그 집안을 멸망시켜 우문씨宇文氏로 하여금 재처럼 날리고 연기처럼 사라져서 탕진하여 하나도 남은 것이 없게 만들었으니, 근대近代에 나라를 멸망시킨 가 이와 같이 혹독한 적이 있지 않았다.
양광楊廣은 아버지(楊堅)의 병이 심할 때를 당해 아버지의 을 간음하여 짐승 같은 행실을 달갑게 여기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를 시해하고 형을 죽여서 가 측량할 수 없었으며, 한 해를 넘긴 뒤에는 하루에 유자猶子(조카)를 죽인 것이 7명이나 되었다.
도륙屠戮의 참혹함이 또한 대략 상응相應할 만하였는데, 양광楊廣만년晩年에 자신 또한 남의 손에 죽어서 상책床簀을 거두어 시신을 싸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혹하게 를 입은 것이 또한 전대前代에 드물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군주가 이로써 시작하면, 또한 이로써 끝마쳐야 한다.’ 하였으니, 나라의 국운國運이 길지 못함은 불행不幸이 아니다.
나라가 창업創業한 것이 대체로 시황始皇과 같았고 두 만에 나라가 망한 것도 같다.
그러나 시황始皇은 민간의 책을 불태워서 오제五帝삼황三皇 이래로 내려온 육경六經의 학문이 마침내 망하였는데, 나라 문제文帝도참서圖讖書를 불태워서 이래로 내려온 참기讖記(圖讖書)의 학문이 마침내 망하였으니, 그 이해利害의 상반됨은 또한 칭찬하여 말할 만한 점이 있다.”


역주
역주1 記室 : 表章을 올리거나 書記 일을 맡은 관직으로, 지금의 書記 또는 秘書官 따위이다.
역주2 此而可爲 : 范祖禹의 《唐鑑》에 근거하여 ‘此而可爲’ 네 자를 보충하였다.
역주3 : 지
역주4 : 에
역주5 蚌鷸 : 방휼
역주6 攀鱗附翼 : 攀龍鱗附鳳翼의 줄임말로 龍과 鳳은 帝王을 상징하는 바, 英主를 섬겨 공명을 세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역주7 : 록
역주8 : 폭
역주9 : 구
역주10 統軍 : 唐나라 때에 禁軍인 左右龍武軍‧左右神武軍‧左右神策軍에 각각 統軍 1인을 두었는데, 지위가 大將軍의 다음이었다.
역주11 : 고
역주12 : 저
역주13 : 선
역주14 天興殿 : 胡三省의 注에 “天興殿은 마땅히 大興殿이 되어야 한다.[天興殿 當作大興殿]” 하였다.
역주15 以樂滔憂 : 《春秋左傳》 昭公 3年條에 “정사가 大夫의 집안에 있어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는데, 군주는 날마다 뉘우치지 않고 즐거움으로써 근심을 잊으니, 公室이 그 얼마나 가겠는가.[政在家門 民無所依 君日不悛 以樂慆憂 公室之卑 其何日之有]” 하였다.
역주16 : 극
역주17 屠戮之慘 亦略相報稱 : 文帝가 宇文氏의 一族을 대거 도륙하였는데, 이에 대한 應報로 煬帝가 자신의 血肉을 많이 도륙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8 君以此始 亦以此終 : 이 내용은 《春秋左傳》 宣公 12年條에 보인다. 楚나라 莊王이 晉나라와 전투할 때에 左廣車를 타고 나갔다가 右廣車를 보고 옮겨 타려 하자, 左廣車의 車右인 屈蕩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君王께서 이 左廣車를 타고 전투를 시작하였으니 이 左廣車를 타고 전투를 마치셔야 합니다.” 하였는 바, 중간에 수레를 바꾸어 타면 군사들이 의혹할까 염려해서였다. 廣車는 兵車이다.

통감절요(6)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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