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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7)

통감절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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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丙辰]四年이라
二月 以尙書右丞若水 爲汴州刺史兼河南采訪使하다
雖欲重都督刺史하야 選京官才望注+[頭註]才地聞望이라 者爲之 然當時士大夫猶輕外任이라
揚州采訪使班景 入爲大理少卿하야 過大梁이어늘
若水餞之行할새 立望其行塵하고 久之 乃返하야 謂官屬曰 班生此行 何異登仙이리오하니라
〈本傳〉
○ 山東 蝗復大起어늘 姚崇 又命捕之하니 倪若水謂호되 蝗乃天災 非人力所能及이니修德以禳之
劉聰注+[釋義]晉惠時 劉聰 據平陽하고 僭號曰漢이라 常捕埋之호되 爲害益甚이라하고 拒御史注+[頭註]上年 遣御史하야 捕而埋之하고 不從其命하다
崇牒若水曰 劉聰 僞主 德不勝妖어니와 今日 聖朝 妖不勝德하리니
古之良守 蝗不入境注+[頭註]後漢魯恭爲中牟令하야 政有하니 曰 蝗不犯入하고 化及禽獸하고 童子有仁心이라하니라 하니 若其修德可免인댄 彼豈無德致然가하니 若水乃不敢違
由是 連歲蝗災 不至大飢하니라
〈出本傳〉
○ 或言於上曰 今歲選敍太濫하야 縣令非才라하야늘
及入謝 悉召縣令於宣政殿庭하야 試以理人策하니 惟鄄城令韋濟 詞理第一이라 擢爲醴泉令하고 餘二百餘人 不入第 且令之官하고 四十五人 放歸學問하다
〈出濟本傳〉
○ 六月癸亥 上皇하다
○ 十二月 姚崇, 源乾曜注+[頭註]姓名이라 하고 以刑部尙書宋璟, 蘇으로 同平章事하다
璟爲相 務在擇人하고 隨材授任하야 使百官으로 各稱其職하며 刑賞無私하고犯顔正諫하니 甚敬憚之하야 雖不合意 亦曲從之러라
突厥黙 自則天世 爲中國患하야 朝廷旰食하고 傾天下之力호되 不能克이라
靈荃注+[頭註] 音壑이라 靈荃 使突厥하야 得其首하니라 得其首하고 自謂不世之功이러니 璟以天子好武功하시니 恐好事者競生心徼倖이라하야
痛抑其賞하고 逾年 始授郞將하니 靈荃 慟哭而死하니라
〈出本傳〉
[新增]范氏曰
宋璟 可謂賢相矣
見其始而知其終하고 沮其勝而憂其敗러니 明皇 卒以黷武 至於大亂하니 何其智之明歟
其可謂賢相矣로다
姚, 宋 相繼爲相應變成務하고守法持正하야 二人 志操不同이나協心輔佐하야 使賦役寬平하고 刑罰淸省하니 百姓富庶하야 唐世賢相 前稱房, 하고 後稱姚, 하야 他人 莫得比焉이러라
二人每進 上輒爲之起하고 去則臨軒注+[頭註]檐宇之末曰軒이니 臨軒 謂近軒階也 送之러니 及李林甫爲相 雖寵任 過於姚, 宋이나 然禮遇殊卑薄矣러라
〈出本傳〉
贊曰
姚崇 以十事天子而後 輔政하니 顧不偉哉리오마는 而舊史不傳이라
觀開元初 皆已施行하니 信不誣已 宋璟 剛正 又過於崇하야 玄宗素所尊憚하야 嘗屈意聽納이라
唐史 稱崇善應變以成天下之務하고 璟善守文以持天下之正이라
二人 道不同이나 同歸于治하니 此天所以佐唐使中興也
嗚呼 勸天子不求邊功하고 不肯賞邊臣이어늘 而天寶之亂 卒蹈其害하니 可謂先見矣
이나 唐三百年 輔弼者不爲少로되 獨前稱房, 杜하고 後稱姚, 宋 何哉
君臣之遇 蓋難矣夫인저
[史略 史評]范氏曰
三公 坐而論道하야 天子所與共天位, 治天職者也
其禮不可不尊이요 其任不可不重이라
自堯舜으로 至于三代 尊禮輔相 詩書著矣 漢承秦弊하야 崇君卑臣이나 然猶宰相進見 天子御坐爲起하고 在輿爲下하니 所以禮貌大臣而風厲其節也
開元之初 明皇 勵精政治하고 優禮故老하야 姚宋是師러니 天寶以後 宴安驕侈하야 倦求賢俊하고 委政群下하니 彼小人者 惟利是就하야 不顧國體하고 巧言令色하야 以求親昵이어늘 人主甘之하야 薄於禮而厚於情이라
是以 林甫得容其姦이라
人君 不敬禮大臣이면 則賢者日退而小人日進矣니라


개원開元 4년(병진 716)
2월에 상서우승尙書右丞예약수倪若水변주자사汴州刺史겸하남채방사兼河南采訪使로 삼았다.
이 비록 도독都督자사刺史를 중시하여 경관京官 중에 재주와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注+[頭註]재망才望은 재능과 지벌地閥과 명망이다.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사대부들이 여전히 지방관의 임무를 경시하였다.
양주채방사揚州采訪使반경천班景倩이 들어가 대리시大理寺소경少卿이 되어 대량大梁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약수倪若水가 그를 위하여 전별할 적에 떠나는 행렬의 먼지를 서서 바라보고는 한참 뒤에 비로소 돌아와 관속들에게 이르기를 “반생班生의 이번 걸음이 어찌 하늘에 올라가 신선이 되는 것과 다르겠는가.” 하였다.
- 《신당서新唐書예약수전倪若水傳》에 나옴 -
산동山東 지방에 황충蝗蟲의 재앙이 다시 크게 일어나자 요숭姚崇이 또다시 명하여 잡게 하니, 예약수倪若水가 이르기를 “황충은 바로 천재天災이고 인력人力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을 닦아 물리쳐야 합니다.
전조前趙유총劉聰注+[釋義]나라 혜제惠帝 때에 유총劉聰평양平陽을 점거하고 참람하게 나라 이름을 이라 하였다. 때에 항상 황충을 잡아 죽였으나 폐해가 더욱 심하였습니다.” 하고는 어사御史를 막고注+[頭註]지난해에 어사御史를 보내어 황충을 잡아서 묻게 하였다.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요숭姚崇예약수倪若水에게 통첩하기를 “유총劉聰은 가짜 군주이므로 덕이 요망함을 이기지 못했지만 오늘날은 성군聖君이 조정에 임어하셨으니 요망함이 덕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옛날 훌륭한 수령이 다스리는 곳에는 황충이 그 경내에 들어가지 않았으니,注+[頭註]후한後漢노공魯恭중모현령中牟縣令이 되어 정사에 세 가지 기이한 일이 있었으니, 황충이 경내에 들어오지 않고 교화가 금수에까지 미치고 어린아이가 인자한 마음이 있었다 한다. 만약 덕을 닦아 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저 황충은 어찌 그대가 덕이 없는 소치가 아니겠는가.” 하니, 예약수倪若水가 마침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수년 동안 계속하여 황충의 재앙이 있었으나 큰 기근에는 이르지 않았다.
- 《신당서新唐書요숭전姚崇傳》에 나옴 -
혹자가 에게 아뢰기를 “금년에 관원을 선발하여 서용敍用한 것이 너무 지나쳐서 현령縣令이 적임자가 아닙니다.” 하였다.
새로 임명된 관원이 조정에 들어와 사례할 적에 현령縣令들을 선정전宣政殿의 뜰로 모두 불러서 백성을 다스리는 계책을 가지고 시험해보니, 오직 견성령鄄城令위제韋濟가 문장과 이론이 제일이므로 발탁하여 예천령醴泉令으로 삼고, 나머지 200여 명은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우선 맡은 고을로 돌아가게 하고, 45명은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익히게 하였다.
- 《신당서新唐書위제전韋濟傳》에 나옴 -
6월 계해일(19일)에 상황上皇하였다.
12월에 요숭姚崇원건요源乾曜注+[頭註]원건요源乾曜성명姓名이다. 파면(면직)하고 형부상서刑部尙書송경宋璟소정蘇頲동평장사同平章事로 삼았다.
송경宋璟이 정승이 되자, 인재를 가려 뽑음에 힘쓰고 재능에 따라 임무를 맡겨서 백관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직책에 걸맞게 하며, 형벌과 상을 줌에 사정私情을 따르지 않고 감히 황제의 얼굴을 범하면서 정직하게 간하니, 이 매우 공경하고 조심하여 비록 자신의 뜻에 합하지 않더라도 굽혀 그의 뜻을 따랐다.
돌궐突厥묵철黙啜측천무후則天武后 때로부터 대대로 중국의 걱정거리가 되어 조정에서 이 때문에 정무를 보느라 늦게서야 밥을 먹고 천하의 힘을 기울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학령전郝靈荃注+[頭註]은 음이 학이다. 학령전郝靈荃돌궐突厥에 사신으로 갔다가 묵철黙啜수급首級을 얻었다. 묵철黙啜수급首級을 얻고는 스스로 전무후무한 공이라고 여겼는데, 송경宋璟이 “황제가 무공武功을 좋아하시니 일을 좋아하는 자들이 다투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낼까 두렵다.” 하여,
그의 을 통렬히 억제하고 해를 넘기고야 비로소 낭장郎將에 제수하니, 학령전郝靈荃이 통곡하다가 죽었다.
- 《신당서新唐書요송전姚宋傳》에 나옴 -
[新增]范氏가 말하였다.
송경宋璟은 어진 정승이라고 이를 만하다.
처음을 보고 끝을 알았으며 승리를 억제하고 패배를 우려하였는데, 명황明皇이 끝내 무력을 남용함으로써 큰 혼란에 이르렀으니, 어쩌면 그리도 지혜가 밝은가.
어진 정승이라고 이를 만하다.”
요숭姚崇송경宋璟이 서로 이어서 정승이 되었는데, 요숭姚崇은 임기응변을 잘하여 일을 이루었고 송경宋璟은 법을 잘 지켜 공정公正함을 유지하여, 두 사람이 뜻과 소행은 같지 않았으나 합심하여 보좌해서 부역賦役이 너그럽고 공평하며 형벌이 투명하고 줄어들게 하니, 백성들이 부유하고 많아져서 나라 때의 어진 재상 중에 전에는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를 일컫고 뒤에는 요숭姚崇송경宋璟을 일컬어서 다른 사람은 이들에게 견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두 사람이 매번 나아가 뵐 때마다 이 번번이 그들을 위해 일어났으며 그들이 떠날 때면 殿 앞에까지 나가注+[頭註]추녀 끝을 이라 이르니, 임헌臨軒헌계軒階(堂 앞의 계단)와 가까움을 이른다. 몸소 전송하곤 하였는데, 뒤에 이임보李林甫가 정승이 되었을 때에는 비록 총애하고 위임함이 요숭姚崇송경宋璟보다 더하였으나 예우함은 현저히 낮고 박하였다.
- 《신당서新唐書요숭송경전姚崇宋璟傳》에 나옴 -
신당서新唐書》 〈요숭姚崇송경열전宋璟列傳〉贊에 말하였다.
요숭姚崇이 열 가지 일을 천자에게 요구하고 설득한 뒤에 정사를 보필하였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마는 《구당서舊唐書》에는 이것이 전하지 않는다.
살펴보건대 개원開元 초기에 모두 이미 시행되었으니, 참으로 거짓이 아니요, 송경宋璟은 강직하고 바름이 또 요숭姚崇보다 더하여 현종玄宗이 평소에 높이고 공경하는 바여서 일찍이 뜻을 굽히고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당사唐史(《新唐書》)에 ‘요숭姚崇은 임기응변을 잘하여 천하의 일을 이루었고, 송경宋璟은 법을 잘 지켜 천하의 공정公正함을 유지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두 사람이 는 같지 않으나 똑같이 다스려지는 데로 귀결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나라를 도와서 중흥中興하게 한 것이다.
아, 요숭姚崇은 천자에게 변방의 을 구하지 말 것을 권하였고, 송경宋璟은 변방의 신하에게 상을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천보天寶 연간의 난리에 끝내 그 폐해를 입었으니, 선견지명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나라 300년 동안 보필한 자가 적지 않았으나 다만 앞에는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를 칭하고 뒤에는 요숭姚崇송경宋璟을 칭함은 어째서인가?
훌륭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만나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史略 사평史評]范氏가 말하였다.
삼공三公은 앉아서 를 논하여 천자天子천위天位를 함께 하고 천직天職을 다스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 가 높지 않을 수 없고 그 맡김이 무겁지 않을 수 없다.
으로부터 삼대三代에 이르기까지 보상輔相을 높이고 예우한 것이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분명히 드러나 있으며, 나라는 나라의 폐단을 인습하여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었으나 오히려 재상이 나아가 뵐 때에 천자天子어좌御座에서 일어났고 수레에 있을 때에는 수레에서 내렸으니, 이는 대신大臣을 예우하여 절개를 권면하기 위해서였다.
개원開元 초기에는 명황明皇이 마음을 가다듬고 오로지 정사에 힘을 쏟아 원로대신元老大臣들을 우대하여 요숭姚崇송경宋璟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천보天寶 이후에는 안일에 빠지고 교만하고 사치하여 현자와 준걸들을 구하기를 게을리 하고 정사를 아랫사람들에게 맡기니, 저 소인小人들은 오직 이로움을 따라서 국가의 체통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듣기 좋게 하고 얼굴빛을 꾸며서 군주와 친하기를 구하는데, 군주가 이것을 좋게 여겨서 를 박하게 하고 을 후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이임보李林甫가 그 간악함을 부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임금이 대신大臣을 공경하고 예우하지 않으면 현자가 날로 물러가고 소인들이 날로 나오는 것이다.”


역주
역주1 : 예
역주2 : 천
역주3 三異 : 魯恭이 中牟縣令이었을 때에 오로지 德化로써 다스리고 형벌을 가하지 않았다. 建初 7년에 황충의 폐해가 심하였으나 魯恭이 다스리는 중모현에는 황충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河南尹袁安이 이 말을 듣고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여 肥親을 보내어 중모현에 가서 廉察하게 하였다. 魯恭이 肥親을 따라 阡陌(밭두둑과 길거리)을 순행하다가 뽕나무 아래에 함께 앉았는데, 꿩이 지나가다가 그 곁에 내려앉았다. 곁에 어린 동자가 있으므로 肥親이 말하기를 “얘야, 어째서 꿩을 잡지 않느냐?” 하니, 아이가 “꿩이 아직 어리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肥親이 놀라서 일어나 魯恭에게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은 그대의 정사를 살피기 위해서인데, 지금 황충이 경내를 침범하지 않으니 이것이 첫 번째 기이한 일이요, 덕화가 鳥獸에게까지 미치니 이것이 두 번째 기이한 일이요, 어린 아이도 인자한 마음이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기이한 일이다. 오래 머물면 다만 賢者를 번거롭게 할 뿐이다.” 하고 관부로 돌아와서 袁安에게 상세히 보고하였다. 《後漢書魯恭傳》
역주4 : 정
역주5 : 철
역주6 : 학
역주7 : 현
역주8 臨軒 : 황제가 正殿에 앉아 있지 않고 殿 앞에 나가는 것을 말한다. 殿 앞의 堂과 계단 사이는 처마와 가까우며 양쪽에 난간이 있는 것이 마치 수레의 軒과 같기 때문에 軒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역주9 : 세

통감절요(7) 책은 2022.01.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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