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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3)

통감절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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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竟寧元年이라
河南太守召信臣 爲少府하다
信臣 先爲南陽太守하고 後遷河南하니 治行 常第一이라
視民如子하고 好爲民興利하야 躬勸耕稼하고 開通溝瀆하니 戶口增倍하고 吏民親愛하야 號曰召父라하니라
〈出本紀〉
○ 甘延壽, 陳湯 旣至 論功이러니 石顯, 匡衡 以爲延壽, 湯 擅興師矯制하니 幸得不誅
如復加爵土 則後奉使者 爭欲乘危徼幸하야 生事於蠻夷하야 爲國招難하리이다
帝內嘉延壽, 湯功이나 而重違衡, 顯之議하야 久之不決이라
故宗正劉向 上疏曰 貳師將軍李廣利 捐五萬之師하고 靡億萬之費하고 經四年之勞하야 而僅獲駿馬三十匹하고 雖斬宛王寡之首 猶不足以注+[原註]償也 其私罪惡 甚多로되
孝武以爲萬里征伐이라하사 不錄其過하고 遂封拜兩侯注+[頭註]廣利等侯者二人이요 卿者三人이요 二千石 百有餘人이라[通鑑要解]兩侯 武帝封廣利兄弟하시니이다
今康居之國 彊於大宛하고 郅支之號 重於宛王하고 殺使者罪 甚於留馬어늘
而延壽, 湯 不煩漢士하고 不費斗糧하니 比於貳師컨대 功德 百之注+[釋義]言功與德 百倍勝之니이다
於是 天子下詔하야 赦延壽, 湯罪하야 勿治하고 令公卿議封焉하야 封延壽爲義成侯하고 賜湯爵關內侯하다
〈出陳湯傳〉
○ 夏五月 帝崩하다
班彪贊曰
爲元帝侍中이러니
語臣曰 元帝多材藝하야 善史書注+[頭註]周宣王太史史所作大篆이라하고 〈鼓琴瑟하고 吹洞簫하며 自度曲하야 被歌聲하야 分刌節度하야 窮極幼眇(要妙)
少而好儒러니 及卽位 徵用儒生하야 委之以政하야 貢薛韋匡 迭爲宰相이로되
而上牽制文義하고 優游不斷하야 孝宣之業 衰焉이라
이나 寬弘盡下하야 出於恭儉하고 號令溫雅하야 有古之風烈이라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元帝以昏懦之資 繼統之初 首以公田으로 賑業貧民하고 賦貸種食하며 未幾 減樂府員하고 省苑馬하야 以賑困乏하며 又罷宮館하고 減馬獸肉食하야 數月之內 善政 迭書하니 率是而行이면 文景 亦不是過어늘
奈何 主德不明하고 群小在位하야 知蕭周之賢호되 善善而不能用하고 知恭顯之姦호되 惡惡而不能去하야 事無巨細 悉委中書하야 專事邪僻하고 賊害忠良하니 西漢之衰 決於此矣로다
太子卽皇帝位하야 以元舅注+[頭註]母之兄弟曰舅平陽侯王鳳으로 爲大司馬大將軍하야 領尙書事하다
[新增]尹氏曰
元舅未有書어늘 而此書之者 所以著外氏得權之始 新莽簒竊之漸爾 履霜堅氷 可不戒哉


경녕竟寧 원년元年(무자 B.C.33)
하남태수河南太守 소신신召信臣소부少府가 되었다.
소신신召信臣은 먼저는 남양태수南陽太守가 되고 뒤에는 하남河南으로 옮겼는데, 치적治績이 항상 제일이었다.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아끼고 백성들을 위해 이로운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몸소 농사일을 권장하고 수로水路를 개통하니, 호구戶口가 배로 증가하고 관리와 백성들이 친애하여 소부召父라고 불렀다.
- 《한서漢書 원제기元帝記》에 나옴 -
감연수甘延壽진탕陳湯이 이르자, 이들의 을 논하였는데, 석현石顯광형匡衡이 말하기를 “감연수甘延壽진탕陳湯이 제멋대로 군대를 일으키고 황제의 명을 사칭하였으니, 죄를 받아 죽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만일 다시 작위爵位토지土地를 더해 준다면 뒤에 사명使命을 받드는 자들이 다투어 위태로운 일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서 오랑캐에게 일을 벌이고자 하여 국가에 난리를 초래할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는 내심으로 감연수甘延壽진탕陳湯을 가상히 여겼으나 광형匡衡석현石顯의 의논을 어기기가 어려워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하였다.
예전의 종정宗正유향劉向이 상소하기를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5만의 군사를 버리고 억만 전의 비용을 허비하고 4년 동안의 수고로움을 감내하여 겨우 준마駿馬 30필을 얻었고 비록 대완국大宛國관과毌寡의 머리를 베었으나 오히려 비용을 다 보상注+[原註]은 보상함이다. 하지 못하였으며 사사로운 죄악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효무제孝武帝는 만 리 먼 곳을 정벌했다 하여 그의 허물을 기록하지 않고 마침내 두 注+[頭註]李廣利 등 에 봉해진 자가 두 명이고, 이 된 자가 세 명이고, 이천석二千石이 된 자가 백여 명이었다. [通鑑要解]두 무제武帝이광리李廣利 형제를 봉한 것이다. 에 봉하였습니다.
지금 강거국康居國대완국大宛國보다 강하고, 질지郅支의 칭호가 대완왕大宛王보다 중하고, 사자使者를 죽인 죄가 대완국大宛國에서 말을 숨기고 내주지 않은 것보다 더 심한데,
감연수甘延壽진탕陳湯나라 군사를 번거롭게 동원하지 않고 한 말의 양식도 허비하지 않았으니, 이사장군貳師將軍에 비하건대 이 백배나 낫습니다.注+[釋義]공덕백지功德百之이 백배나 나음을 말한 것이다. ” 하였다.
이에 천자天子가 조서를 내려 감연수甘延壽진탕陳湯의 죄를 사면하여 다스리지 말게 하고, 공경公卿들로 하여금 봉작封爵을 의논하게 해서 감연수甘延壽를 봉하여 의성후義成侯로 삼고, 진탕陳湯에게는 관내후關內侯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 《한서漢書 진탕전陳湯傳》에 나옴 -
○ 여름 5월에 황제가 승하하다.
반표班彪의 《한서漢書》 〈원제기元帝紀에 말하였다.
외조外祖 형제가 원제元帝시중侍中이 되었었는데,
에게 말씀하기를 ‘원제元帝재예才藝가 많아 사주史籒의 글씨체注+[頭註]사서史書나라 선왕宣王 때의 태사太史였던 사주史籒가 만든 대전大篆이다. 를 잘 쓰고 거문고와 비파를 잘 타고 퉁소를 잘 불며 스스로 곡조를 만들어 노랫소리에 입혀서 절도節度에 맞아 오묘함을 다하였다.
젊어서부터 유학儒學을 좋아하였는데, 즉위하자 유생儒生들을 초빙해서 정사를 맡겨 공우貢禹, 설광덕薛廣德, 위현성韋玄成, 광형匡衡이 차례로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은 글의 뜻에 구애되고 우유부단優游不斷하여 효선제孝宣帝이 쇠퇴하였다.
그러나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다하고 공손함과 검소함에서 나왔으며, 호령號令이 온화하고 고상하여 옛 풍모가 있었다.’ 하였습니다.”
[史略 사평史評]史斷에 말하였다.
원제元帝혼우昏愚하고 나약한 자질로 대통大統을 이은 초기에 첫 번째로 공전公田을 가지고 가난한 백성들의 생업을 도와주고 조세를 종자 곡식으로 꾸어 주며, 얼마 있지 않아 악부樂府의 인원을 줄이고 상림원上林苑의 말을 줄여서 곤궁한 자들을 구휼하였으며, 또 궁관宮館을 없애고 말과 고기 먹는 짐승을 줄여서 몇 달 사이에 선정善政이 번갈아 기록되었으니, 이를 따라서 행하였다면 문제文帝경제景帝 또한 이보다 더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군주의 이 밝지 못하고 여러 소인들이 지위에 있어서 소망지蕭望之주감周堪의 어짊을 알았으나 을 선하게 여기면서도 등용하지 못하고, 홍공弘恭석현石顯의 간사함을 알았으나 을 미워하면서도 제거하지 못해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중서中書에 맡겨서 오로지 사벽邪僻함을 일삼고 충량忠良한 사람을 해쳤으니, 서한西漢의 쇠퇴함이 여기에서 결정되었다.”
태자가 황제에 즉위하여 원구元舅(큰외삼촌)注+[頭註]어머니의 형제를 라 한다. 평양후平陽侯 왕봉王鳳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삼아서 상서尙書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新增]尹氏가 말하였다.
원구元舅를 기록한 적이 없는데, 여기에 특별히 쓴 것은 외척들이 권력를 얻은 시초와 나라의 왕망王莽이 찬탈한 조짐을 드러낸 것이니,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르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 관
역주2 : 복
역주3 臣外祖兄弟 : 應劭는 말하기를 “元帝와 成帝의 紀는 모두 班固의 아버지 彪가 지은 것이니, 臣은 彪가 자신을 말한 것으로 그의 外祖는 金敞이다.” 하였고, 如淳은 말하기를 “班固의 外祖는 樊叔皮이다.” 하였는데, 顔師古는 말하기를 “應氏의 說이 옳다.” 하였다.
역주4 :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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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자] 경녕원년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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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자] 경녕원년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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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자] 경녕원년 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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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자] 경녕원년 20

통감절요(3)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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