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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9)

통감절요(9)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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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9)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戊寅]十二年이라
餌方士藥하고 已覺躁渴하다
[新增]范氏曰
三代之時 自天子 至於庶人 皆有常職하야 以食其力注+[頭註]言各以力耕得食이니 卽食己之力也 又力祿也 記曲禮 有宰食力이라하니 謂食下民賦稅之力이라하고 有常行하야 以勤其生하니 壯而彊勉焉하고 老而敎誨焉하야 修身以俟死而已
天下無異道하니 未有衆人皆死而欲一己獨不死者也 執左道注+[頭註]左道 非正之術이라以亂政者이라
無迂怪注+[頭註] 曲也之士러니
由秦漢以來 乃有神仙服食不死之說이라
人心多惑하고 聖道不明 此其一端也어늘 而人主尤甘心焉이라
以唐攷之하면 自太宗으로 至于武宗 餌藥注+[頭註] 食也以敗者 六七君注+[頭註]憲, 穆, 敬, 武, 宣이요 二未詳이라이라
皆求長生이라가 而反夭其天年하니 亦可以爲戒矣어늘
而宣宗 又敗以藥하야 至以儲嗣爲諱注+[附註] 晩年 寵愛少子夔王滋하야 不定儲位어늘上言하고 繼之以泣호되 不聽이라 裴休奏請한대 乃曰 若立太子 朕遂爲閑人이라하고 崔愼由以建儲對라가 旬日 斥罷하니라하니 豈不蔽甚也哉
호되 刺史毋得外徙하고 必令至京師하야 面察其能否然後 除之하라
令狐綯嘗徙其故人하야 爲隣州刺史하고 道之官이러니
見其謝上表하고 以問綯한대 對曰 以其道近하야 送迎耳니이다
上曰 朕以刺史多非其人하야 爲百姓害故 欲一一見之하야 訪問其所施設하야 知其優劣하야 以行黜陟이어늘
而詔命旣行注+[釋義]史記淮南王安傳 廢格明詔라한대 按如淳註 止也 攱閣不得下也라하니라 蘇林曰 格 音閣이니라 不用하니 宰相 可謂有權이로다 時方寒이러니汗透重裘러라
臨朝하야 接對群臣 如賓客하고 雖左右近習이라도 未嘗見其有惰容하며 每宰相奏事 旁無一人立者호되 威嚴하야 不可仰視
奏事畢 忽怡然曰 可以閑語矣로다하고 因問閭閻細事하고 或談宮中遊宴하야 無所不至라가
一刻許 復整容하야 曰 卿輩 善爲之하라
常恐卿輩負朕하야 後日不復得再相見이라하고 乃起入宮하니라
令狐綯謂人曰 吾十年秉政 最承恩遇이나 每延英奏事 未嘗不汗霑衣也라하니라


대중大中 12년(무인 858)
방사方士가 올린 약을 먹고는 이미 조급증과 갈증을 느꼈다.
[新增]范氏(范祖禹)가 말하였다.
삼대시대三代時代에는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떳떳한 직책이 있어서 자기 능력에 따라 먹고,注+[頭註]식기력食其力은 각자 자기 힘대로 농사지어 얻어 먹는 것이니, 바로 자기 힘대로 먹고 사는 것이요, 또 녹봉을 힘쓰는 것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家臣)가 있고 백성들이 내는 조세를 먹는다.”라고 하였으니, 식력食力은 백성들이 내는 조세를 먹는 것을 이른다. 떳떳한 행실이 있어서 생업에 부지런히 힘쓰니, 장성해서는 부지런히 힘쓰고 늙어서는 사람들을 가르쳐서 몸을 닦아 죽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천하에 다른 가 없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다 죽는데 자기 혼자만 죽지 않으려고 하는 자가 있지 않았고, 좌도左道(부정한 도)를 주장하여注+[頭註]좌도左道는 바른 것이 아닌 방술方術이다. 정사를 어지럽히는 자는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우활하고 괴탄한注+[頭註]는 굽은(바르지 않은) 것이다. 선비가 없었다.
그런데 한시대漢時代 이후로는 마침내 신선이 되고 불사약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므로 인심人心이 많이 미혹되고 성인聖人가 밝혀지지 못한 것은 이것이 한 단서인데, 군주가 더욱 마음에 달갑게 여겼다.
나라를 가지고 살펴보면 태종太宗으로부터 무종武宗에 이르기까지 불사약을 먹고注+[頭註]는 먹는 것이다. 몸을 망친 군주가 6, 7명에 이른다.注+[頭註]6, 7명의 군주는 헌종憲宗목종穆宗경종敬宗무종武宗선종宣宗이고, 나머지 두 명은 자세하지 않다.
이들은 모두 약을 먹고 장생長生하기를 바라다가 도리어 타고난 수명을 재촉하였으니, 또한 경계로 삼을 만하다.
그런데 선종宣宗이 또다시 불사약 때문에 몸을 망쳐서 저사儲嗣(太子)를 싫어하고 꺼리기까지 하였으니,注+[附註](宣宗)이 말년에 작은아들인 기왕夔王 이자李滋를 총애하여 저위儲位(태자의 지위)를 정하지 않자, 위모魏謩상언上言하고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으나 듣지 않았다. 배휴裴休가 태자를 세울 것을 주청하자, 이 마침내 말하기를 “만약 태자를 세우면 짐은 마침내 할 일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였고, 최신유崔愼由건저建儲를 건의하였다가 열흘 만에 배척을 받고 파직되었다. 어찌 심히 몽매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조서를 내리기를 “자사刺史를 제수할 적에 외지에서 곧바로 옮겨가게 하지 말고 반드시 경사京師에 오게 해서 그의 능하고 능하지 못함을 직접 대면하여 살핀 뒤에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호도令狐綯가 일찍이 그의 친구를 이웃 자사刺史로 옮기고 곧바로 길을 떠나 부임하게 하였다.
이 그가 조정에 사은하여 올린 표문表文을 보고 영호도令狐綯에게 물으니, 영호도令狐綯가 대답하기를 “부임할 곳과 가깝기 때문에 전송하고 맞이하는 데 드는 비용을 생략하고자 하여 곧바로 부임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 말하기를 “짐은 자사刺史들이 대부분 적임자가 아니어서 백성들의 폐해가 되기 때문에 일일이 대면하여 그들이 부임한 뒤에 어떻게 시행할 것인지를 물어 그들의 우열을 알아서 내치고 올리는 일을 결정하고자 하였다.
조명詔命을 이미 내린 뒤에 곧바로 폐기하고注+[釋義]사기史記》 〈회남왕淮南王 유안전劉安傳〉에 “밝은 조서를 폐격廢格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여순如淳에 “는 그만두는 것이고 은 시렁에 놓아두고 내리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소림蘇林이 말하기를 “은 음이 각이다.” 하였다. 따르지 않으니, 재상이 권세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하니, 이때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 영호도令狐綯는 식은땀이 흘러 두터운 갖옷을 적셨다.
은 조정에 임어臨御하여 신하들을 접견할 적에 손님처럼 공경하여 비록 좌우의 친근한 자라도 일찍이 태만히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며, 매양 재상들이 일을 아뢸 적에 옆에 한 사람도 서 있는 자가 없었으나 위의가 엄숙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황제의 얼굴을 우러러보지 못하게 하였다.
일을 다 아뢰고 나면 이 갑자기 온화한 얼굴로 말하기를 “이제 한담閑談을 할 수 있다.” 하고는, 인하여 여염의 자질구레한 일을 묻거나 혹은 궁중에서 놀고 잔치하는 일을 물어서 이르지 않는 바가 없었다.
그러다가 1이 지난 뒤에는 다시 용모를 정돈하고 말하기를 “경들은 직임을 잘 수행하라.
짐은 항상 경들이 짐을 저버려 후일에 다시 서로 만나보지 못할까 두렵다.” 하고는 마침내 일어나 궁중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영호도令狐綯가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 십 년 동안 정권을 잡음에 가장 많이 은혜와 대우를 받았으나 연영전延英殿에서 정사를 아뢸 때마다 일찍이 식은땀이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역주
역주1 : 오
역주2 : 모
역주3 便 : 편
역주4 : 생
역주5 : 각

통감절요(9)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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