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丑]〈陳太建十三年이요 周大象三年이니 二月後는 隋高祖文帝楊堅開皇元年이라
二月
에 周主下詔
하야 遜位居別宮
하고 命奉
紱
注+[通鑑要解]音弗이니 印組也라하야 禪位于隋
하다
文帝
注+[頭註]宇文泰라以關中之衆
으로 東迎孝武
注+[頭註]魏武帝脩라하야 收疲散之兵
하고 撫貧困之民
하며 任賢使能
하야 列官布職
하며 明部分
하고 務農桑
하야 以輔魏室
하니 雖以高氏
注+[頭註]高歡族黨이라之强
으로도 不能陵也
라
武帝
注+[頭註]高祖邕이니 文帝第四子라는 以英傑之資
로 受制强臣
注+[頭註]宇文護니 專權이라이러니 恭黙端拱
하야 十有餘年
에 須其罪盈惡熟
하야 爲衆所棄
하야 一旦除之
注+[頭註]壬辰年에 周主討殺太師護라를 若撥
注+[頭註]撥은 治也라 麷은 音豐이니 熬麥也라振槁
하니 可謂知柔知剛
하야 知(智)勇兼備者矣
라
然後에 親統六師하야 以征東夏하니 齊之嶮(險)阻不守하고 士卒不戰하야 數月之間에 縛其君臣하야 致之鼓下하야 使有周之境으로 東漸于海하고 南傅于江하니 雖魏室全盛之時라도 不能及也라
宣帝
注+[頭註]이라恣其淫侈
하고 逞其苛譎
하야 自絶于天
하고 結怨于民
하야 不及三年
에 而爲異姓所有
하니 悲夫
라
三月에 隋以賀若弼로 爲吳州總管하야 鎭廣陵하고 韓擒虎로 爲廬州總管하야 鎭廬江하다
隋主有幷呑江南之志
하야 問將帥於高
한대 熲薦弼與擒虎
라 故
로 置於南邊
하야 使潛爲經略
하니라
○ 隋高熲, 蘇威同心協贊하니 政刑大小를 帝無不與之謀議然後行之라
신축(581) - 진陳나라 태건太建 13년이고, 주周나라 대상大象 3년이니, 2월 이후는 수隋나라 고조高祖 문제文帝 양견楊堅의 개황開皇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주周나라가 망하고 수隋나라가 대신하니, 모두 세 나라이다. -
2월에
주주周主가
조서詔書를 내려 황제의 자리를 내놓고
별궁別宮에 거처하였으며,
황제皇帝의 옥새와 인끈
注+[通鑑要解]불紱은 음이 불이니, 인끈이다. 을 받들어서
수隋나라에
양위讓位하도록 명하였다.
“
문제文帝(宇文泰)
注+[頭註]문제文帝는 우문태宇文泰이다. 가
관중關中의 병력을 끌고 동쪽으로 가서
효무제孝武帝(元脩)
注+[頭註]효무제孝武帝는 북위北魏 무제武帝 원수元脩이다. 를 맞이하여 피폐하고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고 곤궁한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어진 자에게 맡기고 유능한 자를 부려서 관직에 나열하게 하며, 부대를 분명하게 나누고 농사와
양잠養蠶을 힘써서
위魏나라 황실을 보필하였으니, 비록
고씨高氏注+[頭註]고씨高氏는 고환高歡의 족당族黨이다. 의 강성함으로도 능멸하지 못하였다.
그가 만든 전법典法이 후세에 시행되었으니, 어질다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제武帝(宇文邕)
注+[頭註]무제武帝는 고조高祖 우문옹宇文邕이니, 문제文帝의 넷째 아들이다. 는 영웅호걸의 자질을 지녔으면서 강성한 신하(宇文護)
注+[頭註]강성한 신하는 우문호宇文護이니, 권력을 전횡하였다. 에게 제재당하였는데, 공손히 침묵하고 단정히 손을 모으고서 십여 년 동안 그의
죄罪가 가득 차고
악惡이 무르익어서 무리들에게 버림받기를 기다렸다가 하루아침에 제거하여
注+[頭註]임진년壬辰年(572)에 주주周主(宇文邕)가 태사太師 우문호宇文護를 토벌하여 죽였다. 볶은 보리
注+[頭註]발撥은 다스림이다. 풍麷은 음이 풍이니, 볶은 보리이다. 의 싹을 없애고 낙엽을 흔들어 떨어뜨리듯이 하였으니,
유柔해야 할 때에
유柔할 줄 알고
강剛해야 할 때에
강剛할 줄 알아서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런 뒤에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동하東夏를 정벌하였는데, 제齊나라의 험한 요새가 지켜지지 못하고 사졸들이 싸우지 않아서 몇 달 만에 제齊나라의 군주와 신하를 포박하여 고하鼓下(軍中)로 끌어와서 주周나라의 국경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양자강揚子江에 이르게 하였으니, 비록 위魏나라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을 때라 해도 이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선제宣帝(宇文贇)
注+[頭註]선제宣帝는 우문빈宇文贇이다. 는 음란함과 사치함을 제멋대로 행하고 가혹함과 속임수를 부려서 스스로
천리天理를 끊고 백성들에게 원한을 맺어 3년이 못 되어 국가가 다른
성씨姓氏의 소유가 되게 하였으니, 슬프다.”
수隋나라가 소위蘇威를 겸납언兼納言‧탁지상서度支尙書로 삼았다.
3월에 수隋나라가 하약필賀若弼을 오주총관吳州總管으로 삼아서 광릉廣陵에 진주하게 하고, 한금호韓擒虎를 여주총관廬州摠管으로 삼아서 여강廬江에 진주하게 하였다.
수주隋主가 강남江南(陳나라)을 병탄할 마음을 품고서 고경高熲에게 쓸 만한 장수를 물었는데, 고경高熲이 하약필賀若弼과 한금호韓擒虎를 천거하였으므로 이들을 남쪽 변방에 배치하여 은밀히 경략하게 한 것이다.
○ 수隋나라 고경高熲과 소위蘇威가 한마음으로 함께 보좌하니, 크고 작은 정사와 형벌을 문제文帝가 이들과 함께 도모하고 의논한 뒤에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제文帝가 혁명革命하여 주周나라를 대신한 수년 동안 천하가 태평함을 일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