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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9)

통감절요(9)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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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後唐同光四年四月 明宗李嗣源天成元年이라
○ 吳越寶正元年이라
○ 是歲 蜀亡하고 閩建國하니 凡四國, 三鎭이라
正月 唐魏王繼岌 將發成都할새 馬彦珪至하야 以皇后敎 示繼岌한대 繼岌 命召崇韜하야 計事하고 繼岌 登樓避之하다
崇韜方升階어늘 繼岌從者李環 碎其首注+[頭註] 張瓜切이니 箠也 하고 幷殺其子廷誨하다
○ 唐趙在禮反注+[附註]魏博指揮使楊仁晸 將兵屯貝州하니 天下莫知郭崇韜之罪하고 民間訛言皇后弑帝라하야 人情愈駭 仁晸部兵皇甫暉作亂하야 劫仁晸曰 主上所以有天下者 吾魏軍力也어늘 天下已定 不念舊勞하고 更加猜忌니이다 今聞皇后弑逆하야 京師已亂이라하니 願與公歸 安知不更爲富貴之資乎잇가 仁晸 不從한대 暉殺之하고 又劫小校하야 不從한대 又殺之하다 效節指揮使趙在禮 聞亂而走어늘 暉追及하야 하니 在禮懼而從之하니라 于鄴이어늘 命李嗣源注+[頭註]成德節度使 是爲明宗이라 하야 討之하다
三月 嗣源 至鄴都하야 下令軍中하야 詰旦注+[頭註]平旦也 攻城이러니 是夜 從馬直注+[頭註]莊宗選驍勇親軍하야 分置四指揮하고 號從馬直이라軍士張破敗 作亂하야 帥衆大譟하고 殺都將하고 焚營舍하다
詰旦 亂兵 逼中軍이어늘 嗣源 叱而問之曰 爾曹欲何爲 對曰 將士從主上十年 百戰以得天下러니
今主上 棄恩任威하야 云 克城之後 當盡坑注+[附註]鄴都亂이어늘 遣歸德節度使李紹榮하야 招撫러니 紹榮 至鄴한대 皇甫暉拒戰하니 紹榮 攻之不克이라 以狀聞한대 唐主怒曰 克城之日 勿遺噍類하라 紹榮 合諸道兵再攻하고 又遣嗣源하야 將親軍討之호되 不得通이라 嗣源之爲亂兵所逼也 紹榮 陳於城南이어늘 嗣源 相繼召之하야 欲與共討호되 紹榮 疑之하야 引避不應이라 及嗣源入鄴都 遂引兵退하야 保衛州하고 奏嗣源已(判)[叛]하야 與賊合이라하니 嗣源 遣使上章自理호되 不得通하니라 魏博之軍이라하니 我輩初無叛心이요 但畏死耳
今衆議欲城中合勢하야 擊退諸道之軍하오니 請主上帝河南하고 令公帝河北하야 爲軍民之主니이다
嗣源 泣諭之호되 不從이러라
嗣源所奏 皆爲李紹榮所遏하야 不得通하니 嗣源 由是疑懼
石敬瑭注+[頭註]尙明宗女永寧公主한대 後爲晉高祖하니라 曰 夫 成於果決而敗於猶豫니이다
康義誠注+[頭註]突騎都指揮使 曰 主上無道하야 軍民怨怒하니 從衆則生하고 守節則死니이다
嗣源 乃令安重誨注+[頭註]中門使也 後爲樞密使하니라 移檄會兵하니 軍勢大盛이러라
李紹榮 請唐主幸關東하야 招撫之한대 唐主從之하다
唐主至萬勝鎭하야 聞嗣源已據大梁하고 諸軍離叛하고 神色沮喪하야 登高歎曰 吾不濟注+[頭註] 成也 로다 卽命旋師하야 歸入洛城하다
四月 從馬直指揮使郭從謙注+[頭註]伶人이라 作亂하니 近臣宿將釋甲潛遁이라
俄而 唐主爲流矢所中하야 須臾遂殂하니라
[史略 史評]胡氏曰
莊宗初立 決勝夾寨하야 解潞州之圍하고 歸而治國訓兵 事各有理하니 使朱溫未死 固必爲所擒矣리라
旣違張承業忠謀하고 亟稱尊號하니 則擧措之失 已稍形見이요
逮滅梁之後하야는 遂無一善可稱하야 與向者猶二人然하니 是何也
才器有限也일새라
若曰天數 則裂膚汗血하고 沐雨櫛風하야 凡十五年而後得이어늘 好遊畋하고 幸婦女하고 寵伶人하고 信宦官하야 不三年而滅亡이라
其心 昔明而今暗하고 先戒而後肆하니 豈亦天邪
莊宗之 皆所自貽 不可歸之天數也니라
○ 是日 李嗣源子谷하야 聞之慟哭하고 謂諸將曰 主上 素得士心이나 正爲群小蔽惑하야 致此하니 今吾將安歸乎
己丑 嗣源 入洛陽하니 百官 三上牋(箋)하야 請嗣源監國한대
嗣源 乃許之하고 於柩前 卽皇帝位하다
○ 唐主目不知書하야 四方奏事 皆令安重誨讀之하니 重誨亦不能盡通이라
乃奏호되 願倣前朝侍講侍讀注+[頭註]盛唐之制 近代直崇政樞密院注+[頭註]直崇政院 梁制 直樞密院 莊宗制也 하야 選文學之臣하야 與之共事하야 以備應對니이다
乃置端明殿學士할새 以翰林學士馮道, 趙鳳으로 爲之하다
○ 昭武節度使王延翰注+[頭註]審知子也 自稱大閩國王하다


병술(926) - 후당後唐 동광同光 4년 4월은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천성天成 원년元年이다.
오월吳越보정寶正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이 망하고 이 나라를 세우니, 모두 네 나라이고 세 이다. -
정월에 나라 위왕魏王 계급繼岌이 장차 성도成都를 출발하려 할 적에 마언규馬彦珪가 이르러서 황후皇后의 교서를 계급繼岌에게 보이니, 계급繼岌이 명하여 곽숭도郭崇韜를 불러 일을 계책한다 하고는 계급繼岌은 누대에 올라가 그를 피하였다.
곽숭도郭崇韜가 막 계단을 오르려 하는데 계급繼岌의 종자 이환李環이 채찍으로 그의 머리를 깨부수고注+[頭註]장과절張瓜切(좌)이니, 채찍이다. 아울러 그의 아들 정회廷誨를 죽였다.
나라 조재례趙在禮업도鄴都에서 배반하자,注+[附註]위박지휘사魏博指揮使 양인정楊仁晸이 군대를 거느리고 패주貝州에 주둔하니, 당시에 천하 사람들은 곽숭도郭崇韜의 죄를 알지 못하였고 민간에서는 황후가 황제를 시해했다고 와전되어 인정人情이 더욱 놀랐다. 양인정楊仁晸의 부하 병사인 황보휘皇甫暉가 난을 일으켜 양인정楊仁晸을 위협하기를 “주상主上께서 천하를 소유하게 된 것은 우리 위박군魏博軍의 힘이었는데, 천하가 이미 평정된 뒤에 옛 공로를 생각하지 않고 다시 의심하십니다. 지금 들으니 황후가 시역弑逆을 저질러서 경사京師가 이미 혼란하다고 하니, 바라건대 과 함께 돌아간다면 어찌 다시 부귀의 밑천이 되지 않을 줄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양인정楊仁晸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자 황보휘皇甫暉가 그를 죽였고, 또 소교小校를 위협하였는데 따르지 않자 또다시 소교小校를 죽였다. 효절지휘사效節指揮使 조재례趙在禮가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달아나자, 황보휘皇甫暉가 쫓아가서 따라잡아 두 사람의 머리를 보이니, 조재례趙在禮가 두려워하여 따랐다. 이사원李嗣源에게 명하여注+[頭註]이사원李嗣源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이니, 이가 명종明宗이다. 토벌하게 하였다.
3월에 이사원李嗣源업도鄴都에 이르러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서 다음날 아침注+[頭註]힐단詰旦평단平旦(동이 틀 때)이다. 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이날 밤에 종마직從馬直注+[頭註]장종莊宗이 날래고 용감한 친군親軍을 선발하여 네 지휘사指揮使를 나누어 설치하고 종마직從馬直이라 호칭하였다. 군사軍士장파패張破敗가 난을 일으켜 병사들을 거느리고 크게 함성을 지르며 도장都將을 죽이고 영사營舍(막사)를 불태웠다.
다음날 아침 난을 일으킨 군사들이 중군中軍을 핍박하자, 이사원李嗣源이 꾸짖고 묻기를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장병들이 주상主上을 따른 지가 이미 십 년인데 몸소 수많은 전투를 거친 뒤에야 비로소 천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상께서 은혜를 버리고 위엄에 맡겨서 성을 점령한 뒤에는 마땅히 위박진魏博鎭의 군대를 다 묻어 죽인다고 하니,注+[附註]업도鄴都가 혼란하자 귀덕절도사歸德節度使 이소영李紹榮을 보내어 초무招撫하게 하였는데, 이소영李紹榮업도鄴都에 이르자 황보휘皇甫暉가 항거하여 싸우니, 이소영李紹榮이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장계狀啓로 이 사실을 아뢰자, 당주唐主가 노하여 말하기를 “성을 점령하는 날에 씨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하였다. 이소영李紹榮제도諸道의 군대를 규합하여 다시 공격하였으며 또다시 이사원李嗣源을 보내어 친군親軍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하였으나 소식을 통할 수가 없었다.
이사원李嗣源이 반란군에게 핍박받을 때에 이소영李紹榮이 성의 남쪽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사원李嗣源이 계속하여 불러서 함께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이소영李紹榮이 의심하여 몸을 피하고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사원李嗣源업도鄴都로 들어가게 되자,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여 위주衛州를 지키면서 ‘이사원李嗣源이 이미 배반하여 적과 연합했다.’고 아뢰니, 이사원李嗣源사자使者를 보내어 글을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으나 소식을 통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애당초 배반할 마음이 없고 다만 죽음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금 중론衆論성중城中과 합세하여 제도諸道의 군대를 격퇴하고자 하오니, 청컨대 주상께서는 하남河南의 황제가 되시고 영공令公께서는 하북河北의 황제가 되어서 군사와 백성들의 군주가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이사원李嗣源이 눈물을 흘리면서 타일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사원李嗣源당주唐主에게 아뢰는 것을 이소영李紹榮에게 모두 저지당하여 통하지 못하니, 이사원李嗣源이 이로 말미암아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석경당石敬瑭注+[頭註]석경당石敬瑭명종明宗의 딸 영녕공주永寧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뒤에 나라 고조高祖가 되었다. 말하기를 “일은 과감하게 결단하는 데서 이루어지고 망설이는 데서 실패합니다.” 하였다.
강의성康義誠注+[頭註]강의성康義誠돌기도지휘사突騎都指揮使이다. 말하기를 “주상이 무도하여 군사와 백성들이 원망하고 노여워하니, 이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면 살고 신하의 절개를 지키면 죽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사원李嗣源이 마침내 안중회安重誨로 하여금注+[頭註]안중회安重誨중문사中門使이니, 뒤에 추밀사樞密使가 되었다.격문檄文을 돌려 군사를 모으게 하니, 군세軍勢가 크게 성하였다.
이소영李紹榮당주唐主에게 청하여 관동關東 지방에 가서 초무招撫할 것을 청하자, 당주唐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당주唐主만승진萬勝鎭에 이르러 이사원李嗣源이 이미 대량大梁을 점거하고 제군諸軍들이 이반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신색神色저상沮喪되어서 높은 곳에 올라가 한탄하기를 “내가 성공하지 못하겠다.” 하고는注+[頭註]는 이룸이다. 즉시 회군할 것을 명하여 돌아와 낙양성洛陽城으로 들어갔다.
4월에 종마직지휘사從馬直指揮使 곽종겸郭從謙注+[頭註]곽종겸郭從謙은 악공이다. 난을 일으키니, 가까이 모시던 신하와 옛 장수들이 모두 갑옷을 벗고 몰래 도망하였다.
얼마 후에 당주唐主유시流矢를 맞아 잠깐 만에 마침내 죽었다.
[史略 사평史評]胡氏(胡寅)가 말하였다.
장종莊宗이 처음 즉위했을 적에 협채夾寨에서 승리를 결정지어 노주潞州의 포위를 풀었고, 돌아와서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들을 훈련함에 일마다 각각 조리가 있었으니, 가령 주온朱溫이 죽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장종莊宗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이후 장승업張承業의 충성스런 계책을 어기고 황제의 존호尊號를 급히 칭하니, 거조의 잘못이 이미 차츰 드러났다.
그리고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는 마침내 칭찬할 만한 선행善行이 한 가지도 없어서 예전과 다른 것이 마치 딴 사람인 것 같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재주와 기국器局이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천운天運이라고 한다면 살이 터지고 피땀을 흘리며 객지에서 비바람에 시달려서 모두 15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한 뒤에야 얻었는데,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고 부녀자들을 사랑하며 악공을 총애하고 환관을 신임해서 3년이 못 되어 멸망하였다.
그리하여 그 마음이 옛날에는 밝다가 지금은 어둡고 처음에는 경계하다가 뒤에는 방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또한 천운天運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이 장종莊宗에게 어짊을 명할 것인지, 길흉을 명할 것인지, 오랜 역년을 명할 것인지는 모두 스스로 부르는 것이니, 이를 천운天運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다.”
이날 이사원李嗣源앵자곡罌子谷에 이르러 당주唐主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고, 제장諸將들에게 이르기를 “주상主上이 평소 군사들의 마음을 깊이 얻었으나 다만 여러 소인배들에게 가리워지고 미혹되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내가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였다.
기축일己丑日(4월 3일)에 이사원李嗣源낙양洛陽으로 들어가니, 백관들이 세 번 전문牋文을 올려 이사원李嗣源에게 감국監國할 것을 청하였다.
이사원李嗣源이 마침내 허락하고 영구靈柩 앞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당주唐主(李嗣源)가 눈으로 글을 읽을 줄 몰라 사방에서 아뢰는 일을 모두 안중회安重誨에게 읽게 하니, 안중회安重誨 또한 다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에 아뢰기를 “전대의 시강侍講시독侍讀,注+[頭註]시강侍講시독侍讀성당盛唐 때의 제도이다. 근대의 직숭정원直崇政院직추밀원直樞密院의 고사를 따라注+[頭註]직숭정원直崇政院나라의 제도이고, 직추밀원直樞密院장종莊宗의 제도이다. 문학文學하는 신하를 뽑아 그와 함께 일을 논하여 황제의 하문下問의 대비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이에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를 둘 적에 한림학사翰林學士 풍도馮道조봉趙鳳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로 임명하였다.
소무절도사昭武節度使 왕연한王延翰注+[頭註]왕연한王延翰왕심지王審知의 아들이다. 스스로 대민국왕大閩國王이라 칭하였다.


역주
역주1 : 과
역주2 示以(一)[二]首 : 楊仁晸과 小校의 머리를 보여준 것이다.
역주3 命哲, 命吉凶, 命歷年 : 《書經》 〈召誥〉에 召公이 成王에게 고한 내용에 “아! 자식을 낳음에 처음 태어날 때에 달려 있어 스스로 어진 命을 부르지 않음이 없음과 같으니, 이제 하늘이 우리에게 어짊을 명할 것인지, 길흉을 명할 것인지, 오랜 역년을 명할 것인지 이것을 아는 것은 지금 우리가 처음 정사함에 달려 있습니다.[嗚呼 若生子 罔不在厥初生 自貽哲命 今天 其命哲 命吉凶 命歷年 知今我初服]”라고 보인다.
역주4 : 앵
역주5 直崇政樞密院 : 同光 2년에 崇政院을 옛 제도에 의거하여 樞密院으로 만들고 宰臣에게 院使를 겸임하게 하며 直院 1인을 두었다.

통감절요(9)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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