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通鑑節要(3)

통감절요(3)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통감절요(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乙卯]四年이라
霍顯及禹, 山, 雲注+[頭註] 光妻 光子禹 兄孫雲이요 雲弟山이라 自見日侵削하고 數相對啼泣自怨하야 謀廢天子라가 事發覺하야
雲山 自殺하고 要(腰)斬하고 顯及諸女昆弟 皆棄市하고 皇后霍氏하다
○ 初 霍氏奢侈하니 茂陵徐生 上疏하야 言宜以時抑制러니 其後 霍氏誅滅而告者皆封注+[釋義]告霍氏反者皆封이라이라
人爲徐生注+[釋義] 謂當時有人也 助也 徐生 卽徐福이라하야 上書曰 臣聞客有過主人者 見其竈直突注+[釋義] 竈窓也하고 傍有積薪하고 客謂主人호되 爲曲突注+[釋義] 改也 曲則不直而火勢慢也하고 遠徙其薪하라
不(否)者注+[釋義]猶言否則也 且有火患하리라
主人 不應이러니 俄而 家果失火어늘 隣里共救之하야 幸而得息이라
於是 殺牛置酒하고 謝其隣人할새 灼爛者在於上行注+[釋義] 列也 救火而被燒灸者坐於上列이라하고 餘各以功次坐호되 而不錄言曲突者
人謂主人曰 鄕(曏)使聽客之言이런들 不費牛酒하고 終亡(無)火患이어늘
今論功而請賓 曲突徙薪 無恩澤하고 燋頭爛額 爲上客 主人 乃寤而請之라하니
今茂陵徐福 數上書하야 言霍氏且有變하리니 宜防絶之라하니 鄕使福說得行이면 則國無裂土出爵之費하고 臣無逆亂誅滅之敗
往事 旣已어니와 而福 獨不蒙其功하니 唯陛下 察之하사 貴徙薪曲突之策하야 使居焦髮灼爛之右하소서
乃賜福帛十匹하고 後遷爲郞注+[釋義]百官表 郞掌守門戶하고 出充車騎하니라하다
〈出霍光傳〉
○ 帝初立하야 謁見高廟할새 大將軍光 驂乘하니 內嚴憚之하야 若有芒刺在背注+[釋義] 草耑也 如棘刺其背러니 車騎將軍張安世 代光驂乘하니 天子從容肆體注+[釋義]從容 謂從任其容止하야 不矜莊也 肆體 謂身體舒放也하야 甚安近焉이라
及光身死 而宗族竟誅 俗傳霍氏之禍萌於驂乘이라하니라
〈出光本傳〉
班固贊曰
霍光 受襁褓之託하고 任漢室之寄하야 匡國家, 安社稷하야 擁昭立宣하니 雖周公阿衡注+[釋義]周公 名旦이니 武王弟也 武王崩하고 成王在襁褓中일새 周公 代其當國이라가 七年後還政이라 阿衡 殷太甲之相伊尹之號也 蔡氏曰 阿衡 商之官名이니 亦曰保衡이라이라도 何以加此리오
이나 光不學亡(無)術하야 闇於大理하야 陰妻邪謀注+[釋義] 與蔭通이니 庇也 言藏匿其妻之邪謀也[附註]許后崩 人上書告諸醫侍疾無狀者어늘 皆收繫詔獄한대 恐急하야 卽具語光曰 旣失計爲之하니 毋令吏急衍하라한대 光大驚하야 欲自發擧러니 不忍奏上하다 光署衍勿論하니 女醫名이라하고 立女爲后하야 湛(沈)溺盈溢之欲注+[釋義] 與沈通이라하야
以增顚覆之禍하야 死財(纔)三年注+[釋義]養心吳氏曰 財與纔通이라 宗族誅夷하니 哀哉인저
溫公曰
霍光之輔漢室 可謂忠矣
이나 卒不能庇其宗 何也
夫威福者 人君之器也 人臣執之하야 久而不歸 鮮不及矣
以孝昭之明으로 十四而知上官桀之詐하니 固可以親政矣어든 況孝宣 十九卽位하야 聰明剛毅하고 知民疾苦어늘
而光 久專大柄하야 不知避去하고 多置親黨하야 充塞朝廷하야 使人主蓄憤於上하고 吏民積怨於下하야
切齒側目하야 待時而發하니 其得免於身 幸矣
況子孫 以驕侈趣(促)之哉
雖然이나 曏使孝宣 專以祿秩賞賜 富其子孫하야 使之食大縣, 奉朝請注+[釋義] 謁也이런들 亦足以報盛德矣어늘
乃復任之以政하고 授之以兵하야 事叢釁積 更加裁奪하야 遂至怨懼하야 以生邪謀하니 豈徒霍氏之自禍哉
亦孝宣醞釀以成之注+[釋義]醞釀 造酒也 言宣帝不早防閑霍氏하야 致令貫盈하야 宗族誅夷하니 是醞釀浸漬而成其邪謀也
鬪椒注+[頭註]子文弟 子良之子 作亂於楚어늘 하고 以爲子文無後 何以勸善이리오하니
夫以顯, 禹, 雲, 山之罪 雖應夷滅이나 而光之忠勳 不可不祀어늘 遂使家無噍類注+[釋義] 齧也 言無復有活而噍食者하니 孝宣亦少恩哉인저
北海太守朱邑 以治行第一 入爲大司農하다
○ 渤海太守龔遂 入爲水衡都尉注+[頭註]水衡都尉 掌上林均輸御羞禁圃하니라하다
先是 渤海左右郡 歲飢하야 盜賊 竝起하니 二千石 不能擒制
選能治者할새 丞相御史擧遂어늘 拜爲渤海太守하고 召見하야 問何以治渤海하야 息其盜賊고한대
對曰 海瀕 遐遠하야 不霑聖化하야 其民 困於飢寒이어늘 而吏不恤이라
使陛下赤子 盜弄陛下之兵於池中耳注+[釋義] 音黃이니 潢池者 潢汚行潦之水池也 言如小兒戲弄兵器於潢池之中하야 平之不難也 唐宣宗時 鷄山群盜起 詔討之한대 崔鉉曰 此皆陛下赤子어늘 迫於飢寒하야 盜弄兵於谿谷間이니 不足辱大軍也라하니 亦倣此說이라 今欲使臣勝之邪잇가
上曰 選用賢良 固欲安之也니라 遂曰 治亂民 猶治亂繩하야 不可急也
唯緩之然後 可治 願丞相御史且無拘臣以文法하고一切便宜從事注+[通鑑要解]便宜 謂臨事 凡有便於今하고 宜於世者하야 可行卽行이라하노이다
許焉하고 加賜黃金하다
乘傳至渤海界한대 郡聞新太守至하고 發兵以迎이어늘 遂皆遣還하고 移書勅屬縣하야 悉罷逐捕盜賊吏하고
諸持注+[釋義] 或作鋤 鎌也田器者 皆爲良民이니 吏毋得問이요 持兵者 乃爲賊이라하고 遂單車 獨行至府하니
盜賊 聞遂敎令하고 卽時解散하야 棄其兵弩而持鉤鉏하니 於是 悉平하다
遂乃開倉廩하야 假貧民하고 選用良吏하야 慰安牧養焉하다
遂見齊俗奢侈하야 好末技, 不田作하고 乃躬率以儉約하야 勸民農桑하고
民有帶持刀劍者어든 使賣劍買牛, 賣刀買犢하고何爲帶牛佩犢고하고 勞來循行하니
郡中 皆有畜積하고 獄訟 止息이러라
〈出遂本傳〉


지절地節 4년(을유 B.C.66)
곽현霍顯곽우霍禹, 곽산霍山, 곽운霍雲注+[頭註]곽광霍光의 아내이다. 곽광霍光의 아들이 이고, (霍去病)의 손자가 이고, 의 아우가 이다. 이 날마다 침삭侵削당하는 것을 스스로 보고는 자주 서로 마주 보고 울며 스스로 원망하여 천자天子를 폐위할 것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그리하여 곽운霍雲곽산霍山은 자살하고, 곽우霍禹요참형腰斬刑을 당하고, 곽현霍顯과 여러 딸과 형제들은 모두 기시형棄市刑을 당하고, 황후皇后 곽씨霍氏는 폐위당하였다.
○ 예전에 곽씨霍氏가 사치(방종)하니, 무릉茂陵서생徐生(徐福)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제때에 억제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그 뒤 곽씨霍氏가 죽임을 당하고 멸망하자, 곽씨霍氏를 고발한 자들이 모두 에 봉해졌다.注+[釋義]곽씨霍氏의 반란을 고발한 자들이 모두 에 봉해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서생徐生을 위하여注+[釋義]은 당시의 어떤 사람을 이른다. 는 도움이다. 서생徐生은 바로 서복徐福이다.상서上書하기를 “신이 들으니 지나가다가 주인을 방문한 이 있었는데, 그 집 부엌의 굴뚝注+[釋義]은 부뚜막의 창(굴뚝)이다. 이 곧게 뻗은데다 곁에 장작이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주인에게 이르기를 ‘굴뚝을 굽게 만들고注+[釋義]은 고침이다. 굴뚝을 굽게 만들면 곧장 뻗지 않아 불이 타오르는 기세가 약한 것이다. 장작을 멀리 옮기시오.
그렇지 않으면注+[釋義]부자不者는 ‘부즉否則(아니면)’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장차 화재가 날 것이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응하지 않았는데 얼마 후 과연 그 집에 화재가 나자, 이웃 사람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구원하여 다행히 불을 끌 수 있었습니다.
이에 소를 잡고 술자리를 베풀고는 그 이웃 사람들에게 사례할 때에 불에 데인 사람은 상석上席에 있게 하고注+[釋義]은 항렬이니, 불을 끄다가 불에 덴 자가 상석上席에 앉는 것이다. 나머지는 각각 공로에 따라 차례로 앉혔으나, 굴뚝을 굽게 만들라고 말해 준 자의 공은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만일 손님의 말을 들었더라면 소와 술도 허비하지 않고 끝내 화재도 없었을 터인데,
지금 을 논하여 손님을 청하면서 굴뚝을 굽게 만들고 장작을 옮기라고 말해 준 자는 은택이 없고, 머리와 이마를 데인 사람이 상객上客이 된단 말입니까?’ 하니, 주인이 비로소 깨닫고 그를 청했다고 합니다.
지금 무릉茂陵서복徐福이 자주 글을 올려 곽씨霍氏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것이니 이것을 막고 끊어야 한다고 말하였으니, 지난번에 가령 서복徐福의 말이 시행되었다면 국가는 땅을 떼어 주고 작위爵位를 내려 주는 비용이 들지 않았을 것이요, 신하는 반역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멸망하는 실패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나간 일은 이미 어쩔 수 없으나 서복徐福이 유독 그 공을 입지 못하였으니, 폐하께서는 살피시어 장작을 옮기고 굴뚝을 굽게 만들라는(미리 화를 방지하는) 계책을 중하게 여기셔서 머리카락을 그슬리고 살이 데고 문드러진 자의 윗자리에 있게 하소서.” 하였다.
이 마침내 서복徐福에게 비단 10필을 하사하고 뒤에 승진시켜 낭관郎官注+[釋義]한서漢書》 〈백관표百官表〉에 “문호門戶를 관장하여 지키고, 나가면 거기車騎에 충원되었다.” 하였다. 을 삼았다.
-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에 나옴 -
○ 황제가 처음 즉위하여 고묘高廟를 알현할 때에 대장군 곽광霍光참승驂乘하니 이 속으로 두려워하고 꺼려서 마치 등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여겼는데,注+[釋義]은 풀의 까끄라기요, 는 가시가 그 등을 찌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뒤에 거기장군車騎將軍 장안세張安世곽광霍光을 대신하여 참승驂乘하니 천자天子가 자유로워 몸을 펴서注+[釋義]종용從容은 행동거지를 마음대로 하여 조심스럽고 엄숙하지 않음을 이르고, 사체肆體는 신체가 펴지고 풀어짐을 이른다. 매우 편안해하고 가까이하였다.
곽광霍光이 죽자 종족宗族이 끝내 주벌당하였으므로 세속에서 전하기를 “곽씨霍氏의 화가 참승驂乘에서 비롯되었다.” 하였다.
-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에 나옴 -
반고班固가 말하였다.
곽광霍光강보襁褓에 싸인 어린 군주를 부탁받고 나라 왕실王室의 안위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아 국가國家를 바로잡고 사직社稷을 안정시켜 소제昭帝선제宣帝를 옹립하였으니, 비록 주공周公아형阿衡(伊尹)이라도注+[釋義]주공周公은 이름이 이니 무왕武王의 아우이다. 무왕武王하고 성왕成王이 강보 속에 있으므로 주공周公성왕成王 대신 나라를 맡아 다스리다가 7년 뒤에 성왕成王에게 정사를 돌려주었다. 아형阿衡나라 태갑太甲의 재상인 이윤伊尹의 칭호이다. 채씨蔡氏(蔡沈)가 말하기를 “아형阿衡나라의 관명官名이니 또한 보형保衡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그러나 곽광霍光이 배우지 않아 학술이 없어 큰 이치에 어두워서, 아내의 간사한 꾀를 덮어 주고注+[釋義]陰은 과 통용되니, 덮어 주는 것이다. 곽광霍光이 아내의 간사한 꾀를 감추어 숨겼음을 말한 것이다.[附註]간사한 꾀는 허후許后가 별세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상서上書하여 병을 시중하던 여러 의원들의 불초不肖함을 고발하자, 이들을 모두 조옥詔獄에 가두었는데, 곽현霍顯이 두려워하여 즉시 곽광霍光에게 자세히 말하기를 “이미 실책을 범하였으니, 옥리獄吏로 하여금 순우연淳于衍을 급하게 논죄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곽광霍光은 크게 놀라 이 사실을 스스로 황제에게 말하려 하였으나 차마 상주하지 못하였다. 곽광霍光순우연淳于衍을 논죄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순우연淳于衍여의女醫의 이름이다. 딸을 세워 로 삼아서 가득 차서 넘치는 욕망에 빠졌다.注+[釋義]과 통용된다.
그리하여 전복顚覆하는 화를 보태어 곽광霍光이 죽은 지 3년 만에注+[釋義]양심오씨養心吳氏가 말하기를 “와 통용된다.” 하였다. 종족宗族이 멸족당하였으니, 슬프다.”
온공溫公이 말하였다.
곽광霍光나라 왕실을 보필한 것은 충성스럽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끝내 자신의 종족을 보호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위엄과 은 임금이 사용하는 기물이니, 신하가 이것을 잡고 오랫동안 돌려주지 않으면 화가 미치지 않는 자가 드물다.
효소제孝昭帝의 명철함으로 14세에 상관걸上官桀의 속임수를 알았으니 진실로 친정親政을 할 수 있었는데, 더구나 효선제孝宣帝는 19세에 즉위하여 총명하고 강의剛毅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알았음에랴.
그런데도 곽광霍光이 오랫동안 대권大權을 독차지해서 피하여 떠날 줄을 모르고 친당親黨들을 많이 두어 조정에 꽉 차게 해서, 인주人主로 하여금 위에서 분한 마음을 쌓게 하고 관리와 백성들로 하여금 아래에서 원한을 쌓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갈고 눈을 흘기며 때를 기다려 일어나게 하였으니, 자기 몸에 화를 면한 것만도 다행이다.
더구나 자손들이 교만함과 사치함으로 재촉함에 있어서랴.
그러나 지난번에 만일 효선제孝宣帝가 오로지 녹질祿秩(祿俸)과 상사賞賜로써 그 자손들을 부유하게 하여 큰 식읍食邑을 먹게 하고 조청朝請(朝謁)注+[釋義]은 뵘이다. 을 받들게 했더라면 또한 충분히 곽광霍光의 거룩한 에 보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정사를 맡기고 병권兵權을 주어서 일이 얽히고 허물이 쌓이자, 다시 제재制裁하고 빼앗음을 가해서 마침내 원망하고 두려워하여 간사한 꾀를 내게 하였으니, 어찌 다만 곽씨霍氏가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일 뿐이겠는가.
또한 효선제孝宣帝온양醞釀하여 이룬 것이다.注+[釋義]온양醞釀은 술을 빚는 것이다. 선제宣帝곽씨霍氏의 화를 미리 막지 않아 죄가 가득 차서 종족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게 하였으니, 이는 온양醞釀하고 차츰차츰 배어들어서 간사한 꾀를 이루었음을 말한 것이다.
옛날 투초鬪椒注+[頭註]자문子文의 아우이고 자량子良의 아들이다. 자문子文은 바로 투누오도鬪穀於菟이다. 나라에서 난을 일으키자, 장왕莊王이 그의 삼족三族을 멸하면서도 잠윤箴尹극황克黃을 사면하고 이르기를 ‘자문子文(鬪穀於菟)이 후손이 없으면 어떻게 선인善人들을 권면하겠는가.’ 하였으니,
곽현霍顯곽우霍禹곽운霍雲곽산霍山의 죄로 볼 때 비록 마땅히 삼족三族을 멸해야 하나 곽광霍光의 충성과 공훈은 제사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마침내 집안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게 하였으니,注+[釋義]는 씹음이니, 다시 살아남아서 음식을 씹어 먹는 자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효선제孝宣帝 또한 은혜가 적다고 할 것이다.”
북해태수北海太守 주읍朱邑치행治行(治績)이 제일이므로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대사농大司農이 되었다.
발해태수渤海太守 공수龔遂가 들어와 수형도위水衡都尉注+[頭註]수형도위水衡都尉상림원上林苑균수均輸어수御羞(御饌)와 금포禁圃를 관장하였다.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발해渤海좌군左郡우군右郡에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떼지어 일어나니, 이천석二千石(太守)이 사로잡아 제재하지 못하였다.
이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를 선발할 때에 승상과 어사가 공수龔遂를 추천하니, 공수龔遂를 임명하여 발해태수渤海太守로 삼고 불러서 묻기를 “어떻게 발해渤海를 다스려서 도적들을 그치게 할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바닷가가 도성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성왕聖王의 교화를 입지 못하여 백성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곤궁한데, 관리들이 구휼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폐하의 적자赤子들로 하여금 폐하의 병기를 훔쳐서 못 가운데에서 장난하게 한 것일 뿐이니,注+[釋義]使陛下赤子……潢池中耳:은 음이 황이니, 황지潢池는 웅덩이와 장마물이 괴어 있는 못이니, 어린아이들이 병기를 가지고 황지潢池 안에서 장난하는 것과 같아 평정하기가 어렵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나라 선종宣宗 때에 계산鷄山에서 도둑떼가 일어나자 황제가 토벌하라고 명하니, 최현崔鉉이 말하기를 “이들은 모두 폐하의 적자赤子인데, 기근飢饉과 추위에 핍박을 당하여 병기를 훔쳐 계곡 사이에서 장난을 친 것일 뿐이니, 대군大軍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으니, 또한 이 말과 같다. 지금 신으로 하여금 이들을 이기게 하고자 하십니까?
아니면 편안하게 하고자 하십니까?” 하였다.
이 말하기를 “현명하고 어진 사람을 선발하여 등용함은 본래 백성을 편안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공수龔遂가 말하기를 “혼란한(난을 일으킨) 백성을 다스림은 어지럽게 얽힌 노끈을 푸는 것과 같아서 급하게 옥죄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늦추어 준 뒤에야 다스릴 수 있으니, 신은 승상과 어사들이 우선 법문法文으로써 신을 구애하지 말고, 신이 일체 편의便宜대로 종사注+[通鑑要解]편의便宜는 일을 당했을 때에 무릇 지금에 편리하고 세상에 마땅한 것이 있어서 행할 수 있으면 즉시 행함을 이른다. 할 수 있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이 이를 허락하고 황금을 더 하사하였다.
공수龔遂가 역말을 타고 발해渤海의 경계에 이르자, 에서는 신임 태수가 부임해 온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동원하여 맞이하였으나 공수龔遂는 이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공문公文을 보내 속현屬縣에 신칙해서 도적들을 추격하고 체포하는 관리들을 모두 해산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호미와 낫注+[釋義]는 혹 로도 쓴다. 는 낫이다. 과 농기구를 잡고 있는 자는 모두 선량한 백성이니 관리는 죄를 묻지 말 것이요, 병기를 잡고 있는 자는 바로 적이다.” 하고는 마침내 한 대의 수레로 홀로 가서 에 이르렀다.
도적들이 공수龔遂교령敎令을 듣고는 즉시 해산하여 병기와 쇠뇌를 버리고 낫과 호미를 잡으니, 이에 모두 평정되었다.
공수龔遂가 마침내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 주고, 선량한 관리들을 선발하여 등용해서 백성들을 위안하고 잘 길렀다.
공수龔遂 지방의 풍속이 사치하여 말기末技를 좋아하고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몸소 검약함으로 솔선하여 백성들에게 농업과 잠업蠶業을 권장하고,
백성 중에 칼[刀]이나 검을 차거나 지니고 있는 자가 있으면 검을 팔아서 소를 사게 하고 칼을 팔아서 송아지를 사게 하며 말하기를 “어찌하여 소를 차고 다니고, 송아지를 차고 다니는가?” 하고는 위로하고 순행하니,
고을 안의 백성들이 모두 저축한 곡식이 있고 옥송獄訟이 종식되었다.
- 《한서漢書 공수전龔遂傳》에 나옴 -


역주
역주1 : 경
역주2 子文 卽鬪穀於菟也 : 子文은 楚나라의 명재상으로 姓은 鬪이고 이름은 穀於菟이니, 穀는 길러졌다는 뜻이고 於菟는 호랑이를 가리키는 바, 호랑이에게 물려가 호랑이 젖을 먹고 자랐다 하여 이렇게 이름했다 한다. 《論語》 〈公冶長〉에 “子張이 ‘令尹인 子文이 세 번 벼슬하여 令尹이 되었으나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 벼슬을 그만두었으나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없어서 옛날 자신이 맡아보던 令尹의 정사를 반드시 새로 부임해 온 令尹에게 일러 주었으니,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孔子께서 ‘충성스럽다.’고 대답하셨다.” 하였다.
역주3 莊王滅其族而赦箴尹克黃 : 箴尹은 諫官의 명칭이며 克黃은 子文의 손자이다. 楚나라에서 鬪椒를 죽일 때에 克黃은 마침 齊나라에 사신 갔었는데, 楚나라로 돌아와서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도성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하였으나 克黃은 “군주의 명령을 버릴 수 없다.” 하고 끝내 돌아와 복명한 다음 스스로 옥에 갇혔다. 鬪椒가 그의 從孫이므로 함께 죄를 받게 된 것이다. 莊王이 克黃을 사면해 준 일은 《春秋左傳》 宣公 4年條에 보인다.
역주4 : 황
역주5 今欲使臣勝之邪 將安之也 : 勝之는 위엄과 무력으로써 이겨 죽임을 이르고, 安之는 德化로써 어루만져 편안하게 함을 이른다.
역주6 鉏鉤 : 서구
동영상 재생
1 [을묘] 4년 8
동영상 재생
2 [을묘] 4년 145
동영상 재생
3 [을묘] 4년 185
동영상 재생
4 [을묘] 4년 340
동영상 재생
5 [을묘] 4년 1280
동영상 재생
6 [을묘] 4년 1435
동영상 재생
7 [을묘] 4년 1103

통감절요(3)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