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能親決庶務하고 委之左右하니 於是에 倖臣趙邕及外戚高肇等이 始用事하야 魏政이 浸衰러라
加蕭衍征東大將軍, 都督征討諸軍事하고 假黃鉞이러니
己巳에 衍이 以宣德太后令으로 追廢涪陵王하야 爲東昏侯하다
高帝
注+[頭註]蕭道成이라는 以功名之盛
으로 不容於昏暴之朝
하고 逆取而順守之
하니 亦一時之良主也
라
明帝
注+[頭註]蕭鸞이라는 自以得於不義
注+[頭註]弑君而立이라라하야 猜忌高, 武
注+[頭註]高帝道成及武帝賾이라子孫
하야 誅夷殆盡
注+[附註]甲戌年에 鸞이 殺鄱陽王鏘等七人하고 又殺衡陽王鉤等四人하고 又殺海陵王하며 乙亥年에 殺西陽王子明等三人하고 戊寅年에 殺河東王鉉等十人하니라하고 深戒東昏以先事制人
注+[頭註]明帝嘗戒東昏侯하야 使先事制人也라이러니 而大臣疑懼
하야 禍變相尋
하야 卒亡其國
이라
夫不務令德하고 而殺人以自安이면 自古以來로 未有能濟者也니라
蕭衍이 因伯氏被禍하야 起兵襄陽하야 遂移齊鼎이라
當是時하야 四海分裂에 人厭齊亂하니 雖欲不梁이나 其可得乎아
蓋高祖는 以弑逆得天下하고 明帝는 以猜忌殺宗親하고 東昏繼之에 淫虐尤甚하니 促其年代 有自來矣라
然則國祚脩斷이 雖係乎天이나 而實人自爲之니 有國家者는 尙鑑于玆어다
신사(501) - 제齊나라 화제和帝의 중흥中興 원년元年이고, 위魏나라 경명景明 2년이다. -
정월正月에 제齊나라 소연蕭衍이 양양襄陽을 출발하였다.
직접 여러 가지 정무政務를 결정하지 못하고 좌우에게 맡기니, 이에 총신인 조옹趙邕과 외척外戚인 고조高肇 등이 비로소 용사用事하여 위魏나라의 정사가 점점 쇠퇴하였다.
○ 3월에 제齊나라 남강왕南康王 소보융蕭寶融이 강릉江陵에서 즉위하였다.
소연蕭衍에게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도독정토제군사都督征討諸軍事를 가하고 가황월假黃鉞의 호칭을 더하였다.
기사일己巳日(12월 9일)에 소연蕭衍이 선덕태후宣德太后의 명령으로 부릉왕涪陵王을 추폐追廢하여 동혼후東昏侯로 삼았다.
이상 제齊나라는 일곱 군주에 합하여 24년이다.
“
고제高帝注+[頭註]고제高帝는 소도성蕭道成이다. 는 공명이 성대하였으므로 어둡고 포학한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여 역으로 취하고 순으로 지켰으니, 또한 한때의 어진 군주이다.
명제明帝注+[頭註]명제明帝는 소란蕭鸞이다. 는 스스로 의롭지 못하게
注+[頭註]의롭지 못하다는 것은 군주를 시해하고 즉위한 것이다. 천하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고제高帝와
무제武帝注+[頭註]高, 무武:고高, 무武는 고제高帝 소도성蕭道成과 무제武帝 소색蕭賾을 이른다. 의 자손들을 시기하여 주벌해서 거의 다 죽였으며,
注+[附註]갑술년(494)에는 소란蕭鸞이 파양왕鄱陽王 소장蕭鏘 등 7명을 죽이고, 또 형양왕衡陽王 소구蕭鉤 등 4명을 죽이고, 또 해릉왕海陵王을 죽였으며, 을해년(495)에는 서양왕西陽王 소자명蕭子明 등 3명을 죽이고, 무인년(498)에는 하동왕河東王 소현蕭鉉 등 10명을 죽였다. 동혼후東昏侯에게 먼저 손을 써서 상대를 제압하라고 경계하였는데,
注+[頭註]명제明帝는 일찍이 동혼후東昏侯에게 먼저 손을 써서 상대를 제압하라고 경계하였다. 대신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화와 변란이 서로 이어져서 끝내 그 나라를 잃었다.
훌륭한 덕德을 힘쓰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스스로 편안하다고 한다면 예로부터 성공한 자가 있지 않았다.”
“소연蕭衍은 백씨伯氏가 화禍를 입음으로 인하여 양양襄陽에서 군대를 일으켜 마침내 제齊나라의 정권을 옮겼다.
이때를 당하여 온 천하가 분열되자 사람들이 제齊나라의 혼란함을 싫어하였으니, 비록 양梁나라가 되지 않고자 하나 어찌 될 수 있었겠는가.
제齊나라의 국운國運이 길지 못하였음은 어째서인가?
고조高祖는 시역弑逆으로 천하를 얻었고, 명제明帝는 시기심으로 종친宗親들을 죽였으며, 동혼후東昏侯는 이 뒤를 계승하여 음탕하고 잔학함이 더욱 심하였으니, 국가의 운명을 재촉한 것이 유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운國運이 길고 끊김은 비록 천운天運에 달려 있기는 하나 실로 사람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 국가를 소유한 자는 부디 이를 거울삼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