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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7)

통감절요(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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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十二載
安祿山 以林甫狡猾踰己 畏服注+[附註]祿山 見林甫 雖盛冬이나 必汗하며 在范陽 其下自長安來하면 必問曰 十郞何言고하야 得美言則喜하고 或云 語安大夫하야 須好點檢이라하면 則曰 噫噫 我死矣라하니라 러니 及楊國忠爲相 祿山 視之蔑如하니 由是 有隙이라
國忠 屢言 祿山有反狀이라호되 不聽이어늘
國忠 以隴右節度使哥舒翰注+[頭註] 虜突騎施別部之號 後因爲氏焉하니라 與祿山不協이라하야 欲厚結翰하야 與共排祿山하야 奏以翰兼河西節度使하니
閭閻相望하고 桑麻翳野하니 天下 稱富庶者 無如隴右
每遣使入奏 常乘白槖駝하고 日馳五百里러라
〈出楊國忠等傳〉


천보天寶 12년(계사 753)
안녹산安祿山이임보李林甫가 자기보다 더 교활하다고 여겼으므로 그를 두려워하고 복종했었는데,注+[附註]안녹산安祿山이임보李林甫를 뵐 적에 비록 한겨울이라도 반드시 땀을 흘렸으며, 범양范陽에 있을 적에 그 부하가 장안에서 오면 반드시 묻기를 “십랑十郞(李林甫)이 무슨 말씀을 하던가?”라고 하여, 좋은 말을 들으면 기뻐하고, 혹자가 이르기를 “안대부安大夫에게 말하여 부디 잘 점검하라고 했습니다.”라고 하면 즉시 말하기를 “아! 나는 죽었구나.” 하였다. 양국충楊國忠이 정승이 되자 안녹산安祿山양국충楊國忠을 무시하니, 이로 인해 틈이 생겼다.
양국충楊國忠에게 안녹산安祿山이 배반하려는 형상이 있다고 여러번 아뢰었으나 이 듣지 않았다.
양국충楊國忠농우절도사隴右節度使가서한哥舒翰注+[頭註]가서哥舒는 오랑캐인 돌기시突騎施별부別部의 칭호이니, 뒤에 이로 인해 가서哥舒성씨姓氏로 삼았다. 안녹산安祿山과 사이가 좋지 않다 하여 가서한哥舒翰과 깊이 결탁해서 그와 함께 안녹산安祿山을 배척하고자 하여 에게 아뢰어서 가서한哥舒翰에게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이때에 중국이 강성하여 장안성長安城안원문安遠門으로부터 서쪽으로 당나라 국경 끝까지가 1만 2천 리였다.
여염집들이 서로 이어지고 뽕나무와 삼밭이 들에 가득하니, 천하에 백성이 많고 살림이 넉넉한 곳을 일컬을 적에 농우隴右만 한 곳이 없었다.
가서한哥舒翰이 매번 사신을 보내어 들어와 아뢸 적마다 항상 흰 낙타를 타고 하루에 500리를 달리곤 하였다.
- 《당서唐書양국충전楊國忠傳》 등에 나옴 -


역주
역주1 哥舒 : 複姓이다. 唐나라 때 突騎施에 哥舒部가 있어 대대로 安西에 살았고, 또한 部落의 이름을 姓氏로 삼았다.
역주2 自安遠門 西盡唐境 凡萬二千里 : 長安城 서쪽의 첫 번째 관문이 安遠門이니, 본래 隋나라의 開遠門이다. 서쪽으로 당나라 국경 끝까지 1만 2천 리라는 것은 西域의 여러 屬國까지 아울러 말한 것이다.

통감절요(7) 책은 2022.01.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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