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申] 〈梁大通二年이요 魏孝昌四요 敬宗孝莊帝子攸永安元年이라〉
正月
에 魏太后再臨朝
注+[附註]太后胡氏는 肅宗詡之母니 而武始伯國珍之女也라 頗事粧飾하고 穢德彰聞이라 太傅(靑)[淸]河王懌이 美風儀러니 胡太后逼而幸之라 江陽王繼子元叉 爲侍中, 領軍將軍하고 叉妻胡氏爲女侍中하니 叉恃寵驕恣어늘 懌이 每裁抑之하니 叉怨之하다 庚子年에 遂殺懌하고 幽太后于北宮하고 詐爲太后詔하야 稱有疾하야 還政魏主러니 乙巳年에 太后復臨朝하야 誅元叉하니라以來
로 嬖倖用事하니 政事縱하고 威恩不立
注+[附註]羽林, 虎賁作亂하야 殺將軍張彛之子仲瑀어늘 只誅八人하고 其餘는 不復窮治하다 高歡見之하고 還家하야 傾財結客曰 宿衛焚大臣之第어늘 朝廷懼而不問하니 事可知矣라하니라하야 盜賊蜂起
注+[釋義]言盜賊之衆이 如蜂之飛起也라하고 封疆日
注+[頭註]日蹙은 謂秦, 隴以西와 冀, 幷以北은 皆爲盜區요 淮汝淮泗之間은 皆爲梁所侵也라이라
是時
에 討虜大都督爾朱榮
注+[釋義]爾朱는 複姓이라 其先은 이니 代爲酋帥하야 居爾朱川일새 因以爲氏하니라[頭註]爾朱榮은 本東胡種이니 高歡妃父라이 兵勢彊盛
하니 魏朝憚之
라
高歡
注+[頭註]渤海蓨人이라 字賀六渾이니 是爲北齊神武帝라이 往歸榮
한대 榮曰 但言爾意
하라
歡曰 今天子闇弱
하고 太后淫亂
하야 注+[釋義]孼者는 猶木之有蘖生也라擅命
하고 朝政不行
하니 以明公雄武
로 乘時奮發
이면 霸業注+[附註]霸는 把也니 把持諸侯之權이요 又把持天子之政이라 或作伯하니 蓋取牧伯長諸侯之義러니 後人이 恐與侯伯字相混이라 故借用霸字하야 以別之하니라을 可擧鞭而成하리이다
魏之中葉
엔 以門地
注+[頭註]家門地位라取士
러니 及其衰也
하야는 以停年
注+[頭註]卽停解日月이니 見上己亥年이라用人
이라
於是에 英雄散逸하고 才智不用하니 思有以振而發之로되 而天下始多故矣라
魏肅宗
注+[頭註]明帝詡라이 亦惡鄭儼, 徐紇等
호되 逼於太后
하야 不能去
라
榮이 以高歡爲前鋒하야 行至上黨하니 魏主復以私詔止之하다
儼, 紇이 恐禍及己하야 陰與太后로 謀酖魏主하다
二月癸丑
에 魏主暴殂
注+[頭註]暴은 急也라어늘 太后改立故臨
注+[釋義]隴西邑이니 屬後魏라王寶暉世子
注+[頭註]文帝宏之孫이니 太后欲久專政故로 利其幼而立之라하니 釗始生三歲
라
爾朱榮
이 聞之
하고 與元天穆
注+[頭註]幷州刺史라議
하야 以彭城武宣王
注+[頭註]勰은 顯祖獻文帝弘之子라이 有忠勳
하고 其子長樂王子攸 素有令望
이라하야 欲立之
하다
四月
에 榮
이 濟河
하니 百官
이 奉璽綬
하고 備法駕
하야 迎敬宗
注+[原註]名子攸니 獻文之孫이라 卽帝位하니 是爲敬宗孝莊皇帝라於河橋
注+[頭註]榮이 沈太后胡氏及幼主釗于河하고 殺王公以下二千人하야 自爲太原王이라하다
魏氏之亂이 始於世宗奉佛하야 政事不修하고 重以肅宗幼弱하고 胡后稱制하야 穢德彰聞이요
元澄, 雍, 懌
注+[頭註]司徒任城王澄과 太保高陽王雍이 同總國事라 懌은 太傅淸河王也라은 才薄力弱
하고 劉騰, 元叉
注+[頭註]劉騰은 이니 後爲司空이요 元叉는 見上再臨朝注라는 擅權黷貨
하야 以召六鎭
注+[頭註]時에 爾朱榮爲車騎將軍으로 幷, 肆, 汾, 廣, 恒, 雲六州討虜大都督이라之兵
이라
雖然이나 其間에 非無忠謀至計로 排難解紛者어늘 而朝廷忽焉하야 如元匡, 崔(洸)[光], 袁飜, 李崇, 張普惠, 薛(淑)[琡], 元孚, 元(深)[諶], 元順, 元(纂)[贊], 辛雄, 路思令, 楊椿, 源子(邕)[雍]之言을 皆不聽也라
然則非爾朱榮, 高歡이 能爲魏毒也요 魏自亡爾니라
魏北海王顥
注+[頭註]於帝爲從兄弟라來奔
이어늘 梁主以顥爲魏王
하고 遣陳慶之
하야 將兵送之還北
하다
무신(528) - 양梁나라 대통大通 2년이고, 위魏나라 효창孝昌 4년이고, 경종敬宗 효장제孝莊帝 원자유元子攸의 영안永安 원년元年이다. -
정월에
위魏나라
호태후胡太后가 다시 조정에
임어臨御注+[附註]태후太后 호씨胡氏는 숙종肅宗 원후元詡의 모후母后이니, 무시백武始伯 호국진胡國珍의 딸이다.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일삼았으며 추문이 자자하였다. 태부太傅인 청하왕淸河王 원역元懌이 풍채가 아름다웠는데, 호태후胡太后가 강제로 핍박하여 총애하였다. 강양왕江陽王 원계元繼의 아들인 원차元叉는 시중侍中‧영군장군領軍將軍이 되고 원차元叉의 아내인 호씨胡氏는 여시중女侍中이 되었는데, 원차元叉가 총애를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자 원역元懌이 그때마다 제재하고 억제하니 원차元叉가 그를 원망하였다. 경자년庚子年(520)에 원차元叉가 마침내 원역元懌을 죽이고 태후太后를 북궁北宮에 유폐시키고, 거짓으로 태후太后의 조서詔書를 만들어 병이 있다고 칭하고서 정권을 위주魏主에게 돌려주었는데, 을사년乙巳年(525)에 태후太后가 다시 조정에 임어하여 원차元叉를 죽였다.한 뒤로 총애하는
소인小人들이
용사用事하니, 정사가 해이하고 조정의 위엄과 은혜가 서지 못하여
注+[附註]우림군羽林軍과 호분위虎賁衛가 난을 일으켜서 장군將軍 장이張彛의 아들 장중우張仲瑀를 죽였는데, 호태후胡太后가 다만 8명만 주벌하고 그 외의 사람은 더 이상 죄를 다스리지 않았다. 고환高歡이 이것을 보고 집에 돌아가 재물을 털어 문객과 교분을 맺으며 말하기를 “숙위병宿衛兵이 대신大臣의 집을 불태웠는데도 조정에서 두려워하여 죄를 묻지 못하니, 일을 알 만하다.” 하였다.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나고
注+[釋義]도적의 무리가 벌이 떼 지어 일어나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국경이 나날이 축소되었다.
注+[頭註]나날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진秦‧농隴 이서와 기주冀州‧병주幷州 이북은 모두 도적들의 소굴이 되고, 회淮‧여汝와 회淮‧사泗 지역은 모두 양梁나라에게 침식당하였음을 이른다.
이때
토로대도독討虜大都督 이주영爾朱榮注+[釋義]爾朱는 복성複姓이다. 그 선조는 계호契胡(긱호, 글호) 부락 사람이니, 대대로 추장酋長이 되어 이주천爾朱川에 거주하였으므로 인하여 성씨姓氏로 삼은 것이다.[頭註]爾朱榮은 본래 동쪽 오랑캐 종족이니, 고환高歡의 후비后妃의 아버지이다. 의 군세가 강성하니,
위魏나라 조정에서 그를 두려워하였다.
고환高歡注+[頭註]고환高歡은 발해渤海 수현蓨縣 사람이다. 자字가 하육혼賀六渾이니, 이가 바로 북제北齊의 신무제神武帝이다. 이
이주영爾朱榮을 찾아가자,
이주영爾朱榮이 말하기를 “다만 너의 뜻을 말해 보라.” 하였다.
고환高歡이 말하기를 “지금
천자天子는 어리석고 약하며
태후太后는 음란하여 총애하는
소인小人들
注+[釋義]얼孼은 나무에 움이 싹트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조정의 정사가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명공明公의 뛰어난
무략武略을 가지고 이러한 기회를 틈타 분발한다면 채찍만 들고도
패업霸業注+[附註]패霸는 손으로 쥐는 것이니, 제후의 권력을 쥐고 또 천자의 정사를 거머쥐는 것이다. 혹은 백伯으로 쓰니, 목백牧伯이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는 뜻을 취한 것인데, 후인들이 후백侯伯이라는 글자와 혼동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패자霸字를 사용하여 구별하였다. 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주영爾朱榮이 크게 기뻐하여 이로부터 늘 군사 작전에 고환高歡을 참여시켰다.
“
위魏나라 중엽에는
문지門地(門閥)
注+[頭註]문지門地는 가문家門의 지위地位이다. 로써 선비를 뽑았는데, 쇠퇴함에 미쳐서는 재직한 연수
注+[頭註]정년停年은 곧 직임을 맡은 세월이니, 정해停解는 앞의 기해년조己亥年條(519)에 보인다. 로써 사람을 등용하였다.
이에 영웅들이 흩어지고 재주 있는 자와 지혜로운 자가 등용되지 못하니, 진작하여 분발하게 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천하에 비로소 변고가 많게 되었다.
지난번에 만일 위魏나라 조정에서 인재를 거두어 등용했더라면 2백 년의 기업基業이 어찌 쉽게 기울어졌겠는가.”
위魏나라
숙종肅宗注+[頭註]숙종肅宗은 명제明帝 원후元詡이다. 이 또한
정엄鄭儼과
서흘徐紇 등을 미워하였으나
태후太后에게 견제당하여 이들을 제거하지 못하였다.
위주魏主가 은밀히 이주영爾朱榮에게 명령을 내려 군대를 일으켜서 서울로 향하게 하여 태후太后를 협박하고자 하였다.
이주영爾朱榮이 고환高歡을 선봉先鋒으로 삼아 행군하여 상당上黨에 이르자, 위주魏主가 다시 은밀히 명령을 내려 중지하게 하였다.
정엄鄭儼과 서흘徐紇이 자신들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은밀히 태후太后와 함께 위주魏主를 독살할 것을 모의하였다.
2월
계축일癸丑日(25일)에
위주魏主가 갑자기
注+[頭註]폭暴은 갑자기이다. 죽자,
태후太后가 다시 죽은
임조臨洮注+[釋義]임조臨洮는 농서隴西의 고을이니, 후위後魏에 속한다. 王
원보휘元寶暉의
세자世子인
원쇠元釗注+[頭註]원쇠元釗는 문제文帝 원굉元宏의 손자이니, 태후太后가 정사를 오랫동안 전횡하고자 하였으므로 원쇠元釗의 나이가 어린 것을 이롭게 여겨 세운 것이다. 를 세우니,
원쇠元釗의 나이 세 살이었다.
이주영爾朱榮이 이 말을 듣고
원천목元天穆注+[頭註]원천목元天穆은 병주자사幷州刺史이다. 과 의논하여
팽성彭城 무선왕武宣王 원협元勰注+[頭註]원협元勰은 현조顯祖 헌문제獻文帝 원홍元弘의 아들이다. 이 충성을 다해 세운 공훈이 있고 그 아들
장악왕長樂王 원자유元子攸가 평소에 훌륭한 명망이 있다 하여 그를 세우고자 하였다.
4월에
이주영爾朱榮이
황하黃河를 건너오니,
백관百官이 옥새와 인끈을 받들고
법가法駕를 갖추어서
경종敬宗(元子攸)
注+[原註]경종敬宗은 이름이 자유子攸이니 헌문제獻文帝의 손자이다.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바로 경종敬宗 효장황제孝莊皇帝이다. 을
하교河橋에서 맞이하였다.
注+[頭註]이주영爾朱榮이 태후太后 호씨胡氏와 어린 군주인 원쇠元釗를 황하에 빠뜨려 죽이고 왕공王公 이하 2천 명을 죽이고서 스스로 태원왕太原王이 되었다.
“위魏나라의 혼란은 세종世宗이 불법佛法을 신봉하여 정사가 닦여지지 않은 데에서 비롯되었고, 다시 숙종肅宗이 어리고 약하며 호후胡后가 조정에 임어臨御하여 제制를 칭해서 추문이 드러난 데에서 더욱 심해졌다.
원징元澄‧
원옹元雍‧
원역元懌注+[頭註]사도司徒 임성왕任城王 원징元澄과 태보太保 고양왕高陽王 원옹元雍이 함께 국사國事를 총괄하였다. 원역元懌은 태부太傅 청하왕淸河王이다. 은 재주가 부족하고 힘이 약하였으며,
유등劉騰과
원차元叉注+[頭註]유등劉騰은 위장군衛將軍이니 뒤에 사공司空이 되었고, 원차元叉는 앞의 무신년戊申年(528) ‘위태후재림조魏太后再臨朝’의 주注에 보인다. 는 권력을 독점하고 재물을 탐하여
이주영爾朱榮의
육진六鎭注+[頭註]당시에 이주영爾朱榮은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병주幷州‧사주肆州‧분주汾州‧광주廣州‧항주恒州‧운주雲州 등 6주州의 토로대도독討虜大都督이었다. 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 사이에 충성스러운 모의와 지극한 계책으로 국난國難을 물리치고 분란紛亂을 해결할 수 있는 자가 없지 않았는데, 조정에서 이들을 홀대하여 원광元匡‧최광崔光‧원번袁飜‧이숭李崇‧장보혜張普惠‧설숙薛琡‧원부元孚‧원심元諶‧원순元順‧원찬元贊‧신웅辛雄‧노사령路思令‧양춘楊椿‧원자옹源子雍 같은 사람들의 말을 모두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주영爾朱榮과 고환高歡이 위魏나라의 해독이 된 것이 아니라, 위魏나라가 스스로 망하였을 뿐이다.”
위魏나라
북해왕北海王 원호元顥注+[頭註]북해왕北海王 원호元顥는 황제에게 종형제從兄弟가 된다. 가
양梁나라로 도망오자,
양주梁主가
원호元顥를
위왕魏王으로 삼고
진경지陳慶之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호송하여 북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