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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4)

통감절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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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卯]十六年이라
馬超, 韓遂等十部皆反하야 據潼關注+[釋義]在華州華陰縣이라 杜氏通典曰 潼關 元名衝關이니 言河自龍門南流하야 〈衝〉激華山而東也 后因關之西一里有潼水하야 遂名潼關하니라이어늘 操留子丕守鄴하고 自將擊超하야 大破之하니 遂, 超奔涼州하다
○ 法正注+[頭註]姓名이라 爲劉璋軍議校尉注+[通鑑要解]使之議軍事러니 璋不能用하니 邑邑注+[釋義]本作悒悒하니 不安貌不得志하다
益州別駕張松 與正善이러니 自負其才하야 忖璋不足以有爲하고 勸璋結劉備하야 以討張魯注+[頭註]張魯據關中하니 卽米賊也하니 璋曰 誰可使者
乃擧正하니 璋然之하야 遣正將四千人하야 迎備어늘
主簿黃權호되 不聽이러라
法正 至荊州하야 陰說備하야 取益州한대 備疑未決이러니
龐統曰 益州 土沃財富하니 大業 可成이니이다
備曰 今指與吾爲水火者 曹操也
操以急이어든 吾以寬하고 操以暴어든 吾以仁하고 操以譎이어든 吾以忠하야
每與操反이라야 事乃可成耳어늘 今以小利而失信義於天下 奈何
統曰 逆取順守 古人所貴
若事定之後 封以大國이면 何負於信이리잇고
今日不取 終爲人利耳리이다
備以爲然하야 乃留諸葛亮, 關羽等하야 守荊州하고 備將步卒數萬人하고 入益州하다
備至巴郡하니 太守嚴顔 拊心歎曰 此所謂獨坐窮山하야 放虎自衛者也로다
備至注+[釋義]縣名이니 屬廣東이라 唐以前稱涪者 卽今綿州也 三國 漢立涪陵郡하고 唐置涪州하니 去成都三百五十里하니 往會之하고 增備兵하고 厚加資給하야 使擊張魯러니
備北到葭萌注+[釋義]縣名이니 屬廣東이라 括地志 苴侯都葭萌하니 故城 在今利州益昌縣南五十里하니라하야 未卽討魯하고 厚樹恩德하야 以收衆心이러라


건안建安 16년(신묘 211)
마초馬超한수韓遂 등 10가 모두 반란하여 동관潼關注+[釋義]동관潼關화주華州 화음현華陰縣에 있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이르기를 “동관潼關은 원래 이름이 충관衝關이니, 황하黃河용문龍門으로부터 남쪽으로 흐르다가 화산華山에 부딪쳐서 동쪽으로 나옴을 말한 것이다. 뒤에 관문關門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동수潼水가 있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동관潼關이라 이름했다.” 하였다. 을 점거하자, 조조曹操가 아들 조비曹丕를 남겨 두어 업성鄴城을 지키게 하고,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마초馬超를 공격해서 대파하니, 한수韓遂마초馬超양주涼州로 달아났다.
법정法正注+[頭註]법정法正성명姓名이다. 유장劉璋군의교위軍議校尉注+[通鑑要解]군의교위軍議校尉는 그로 하여금 군대의 일을 의논하게 한 것이다. 가 되었는데, 유장劉璋이 그의 계책을 쓰지 못하니 답답하여注+[釋義]읍읍邑邑은 본래 읍읍悒悒으로 되어 있으니, 불안해하는 모양이다. 뜻을 얻지 못하였다.
익주별가益州別駕 장송張松법정法正과 서로 친하였는데, 자신의 재능을 자부하여 유장劉璋이 훌륭한 일을 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는 유장劉璋에게 권하여 유비劉備와 결탁해서 장로張魯를 토벌하라注+[頭註]장로張魯관중關中을 점거하였으니, 곧 오두미적五斗米賊이다. 하니, 유장劉璋이 말하기를 “누가 사신으로 보낼 만한 자인가?” 하였다.
장송張松이 마침내 법정法正을 천거하니, 유장劉璋이 그 말을 옳게 여겨서 법정法正을 보내어 4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유비劉備를 맞이하게 하였다.
주부主簿 황권黃權이 이를 간하였으나 유장劉璋이 듣지 않았다.
법정法正형주荊州에 이르러서 은밀히 유비劉備를 설득하여 익주益州를 취하게 하니, 유비劉備가 의심하고 결정하지 못하였다.
방통龐統이 말하기를 “익주益州는 토지가 비옥하고 재물이 풍부하니,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였다.
유비劉備가 말하기를 “지금 나와 더불어 물과 불처럼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자는 조조曹操이다.
조조曹操가 급함으로써 하면 나는 너그러움으로써 대응하고, 조조曹操가 포악함으로써 하면 나는 으로써 대응하고, 조조曹操가 속임수를 사용하면 나는 충성으로 대응하여
매번 조조曹操와 반대로 하여야 일을 비로소 이룰 수 있을 터인데, 이제 작은 이익 때문에 천하에 신의를 잃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방통龐統이 말하기를 “으로 취하고 으로 지킴은 옛사람들이 귀하게 여긴 바입니다.
만약 일이 안정된 뒤에 유장劉璋을 큰 나라에 봉해 주면 어찌 신의를 저버리겠습니까?
오늘날 익주益州를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의 이익이 될 뿐입니다.” 하였다.
유비劉備가 그의 말을 옳게 여겨서 마침내 제갈량諸葛亮관우關羽 등을 남겨 두어 형주荊州를 지키게 하고, 유비劉備가 직접 보병步兵 수만 명을 거느리고 익주益州로 쳐들어갔다.
유비劉備파군巴郡에 이르니, 태수太守 엄안嚴顔이 가슴을 치며 한탄하기를 “이는 이른바 홀로 깊은 산속에 앉아서 호랑이를 풀어놓아 스스로 호위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유비劉備부현涪縣注+[釋義]의 이름이다. 광동廣東에 속하였다. 나라 이전에 라고 칭한 것은 바로 지금의 면주綿州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촉한蜀漢부릉군涪陵郡을 세웠고 나라 때 부주涪州를 설치하였으니, 성도成都와 350리 떨어져 있다. 에 이르니, 유장劉璋은 가서 만나 보고는 유비劉備에게 병력을 보태 주고 물자를 넉넉히 지급하여 장로張魯를 공격하게 하였다.
유비劉備는 북쪽으로 가맹현葭萌縣注+[釋義]가맹葭萌의 이름이니 광동廣東에 속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저후苴侯가맹葭萌에 도읍하였으니, 옛 성이 지금의 이주利州 익창현益昌縣 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에 이르러서 즉시 장로張魯를 토벌하지 않고 은덕恩德을 널리 베풀어 민심民心을 수습하였다.


역주
역주1 : 부

통감절요(4)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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