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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4)

통감절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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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戌]四年이라
在位 頗能推進賢士
弘農楊震 孤貧好學하야 通達博覽하니 諸儒爲之語曰 關西孔子 楊伯起注+[頭註]라하야늘 聞而辟之하다
累遷荊州刺史, 東萊太守하다
當之郡할새 道經昌邑이러니 故所擧荊州茂才王密 爲昌邑令하야 夜懷金十斤하고 以遺震이어늘
震曰 故人 知君이어늘 君不知故人 何也 密曰 暮夜 無知者니이다
震曰 天知, 地知, 我知, 子知하니 何謂無知者오하니 愧而出하니라
公廉하야 子孫 常素食注+[頭註]麤飯이니 凡草菜可食者 通名爲蔬步行이어늘
故舊或欲令爲開産業注+[釋義]王氏曰 欲令楊震自爲開置産業이라한대 震不肯曰 使後世 稱爲淸白吏子孫하야 以此遺之 不亦厚乎
[史略 史評]熊氏曰
君子之德 明不欺天하고 幽不欺神하고 內不欺心하고 外不欺人하나니 持行於昭昭之際하고 昧心於冥冥之中 可乎
令以利來어늘 震以義責이라
懷慙而退也하니라
[史略 史評]胡氏曰
安帝三公 無出震之右者
이나 人臣以道事君하야 合則留하고 違則去어늘 以三公之尊으로 兩奏一乳媼而不能動하니 宜去久矣로되
至是極言하야 하니
忠則忠矣 然其燭理不明하고 處義不精하니 亦不足稱也니라
○ 朝歌賊注+[釋義]朝歌 河內邑也 康叔所封之地 姓也等 數千人 攻殺長吏하고 屯聚連年하니 州郡 不能禁이라
鄧騭 惡虞하야 以詡爲朝歌長하니 故舊皆弔之注+[通鑑要解]弔之 謂其將得罪也어늘 詡笑曰 事不避難 臣之職也
不遇盤根錯節이면 無以別利器注+[釋義]樹根之盤互 木節之交錯 非堅利之器 不能治之 此乃吾立功之秋也라하다
及到官 設三科하야 以募求壯士할새 自掾吏以下 各擧所知하니 其攻劫者爲上하고 傷人偸盜者次之하고 不事家業者爲下하야 收得百餘人하다
詡爲饗會하야其罪注+[釋義] 赦也[通鑑要解]此三等人 皆惡少年負宿罪者也 悉貰之하야 使入賊爲間이라하고 使入賊中하야 誘令劫掠하고 乃伏兵以待之하야 遂殺賊數百人하고
又潛遣貧人能縫者하야 傭作賊衣호되 以采線으로 縫其裾하야 有出市里者어든 吏輒禽之하니 由是駭散하야 咸稱神明하니
縣境 皆平이러라


영초永初 4년(경술 110)
등즐鄧騭이 지위에 있자 자못 어진 선비를 추천하여 등용하였다.
홍농弘農양진楊震이 외롭고 가난하였으나 학문을 좋아하여 통달하고 박람하니, 여러 선비들이 말하기를 “관서關西공자孔子양백기楊伯起注+[頭註]백기伯起양진楊震이다. 이다.”라고 하였는데, 등즐鄧騭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등용하였다.
양진楊震이 여러 번 승진하여 형주자사荊州刺史동래태수東萊太守가 되었다.
일찍이 으로 부임할 때에 길이 창읍昌邑을 경유하였는데, 옛날에 천거했던 형주荊州무재茂才 왕밀王密창읍령昌邑令이 되어 밤에 금 10근을 품고 와서 양진楊震에게 주었다.
양진楊震이 말하기를 “친구인 나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가 나를 알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왕밀王密이 대답하기를 “늦은 밤이어서 아는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양진楊震이 말하기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는 자가 없다고 말하는가?” 하자, 왕밀王密이 부끄러워 그대로 나갔다.
양진楊震은 성품이 공정하고 청렴하여 자손들이 항상 소식素食注+[頭註]소식素食은 거친 밥이니, 먹을 수 있는 모든 풀과 나물을 통틀어 라고 이름한다. 을 하고 도보로 다녔다.
친구들이 혹 자손들을 위하여 산업産業을 장만하게 하려고 하자,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양진楊震으로 하여금 스스로 산업産業을 마련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양진楊震은 이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후세로 하여금 청백리淸白吏의 자손이라고 칭하게 하여 이것을 후손에게 물려준다면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史略 사평史評]熊氏가 말하였다.
군자君子은 밝은 곳에서는 하늘을 속이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는 을 속이지 않으며, 안으로는 마음을 속이지 않고 밖으로는 남을 속이지 않으니, 밝게 드러난 데서는 훌륭한 행실을 지키고 어두운 데서는 마음을 속이는 것이 옳겠는가.
창읍령昌邑令은 이익을 가지고 왔는데 양진楊震의리義理로써 책하였다.
이 때문에 창읍령昌邑令이 부끄러운 마음을 품고 물러간 것이다.”
[史略 사평史評]胡氏가 말하였다.
안제安帝삼공三公 중에 양진楊震보다 더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신하는 로써 군주를 섬겨서 가 맞으면 머물고 어긋나면 떠나가야 하는데, 양진楊震은 존귀한 삼공三公으로서 한 유모乳母에 대해 두 번이나 아뢰었으나 군주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으니, 떠나야 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지극히 말하여 마침내 몸을 죽이는 화를 취하였다.
충성스럽기는 충성스러우나 이치를 봄이 밝지 못하고 에 처함이 정밀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조가朝歌의 도적인 영계甯季注+[釋義]조가朝歌하내河內의 고을이니, 나라 때 강숙康叔을 봉한 곳이다. 이다. 등 수천 명이 장리長吏(守令)를 공격하여 죽이고 무리 지어 한데 모여서 수년간 을 계속하니, 주군州郡에서 금하지 못하였다.
등즐鄧騭우후虞詡를 미워하여 우후虞詡조가朝歌으로 삼으니, 친구들이 모두 위문하였으나注+[通鑑要解]친구들이 모두 위문한 것은 우후虞詡가 장차 죄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우후虞詡는 웃으며 말하기를 “국가의 일에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다.
서린 뿌리와 뒤엉킨 마디를 만나지 않으면 예리한 연장을 분별할 수가 없으니,注+[釋義]不遇盤根錯節 무이별이기無以別利器:나무의 뿌리가 서린 것과 나무의 마디가 뒤엉킨 것은 견고하고 예리한 연장이 아니면 다스리지 못한다. 이는 바로 내가 공을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하였다.
관청에 부임하자, 세 조목을 마련하여 장사壯士를 모집하여 구할 때에 연리掾吏 이하로부터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니, 사람을 공격하여 겁탈한 자를 상등上等으로 삼고, 사람을 부상시키거나 도둑질한 자를 다음으로 삼고, 가업家業에 일삼지 않은 자를 하등下等으로 삼아서 백여 명을 거두어 얻었다.
우후虞詡가 연향을 베풀어 그들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고도注+[釋義]貰는 용서함이다. [通鑑要解]이 세 등급의 사람은 모두 악한 소년少年으로서 예전에 죄를 지은 자들이니, 이들을 모두 용서해 주고 도적 속으로 들어가 반간反間 노릇을 하게 한 것이다. 적 속으로 들어가서 적들을 유인하여 위협하고 노략질하게 하고는 군대를 매복시켜 기다렸다가 마침내 적 수백 명을 죽였다.
또 가난한 사람 중에 옷을 잘 꿰매는 자를 몰래 보내어 삯바느질을 하여 적의 옷을 만들되 채색 실로 옷자락을 꿰매게 하여 이 옷을 입고 시장 거리로 나오는 자가 있으면 관리가 그때마다 사로잡으니, 적들이 이로 말미암아 놀라 흩어져 모두 신명神明하다고 일컬었다.
그리하여 의 경내가 모두 평안하였다.


역주
역주1 : 즐
역주2 素食 : 고기를 먹지 않음을 이르는 바, 疏食로도 쓴다. 食는 音이 사이다.
역주3 或欲令爲開産業 : 楊震으로 하여금 財貨와 田宅 따위를 장만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역주4 遂取殺身之禍 : 安帝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太后가 조정에 臨御하였는데, 太后가 죽은 뒤에 오직 乳母인 王聖의 말만 듣고 환관의 참소를 따랐다. 楊震이 太尉로 있으면서 大鴻臚 耿寶, 中常侍 樊豐 등의 간악한 행위를 진언하였다가, 이들의 참소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本郡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여러 아들과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奸臣의 교활한 행위를 미워하면서도 목을 베지 못하고 임금에게 총애받는 여인의 문란한 짓을 금지하지 못했는데 무슨 면목으로 日月을 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酖毒을 마시고 죽었다. 順帝가 즉위하자 문인들이 伸寃하고 조정이 모두 그의 충성을 칭송하였으므로 조서를 내려 禮葬하게 하였다. 장사지내기 10여 일 전에 한 길이 넘는 큰 새가 楊震의 喪柩 앞에 앉아서 슬피 울며 눈물을 흘려 땅을 적셨다. 그 새는 장사가 끝나자 날아갔는데, 이에 사람들이 묘소에 石鳥像을 세웠다.
역주5 : 녕
역주6 : 허
역주7 : 세

통감절요(4)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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