魏賀拔岳
注+[頭註]勝之弟也니 時爲關中行臺라이 遣使詣晉陽
하야 與歡
約爲兄弟注+[頭註]謂勝與岳也라어늘 司馬宇文泰
注+[附註]代郡武川人이라 其先은 出自炎帝하니 炎帝子孫이 遁居朔野하다 其後에 有葛烏(老)[免]者 有雄略하니 鮮卑奉以爲主하야 世爲大人이라 裔孫普回 得玉璽하니 文曰 皇帝璽라하니 普回以爲天授라 其俗謂天子曰宇文이라 故로 國號宇文하고 幷以爲氏하다 泰는 乃普回十四世孫也라 追諡德皇帝하니 (耽)[肱]之少子也라 世子覺이 簒西魏하니 是謂後周라自請詣晉陽
하야 以觀歡之爲人
하다
歡이 奇其狀貌하야 曰 此兒視瞻非常이라하고 將留之러니 泰固求復命이어늘 歡이 旣遣而悔之하다
泰至長安하야 謂岳曰 高歡이 所以未簒者는 正憚公兄弟爾니 公이 但潛爲之備면 圖歡不難하리이다하니 岳이 大悅하다
以夏州被邊要重
注+[頭註]謂要害重地라이라하야 欲求良刺史以鎭之
한대 衆擧宇文泰
어늘 岳
이 表用之
하다
계축(533) -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5년이고, 위魏나라 영희永熙 2년이다. -
위魏나라
하발악賀拔岳注+[頭註]하발악賀拔岳은 하발승賀拔勝의 아우이니, 이 당시 관중행대關中行臺였다. 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진양晉陽에 가서
고환高歡과 함께 형제
注+[頭註]형제兄弟는 하발승賀拔勝과 하발악賀拔岳을 이른다. 가 되기로 약속하였는데,
사마司馬인
우문태宇文泰注+[附註]우문태宇文泰는 대군代郡 무천武川 사람이다. 그 선조는 염제씨炎帝氏로부터 나왔으니, 〈염제炎帝가 황제黃帝에게 멸망당하자〉 염제炎帝의 자손이 도망하여 삭방朔方의 들에 거주하였다. 그 후에 갈오면葛烏免라는 자가 웅대한 지략이 있으니, 선비족鮮卑族이 그를 받들어 군주로 삼아 대대로 대인大人이 되었다. 후손 중에 보회普回가 〈사냥하다가〉 옥새를 얻었는데, 옥새의 내용에 “황제의 옥새”라고 되어 있으니, 보회普回는 이를 하늘이 준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 풍속에 천자天子를 우문宇文이라 하였으므로 국호國號를 우문宇文이라 하고 아울러 이로써 성씨姓氏를 삼았다. 우문태宇文泰는 바로 보회普回의 14세손이다. 덕황제德皇帝라 추시追諡하니, 우문굉宇文肱의 작은 아들이다. 세자世子 우문각宇文覺이 서위西魏를 찬탈하니, 이를 후주後周라 이른다. 가
진양晉陽에 가서
고환高歡의 사람됨을 관찰하기를 자청하였다.
고환高歡이 〈우문태宇文泰를 보고〉 그의 얼굴 생김새를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는 눈길이 비범하다.” 하고는 그를 머물게 하려고 하였는데, 우문태宇文泰가 한사코 복명復命할 것을 청하자 고환高歡이 보낸 뒤에 후회하였다.
우문태宇文泰가 장안長安에 이르러 하발악賀拔岳에게 말하기를 “고환高歡이 제위帝位를 찬탈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공公의 형제를 두려워해서일 뿐이니, 공公이 단지 은밀히 대비하기만 하면 고환高歡을 도모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하발악賀拔岳이 크게 기뻐하였다.
하발악賀拔岳은
하주夏州가 변방의 요충지
注+[頭註]요중要重은 요해처가 되는 중요한 곳을 이른다. 라 하여 어진
자사刺史를 구하여 진무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우문태宇文泰를 천거하자
하발악賀拔岳이
효무제孝武帝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그를 등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