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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4)

통감절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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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子]二年이라
正月 帝崩하니 三十一이라
范曄論曰
魏文帝稱明帝察察注+[釋義]老子曰 俗人察察이어늘 我獨悶悶이라하고 又曰 其政察察이면 其民缺缺이라한대 註云 悶悶 不作聰明也 察察 煩碎也라하니라하고 章帝長者라하니 章帝 素知人厭明帝苛切하고 事從寬厚
奉承明德太后注+[頭註]馬援之女 明帝后也 無子하야 養賈貴人子호되 盡心撫育하야 勞悴過於所生하니 是爲章帝하야 盡心孝道하고 平徭簡賦하야 而民賴其慶하며 又體之以忠恕하고 文之以禮樂하니 謂之長者 不亦宜乎
太子卽位하니 十歲
竇太后臨朝하고 竇憲兄弟 皆在親要之地하다
○ 北匈奴飢亂이어늘 以竇憲으로 爲車騎將軍하야 伐北匈奴하다
東萊呂氏曰
章帝繼明帝察慧之後하야 承之以寬大
如解楚王之獄하고 罷西域之戍하며 輕徭薄賦하야 與天下休息하니 此所以爲東漢之賢君이니 大抵皆是慈祥長者
이나 慈祥長者 短處亦相乘이라
竇憲 奪公主園하니 此外戚專恣之漸也어늘 卒不能正其罪하고 竇后譖廢太子注+[附註]帝納宋貴人하야 生太子慶하고 又納梁竦女하야 生皇子肇하다 竇皇后無子하야 養肇爲子러니 謀陷宋氏하야 誣言爲壓勝之術이라한대 乃廢慶爲淸河王하고 以肇爲皇太子하니 竇后 勳之女也하니 亦宮闈害政之端也어늘 卒不免陷其說하니 此皆優柔不斷之過
又如當時 班超 要功西域하고 傅育張紆 擾動羌胡하니 以章帝慈祥長者 本非武帝好大喜功之君이나
然所行之事 去武帝無幾 亦緣慈祥長者之過 奪於人之說하야 不能自守하야 卒至勞敝中國이니 所以雖無好大喜功之心이나 未免有好大喜功之失이라
古今論君德 以剛爲主
天行하니 君子以하야 自强不息하나니 若於剛上 少欠이면 雖有慈祥之意 不過能謹其小하고 往往失之於大하니 章帝是也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孝章 繼明帝察慧之後하야 承之以寬大하야 聽楊終諫而罷西域之戍하고 用陳寵言而除嚴刻之刑하며 輕徭薄賦하야 與民休息하고 勸課農桑하고 明愼選擧하며 進柔良而退貪猾하고 順時令而理寃獄하며 雅好文章하고 褒崇儒術하니 史稱長者 不亦宜乎
이나 過於寬柔하야 不能濟之以剛하야 竇憲 奪公主園하니 此外戚專恣之漸也어늘 卒不能正其罪하고 竇后譖廢太子하니 亦宮闈害政之端也어늘 卒不免陷其說하니
東漢之衰 基於此矣로다


장화章和 2년(무자 88)
정월에 황제가 승하하니, 나이가 31세였다.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장제기章帝紀에 말하였다.
나라 문제文帝가 이르기를 ‘명제明帝찰찰察察注+[釋義]노자老子》에 이르기를 “속인俗人들은 찰찰察察한데 나만 홀로 민민悶悶하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정사가 찰찰察察하면 백성이 이지러지고 이지러진다.” 하였는데, 에 이르기를 “민민悶悶총명聰明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고, 찰찰察察은 번거롭고 자잘하게 살피는 것이다.” 하였다. 하고 장제章帝장자長者이다.’라고 하였으니, 장제章帝는 평소 사람들이 명제明帝의 까다롭고 박절함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일을 함에 관후寬厚함을 따랐다.
명덕태후明德太后注+[頭註]명덕태후明德太后마원馬援의 딸이고 명제明帝이다. 자식이 없어 가귀인賈貴人의 아들을 양육하였는데, 진심으로 어루만지고 잘 길러 애쓰고 수고하기를 자기 소생보다 더하게 하였으니, 이가 바로 장제章帝이다. 를 받들어 섬겨서 효도에 마음을 다하였으며 요역徭役을 공평하게 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어 백성들이 그 은택을 입었으며, 또 충서忠恕로써 체득하고 예악禮樂으로써 문채를 내었으니 장자長者라고 이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태자가 즉위하니 나이가 10세였다.
두태후竇太后가 조회에 임하고 두헌竇憲 형제兄弟가 모두 가깝고 요긴한 지위에 있었다.
북흉노北匈奴기아飢餓에 시달리고 혼란하자 두헌竇憲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아서 북흉노北匈奴를 정벌하였다.
동래여씨東萊呂氏가 말하였다.
장제章帝는 밝게 살피는 명제明帝의 뒤를 이어 관대함으로 계승하였다.
예를 들면 초왕楚王을 풀어 주고 서역西域의 수자리를 중지하였으며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적게 하여 천하와 함께 휴식하였으니, 이 때문에 동한東漢의 훌륭한 군주가 된 것이니, 대저 모두 자상慈祥장자長者였다.
그러나 자상한 장자는 단점도 또한 서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두헌竇憲공주公主전원田園을 빼앗으려 하였으니 이는 외척外戚전횡專橫하고 방자할 조짐이었는데도 끝내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하였고, 두후竇后가 태자를 참소하여 폐위하였으니注+[附註]황제가 송귀인宋貴人을 받아들여 태자太子 을 낳았고, 또 양송梁竦의 딸을 받아들여 황자皇子를 낳았다. 두황후竇皇后가 아들이 없으므로 를 양자로 길렀는데, 두황후竇皇后송씨宋氏를 모함하여 압승壓勝하는 주술을 한다고 무고하니, 황제가 마침내 송귀인宋貴人이 낳은 을 폐하여 청하왕淸河王으로 삼고 를 황태자로 삼았다. 두후竇后두훈竇勳의 딸이다. 또한 궁중에서 정사를 해치는 단서였는데도 끝내 그의 말에 빠짐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모두 우유부단한 잘못이다.
또 당시에 반초班超서역西域에서 을 세우려 하였고 부육傅育장우張紆강족羌族과 오랑캐들을 요동하게 하였으니, 장제章帝는 자상한 장자長者로서 본래 무제武帝처럼 큰 일을 좋아하고 을 좋아하는 군주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일이 무제武帝와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은 또한 자상한 장자長者의 과실로 남의 말에 빼앗겨서 스스로 자기 의견을 지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끝내 중국中國을 수고롭고 피폐하게 만든 것이니, 이 때문에 비록 큰 일을 좋아하고 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었으나 큰 일을 좋아하고 을 좋아하는 잘못이 있음을 면치 못한 것이다.
고금古今군주君主을 논할 때에 강함을 위주로 하였다.
하늘의 운행이 굳세니 군자가 이것을 본받아서 스스로 강하고 쉬지 않는 것이니, 만약 강함에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비록 자상한 뜻이 있으나 그 작은 것은 잘 삼감에 지나지 않고 왕왕 큰 것에 실수하니, 장제章帝가 이런 사람이다.”
[史略 사평史評]史斷에 말하였다.
장제章帝는 밝게 살피는 명제明帝의 뒤를 이어 관대함으로 계승해서, 양종楊終의 간언을 듣고 서역西域에 수자리 보내는 군사를 파하였고, 진총陳寵의 말을 따라 엄하고 까다로운 형벌을 제거하였으며,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어 백성들과 함께 휴식하였고,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 선거選擧를 분명하게 하고 삼가며, 유순하고 선량한 자를 등용하고 탐욕스럽고 교활한 자를 물리치며, 시령時令을 따르고 억울한 옥사를 다스리며, 평소 문장文章을 좋아하고 유학儒學을 높였으니, 역사책에서 장자長者라고 칭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나치게 관대하고 유순하여 함으로 구제하지 못해서 두헌竇憲공주公主전원田園을 빼앗으려 하였으니 이는 외척外戚전횡專橫할 조짐인데도 끝내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하였고, 두후竇后태자太子를 참소하여 폐위廢位하였으니 이는 또한 궁중에서 정사를 해칠 단서였는데도 끝내 그 말에 빠짐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동한東漢의 쇠퇴함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통감절요(4)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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