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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5)

통감절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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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八年이라 〈秦建元十九年이라
七月 秦王堅 下詔하야 大擧注+[通鑑要解]群臣 皆不可라호되 獨冠軍將軍慕容垂勸故 大擧也入寇하다
○ 八月 遣陽平公融하야 督後將軍張注+[頭註]有前將軍, 後將軍이라 七志切이라 冠軍將軍慕容垂等 步騎二十五萬하야 爲前鋒하고 以兗州刺史姚萇으로 爲龍驤將軍하다
慕容楷注+[頭註] 音皆, 慕容紹 言於慕容垂曰 主上 驕矜已甚하니 叔父建中興之業 在此行也니이다
垂曰 然하다
非汝 誰與成之리오
甲子 發長安戎卒六十餘萬 騎二十七萬하니 旗鼓相望하야 前後千里러라
詔以謝石, 謝玄으로 帥衆八萬하야 拒之할새 秦兵 至潁口하니 兵旣盛하야 都下震恐이라
入問計於謝安한대 夷然注+[頭註] 坦也, 平也 言坦然無異平日也答曰 已別有旨라하고 旣而寂然이라
不敢復言하고 乃令張玄重請한대 安遂命駕하야 出遊山注+[釋義] 田廬也하니 親朋 畢集이라
與玄으로 圍碁賭墅할새 安碁常劣於玄이러니 是日 玄懼하야 便爲敵手而又不勝注+[通鑑要解]敵手 謂下子爭行劫하야 智算相敵也 玄意不在碁故 不能勝安이라하다
遂遊陟注+[釋義] 登也 遊山登高也이라가 至夜乃還하다
○ 桓沖注+[頭註]彛之子 溫之弟也 時爲都督諸江, 荊等州諸軍事, 儀同三司 深以根本爲憂하야 遣精銳三千하야 入援京師어늘 謝安 固却之曰 朝廷 處分已定하고 兵甲無闕하니 宜留以爲防이라한대
對佐吏歎曰 謝安石注+[頭註]安字也 有廟堂之量이나 不閑將略注+[頭註] 習也이라
今大敵垂至어늘 方遊談不暇하고 遣諸不經事少年하야 拒之하고 衆又寡弱하니 天下事 已可知
吾其左注+[釋義] 衣衿也 夷狄之俗 左其衣袵이라로다
○ 十月 秦陽平公融等 攻壽陽하야 癸酉 克之하고 將軍梁成注+[頭註]秦將이라 帥衆五萬하야 屯于洛澗하고 柵淮以遏東兵하니 謝石, 謝玄等 去洛澗二十五里而軍하고 憚成不敢進이라
融於壽陽 遣尙書朱序注+[原註]序先爲梁州刺史러니 爲秦所執하니라하야 來說謝石等하야 使降이러니 序私謂石等曰 若秦百萬之衆 盡至 誠難與爲敵이라
今乘諸軍未集하야 宜速擊之 若敗其前鋒이면 則彼已奪氣하야 可遂破也리이다
從序言하다
○ 十一月 謝玄 遣劉牢之注+[頭註]廣陵相이라하야 帥精兵五千하야 趣(趨)洛澗할새 未至十里 梁成 阻澗爲陳(陣)注+[頭註] 恃也 恃澗自固也 讀曰陣이라以待之어늘
牢之直前渡水하야 擊成大破之하야 斬成하고 又分兵斷其歸津하니 秦步騎崩潰하야 爭赴淮水하야 士卒死者 萬五千人이라
執秦揚州刺史王顯等하고 盡收其器械軍資하다
於是 謝石等諸軍 水陸繼進하다
秦王堅 與陽平公融으로 登壽陽城하야 望之할새 見晉兵部陳嚴整하고 又望見八公山草木하고 皆以爲晉兵注+[釋義]王氏曰 八公山 在安豐壽春縣北四里 乃苻堅伐晉할새 望山上草木하니 皆人形 卽此[通鑑要解]八公 在今壽春縣北四里하니라 世傳漢淮南王安 好神仙이러니 忽有八公鬚眉皓素하여 詣門求見云云이라하니 煩不引이라이라
顧謂融曰 此亦注+[釋義] 强也이니 何謂弱也 注+[頭註]失意貌始有懼色이러라
秦兵 逼淝水而陳하니 晉兵 不得渡
謝玄 遣使하야 謂陽平公融曰 君 懸軍深入하야 而置陳逼水하니 此乃持久之計 非欲速戰者也로다
若移陳少却하야 使晉兵得渡하야 以決勝負 不亦善乎 秦諸將 皆曰 我衆彼寡하니 不如遏之하야 使不得上하야 可以萬全이리이다
堅曰 但引兵少却하야 使之半渡하고 我以鐵騎 蹙而殺之 蔑不勝矣라한대 融亦以爲然하야 遂麾兵使却하니 秦兵 遂退하야 不可復止
謝玄, 謝琰, 桓伊等 引兵渡水擊之하니
馳騎略陳注+[頭註] 行也 巡行曰略이라하야 欲以帥退者라가 馬倒하야 爲晉兵所殺하니 秦兵 遂潰
玄等 乘勝追擊하야 至于靑岡注+[釋義]在安豐軍하니 去壽春三十里하니 秦兵 大敗하야 自相蹈藉注+[頭註] 與踖同하니 踐也而死者 蔽野塞川하고
其走者 聞風聲鶴唳하고 皆以爲晉兵且至라하야 晝夜不敢息하야
草行露宿하고 重以飢凍하야 死者什 七八이러라
秦兵小却이어늘 朱序在陳後하야 呼曰 秦兵 敗矣라하니 衆遂大奔이라
序因與張天錫注+[頭註]丙子年 降秦이라으로 皆來奔하다
流矢注+[釋義] 傷也 飛矢曰流矢하고 單騎走하다
李舜臣曰
蜀漢之中 古未有興王之迹也어늘 而漢高祖起自南鄭하야 以取關中하고 樊鄧之間 古未有中興之迹也어늘 而漢光武起自南陽하야 以定河北이라
而況江東之地 首起西陵하고 尾接東海하니 其兵之犀銳注+[頭註] 堅也 古以犀兕皮爲鎧 謂堅曰犀 足以破秦兵於鉅鹿注+[頭註]謂項羽하고 其財之富厚 足以復唐祚於靈武注+[頭註]唐肅宗이니 見四十二卷丙申年이라
이나 自吳以下 國於江東者 凡六朝注+[頭註]吳, 東晉, 宋, 齊, 梁, 陳이라 周瑜有赤壁之勝하고 祖逖注+[頭註]晉元帝丁丑年 流民張平樊雅 各聚衆在譙하야러니 逖攻降之하니라有譙城之勝하고 褚裒有彭城之勝하고 桓溫有灞上之勝하고 謝玄有淝水之勝하고 劉裕注+[頭註]在三十卷乙卯年이라有關中之勝하고 到彦之注+[頭註]在三十一卷庚午年이라有淮南之勝하고 蕭衍注+[頭註]齊明帝 乙亥年 與魏戰勝之有義陽之勝하고 陳慶之注+[頭註]見三十二卷己酉年이라有洛陽之勝하고 吳明徹注+[頭註]見三十三卷癸巳年이라有淮南之勝하니
此十者 皆起江東之師하야 以取勝中原이니 其剋敵制勝之功 亦奇矣
然終不能渡江而北定中原하야 以一天下하니 非江東之地 便於守而不便於攻이요 蓋江東之人 知有江東而不知有天下也일새라
向使六朝君臣 素有幷呑之志하야 先定規模於未勝之前하고 而進乘機會於旣勝之後런들 則千乘萬騎 起自江東而入中原이면 蓋可以鞭撻四夷하고 坐制六合이니
誰謂江東之地 土綿力薄注+[頭註]綿 弱也하야 而不足以擧天下也哉
惟其平居暇日 初未嘗有進取之心하야 而預爲必復中原之計
是以 一旦欲乘機會로되 而倉皇失措注+[頭註]倉皇 一作倉黃하니 失措貌 詩註 忽遽貌라하니라하야 竟不能成混一之功이라
且苻堅養兵於秦中 幾三十年이라
一旦 驅之南下하야 欲以幷呑吳會할새 顧謂大江之流하고 投鞭可斷이라하니 志則誇矣
而兵始一交 全師潰散하야 相與枕藉於淝水之中하야 晉之君臣 嘗試睥睨注+[頭註]邪視也一世하니 此乾坤何等時耶
挽吳江之水하야 以洗關河嵩洛之腥穢注+[頭註] 其不在玆時耶
奈何徘徊於兗豫之間하야 竟不能過關踰鄴하야 以圖混一하고 而乃今日運米於枋頭하야 以濟苻丕之飢注+[頭註]在下甲申年이라하고 明日率軍於關하야 以爲苻堅之助
夫淮淝百萬 志欲何爲
幸其天敗하야 粮盡力困하야 不奮兵以勦除之하고 乃擧國之大讐하야 付之相忘之域하니 豈不深可惜哉
是時 諸軍 皆潰호되 惟慕容垂注+[頭註]己巳年 奔秦하니 乃以垂爲冠軍將軍이라所將三萬人 獨全이어늘 堅以千餘騎赴之하다
世子寶言於垂曰 秦王 兵敗하야 委身於我하니 天借之以復燕祚
此時 不可失也니이다
垂曰 汝言 是也이나 彼以赤心으로 投命於我어늘 若之何害之리오
若氐運注+[頭註]苻氏 氐也 運祚也 必窮이면 吾當懷集關東하야 以復先業耳리라
親黨 多勸垂殺堅호되 垂皆不從하고 悉以兵授堅하다
○ 謝安 得驛書하야 知秦兵已敗하다
方與客圍碁러니 攝書注+[頭註] 收也置牀上하고 了無喜色하고 圍碁如故어늘
客問之한대 徐答曰 小兒輩 遂已破賊이라하더니 旣罷 還內過戶限할새 不覺齒之折注+[通鑑要解]喜甚也 木屐이라이러라
○ 秦王堅 收集離散하야 比至洛陽하니 十餘萬이요 百官儀物軍容 粗備러라
○ 慕容垂言於堅曰 北鄙之民 聞王師不利하고 輕相扇動하니 請奉詔書하야 以鎭慰安集之하고 因過謁陵廟하노이다 許之하다
權翼 諫曰 國兵 新破 四方 皆有離心하니 宜徵集名將하야 置之京師하야 以固根本이니이다
勇略過人하고 世豪東夏하니 顧以避禍而來언정 其心 豈止欲作冠軍而已哉잇가
譬如養鷹하야 飢則附人이나 每聞風飆注+[頭註] 畢遙切이니 疾風也之起하면 常有凌霄注+[頭註] 雲霄也之志하니
正宜謹其注+[通鑑要解] 他刀切이라 絲繩也 所以紲鷹이요 所以鳥也이니 豈可解縱하야 任其所欲哉잇가 堅曰 卿言 是也이나 朕已許之하니 匹夫 猶不食言이어든 況萬乘乎
天命 有廢興하니 固非智力所能移也니라
翼曰 陛下重小信而輕社稷하시니 見其往而不返이니
關東之亂 自此始矣리이다 不聽하다
○ 秦乞伏國仁注+[頭註]隴西鮮卑人이라 反於隴西하니 衆至十餘萬이러라
○ 慕容垂至安陽하니 長樂公丕注+[頭註]苻堅之庶長子 時鎭鄴이라 館垂於鄴西어늘 垂潛與燕之故臣으로 謀復燕祚하다
丁零翟斌注+[頭註]見上卷하니 仕秦爲中郞이라 起兵叛이어늘 秦王堅 驛書하야 使垂將兵討之하다


태원太元 8년(계미 383) - 나라 건원建元 19년이다. -
7월에 진왕秦王 부견苻堅조명詔命을 내려서 군대를 크게 일으켜注+[通鑑要解]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지만 관군장군冠軍將軍 모용수慕容垂만이 권하였기 때문에 군대를 크게 동원한 것이다. 쳐들어왔다.
○ 8월에 부견苻堅양평공陽平公 부융苻融을 보내어 후장군後將軍 장자張蚝注+[頭註]전장군前將軍후장군後將軍이 있다. 는 음이 七志切(치)이다. 관군장군冠軍將軍 모용수慕容垂 등의 보병步兵기병騎兵 25만 명을 감독하게 하여 선봉부대로 삼고, 연주자사兗州刺史 요장姚萇용양장군龍驤將軍으로 삼았다.
모용해慕容楷注+[頭註]이 개(해)이다. 모용소慕容紹모용수慕容垂에게 말하기를 “주상主上이 교만하고 자랑함이 너무 심하니, 숙부叔父께서 중흥中興기업基業을 세우는 것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모용수慕容垂가 말하기를 “그렇다.
너희들이 아니면 내 누구와 더불어 중흥의 기업을 이루겠는가.” 하였다.
갑자일甲子日(8일)에 부견苻堅장안長安에서 병졸 60여만 명과 기병 27만 명을 동원하니, 깃발과 북소리가 서로 이어져 앞뒤로 천 리에 뻗쳤다.
황제가 명하여 사석謝石사현謝玄에게 8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이들을 막게 하였는데, 나라 군대가 영구潁口에 이르니 군대의 기세가 이미 대단하여 도하都下가 동요하고 두려워하였다.
사현謝玄이 들어가 사안謝安에게 계책을 묻자, 사안謝安은 태연히注+[頭註]는 평탄하고 평온함이니, 평탄하여 평소와 다름이 없음을 말한다. 대답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따로 지시한 것이 있다.” 하고는 이윽고 잠잠하였다.
사현謝玄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고 마침내 장현張玄으로 하여금 거듭 묻게 하자, 사안謝安이 마침내 멍에 하도록 명하여 산장注+[釋義]는 농막이다. 에 나가서 노니,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사안謝安사현謝玄과 바둑을 둘 적에 산장을 걸고 내기를 하였는데, 사안謝安의 바둑 실력이 항상 사현謝玄만 못하였으나 이날은 사현謝玄사안謝安을 두려워해서 곧 막상막하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또다시 이기지 못하였다.注+[通鑑要解]적수敵手는 바둑을 둘 때에 서로 뺏기고 빼앗아서 지략과 계산이 서로 대등함을 이른다. 사현謝玄의 뜻이 바둑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안謝安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사안謝安이 마침내 산에 올라가 놀다가注+[釋義]은 올라감이니, 산에 놀러 가서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다.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환충桓沖注+[頭註]환충桓沖환이桓彛의 아들이고 환온桓溫의 아우이다. 이 당시 도독강주형주등제군사都督江州荊州等諸軍事의동삼공儀同三公이었다. 이 근본(都城)을 우려하여 정예병 3천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경사京師의 호위를 원조하게 하자, 사안謝安이 굳이 퇴각시키며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이 이미 결정되었고 군대가 부족하지 않으니, 서쪽 변경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막아야 한다.” 하였다.
환충桓沖이 보좌하는 관리들에게 한탄하기를 “사안석謝安石注+[頭註]안석安石사안謝安이다. 은 재상의 기량器量이 있으나 장수의 도략韜略에는 익숙하지 못하다.注+[頭註]은 익숙함이다.
이제 큰 적이 쳐들어오는데 산에 올라가 놀고 벗들과 한담閑談을 하기에 겨를이 없으며,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연소한 사람을 보내어 적을 막게 하며, 병력이 또 적고 약하니, 천하의 일을 이미 알 만하다.
나는 아마도 오랑캐가 되어 좌임左袵注+[釋義]은 옷깃이니, 이적夷狄의 풍속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 을 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 10월에 나라 양평공陽平公 부융苻融 등이 수양壽陽을 공격하여 계유일癸酉日(18일)에 함락시키고, 장군 양성梁成注+[頭註]양성梁成나라 장수이다. 등이 5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낙간洛澗에 주둔하고 회수淮水에 성책을 쌓아 동쪽 군대를 막으니, 사석謝石사현謝玄 등이 낙간洛澗에서 25리 떨어진 곳에 군대를 주둔하고는 양성梁成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부융苻融수양壽陽에서 상서尙書 주서朱序注+[原註]주서朱序는 이전에 양주자사梁州刺史로 있었는데, 나라에 사로잡혀 갔다. 를 보내어 나라 군영에 와서 사석謝石 등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였는데, 주서朱序가 은밀히 사석謝石 등에게 이르기를 “만약 나라의 백만 대군이 모두 몰려오면 진실로 상대하여 싸우기 어렵다.
이제 여러 군대가 아직 모이지 않았을 때를 틈타서 공격해야 하니, 만약 그 선봉부대를 패퇴시키면 저들은 이미 기가 꺾여서 마침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사석謝石주서朱序의 말을 따랐다.
○ 11월에 사현謝玄유뇌지劉牢之注+[頭註]유뇌지劉牢之광릉廣陵이다. 를 보내어 정예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낙간洛澗으로 달려갈 적에 낙간洛澗에서 10리 못 미친 곳에 이르러서 양성梁成간수澗水를 견고하다고 믿어 을 치고注+[頭註]는 믿는 것이니, 간수澗水를 믿어 스스로 견고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으로 읽는다. 대비하였다.
유뇌지劉牢之가 곧장 전진하여 간수澗水를 건너가서 양성梁成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양성梁成을 목 벤 다음 마침내 군대를 나누어 돌아가는 나루터를 차단하니, 나라의 보병과 기병이 궤멸되어 다투어 회수淮水에 뛰어들어 죽은 사졸士卒이 1만 5천 명이나 되었다.
나라의 양주자사揚州刺史 왕현王顯 등을 사로잡고 그 병기와 군수물자를 전부 몰수하였다.
이에 사석謝石 등의 제군諸軍수륙水陸으로 계속하여 전진하였다.
진왕秦王 부견苻堅양평공陽平公 부융苻融수양성壽陽城에 올라가 이것을 바라보니 나라 군대의 진열陣列이 모두 엄정하였으며, 또 멀리서 팔공산八公山의 초목을 바라보고 모두 나라 병사라고 여겼다.注+[釋義]望見八公山草木 개이위진병皆以爲晉兵:[釋義]王氏가 말하였다. “팔공산八公山안풍군安豐軍 수춘현壽春縣 북쪽 4리에 있다. ‘부견苻堅나라를 정벌할 때에 산 위의 초목을 바라보니, 모두 사람의 모습이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通鑑要解]八公山은 지금 수춘현壽春縣 북쪽 4 되는 지점에 있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나라 회남왕淮南王유안劉安신선神仙을 좋아하였는데, 홀연히 수염과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센 팔공八公이 갑자기 문에 찾아와 만나 보기를 구하였으므로 팔공산八公山이라 이름하였다.……” 하였는데, 번거로우므로 인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부융苻融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또한 강적注+[釋義]은 강함이다. 인데, 어찌 약하다고 이른단 말인가.” 하고, 낙심하여注+[頭註]무연憮然은 실의한 모양이다. 비로소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나라 군대가 비수淝水에 바짝 붙여서 을 치니, 나라 군대가 건너갈 수가 없었다.
사현謝玄이 사자를 보내어 양평공陽平公 부융苻融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현군懸軍(원군 없이 고립된 군대)을 끌고 깊이 쳐들어와서 비수淝水에 바짝 붙여서 진을 치니, 이는 바로 지구전을 하려는 계책이고 빨리 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진영을 옮겨 조금 뒤로 물러나서 나라 군대가 물을 건너가게 하여 승부를 결단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니, 나라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는 군대가 많고 저들은 군대가 적으니, 막아서 올라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만전萬全을 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부견苻堅이 말하기를 “다만 군대를 이끌고 조금 뒤로 물러나서 저들이 반쯤 건너왔을 때에 우리가 철기병鐵騎兵을 몰고 들어가서 저들을 죽인다면 승리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는데, 부융苻融 또한 그 말을 옳게 여겨 군대를 지휘하여 퇴각하게 하니, 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여 다시는 후퇴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
사현謝玄, 사염謝琰, 환이桓伊 등이 군대를 이끌고 물을 건너와 공격하였다.
부융苻融이 말을 타고 달리면서 군진軍陣을 순행注+[頭註]은 돌아다니는 것이니, 순행巡行하는 것을 이라 한다. 하여 퇴각하는 군사들을 통솔하고자 하다가 말이 쓰러져서 나라 군사에게 살해당하니, 나라 군대가 마침내 궤멸되었다.
사현謝玄 등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청강靑岡注+[釋義]청강靑岡안풍군安豐軍에 있으니, 수춘현壽春縣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에 이르니, 진군秦軍이 대패하여 자기들끼리 밟히고 깔려서注+[頭註]과 같으니, 밟는 것이다. 죽은 시체가 들을 뒤덮고 냇물을 막았다.
도망하던 자들은 바람 소리와 학 울음소리를 듣고도 모두 나라 군대가 이르는 것이라고 여겨서 밤낮으로 도망하여 감히 쉬지 못하였다.
이들은 인적이 드문 풀숲 길로 걸어가며 노지露地에서 잠을 잔데다 기근과 추위까지 겹쳐 죽은 자가 열에 일곱 여덟 명이나 되었다.
처음에 나라 군대가 조금 퇴각했을 때에 주서朱序가 진영의 뒤에 있다가 고함치기를 “나라 군대가 패했다.” 하니, 나라 군사들이 마침내 크게 도망하였다.
주서朱序가 인하여 장천석張天錫注+[頭註]장천석張天錫병자년丙子年(376)에 나라에 항복하였다. 과 함께 모두 나라 진영으로 도망쳐 왔다.
부견苻堅은 빗나간 화살을 맞고注+[釋義]은 상함이다. 빗나간 화살을 유시流矢라 한다. 단기單騎로 도망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말하였다.
촉한蜀漢 지방은 옛날에 왕업을 일으킨 자취가 있지 않았는데 나라 고조高祖남정南鄭에서 일어나 관중關中 지방을 취하였고, 번성樊城등성鄧城 사이는 옛날에 중흥한 자취가 있지 않았는데 나라 광무제光武帝남양南陽에서 일어나 하북河北 지방을 평정하였다.
더구나 강동江東 지역은 머리는 서릉西陵에서 시작되고 꼬리는 동해東海와 접하였으니, 병기의 단단함과 예리함注+[頭註]는 견고함이니, 옛날에 서시犀兕(무소)의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견고한 것을 일러 라고 한다. 나라 군대를 거록鉅鹿에서 격파注+[頭註]나라 군대를 거록鉅鹿에서 격파하였다는 것은 항우項羽를 이른다. 할 수 있었고 재물의 풍족함은 나라의 국운을 영무靈武에서 회복注+[頭註]나라의 국운을 영무靈武에서 회복한 것은 나라 숙종肅宗이니, 42권 병신년조丙申年條(756)에 보인다.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 이후로 강동江東에 나라를 정한 것이 모두 여섯 왕조注+[頭註]육조六朝동진東晉이다. 였는데, 주유周瑜적벽赤壁의 승리가 있었고, 조적祖逖注+[頭註]나라 원제元帝 정축년丁丑年(317)에 유민流民장평張平번아樊雅가 각각 초군譙郡에서 무리를 모아 오주塢主가 되었는데, 조적祖逖이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초성譙城의 승리가 있었고, 저부褚裒팽성彭城의 승리가 있었고, 환온桓溫파상灞上의 승리가 있었고, 사현謝玄비수淝水의 승리가 있었고, 유유劉裕注+[頭註]유유劉裕는 해설이 30권 을묘년조乙卯年條(415)에 보인다. 관중關中의 승리가 있었고, 도언지到彦之注+[頭註]도언지到彦之는 해설이 31권 경오년조庚午年條(430)에 보인다. 회남淮南의 승리가 있었고, 소연蕭衍注+[頭註]소연蕭衍(南齊)나라 명제明帝이니, 을해년乙亥年(495)에 (北魏)와 싸워 승리하였다. 의양義陽의 승리가 있었고, 진경지陳慶之注+[頭註]진경지陳慶之는 해설이 32권 기유년조己酉年條(529)에 보인다. 낙양洛陽의 승리가 있었고, 오명철吳明徹注+[頭註]오명철吳明徹은 해설이 33권 계사년조癸巳年條(573)에 보인다. 회남淮南의 승리가 있었다.
이 열 가지는 모두 강동江東의 군대를 일으켜 중원中原에서 승리를 취한 것이니, 적을 이기고 승리한 공이 또한 기이하다.
그러나 끝내 양자강을 건너가서 북쪽으로 중원中原을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하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강동江東 지역이 지키기에 편리하고 공격하기에 불편해서가 아니라, 강동江東 사람들은 강동江東이 있는 줄만 알고 천하가 있는 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만일 육조六朝군신君臣들이 평소에 중원中原을 병탄하려는 뜻을 가지고서 승리하기 전에 규모規模를 미리 정하고 승리한 뒤에 나아가 기회를 탔더라면, 천 대의 수레와 만 명의 기병을 가지고 강동江東에서 일어나 중원中原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니, 이렇게 했더라면 사방의 오랑캐들을 채찍질하고 가만히 앉아서 육합六合을 제어하였을 것이다.
누가 강동江東 지역이 영토가 좁고 힘이 부족해서注+[頭註]綿은 약함이다. 천하를 통일하지 못한다고 말하겠는가.
다만 평소 한가로운 날에 처음부터 진취할 마음을 갖고 반드시 중원을 수복하겠다는 계획을 미리 세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하루아침에 기회를 타려고 하다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라注+[頭註]창황倉皇은 혹 창황倉黃으로도 쓰니, 어찌할 줄 모르는 모양이다. 《시경詩經에 “몹시 급한 모양이다.” 하였다. 끝내 천하통일의 공을 이룩하지 못한 것이다.
부견苻堅나라에서 군대를 기른 지가 거의 30년이었다.
하루아침에 이들을 몰아 남하南下하여 오회吳會 지방을 병탄하고자 할 때에 큰 강(揚子江)이 흐르는 것을 돌아보고는 채찍만 던져 넣어도 강물을 차단할 수 있다고 말하였으니, 뜻은 대단하였다.
그러나 군대가 처음 한번 교전하자마자 전군全軍이 궤멸되어 흩어져서 비수淝水 가운데에 시신이 낭자하여 나라의 군주와 신하가 한 세상을 얕보게注+[頭註]비예睥睨는 곁눈질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건곤乾坤은 어떠한 때란 말인가.
오강吳江의 물을 끌어다가 함곡관函谷關 등의 관문과 황하黃河숭산嵩山낙양洛陽을 차지한 비린내 나는 더러운 오랑캐들注+[頭註]비린내 나는 더러운 오랑캐는 오호五胡를 이른다. 을 씻어 버리는 것이 어찌하여 이때에 있지 않았겠는가.
어찌하여 연주兗州예주豫州 사이에서 배회하여 끝내 관중關中을 지나가고 업성鄴城을 넘어가서 통일을 도모하지 못하고, 마침내 오늘 방두枋頭에서 쌀을 운반하여 부비苻丕의 굶주림을 구제하고注+[頭註]부비苻丕의 굶주림을 구제한 것은 뒤의 갑신년조甲申年條(384)에 보인다. 다음날은 관섬關陝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부견苻堅을 도왔단 말인가.
회수淮水비수淝水의 백만 군대는 뜻이 무엇을 하고자 한 것인가.
하늘이 패망하게 하여 양식이 다하고 힘이 곤궁해진 것을 요행으로 여겨서, 군대를 떨쳐 섬멸하지 않고, 마침내 나라의 큰 원수를 들어서 서로 잊어버린 것처럼 여기는 곳에 내버려 두었으니, 어찌 매우 애석하지 않은가.
이때 제군諸軍이 모두 궤멸되었으나 오직 모용수慕容垂注+[頭註]모용수慕容垂기사년己巳年(369)에 나라로 달아나니, 나라에서 마침내 모용수慕容垂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삼았다. 가 거느리던 3만 명만은 온전하였는데, 부견苻堅이 천여 를 데리고 그에게 달려갔다.
세자世子 모용보慕容寶모용수慕容垂에게 말하기를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전투에 패하여 우리에게 몸을 맡겼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에게 기회를 빌려 주어 나라의 국운을 회복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모용수慕容垂가 말하기를 “네 말이 옳으나 저가 진심으로 자신의 명운命運을 아낌없이 나에게 던졌는데, 어떻게 그를 해친단 말인가.
만약 우리 저족氐族의 운명注+[頭註]부씨苻氏저족氐族이다. 국운國運이다. 이 반드시 곤궁하다면 나는 관동關東 지방을 안집安集시켜서 선조先祖의 기업을 회복할 뿐이다.” 하였다.
모용수慕容垂의 친당들이 많이 모용수慕容垂에게 부견苻堅을 죽일 것을 권하였으나 모용수慕容垂가 이를 따르지 않고 병력을 다 부견苻堅에게 주었다.
사안謝安이 역참에서 띄운 승전보를 받고서 나라 군대가 이미 패배한 것을 알았다.
이때 막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공문서를 거두어注+[頭註]은 거두는 것이다. 책상 위에 놓아둔 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이 전처럼 바둑을 두었다.
손님이 묻자, 사안謝安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아이들이 이미 적을 격파했습니다.” 하였는데, 바둑이 끝난 뒤 내실內室로 돌아가면서 문턱을 넘어갈 적에 흥분하여 신발의 굽이 부러진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注+[通鑑要解]신발의 굽이 부러진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은 매우 기뻐한 것이다. 은 나막신이다.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흩어진 병력을 수합하여 낙양洛陽에 이르니, 무리가 십여만이었고 백관百官의장儀仗으로 쓰는 기물器物과 군사 장비가 대강 갖추어졌다.
모용수慕容垂부견苻堅에게 말하기를 “북쪽 변방의 백성들이 의 군대가 승리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경솔하게 서로 선동하니, 신이 청컨대 조서를 받들고 먼저 가서 그들을 진무鎭撫하고 안집安集시키고, 인하여 지나는 길에 능묘陵廟를 배알할까 합니다.” 하니, 부견苻堅이 이를 허락하였다.
권익權翼이 간하기를 “나라의 군대가 격파된 지 얼마 안 되어 사방이 모두 조정을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마땅히 명장들을 불러 모아서 경사京師안치安置하여 근본을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모용수慕容垂는 용맹과 지략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대대로 동하東夏 지방에서 호걸이라고 일컬어졌으니, 다만 화를 피하기 위하여 나라에 왔을지언정 그의 심산心算이 어찌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되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비유하면 매를 기르는 것과 같아서, 굶주릴 때에는 사람을 따르나 매번 회오리바람注+[頭註]는 畢遙切(표)이니, 빠른 바람이다. 이 일어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항상 하늘 높이 날려는注+[頭註]는 하늘이다. 뜻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땅히 끈과 새장注+[通鑑要解]는 他刀切(도)이다. 실끈이니 매를 묶어 매는 것이요, (새장)은 새를 기르는 것이다. 을 조심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니, 어찌 풀어놓아서 그가 가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하니, 부견苻堅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으나 이미 허락하였으니, 필부匹夫도 오히려 식언食言하지 않는데, 하물며 만승萬乘의 천자에 있어서랴.
천명天命은 폐하고 흥함이 있으니, 진실로 개인의 지혜와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권익權翼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작은 신의를 중히 여기고 사직社稷을 가벼이 여기시니, 신은 그가 가는 것만 볼뿐 돌아오는 것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관동關東의 혼란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부견苻堅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라 걸복국인乞伏國仁注+[頭註]걸복국인乞伏國仁농서隴西선비족鮮卑族 사람이다. 농서隴西에서 배반하니, 무리가 십여만 명에 이르렀다.
모용수慕容垂안양安陽에 이르니, 장악공長樂公 부비苻丕注+[頭註]장악공長樂公 부비苻丕부견苻堅서장자庶長子이니, 이때 업성鄴城진주鎭駐하였다. 모용수慕容垂에게 업성鄴城의 서쪽에 관사를 정해 주자, 모용수慕容垂가 은밀히 나라의 옛 신하들과 나라의 옛 기업基業을 회복할 것을 모의하였다.
마침 정령족丁零族 적빈翟斌注+[頭註]정령丁零 적빈翟斌상권上卷에 보이니, 나라에 벼슬하여 중랑中郞이 되었다. 이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자,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파발을 띄워 모용수慕容垂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 자
역주2 : 서
역주3 西藩 : 당시 桓沖이 刺史로 있었던 江州와 荊州는 都城인 建康의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西藩이라 이른 것이다.
역주4 : 임
역주5 : 경
역주6 : 무
역주7 : 중
역주8 塢主 : 東漢과 魏‧晉 시대에 城寨를 지어 스스로 방어한 勢道家나 大姓 名門을 말한다.
역주9 五胡 : 東漢에서 南北朝 시대에 걸쳐 서북방으로부터 중국 본토에 이주한 다섯 민족으로, 匈奴‧羯‧鮮卑‧氐‧羌을 이른다.
역주10 : 섬
역주11 : 극
역주12 : 조
역주13 : 휵
역주14 丁零翟斌 : 胡三省의 註에 “丁零族은 본래 中山에 살았는데, 苻堅이 燕나라를 멸망시키자 新安으로 옮겨 갔다. 翟斌은 秦나라에 벼슬하여 衛軍從事中郞이 되었다.[丁零種落 本居中山 苻堅之滅燕也 徙於新安 斌仕秦爲衛軍從事中郞]” 하였다.

통감절요(5)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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