奔而殿타가 將入門에 策其馬曰 非敢後也라 馬不進也라하니라
注
人迎功之하니 不欲獨有其名하야 曰 我非敢在後拒敵이라 馬不能前進이라하니라
疏
‘奔而殿 將入門 策其馬曰 非敢後也 馬不進也’者, 此其不伐之事也.
魯與齊戰, 魯師敗而奔, 孟之反賢而有勇, 獨在後爲殿.
且曰 “我非敢在後爲殿以拒敵, 馬不能前進故也.”
疏
○正義曰:杜預曰 “之側, 孟氏族, 字反.” 是也.
疏
○正義曰:云 ‘殿 在軍後 前曰啓 後曰殿’者, 案司馬法謀帥篇曰 “夫前驅啓,
, 倅車屬焉.” 大震, 卽大殿也,
襄二十三年左傳曰 “齊侯伐衛, 大殿, 商子游御夏之御寇.” 詩曰 “元戎十乘, 以先啓行.” 是殿在軍後, 前曰啓也.
案哀十一年左傳說此事云 “齊師伐我, 及淸, 孟孺子洩帥右師, 冉求帥左師, 師及齊師戰于郊, 右師奔, 齊人從之.
孟之側後入以爲殿, 抽矢策其馬曰 ‘馬不進也.’”
注
공왈孔曰:노魯나라 대부 맹지측孟之側이 제齊나라와 전쟁하여 군대가 대패하였다.
불벌不伐은 스스로 자기의 공功을 자랑하지 않음이다.
패주敗走할 때에 맨 뒤에 오다가 성문을 들어서려 할 때에 그 말에 채찍을 치며 말하기를 ‘감히 뒤에 오려 한 것이 아니라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서이다.’라고 하였다.”
注
마왈馬曰:전殿은 군대의 후미後尾에 있는 것이다.
앞에 가는 군대를 계啓라 하고, 뒤에 가는 군대를 전殿이라 한다.
맹지반孟之反은 현명하면서도 용기가 있어서 군대가 대패해 도망해 올 적에 홀로 뒤에 떨어져서 전군殿軍(後軍)이 되었다.
사람들이 맞이해 〈뒤에 온 것을〉 공으로 여기니, 그 명성을 독차지하고자 하지 않아 “내가 감히 뒤에 오면서 적을 막으려 한 것이 아니라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서이다.”라고 한 것이다.
疏
○正義曰:이 장은 공功을 자랑하지 않은 것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孟之反不伐] 공을 자랑하는 것을 벌伐이라 한다.
맹지반孟之反은 노魯나라 대부 맹지측孟之側인데, 군공軍功이 있는데도 자랑하지 않은 것이다.
[奔而殿 將入門 策其馬曰 非敢後也 馬不進也] 이것이 그가 공을 자랑하지 않은 일이다.
노魯나라가 제齊나라와 전쟁하다가 노나라 군대가 패배하여 도망해 올 적에 맹지반孟之反은 현명하면서도 용기가 있어서 홀로 뒤에 떨어져 후군後軍이 되었다.
사람들이 맞이해 이를 공으로 여겼으나, 그는 그 명성을 독차지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국문國門을 들어오려 할 때에 그 말에 채찍을 쳐서 도망해 오는 다른 군사들보다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가려 한 것이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가 감히 뒤에 떨어져 후군後軍이 되어서 적을 막으려 한 것이 아니라,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뒤에 오면서 적을 막은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疏
○正義曰:두예杜預가 “지측之側은 맹씨孟氏의 종족으로 자字가 반反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사람이다.
疏
○正義曰:[殿 在軍後 前曰啓 後曰殿] 고찰하건대 《사마법司馬法》 〈모수편謀帥篇〉에 “선봉부대[前驅]가 출발[啓行]하면 병거兵車를 탄 후군後軍[大震]과 부거副車[倅車]가 따른다.”고 하였는데, 대진大震은 대전大殿(後軍)이다.
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대진大震이라 한 것이다.
양공襄公 23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제후齊侯가 위衛나라를 토벌할 때, 대전大殿(後軍)은 상자유商子游가 하지어구夏之御寇의 수레를 몰았다.”고 하였고, 《모시毛詩》 〈소아小雅 유월六月〉에 “원융元戎(큰 병거兵車) 10승乘으로 먼저 길을 떠났다.”고 하였으니, 전殿은 군대의 후미에 있는 것이고, 앞에 있는 군대를 계啓라 한다.
고찰하건대 애공哀公 11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 일에 대해 말하기를 “제齊나라 군대가 우리나라를 치기 위해 청淸에 집결하니, 맹유자설孟孺子洩은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염구冉求는 좌군左軍을 거느리고서 노군魯軍이 제군齊軍과 노나라 교외에서 교전하였는데, 우군右軍이 도주하니 제군齊軍이 추격하였다.
맹지측孟之側이 후군後軍이 되어 뒤에 들어왔는데, 화살을 뽑아 그 말에 채찍질을 하면서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서이다.’라고 했다.” 하였다.
글이 같지 않은 것은 각각 들은 바에 의거해 기록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