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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注疏(2)

논어주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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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舜有臣五人而天下治하니라
임금이 신하 다섯 사람을 두시니 천하天下가 다스려졌다.
[注]孔曰 禹稷契皐陶伯益이라
공왈孔曰 : 오인五人(설)‧고요皐陶(고요)‧백익伯益이다.
武王曰
무왕武王이 말하였다.
予有亂臣十人호라하니라
“나는 다스리는(직분을 다하는) 신하 열 사람을 두었다.”
[注]馬曰 亂 治也
마왈馬曰 : 이다.
治官者十人 謂周公旦召公奭太公望畢公榮公太顚閎夭散宜生南宮适이요 其一人謂文母
직분을 다하는 열 사람은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 필공畢公영공榮公태전太顚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남궁괄南宮适 등 아홉 사람을 이르고, 나머지 한 사람은 문모文母(文王의 )를 이른다.
孔子曰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才難 不其然乎
인재人才를 얻기 어렵다는 말이 옳은 말이 아닌가?
唐虞之際 於斯爲盛이나 有婦人焉하니 九人而已니라
의 교체기로부터 〈나라까지〉 이때(周)에 〈인재가〉 가장 성대하였으나, 〈열 사람 중에〉 부인婦人 한 사람이 끼어 있으니 〈남자는〉 아홉 사람뿐이다.
[注]孔曰 唐者 堯號 虞者 舜號
공왈孔曰 : 국호國號이고, 국호國號이다.
際者 堯舜交會之間이라
교체交替하던 사이이다.
此也
(周를 가리킴)이다.
言堯舜交會之間으로 比於周 周最盛하야 多賢才 然尙有一婦人하야 其餘九人而已 大才難得 豈不然乎
이 교체하던 사이로부터 나라에 이르기[比]까지 나라가 가장 융성하여 현재賢才가 많았으나, 오히려 부인婦人 한 사람이 끼어 있어 그 나머지는 아홉 사람일 뿐이니, 큰 인재人才를 얻기 어렵다는 말이 어찌 옳은 말이 아니냐는 말이다.
三分天下有其二코도 以服事殷하니 周之德 可謂至德也已矣로다
천하天下삼분三分하여 그 이분二分소유所有하고도 나라를 복종服從해 섬겼으니, 나라 〈문왕文王〉의 은 ‘지극한 ’이라고 이를 수 있도다.
[注]包曰 殷紂淫亂하고 文王爲西伯而有聖德하니 天下歸周者三分有二
포왈包曰 : 나라 주왕紂王음란淫亂하고, 문왕文王서백西伯이 되어 성덕聖德이 있으니, 천하天下의 3분의 2가 나라에 귀의歸依하였다.
而猶以服事殷이라
그런데도 〈문왕은〉 오히려 나라를 복종服從하여 섬겼다.
故謂之至德이라
그러므로 ‘지극한 ’이라고 이른 것이다.
[疏]‘舜有’至‘已矣’
의 [舜有]에서 [已矣]까지
○正義曰 : 此章論大才難得也.
정의왈正義曰 : 이 은 큰 인재人才를 얻기 어려움을 한 것이다.
‘舜有臣五人而天下治’者, 言帝舜時, 有大才之臣五人, 而天下大治.
[舜有臣五人而天下治] 제순帝舜 때에 대재大才를 지닌 신하 다섯 사람을 두니, 천하天下가 크게 다스려졌다는 말이다.
五人者, 禹也, 稷也, 契也, 皐陶也, 伯益也.
다섯 사람은 고요皐陶백익伯益이다.
‘武王曰 予有亂臣十人’者, 亂, 治也.
[武王曰 予有亂臣十人] 이다.
周武王曰 ‘我有治官之臣十人’者,
나라 무왕武王이 ‘나는 직분을 다하는 신하 열 사람을 두었다.’고 하였으니,
謂周公旦也, 召公奭也, 太公望也, 畢公也, 榮公也, 太顚也, 閎夭也, 散宜生也, 南宮适也,
주공周公 소공召公 태공太公 필공畢公영공榮公태전太顚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남궁괄南宮适을 이르고,
其一人, 謂文母也.
나머지 한 사람은 문모文母를 이른다.
‘孔子曰 才難 不其然乎 唐虞之際 於斯爲盛 有婦人焉 九人而已’者, 記者擧舜及武王之時大才之人於上, 遂載孔子之言於下.
[孔子曰 才難 不其然乎 唐虞之際 於斯爲盛 有婦人焉 九人而已] 이 장을 기록한 자가 무왕武王 때의 큰 인재人才들을 위에 거론하고서, 마침내 그 아래에 공자孔子의 말씀을 기재記載한 것이다.
唐者, 堯號, 虞者, 舜號.
국호國號이고, 국호國號이다.
際者, 堯舜交會之間也.
교체交替하던 사이이다.
斯, 此也.
이다.
言堯舜交會之間, 比於此周, 周最爲盛, 多賢才也, 然尙有一婦人, 其餘九人而已, 大才難得, 豈不然乎.
교체交替하던 사이로부터 이 나라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가장 융성하여 현재賢才가 많았으나 오히려 부인婦人 한 사람이 끼어 있어 그 나머지는 아홉 사람일 뿐이니, 큰 인재人才를 얻기 어렵다는 말이 어찌 옳은 말이 아니냐는 말이다.
‘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者, 此孔子因美周文王有至聖之德也.
[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 이것은 공자孔子께서 이어 나라 문왕文王이 지닌 지성至聖을 찬미하신 것이다.
言殷紂淫亂, 文王爲西伯而有聖德, 天下歸周者三分有二,
나라 주왕紂王음란淫亂하고 문왕文王서백西伯이 되어 성덕聖德이 있으니, 천하天下의 3분의 2가 나라에 귀의歸依하였다.
而猶以服事殷, 故謂之至德也.
그런데도 〈문왕은〉 오히려 나라를 복종服從해 섬겼으므로 ‘지극한 ’이라고 이른 것이다.
[疏]○注 ‘孔曰 禹稷契皐陶伯益’
의 [孔曰 禹稷契皐陶伯益]
○正義曰 : 案史記及舜典, 禹名文命, 鯀之子也.
정의왈正義曰 : 《사기史記》와 《서경書經》 〈순전舜典〉을 고찰하건대, 의 이름은 문명文命이니 (舜이 추방追放사흉四凶 중의 하나)의 아들이다.
舜命作司空, 平水土之官也.
이 그를 임명해 사공司空으로 삼았으니 수토水土를 다스리는 관직이다.
稷名棄, 帝嚳之子也.
의 이름은 이니, 제곡帝嚳의 아들이다.
舜命爲后稷, 布種百穀之官也.
이 그를 임명해 후직后稷으로 삼았으니, 백곡百穀파종播種을 맡는 관직이다.
契亦帝嚳之子也, 佐禹治水有功,
제곡帝嚳의 아들인데, 를 도와 치수治水을 세웠다.
舜命作司徒, 布五敎之官也.
이 그를 임명해 사도司徒로 삼았으니 오교五敎를 펴는 관직이다.
皐陶, 字堅, 顓頊之後.
고요皐陶정견庭堅이니 전욱顓頊의 후손이다.
舜命作士, 理官也.
이 그를 임명해 (刑獄을 담당하는 관원官員)로 삼았으니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관직이다.
伯益, 皐陶之子.
백익伯益고요皐陶의 아들이다.
舜命作虞官, 掌山澤之官也.
이 그를 임명해 우관虞官으로 삼았으니 산택山澤을 맡은 관직이다.
[疏]○注 ‘馬曰’至‘文母’
의 [馬曰]에서 [文母]까지
○正義曰 : 云‘亂 治也’ 釋詁文.
정의왈正義曰 : [亂 治也] 《이아爾雅》 〈석고釋詁〉의 글이다.
云‘十人 謂周公旦以下’者, 先儒相傳爲此說也.
[十人 謂周公旦以下] 선유先儒들이 서로 전해온 설이다.
案史記世家云 “周公名旦, 武王之弟也,
고찰하건대 《사기史記》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에 “주공周公은 이름이 이니 무왕武王의 아우이다.
封於魯, 食菜於周,
나라에 해졌고, 주읍周邑채지采地로 받았다.
謂之周公.”,
그러므로 주공周公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召公名奭, 與周同姓, 封於燕, 食邑於召,
사기史記》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 “소공召公은 이름이 이고 나라와 동성同姓이며, 나라에 해졌고 소읍召邑채지采地로 받았다.
謂之召公.”,
그러므로 소공召公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太公望, 呂尙也, 東海上人.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태공太公 여상呂尙이니 동해東海 사람이다.
其先祖嘗爲, 佐禹平水土, 甚有功, 虞‧夏之際, 封於呂.
그의 선조先祖가 일찍이 사악四岳이 되어 를 도와 수토水土를 다스리는 일에 매우 이 있었으므로 나라와 나라의 교체기에 여읍呂邑해졌다.
本姓姜氏, 從其封姓
본래의 강씨姜氏였으나 봉읍封邑의 이름을 따라 으로 삼았다.
, 故曰呂尙.
그러므로 여상呂尙이라 한 것이다.
呂尙蓋嘗窮困, 年老矣, 以釣奸周西伯.
여상呂尙은 일찍이 곤궁困窮하였고 나이도 늙었는데, 낚시질을 하다가 나라 서백西伯(文王)을 만났다.
西伯將獵, 卜之, 曰‘所獲, 非龍非彲, 非虎非熊, 所獲, 霸王之輔.’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가려 할 때 을 치니 그 점괘에 ‘잡는 것은 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며,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니니, 얻는 것은 패왕霸王보좌輔佐이다.’라고 하였다.
於是周西伯獵, 果遇太公於渭之陽, 與語大說, 曰 ‘自吾曰 「當有聖人適周, 周以興.」 子眞是邪.
이에 나라 서백西伯은 사냥을 나갔다가 과연 위수渭水 북쪽에서 태공太公을 만나 그와 이야기를 해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의 선군先君 태공太公께서 ‘성인聖人이 나타나 나라로 올 것인데, 나라는 그로 인해 흥성興盛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대가 참으로 그 사람인가?
吾太公望子久矣.’
우리 태공太公께서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이오.’라고 하였다.
故號之曰太公望, 載與俱歸, 立爲太師.”
그러므로 그를 ‘태공太公 ’이라 호칭號稱하고서, 그를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와 태사太師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劉向別錄曰 “師之, 尙之, 父之,
유향劉向의 《별록別錄》에 “그를 스승으로 삼고서 존숭尊崇[尙]하여 아버지처럼 여겼다.
故曰師尙父.” 父亦男子之美號.
그러므로 그를 ‘사상보師尙父’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또한 남자男子미칭美稱이다.
孫子兵法曰 “周之興也, 呂牙在殷.” 則牙又是其名字.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나라가 일어날 때 여아呂牙나라에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또한 그의 이름이다.
武王已平商而王天下, 封師尙父於齊.
무왕武王나라를 평정平定하고 천하天下이 된 뒤에 사상보師尙父나라에 하였다.
畢‧榮, 皆國名, 入爲天子公卿.
은 모두 국명國名인데, 나라 조정에 들어와 천자天子공경公卿이 되었다.
畢公, 文王庶子.
필공畢公문왕文王서자庶子이다.
太‧閎‧散‧南宮, 皆氏. 顚‧夭‧宜生‧适, 皆名也.
남궁南宮은 모두 이고, 의생宜生은 모두 이름이다.
文母, 文王之后大姒也. 從夫之諡, 武王之母, 謂之文母.
문모文母문왕文王태사太姒이니, 남편의 시호諡號을 따르고 무왕武王모후母后였으므로 문모文母라 한 것이다.
周南‧召南言后妃夫人者, 皆是也.
시경詩經》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에 말한 후비后妃부인夫人은 모두 이 사람(太姒)이다.
[疏]○注 ‘孔曰’至‘然乎’
의 [孔曰]에서 [然乎]까지
○正義曰 : 云 ‘唐者 堯號 虞者 舜號’者, 史記諸書, 皆言“堯帝嚳之子, 帝摰之弟.
정의왈正義曰 : [唐者 堯號 虞者 舜號] 《사기史記》 등 여러 서적書籍에 모두 “제곡帝嚳의 아들이고, 제지帝摰의 아우이다.
嚳崩, 摰立, 摰崩, 乃傳位於堯.”
이 죽자 가 즉위하였고, 가 죽자 마침내 에게 제위帝位를 전하였다.”라고 하였다.
“堯年十六, 以唐侯升爲天子.” 遂以爲號,
서전書傳》에 “가 16당후唐侯로서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랐다.”라고 하였으니, 〈천자天子가 된 뒤에〉 드디어 국호國號로 삼은 것이다.
或謂之陶唐氏.
도당씨陶唐氏로 칭하기도 한다.
書曰 “惟彼陶唐.” 世本云 “帝堯爲陶唐氏”. 韋昭云 “陶唐皆國名, 猶湯稱殷商也.”
서경書經》에 “저 도당陶唐으로부터[惟彼陶唐]”라고 하였고, 《세본世本》에 “제요帝堯도당씨陶唐氏이다.”라고 하였으며, 위소韋昭는 “은 모두 국명國名이니, 은상殷商으로 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案經傳, 契居商, 故湯以商爲國號. 後盤庚遷殷, 故殷‧商雙擧.
경전經傳을 고찰하건대, (殷나라의 시조始祖)이 에 살았기 때문에 국호國號로 삼았고, 뒤에 반경盤庚으로 천도遷都하였기 때문에 을 함께 들어 국호로 사용한 것이다.
歷檢書傳, 未聞帝堯居陶, 而以陶冠唐, 蓋以二字爲名, 所稱或單或複也.
그러나 《서전書傳》을 두루 고검考檢해보아도 제요帝堯에 살았다는 기록을 보지 못하였는데, ‘’字를 ‘’字 위에 씌웠으니, 아마도 이는 두 글자를 국명國名으로 삼고서 국명國名할 때 혹 한 자로 하기도 하고 혹 두 자로 하기도 한 것인 듯하다.
舜之爲虞, 猶禹之爲夏.
라 한 것은 라 한 것과 같다.
稱禹氏曰有夏, 則舜氏曰有虞.
외전外傳》에 우씨禹氏를 ‘유하有夏’로 하였으니, 그렇다면 순씨舜氏가 ‘유우有虞’였음을 알 수 있다.
已來, 地爲國號, 而舜有天下, 號曰有虞氏, 是地名也.
전욱顓頊 이래로 지명地名국호國號로 삼았는데, 천하天下를 소유하고서 국호國號를 ‘유우씨有虞氏’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지명을 국호로 삼은 것이다.
王肅云 “虞, 地也.”
왕숙王肅은 “는 지명이다.”라고 하였다.
皇甫謐云 “堯以二女妻舜, 封之於虞, 今河東太陽山西虞地是也.”
황보밀皇甫謐은 “가 두 딸을 의 아내로 주고서 하였으니, 지금의 하동河東 태양산太陽山 서쪽의 우지虞地가 바로 그곳이다.”라고 하였다.
然則舜居虞地, 以虞爲氏.
그렇다면 땅에 살면서 로 삼은 것이다.
堯封之虞, 爲諸侯. 及王天下, 遂爲天子之號,
하여 제후諸侯로 삼았는데, 천자天子가 되자 마침내 〈를〉 천자국天子國국호國號로 삼은 것이다.
故從微至著, 常稱虞氏.
그러므로 미천微賤했을 때부터 천자天子가 된 뒤에까지 항상 우씨虞氏한 것이다.
[疏]○注 ‘包曰’至‘至德’
의 [包曰]에서 [至德]까지
○正義曰 : 云‘殷紂淫亂’者, 紂爲淫亂, 書傳備言, 若泰誓云“沈湎冒色, 敢行暴虐”之類是也.
정의왈正義曰 : [殷紂淫亂] 주왕紂王음란淫亂했던 것은 《서전書傳》에 자세히 말하였으니, 이를테면 《서경書經》 〈주서周書 태서泰誓〉에 “술에 빠지고 여색女色을 탐하여 포학暴虐자행恣行하였다.[沈湎冒色 敢行暴虐]”고 한 가 그것이다.
云‘文王爲西伯而有聖德’者, 鄭玄詩譜云 “周之先公曰太王者, 避狄難, 自豳始遷焉, 而脩德建王業.
[文王爲西伯而有聖德] 정현鄭玄의 《모시보毛詩譜》에 “나라의 선공先公 태왕太王적인狄人을 피해 에서 비로소 〈기산岐山 밑으로〉 옮겨와서 을 닦아 왕업王業을 세웠다.
商王帝乙之初, 命其子王季爲西伯. 至紂, 又命文王典治南國之諸侯.” 是謂文王繼父之業爲西伯也.
상왕商王 제을帝乙초기初期태왕太王의 아들 왕계王季를 임명하여 서백西伯으로 삼았고, 주왕紂王에 이르러 또 문왕文王을 임명하여 남방南方강한江漢여분汝墳 일대의 제후국諸侯國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문왕文王이 아버지의 사업事業을 계승하여 서백西伯이 된 것을 말한 것이다.
殷之州長曰伯, 謂爲雍州伯也.
나라 때에 장관長官이라 하였으니, 옹주雍州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周禮 “作牧.” 殷之州牧, 蓋亦八命.
주례周禮》 〈춘관春官 대종백大宗伯〉에 “팔명八命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나라의 주목州牧팔명八命이었을 것이다.
如旱麓傳云 “.”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의 모전毛傳에 “구명九命이 된 뒤에 거창秬鬯규찬圭瓚을 하사받았다.”라고 한 것과 같다.
孔叢云 “羊容問於子思曰 ‘古之帝王中分天下, 二公治之, 謂之二伯.
공총자孔叢子》에 “양용羊容자사子思에게 ‘옛날 제왕帝王천하天下반분半分하여 이공二公에게 다스리게 하고서 그들을 이백二伯이라 하였습니다.
周自后稷封爲王者之後, 大王‧王季皆爲諸侯, 奚得爲西伯乎.’
후직后稷하여 이 되게 한 뒤로 태왕太王왕계王季가 모두 제후諸侯가 되었으니, 어찌 서백西伯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묻자,
子思曰 ‘吾聞諸子夏云 「殷王帝乙之時, 王季以九命作伯於西, 受圭瓚秬鬯之錫,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내가 자하子夏에게 들으니, 은왕殷王 제을帝乙 때에 왕계王季구명九命으로 서방西方이 되어 규찬圭瓚거창秬鬯하사下賜받았다.
故文王因之, 得專征伐.」’”
그러므로 문왕文王이 이어받아 마음대로 정벌征伐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諸侯爲伯, 猶周‧召分陝.
이는 제후諸侯로서 이 되었음을 말한 것이니, 주공周公소공召公섬서陝西 지역을 나누어 다스렸던 것과 같다.
皇甫謐亦云 “王季於帝乙殷王之時, 賜九命爲西長, 始受圭瓚秬鬯.” 皆以爲王季受九命作東西大伯.
황보밀皇甫謐은 또 “왕계王季은왕殷王 제을帝乙 때에 구명九命을 받아 서장西長(西伯)이 되어 비로소 규찬圭瓚거창秬鬯을 받았다.”라고 하였으니, 모두 왕계王季구명九命을 받아 동서東西대백大伯이 된 것으로 여긴 것이다.
鄭不見孔叢之書, 旱麓之箋不言九命, 則以王季爲州伯也.
정현鄭玄은 《공총자孔叢子》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록旱麓〉의 구명九命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왕계王季주백州伯으로 여긴 것이다.
文王亦爲州伯, 故西伯戡黎注云 “文王爲雍州之伯, 南兼梁‧荊, 在西,
문왕文王 역시 주백州伯이 되었기 때문에 《서경書經》 〈상서尙書 서백감려西伯戡黎〉의 에 “문왕文王옹주雍州이 되어 남쪽으로 양주梁州형주荊州를 아울러 다스리며 서쪽에 있었다.
故曰西伯.”
그러므로 서백西伯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文王之德, 優於王季, 文王尙爲州伯, 明王季亦爲州伯也.
문왕文王왕계王季보다 우수했는데도 문왕文王이 오히려 주백州伯이 되었으니, 왕계王季 역시 주백州伯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楚辭天問曰 “伯昌號衰, 秉鞭作牧.” 王逸注云 “伯, 謂文王也.
초사楚辭》 〈천문天問〉에 “백창伯昌호령號令하자 채찍을 잡고 이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왕일王逸에 “문왕文王을 이른다.
鞭以喩政, 言紂號令旣衰, 文王執鞭持政, 爲雍州牧.”
채찍은 정치政治를 비유한 것이니, 주왕紂王호령號令해진 뒤에 문왕文王이 채찍을 잡고 정치政治를 맡아 옹주목雍州牧이 되었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天問, 屈原所作, 去聖未遠, 謂文王爲牧, 明非大伯也.
천문天問〉은 굴원屈原이 지은 것이다 〈굴원屈原의 시대가〉 성인聖人의 시대와 멀지 않았는데 ‘문왕文王이 되었다.’고 말하였으니, 대백大伯이 아님이 분명하다.
所以不從毛說.
그러므로 모설毛說을 따르지 않았다.
言‘至紂 又命文王’者, 旣以繼父爲伯, 又命之使兼治南國江漢汝墳之諸侯.
[至紂 又命文王] 이미 부친의 뒤를 이어 이 되었는데, 또 문왕에게 명하여 남국南國강한江漢여분汝墳 일대一帶제후諸侯들을 아울러 다스리게 한 것이다.
周本紀云 “季歷娶大任, 生昌, 有聖瑞.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계력季歷태임太任을 아내로 맞아 을 낳았는데, 성왕聖王이 될 상서祥瑞가 있었다.
古公曰 ‘我世當有興者, 其在昌乎.’” 後果受命爲文王也.
고공古公이 말하기를 ‘내 에 응당 나라를 흥성시킬 자가 나올 것이니, 아마 일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뒤에 과연 천명天命을 받아 문왕文王이 되었다.
云‘天下歸周者三分有二 而猶服事殷’者, 鄭玄又云 “於時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天下歸周者三分有二 而猶服事殷] 정현鄭玄이 또 말하기를 “당시當時천하天下의 3분의 2를 소유所有하고서도 나라를 복종服從하여 섬겼다.
故雍‧梁‧荊‧豫‧徐‧楊之人, 咸被其德而從之.”
그러므로 옹주雍州양주梁州형주荊州예주豫州서주徐州양주楊州 사람들이 모두 그 덕화德化를 입어 문왕文王을 따랐다.”라고 하였다.
鄭旣引論語三分有二, 故據禹貢州名, 指而言之, 雍‧梁‧荊‧豫‧徐‧楊歸文王, 其餘冀‧靑‧兗屬紂.
정현鄭玄은 이미 《논어論語》의 ‘삼분유이三分有二’를 인용引用하였기 때문에, 《서경書經》 〈하서夏書 우공禹貢〉의 주명州名에 의거해 〈주명州名을〉 지적해 말하여, 옹주雍州양주梁州형주荊州예주豫州서주徐州양주楊州문왕文王에게 귀의歸依하였고, 그 나머지 기주冀州청주靑州연주兗州주왕紂王에게 하였다고 한 것이다.
九州而有其六, 是爲三分有其二也.
9 가운데 6를 소유했으니, 이것이 천하天下의 3분의 2를 소유한 것이다.
書傳云 “文王率諸侯以事紂.” 是猶服事殷也.
서전書傳》에 “문왕文王제후諸侯들을 거느리고 주왕紂王을 섬겼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오히려 나라에 복종하여 섬긴 것이다.
紂惡貫盈, 文王不忍誅伐, 猶服事之,
주왕紂王죄악罪惡극한極限에 도달하였으되 문왕文王은 차마 정벌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종하여 섬겼다.
故謂之至德也.
그러므로 ‘지극한 ’이라 한 것이다.
역주
역주1 (廷)[庭] : 저본에는 ‘廷’으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北監本과 毛本에는 ‘廷’이 ‘庭’으로 되어 있으니, 옳다.”라고 한 것에 의거해 ‘庭’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四岳 : 堯舜시대에 四嶽(泰山‧華山‧衡山‧恒山) 아래의 諸侯들을 관리하던 官名이다.
역주3 (魚)[漁] : 저본에는 ‘魚’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毛本에는 ‘魚’가 ‘漁’로 되어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해 ‘漁’로 바로잡았다.
역주4 先君太公 : 太公은 부친이나 祖父를 칭하는 말이니, 太王이나 王季를 일컫는 것인 듯하다.
역주5 書傳 : 《尙書》의 孔傳, 僞書로 일컬어지는 《孔安國傳》을 가리킨다. 여기에 인용된 구절은 〈堯典〉의 “帝曰 咨 四岳 朕在位七十載”에 대한 孔傳의 내용이다. 《尙書正義 堯典》
역주6 外傳 : 本傳 이외의 傳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컨대 《春秋左氏傳》을 內傳이라 하고 《國語》를 外傳이라 하는 類이다. 그러나 “稱禹氏曰有夏……是地名也”가 어느 外傳의 말인지는 未詳이다.
역주7 (如)[知] : 저본에는 ‘如’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孫志祖가 이르기를 ‘如는 마땅히 知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知’로 바로잡았다.
역주8 顓頊 : 五帝의 한 사람으로, 黃帝의 孫子 高陽氏이다. 《史記 五帝本紀》
역주9 江漢汝墳 : 江漢은 長江과 漢水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 汝墳은 汝水의 제방인데 그 주변 지역을 말한다. 《毛詩譜》에는 ‘汝旁’으로 되어있다. 아래도 마찬가지이다.
역주10 八命 : 周代 아홉 등급의 官職 중 두 번째 높은 등급으로, 三公과 州牧의 직책을 맡았다. 《周禮 春官 大宗伯》
역주11 九命然後錫以秬鬯圭瓚 : 九命은 周代 아홉 등급의 官職 중 가장 높은 등급으로 上公의 직위에 해당한다. 秬鬯은 울금향을 달인 물에 검은 기장을 담가 빚은 술로, 고대에 祭祀 지낼 때에 降神과 功이 있는 諸侯에게 下賜하는 물품으로 사용하였다. 圭瓚은 玉瓚이라고도 하는데, 자루를 圭玉으로 만든 것이다. 祭祀에 술을 뜨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역주12 (而)[使] : 저본에는 ‘而’로 되어있으나, 阮刻本에 “《孔叢子》에는 ‘而’가 ‘使’로 되어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使’로 바로잡았다.
역주13 [以] : 저본에는 없으나, 阮刻本에 “《孔叢子》에는 ‘此’ 밑에 ‘以’字가 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논어주소(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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