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 : 此章孔子乘間四弟子侍坐, 因使各言其志, 以觀其器能也.
‘子路曾晳冉有公西華侍坐’者, 時孔子坐, 四子侍側, 亦皆坐也.
‘子曰 以吾一日長乎爾 毋吾以也’者, 孔子將發問, 先以此言誘掖之也.
‘居則曰不吾知也 如或知爾 則何以哉’者, 此問辭也.
言女常居則云己有才能, 人不我知. 設如有人知女, 將欲用之, 則女將何以爲治.
‘子路率爾而對’者, 子路性剛, 故率爾先三人而對也.
‘千乘之國 攝乎大國之間 加之以師旅 因之以饑饉 由也爲之 比及三年 可使有勇 且知方也’者. 此子路所志也.
言若有公侯之國, 迫於大國之間, 又加之以師旅侵伐, 復因之以飢饉民困, 而由也治之, 比至三年以來, 可使其民有勇敢且知義方也.
‘求 爾何如’者, 子路旣對, 三子無言, 故孔子復歷問之. 冉求, 爾志何如.
‘對曰 方六七十 如五六十 求也爲之 比及三年 可使足民 如其禮樂 以俟君子’者, 此冉求之志也.
求也治此小國, 比及三年以來, 使足民衣食, 若禮樂之化, 當以待君子. 此謙辭也.
‘對曰 非曰能之 願學焉 宗廟之事 如會同 端章甫 願爲小相焉’者, 此赤
之志也.
我非自言能之, 願學爲焉. 宗廟祭祀之事, 如有諸侯會同, 及諸侯衣玄端, 冠章甫, 日視朝之時, 己願爲其小相君之禮焉.
‘鼓瑟希’者, 時曾晳方鼓瑟, 承師之問, 思所以對,
未敢言其志, 先對此辭, 言己之所志, 異乎三子者所陳爲政之具也.
‘子曰 何傷乎亦各言其志也’者, 孔子見曾暫持謙, 難其對, 故以此言誘之曰 “於義何傷乎,
‘曰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者, 此曾點所志也.
我欲得與二十以上冠者五六人, 十九以下童子六七人, 浴乎沂水之上, 風涼於舞雩之下, 歌詠先王之道, 而歸夫子之門也.
夫子聞其樂道, 故喟然而歎曰 “吾與點之志.” 善其獨知時, 而不求爲政也.
‘三子者出 曾晳後’者, 子路‧冉有‧公西華三子先出, 曾晳後, 猶侍坐於夫子也.
‘曾晳曰 夫三子者之言何如’者, 曾晳在後, 問於夫子曰 “夫三子者適各言其志, 其言是非何如也.”
‘子曰 亦各言其志也已矣’者, 言三子亦各言其所志而已, 無他別是非也.
‘曰夫子何哂由也’者, 曾晳又問夫子曰 “旣三子各言其志, 何獨笑仲由也.”
‘曰 爲國以禮 其言不讓 是故哂之’者, 此夫子爲說哂之意.
‘唯求也則非邦也與 安見方六七十 如五六十而非邦也者 唯赤則非邦也與 宗廟會同 非諸侯而何’者, 此夫子又言不哂其子路欲爲諸侯之事,
故擧二子所言, 明皆諸侯之事, 與子路同, 其言讓, 故不笑之, 徒笑其子路不讓耳.
‘赤也爲之小 孰能爲之大’者, 此夫子又言, 公西華之才堪爲大相. 今赤謙言小相耳. 若赤也爲之小相, 更誰能爲大相.
疏
○正義曰 : 云‘宗廟之事 謂祭祀也’者, 謂禴‧祀‧烝‧嘗, 及追享‧朝享‧禘祫之類皆是也.
云‘諸侯時見曰會 殷頫曰同’者, 周禮春官大宗伯職文,
朝禮旣畢, 王亦爲壇, 合諸侯以命政焉. 所命之政,
王巡守.
云‘端 玄端也 衣玄端 冠章甫 諸侯日視朝之服’者, 其衣正幅染之玄色, 故曰玄端.
案王制云 “周人玄衣而養老” 注云 “玄衣, 素裳.”
若以素爲裳, 卽是朝服. 此朝服素裳皆得謂之玄端,
若上士以玄爲裳, 中士以黃爲裳, 下士以雜色爲裳, 天子‧諸侯以朱爲裳, 則皆謂之玄端, 不得名爲朝服也.
案周禮秋官司儀職云 “掌九儀之賓客擯相之禮, 以詔儀容‧辭令‧揖讓之節.”
每門止一相” 注曰 “相, 爲主君擯者及賓之介也.
介紹而傳命者, 君子於其所尊, 不敢質, 敬之至也.
玉藻曰 “君入門, 介拂闑, 大夫中棖與闑之間, 上介拂棖.” 則卿爲上介, 大夫爲次介, 士爲末介也.
此云願爲小相者, 謙不敢爲上擯‧上介之卿, 願爲承擯‧紹擯‧次介‧末介之大夫士耳.
疏
○정의왈正義曰 : 이 장은 공자孔子께서 네 제자가 곁에서 모시고 앉아 있는 기회를 이용해 각각 그들의 뜻을 말하게 하여 그들의 기량器量과 재능才能을 보려 하신 것이다.
[子路曾晳冉有公西華侍坐] 이때 공자孔子께서 앉아 계시니, 곁에서 모시는 네 제자도 모두 앉은 것이다.
[子曰 以吾一日長乎爾 毋吾以也] 공자孔子께서 그들의 뜻을 물으시려고 먼저 이렇게 말씀하시어 그들의 대답을 유도誘導하신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모시고 있을 때에 내 나이가 너희들보다 어른이라 하여 〈너희들은〉 겸양하여 말을 적게 한다.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묻겠으니, 너희들은 내가 어른이라 하여 대답하기를 어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居則曰不吾知也 如或知爾 則何以哉] 이것은 물으신 말씀이다.
“너희들이 평소에 ‘나에게 재능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들 하였으니, 만약 어떤 사람이 너희들을 알아보고서 등용하려 한다면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정치를 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子路率爾而對] 자로子路는 성품이 강剛하기 때문에 세 사람에 앞서 성큼 대답한 것이다.
[千乘之國 攝乎大國之間 加之以師旅 因之以饑饉 由也爲之 比及三年 可使有勇 且知方也] 이것은 자로子路가 뜻한 바이다.
곡식이 성숙成熟하지 않는 것을 ‘기飢’라 하고, 채소가 성숙하지 않는 것을 ‘근饉’이라 한다.
만약 공公ㆍ侯의 나라가 큰 나라 사이에 끼어 핍박을 받고, 게다가 또 외국外國 군대의 침공侵攻이 있고, 다시 이어 기근飢饉이 들어 백성들이 곤란을 겪는다면 제가 그 나라를 다스린다면 3년에 이른 뒤에는 그 백성들로 하여금 용감勇敢한 〈기개氣槪를〉 가지게 하고, 또 의로운 방도를 알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夫子哂之] 신哂은 웃음이니, 부자夫子께서 웃으신 것이다.
[求 爾何如] 자로子路는 이미 대답하였으나, 세 사람은 말이 없기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다시 차례로 묻기를 “염구冉求야 너의 뜻은 어떠하냐?”라고 한 것이다.
[對曰 方六七十 如五六十 求也爲之 比及三年 可使足民 如其禮樂 以俟君子] 이것은 염구冉求의 뜻이다.
염구冉求는 성품이 겸손하기 때문에 사방 6, 7십 리나 혹은 5, 6십 리가 되는 작은 나라를 얻어서 다스리고자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제가 이런 작은 나라를 다스린다면 3년에 이른 뒤에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할 수 있을 뿐이고, 예악禮樂의 교화敎化라면 군자를 기다리겠다.’고 말한 것이니, 이것은 겸사謙辭이다.
[赤 爾何如] 또 공서화公西華에게 물으신 것이다.
[對曰 非曰能之 願學焉 宗廟之事 如會同 端章甫 願爲小相焉] 이것은 적赤의 뜻이다.
자신이 스스로 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배우기를 원하는 것이니, 종묘宗廟에 제사祭祀하는 일이 있거나 혹은 제후諸侯가 회동會同하는 일이 있거나 제후諸侯가 현단복玄端服을 입고 장보관章甫冠을 쓰고서 날마다 시조視朝할 때에 자기가 소상小相이 되어 임금의 예禮를 돕기를 원한다고 한 것이다.
[點 爾何如] 또 증석曾晳에게 물으신 것이다.
[鼓瑟希] 이때 증석曾晳은 비파를 퉁기고 있었는데, 스승의 물음을 받고서 대답할 말을 생각하였다.
대답할 말을 생각해냈기 때문에 비파를 내려놓고서 일어나 대답했는데, 비파를 내려놓을 때에 댕그랑 소리가 난 것이다.
[對曰 異乎三子者之撰] 찬撰은 구具(才具)이다.
감히 자기의 뜻을 말할 수 없어 먼저 이 말로 대답한 것이니, 자기가 뜻하는 바는 세 사람이 진술陳述한 정치政治의 재구才具와 다르다는 말이다.
[子曰 何傷乎 亦各言其志也] 공자孔子께서는 증석曾晳이 겸손을 지켜 대답하기 어려워함을 보셨기 때문에 이 말씀으로 그를 유도誘導하기 위해 “의리에 있어 무엇이 해롭겠는가?
또한 각각 자기들의 뜻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시어, 그로 하여금 생각한 대로 뜻하는 바를 말하도록 하신 것이다.
[曰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이것은 증점曾點이 뜻한 바이다.
춘복기성春服旣成은 홑옷이나 겹옷을 입을 때이다.
‘나는 20세 이상의 관자冠者 5, 6인과 19세 이하의 동자童子 6, 7인人을 얻어 함께 기수沂水 가에서 목욕하고 무우단舞雩壇 아래서 바람 쐬고서 선왕先王의 도道를 노래하며 부자夫子의 문하門下로 돌아오고 싶다.’는 말이다.
[夫子喟然歎曰 吾與點也] 위연喟然은 탄식하는 모양이다.
부자夫子께서는 증석曾晳이 도道를 즐기는 뜻을 들으셨기 때문에 위연喟然히 탄식하시면서 “나는 점點의 뜻을 허여許與한다.”고 하셨으니, 그만이 홀로 때를 알아 정치政治하기를 구하지 않은 것을 훌륭하게 여기신 것이다.
[三子者出 曾晳後] 자로子路ㆍ冉有ㆍ公西華 세 사람은 먼저 나가고, 증석曾晳은 뒤에 남아 여전히 부자夫子를 모시고 앉은 것이다.
[曾晳曰 夫三子者之言何如] 증석曾晳이 뒤에 남아서 부자夫子께 “저 세 사람이 마침 각각 자기들의 뜻을 말하였는데, 그 말의 시비是非가 어떻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子曰 亦各言其志也已矣] 세 사람 역시 각각 자기들의 뜻을 말하였을 뿐이니, 특별히 다른 시비是非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曰 夫子何哂由也] 증석曾晳이 또 부자夫子께 “이미 세 사람이 각각 자기의 뜻을 말하였는데, 어째서 유독 중유仲由의 말에 대해서만 웃으셨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曰 爲國以禮 其言不讓 是故哂之] 이것은 부자夫子께서 웃으신 뜻을 설명하신 것이다.
‘나라를 다스림은 예禮로써 하고, 예禮는 겸양謙讓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자로子路는 말을 하면서 겸양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웃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唯求也則非邦也與 安見方六七十 如五六十而非邦也者 唯赤則非邦也與 宗廟會同 非諸侯而何] 이것은 부자夫子께서 또 자로子路가 제후諸侯의 일을 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웃은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말한 것을 들어 모두 제후諸侯의 일인 것은 자로子路와 같으나, 그 말이 겸손하였기 때문에 웃지 않았고, 단지 자로子路의 겸손하지 않은 것만을 웃었을 뿐임을 밝히신 것이다.
[赤也爲之小 孰能爲之大] 이것은 부자夫子께서 또 “공서화公西華의 재능才能이 대상大相을 감당할 만한데, 지금 적赤이 소상小相이 되고자 할 뿐이라고 겸양하였으니, 만약 적赤이 소상小相이 된다면 다시 누가 대상大相이 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 : [宗廟之事 謂祭祀也] 약禴ㆍ祀ㆍ烝ㆍ嘗과 추향追享ㆍ朝享ㆍ禘祫의 유類가 모두 이것(宗廟의 일)이다.
[諸侯時見曰會 殷頫曰同] 《주례周禮》 〈춘관春官 대종백직大宗伯職〉의 글이다.
단지 《주례周禮》에는 ‘은견殷見’으로 되어있는데, 이곳에는 ‘은부殷頫’로 되어있을 뿐이다.
정현鄭玄의 주注에 “이 예禮는 제후諸侯가 왕王에게 조현朝見하는 내용의 글이다.
제후諸侯 중에 순종順從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왕王은 정토征討하기 위해 〈제후諸侯들을 소집召集한다.
제후諸侯들의〉 조근朝覲(諸侯가 천자天子에게 조현朝見하는 것)이 끝나면 왕王은 국문國門 밖에 단壇을 설치하여 제후諸侯들을 모아놓고서 각자에게 맡을 일을 명[命事]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3년에 ‘일이 있으면 회합會合하고 화합和合하지 못하면 결맹結盟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12년 동안 왕王이 만약 순수巡守하지 않으면 육복六服의 제후가 모두 조근朝覲한다.
조례朝禮가 끝나면 왕王은 또 단壇을 설치하여 제후諸侯들을 모아놓고서 정사政事를 명하는데, 명命하는 정사는 왕王의 순수巡守에 관한 일 등이다.
은견殷見은 사방의 제후가 네 철로 나누어 와서 조현朝見함이니, 한 해가 끝나면 사방의 제후가 모두 와서 조현朝見하는 예禮를 마치게 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端 玄端也 衣玄端 冠章甫 諸侯日視朝之服] 그 옷은 정폭正幅을 사용해 짓고, 검은 물을 들였기 때문에 ‘현단玄端’이라 한 것이다.
고찰하건대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주인周人은 현의玄衣를 입고서 양로례養老禮를 거행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현의玄衣는 소상素裳이다.”라고 하였다.
천자天子의 연복燕服은 제후諸侯의 조복朝服이 된다.
저 〈왕제王制〉에 말한 ‘현의玄衣’가 바로 이곳에 말한 현단玄端이다.
흰 천으로 하상下裳을 만들었으면 바로 조복朝服인데, 이 조복朝服의 소상素裳을 모두 현단玄端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곳 주注에 “단端은 현단玄端이다.”라고 한 것이니, 제후諸侯의 조복朝服이다.
상사上士의 경우는 현색玄色으로 하상下裳을 만들고, 중사中士의 경우는 황색黃色으로 하상下裳을 만들고, 하사下士의 경우는 잡색雜色으로 하상下裳을 만들고, 천자天子와 제후諸侯의 경우는 주색朱色으로 하상下裳을 만드니, 이를 모두 현단玄端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조복朝服이라고 명칭名稱할 수는 없다.
고찰하건대, 《주례周禮》 〈추관秋官 사의직司儀職〉에 “사의司儀는 아홉 등급(公ㆍ侯ㆍ伯ㆍ子ㆍ男과 공公ㆍ卿ㆍ大夫ㆍ士)의 빈객賓客을 영접하는 빈상擯相의 예禮를 맡아 〈임금이 지켜야 할〉 의용儀容ㆍ辭令과 읍양揖讓의 절도節度를 왕王에게 고告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나아가서 빈賓을 영접하는 것을 빈擯이라 하고, 들어와서 예禮를 돕는 것을 상相이라 한다.”라고 하였고,
또 “무릇 제공諸公이 서로 빈賓이 되었을 경우, 〈둘째 날 빈賓이 주군主君에게〉 폐幣(圭璋)를 바치는 예禮를 거행할 때에 미쳐서는 〈태조묘太祖廟의 대문 앞에서〉 빈賓‧주主가 빈擯과 개介를 벌여 세워놓고서 〈내방來訪한 제후諸侯가 내방한 이유를 자기의 상개上介에게 전하면 상개는 차개次介에게, 차개는 말개末介에게 전한다. 말개는 다시 이 명을 주국主國의 말빈末擯에게 전하고, 말빈은 차빈次擯에게, 차빈은 상빈上擯에게, 상빈은 이 명을 주군主君에게 전한다.
주군主君은〉 세 차례 사양한 뒤에 수레를 타고 대문을 나가 수레에서 내려 빈賓을 맞이하여 왕림枉臨해준 것에 대해 배사拜謝하면 빈賓은 수레를 타고 앞으로 나와 수레에서 내려 답배答拜한다.
〈그런 뒤에 빈賓‧주主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제후諸侯의 궁宮에는 고문庫門ㆍ雉門ㆍ路門 등 세 문門이 있다. 한 문門을 들어갈 때마다 주군主君이 빈賓에게 먼저 드시라고〉 세 차례 읍하고 빈은 세 차례 사양한다.
한 문을 들어갈 때마다 상相 한 사람씩을 뒤에 떨어뜨려 놓는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상相은 주군主君의 빈擯과 빈賓의 개介이다.
이들을 상相이라고 한 것은 문 밖에서는 응대應對하는 말만을 전할 뿐이지만 문 안으로 들어와서는 예禮로써 고告하고 〈음식을〉 권하기[詔侑] 때문이다.
개介를 벌여 세워놓고서 차례로 이어 명命을 전하게 하는 것은 군자君子는 존경尊敬하는 상대에게 감히 간소簡素[質]하게 대우하지 않음을 보이기 위함이니, 상대를 지극히 공경하는 것이다.
문을 들어갈 때마다 상相 한 사람씩을 뒤에 떨어뜨려 놓는 것은 빈ㆍ주가 더욱 서로 친밀해지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상相은 주군主君의 예禮를 돕는 자를 이른다.
《예기禮記》 〈빙례聘禮〉에 “경卿이 상빈上擯, 대부大夫가 승빈承擯, 사士가 소빈紹擯이 된다.”라고 하였고,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내방來訪한〉 임금이 〈얼서闑西를 경유해〉 문門으로 들어가면 상개上介는 임금의 뒤를 따라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얼闑(문의 중앙에 세운 단목短木)을 스치며 들어가고, 대부大夫는 상개上介의 뒤를 따라 정棖(문설주)과 얼闑의 중간으로 들어가고, 상개上介는 대부의 뒤를 따라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정棖을 스치며 들어간다.”라고 하였으니, 경卿이 상개上介, 대부大夫가 차개次介, 사士가 말개末介이다.
이곳에서 소상小相이 되기를 원한다고 한 것은 겸양하여 감히 상빈上擯이나 상개上介의 경卿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승빈承擯ㆍ紹擯ㆍ次介ㆍ末介의 대부大夫나 사士가 되기를 원한다고만 말한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 : [我欲得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뜻이 벗 10여 인을 취하는 데 있을 뿐이다.
[浴于沂水之上 風涼於舞雩之下] 두예杜預는 “노성魯城 남쪽에 본래부터 기수沂水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두예杜預가 말한 기수沂水가 바로 증점曾點이 말한 기수沂水이다.
기수沂水는 개현蓋縣에서 발원發源하여 남쪽으로 흘러 하비下邳에 이르러 사수泗水로 들어간다.
우雩는 기우제祈雨祭의 명칭이니,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창룡蒼龍이 나타나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정현鄭玄은 “우雩는 우吁(탄식)이니, 탄식하며 비를 청함이다.”라고 하였고, 두예杜預는 “우雩의 뜻은 멂이니, 멀리 백곡百穀을 위해 비를 비는 것인데, 동남童男ㆍ童女를 시켜 춤을 추게 한다.”라고 하였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여무직女巫職〉에 “가뭄이 들면 춤을 추며 우제雩祭를 지낸다.”라고 하였으므로 그곳을 일러 무우舞雩라 한 것이다.
무우舞雩하는 곳에는 단선壇墠과 수목樹木이 있어 휴식休息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우단舞雩壇 아래에서 바람을 쐰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