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논어정의論語正義》 20권은 위魏나라 하안何晏이 주注를 달고 송宋나라 형병邢昺이 소疏를 낸 것이다.
형병邢昺의 자字는 숙명叔明으로 조주曹州 제음濟陰 사람이다.
태평흥국太平興國(송宋 경종景宗의 연호年號. 976~983) 연간年間에 구경급제九經及第로 발탁되어 관위官位가 예부상서禮部尚書에 이르렀다.
그 사적이 《송사宋史》 본전本傳(邢昺傳)에 자세히 실려있다.
이 책은 함평咸平(송宋 진종眞宗의 연호年號) 2년(999)에 형병邢昺에게 명하여 구소舊疏를 개정改定하여 학관學官에 반포하게 한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전각傳刻에 오류誤謬가 매우 많다.
原注
《논어집해論語集解》에 인용한 십삼가十三家를 금본今本에는 각각 ‘모씨某氏’로 기록하였으나,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에는 모두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
고찰하건대, 〈하안何晏이 《논어집해論語集解》를〉 진상進上하면서 아뢴 서문序文 가운데 “제가諸家의 설說 중에 타당한 것을 채집採集하고 그 성명姓名을 기록하였다.”라고 하였고,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에도 “하안何晏의 《집주集注》에는 모두 인명人名을 기록하였으나, 유독 포함包咸만은 ‘포씨包氏’라고 말한 것은 〈하안何晏의 아버지 이름이 함咸인데〉 포함包咸의 이름이 ‘함咸’이여서 하씨가何氏家에서 ‘함咸’을 휘諱하였기 때문에 ‘함咸’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간皇侃의 말은〉 서문序文의 내용과 부합하니, 금본今本에 〈이름을 생략하고 성姓만을 기록한 것은〉 후세에 간행刊行한 판본板本에 생문省文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씨周氏와 주생렬周生烈을 끝내 분별할 수 없으니, 자못 황간본皇侃本에 분별이 있는 것만 못하다.
原注
고찰하건대, 형병邢昺의 소疏 중에도 ‘하씨何氏가 함咸을 휘諱하였다.’라고 한 황간皇侃의 말을 기재記載하고서,
〈서문序文 말미末尾의〉 ‘기기성명記其姓名’이란 구句를 해설한 소疏에 “주注에는 단지 그 성姓만을 기록하였을 뿐인데, 여기에 ‘명名(이름)’字까지 붙여 말한 것은 그 성姓을 드러내어 그 사람을 지칭指稱[名]한 것이지 명名(이름)字를 이른 ‘명名’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형병邢昺이 본 판본에 이미 성姓만 기재되었기 때문에 이런 곡설曲說을 한 것이다.
《칠경맹자고문七經孟子考文》에 “그 나라(日本)에 있는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는 본래 당대唐代에 전래傳來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하나의 증좌證左이다.
그 글(《칠경맹자고문七經孟子考文》)이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에 실린 것과 이동異同이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로 서로 장단長短이 있다.
原注
이를테면 〈학이學而〉篇의 “불환인지불기지不患人之不己知”章에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에는 왕숙王肅의 주注 1조條가 있고, 〈이인里仁〉篇의 “군자지어천하야君子之於天下也”章에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에는 하안何晏의 주注 1조條가 있는데, 금본今本에는 모두 없다.
고염무顧炎武의 《석경고石經考》를 관찰하건대 석경의례교감판石經儀禮校監版에 혹은 경문經文까지 전체의 장절章節이 모두 누락漏落되기까지 하였으니, 그렇다면 금본今本 《논어집해論語集解》의 전각傳刻에 일탈佚脫이 있는 것은 대개 면할 수 없는 바였을 것이다.
그러나 “채옹蔡邕의 《석경논어石經論語》에는 ‘이재소장지내而在蕭牆之內’句에 양본兩本(황본皇本과 형본邢本)을 아울러 존록存錄(載錄)하였다.”는 말이 《예석隷釋》에 보이고, 육덕명陸德明의 《경전석문經典釋文》에는 여러 판본의 이동異同도 모두 아울러 존록存錄하였다.
대체로 당唐나라 이전에는 경사經師가 학설學說을 전수傳授하고 전수傳受받아 각각 자기들의 학설만을 지켜서 비록 경문經文이라도 일치하지 않았으니 주문注文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본래 이 설說을 취해 저 설說을 고칠 필요가 없고, 또 저 설說을 취해 이 설說을 고칠 필요가 없다.
지금 여전히 금본今本에 따라 기록한 것은 각각 그 구설舊說을 존록存錄하기 위함이다.
原注
《송사宋史》 〈예문지藝文志〉에는 형소邢疏(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가 10권이라고 하였는데, 금본今本에 20권이니, 대개 후인後人이 《논어論語》의 편제篇第에 따라 쪼갠 것인 듯하다.
조공무晁公武의 《독서지讀書志》에 “그(邢昺) 또한 황간皇侃이 채록採錄한 제유諸儒의 설說에 의거해 수정修定하여 완성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그 책(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을 살펴보건대, 대체로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의 가지와 넝쿨(불필요한 말들)을 잘라내고 충분하지는 못하나 그런대로 의리義理로써 풀었으니, 이것이 한학漢學이 송학宋學으로 전환轉換하는 관건關鍵이다.
이 소疏(형병邢昺의 《논어주소論語注疏》)가 나오자 황간皇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가 쇠미衰微하였고, 이락伊洛의 학學이 나옴에 미쳐 이 소疏가 또 쇠미衰微하였다.
그러므로 《중흥서목中興書目》에 “그 책이 장구章句와 훈고訓詁와 명물名物에 대해서는 상세하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미언微言에 대해서는 그 해석이 정미精微한 데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먼저 이 소疏가 있음으로 인해 후대後代에 학술學術을 강론講論한 제유諸儒가 물길을 따라 올라가 그 심오深奧한 근원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하신河神에게 먼저 지내고 해신海神에게 뒤에 지내니, 어찌 뒤에 나온 주설註說이 좋다 하여 마침내 옛 주소注疏의 공을 다 버려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