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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1)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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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 題


李相夏(한국고전번역원 교수)

1. 이 책에 대하여


이 책은 《唐宋八大家文抄》에 들어 있는 《宋大家歐陽文忠公文抄》를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唐宋八大家와 《唐宋八大家文抄》를 먼저 소개할 필요가 있다.
唐宋八大家란 唐나라 韓愈, 柳宗元과 宋나라 歐陽脩, 蘇洵, 蘇軾, 蘇轍, 曾鞏, 王安石 등 여덟 명의 저명한 문장가를 지칭하는 말이다.
唐나라 때 韓愈와 柳宗元은 六朝時代 이후 내용이 없고 화려한 四六文에 반대하여 秦漢 이전의 古文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 儒家思想을 바탕으로 한 간결하고 뜻을 충실히 전달하는 문장을 지었다. 이것이 이른바 古文運動이다. 그러나 韓愈와 柳宗元이 세상을 떠나자 고문운동은 기세가 약해지고, 그 반동으로 唐나라 말기부터 다시 六朝時代와 같은 唯美的인 騈儷文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北宋 때에 와서 歐陽脩가 韓愈의 문장을 전범으로 삼아서 알기 쉽고 유려한 문장을 지었고, 韓愈의 영향 아래에 蘇洵, 蘇軾, 蘇轍, 曾鞏, 王安石 등 뛰어난 문장가가 출현하였다.
당송팔대가란 명칭은 宋나라 西山 眞德秀가 처음으로 사용했고, 그 뒤를 이어 唐順之가 팔대가의 문장을 선집하여 《文編》을 편찬했으며, 明나라 茅坤이 바로 이 책의 저본이 되는 《唐宋八大家文抄》 164권을 편찬하였다.
茅坤(1512~1601)은 古文에 조예가 깊었고, 司馬遷과 歐陽脩의 문장을 특히 좋아하였다. 그는 擬古派라 불리는 明나라 때 前後七子들의 ‘文必秦漢論’에 반대하여 王愼中‧唐順之‧歸有光 등과 더불어 唐宋의 古文을 배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文學史에서 이들을 明代의 唐宋派로 일컫는다.
茅坤이 엮은 《唐宋八大家文抄》는 모두 164권인데 《韓愈文抄》 16권, 《柳宗元文抄》 12권, 《歐陽脩文抄》 33권, 《蘇洵文抄》 10권, 《蘇軾文抄》 28권, 《蘇轍文抄》 20권, 《曾鞏文抄》 10권, 《王安石文抄》 20권이다. 이 《唐宋八大家文抄》에는 각 작가의 文抄마다 목록 앞에 서문과 작가의 傳을 실어놓아 작가의 문학세계와 생애의 대강을 알 수 있게 하였으며, 각 작품마다 제목 아래 編者인 茅坤 자신의 評語를 달아놓아 그 작품의 문학적 특징과 要旨를 알 수 있게 해놓았다. 이 책은 실제로 唐宋八大家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淸나라 때 桐城派가 편찬한 《古文約選》, 《古文辭類纂》 등도 이 책을 저본으로 삼았으니, 唐宋 古文의 교재 역할을 톡톡히 하였던 것이다.
《唐宋八大家文抄》는 明나라 萬曆 연간(1573~1619)에 杭州에서 처음 간행되었다. 그 후에 茅坤의 손자인 茅著가 〈五代史抄〉와 〈新唐書抄〉를 추가하고 訂正하여, 崇禎 4년(1631)에 간행한 重刊本이 세상에 유통되었다. 이 책도 중간본이다.
이 책이 간행된 뒤에도 淸나라 때 儲欣의 《唐宋十大家全集錄》, 沈德潛의 《唐宋八家文讀本》 등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유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 《唐宋八大家文抄》이다. 조선시대에 正祖가 이 책을 다시 정선해 《唐宋八子百選》을 편찬하여 문장의 전범으로 삼게 하였고, 일본에서 간행된 《漢文大系》에 실린 沈德潛의 《唐宋八家文讀本》도 이 책을 저본으로 삼은 것이다.
《宋大家歐陽文忠公文抄》는 《唐宋八大家文抄》 중에서 29권부터 60권까지 모두 32권 분량에 해당한다. 歐陽文忠公은 宋나라 歐陽脩(1007~1072)를 가리킨다. 그는 자가 永叔, 호가 醉翁, 만년에는 六一居士라 했으며, 吉州 廬陵 사람이므로 廬陵이라고도 불렀다.
이 책은 科文인 八股體를 짓는 데 도움이 되는 글들을 많이 수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문학적인 글보다 時務를 논한 것이나 論과 같은 글들이 비교적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 책은 첫머리에 〈歐陽文忠公文抄引〉이란 제목으로 편자인 茅坤의 서문이 실려 있고, 그 다음에 〈歐陽文忠公本傳〉이란 제목으로 歐陽脩의 傳이 실려 있어, 그의 문학과 생애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 수 있게 한다. 〈歐陽文忠公文抄引〉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唐書》‧《五代史》를 읽고 따로 鈔本을 만들었는데, 이제 세상에 간행되어 있는 그 문집을 초록하되 황제에게 올린 書‧疏 6편을 첫머리에 싣고, 다음으로 箚子와 狀 53편을 싣고, 다음으로 表‧啓 22편을 싣고, 다음으로 書 25편을 싣고, 다음으로 論 35편을 싣고, 다음으로 序 31편과 傳 2편을 싣고, 다음으로 記 25편을 싣고, 다음으로 神道碑銘‧墓誌銘 47편을 싣고, 다음으로 墓表‧祭文‧行狀 23편을 싣고, 다음으로 頌‧賦와 기타 雜文 10편을 실어, 이를 정리하여 32권으로 만들었다.

현재 유통되는 책은 처음 茅坤이 편찬했을 때와는 체제와 卷數가 조금 다른데 이는 茅坤의 손자 茅著가 수정‧보완하여 중간본을 간행하면서 그렇게 된 듯하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매 편마다 모곤의 評이 있고, 또 역자가 제목에 註를 달아서 간략히 설명해두었으므로, 여기서는 중요한 작품들만 소개한다.
1권의 〈通進司上皇帝書〉와 〈準詔言事上書〉 2편의 上書에서는 주로 조정의 개혁에 대한 견해를 개진하였다. 여기서 구양수의 정치적 才略과 식견을 알 수 있다. 특히 〈通進司上皇帝書〉는 후대의 문호들로부터 ‘經濟의 大文章’이란 평가를 받았다.
2권에서 8권까지에는 疏, 箚子, 狀 도합 57편이 실려 있다. 이 글들은 조정 관료 또는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대부분 실무에 관해 논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米穀의 漕運, 黃河의 水利, 거란‧西夏와의 國交 및 邊方의 분쟁 등 당대의 급무들이 많다. 이를 통해 구양수의 관리로서의 식견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글들은 宋나라 당대의 실무를 논한 것이라 우리나라 독자의 문학적 흥미를 유발하기는 어렵다.
包拯을 비판을 〈論包拯除三司使上書〉 한 편만 소개한다. 嘉祐 4년(1059), 宋祁를 三司使에 임명하였다. 이때 송기의 형 宋庠이 執政하고 있었으므로 송기를 삼사사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많았다. 이에 송상이 송기를 외직에 내보낼 것을 청하고, 포증을 대신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포증은 송기가 益州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구양수는 이 일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포증이 의리와 절조를 지켜서 임명을 받지 말았어야 옳다고 비판하였다. 청렴하고 강직하여 包靑天으로 널리 알려진 포증을 두고 염치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9권에는 表‧啓 22편이 실려 있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올리는 글들이라 騈儷文으로 되어 있어, 구양수 산문의 특색을 잘 보여주지는 못한다.
10, 11권에는 書簡文 25편이 실려 있다. 서간문에서는 구양수의 교유관계를 알 수 있다. 이 중 〈上范司諫書〉는 당시 司諫으로 있던 范仲淹이 諫言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실망하는 뜻을 말하면서, 범중엄에게 간언을 하도록 재촉한 글이다. 이 글은 韓愈의 〈爭臣論〉에 비견되는 명문장으로 《古文眞寶》에도 실려 있다. 원집인 《文忠集》에는 구양수의 知己인 梅堯臣과 주고받은 편지가 46편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 책에는 한 편도 실려 있지 않다.
12, 13, 14권에는 論 15편이 실려 있다. 구양수의 論 중에서는 〈本論〉, 〈朋黨論〉, 〈縱囚論〉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本論〉은 韓愈의 〈原道〉의 취지를 이은 것으로 上‧中‧下 3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개략은 정치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五事, 즉 財用을 풍족하게 하는 것, 兵力을 강화하는 것, 制度를 바로 세우는 것, 人材를 임용하는 것, 名分을 높이는 것을 중시하고, 禮義로 夷狄을 진압해야 하며,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朋黨論〉에서는 붕당은 군자와 소인 두 가지가 있는데, 소인은 이익을 위해 붕당을 만들기 때문에 이익이 다하면 교제가 멀어지므로 거짓 붕당이고, 군자는 道義를 지키고 忠信을 실천하므로 참된 붕당이라 하였다. 따라서 군주는 군자의 참된 붕당을 장려하고 소인의 거짓 붕당은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縱囚論〉에서는 唐 太宗이 자신의 德治를 과장하기 위해 세상 사람들을 속인 것이라고 하였다. 즉 唐 太宗이 사형수 390명을 모두 풀어주고 기한 안에 와서 사형을 받게 했는데 한 명도 도망친 자 없이 기한 안에 돌아오자, 태종이 사형수들을 모두 사면했다는 것에 대해, 이러한 일은 군자도 하기 어려운데 소인이 했다고 하니, 믿을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朋黨論〉과 〈縱囚論〉은 《古文眞寶》에도 실려 있다.
15, 16권에는 史論 20편이 실려 있는데 이 중에는 〈五代史伶官傳論〉이 유명하다.
17, 18, 19권에는 序 31편, 傳 2편이 실려 있다. 이 중에는 〈梅聖兪詩集序〉, 〈釋秘演詩集序〉, 〈送徐無黨南歸序〉, 〈六一居士傳〉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梅聖兪詩集序〉에서 “대개 세상에 전해지는 시들은 대부분이 옛날 곤궁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다.……대개 곤궁할수록 시가 더욱 좋아지는 것이니, 그렇다면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곤궁한 사람이라야만 시가 좋아지는 것이다.[蓋世所傳詩者 多出於古窮人之辭也……蓋愈窮則愈工 然則非詩之能窮人 殆窮者而後工也]” 한 말은 인구에 회자된다. 〈送徐無黨南歸序〉는 《古文眞寶》에 실려 있다.
20, 21권에는 記 25편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相州晝錦堂記〉, 〈豐樂亭記〉, 〈醉翁亭記〉가 널리 알려진 작품들인데, 그 중에서도 〈醉翁亭記〉가 특히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 23개의 ‘而’자, 21개의 ‘也’자, 18개의 ‘者’자, 14개의 ‘之’자를 써서 독특한 문장을 구사한 것이 큰 특색이다. 朱子가 어떤 사람에게 이 〈취옹정기〉 원고를 구입하였는데, 첫 구절에서 滁州는 사면에 산이 있다는 말을 수십 자로 표현하다가 마지막에 “環滁皆山也” 다섯 자로 압축했다고 한다. 구양수가 얼마나 진지한 자세로 글을 썼는지 알 수 있다. 〈相州晝錦堂記〉, 〈醉翁亭記〉는 《고문진보》에 실려 있다.
22, 23권에는 碑銘 9편이 실려 있고, 24권에서 29권까지에는 墓誌銘 37편이 실려 있고, 30권에는 墓表 12편이 실려 있다. 이 중에 〈瀧岡阡表〉, 〈尹師魯墓誌銘〉, 〈梅聖兪墓誌銘〉, 〈石曼卿墓表〉가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瀧岡阡表〉는 구양수의 아버지 歐陽觀에 대한 墓表이다. 그 첫머리에 “슬프다! 우리 선친께서 세상을 떠나 瀧岡에 안장된 지 60년 만에 그 아들 구양수가 비로소 그 무덤에 墓表를 세우니, 감히 늦게 한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嗚呼 惟我皇考崇公卜吉于瀧岡之六十年 其子修始克表於其阡 非敢緩也 蓋有待也]”로 시작하여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60년 동안 살아온 심정을 절절히 서술하는 한편, 어머니 鄭氏의 말을 빌어서 선친의 청렴하고 인자한 관직 생활을 잘 서술하였다.
〈尹師魯墓誌銘〉에서는 知己인 尹洙에 대해, 당대에 문학과 논변이 뛰어나다는 명망은 있었지만 窮達과 禍福에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절개가 옛 군자에게 손색이 없다는 점은 사람들이 모른다고 하였다.
31권에는 祭文 9편, 行狀 2편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祭尹師魯文〉과 〈祭梅聖兪文〉은 知己인 尹洙와 梅堯臣에 대한 제문이다.
마지막 32권에는 頌, 賦, 雜著 10편이 실려 있다. 이 중에 가을 소리를 생동감 있게 묘사한 〈秋聲賦〉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그리고 〈記舊本韓文後〉, 〈讀李翶文〉, 〈書梅聖兪藁後〉는 당나라 韓愈, 李翶의 산문과 친구인 梅堯臣의 시를 읽고 쓴 글들로 구양수의 문학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2. 歐陽脩의 生涯


구양수는 宋나라 眞宗 景德 4년(1007) 6월 21일 四川省 沔陽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선조는 본래 吉州 廬陵의 望族이었으나 그의 나이 4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의 아버지 歐陽觀은 四川省의 判官이었는데 마음이 선량하여 죄인을 판결할 때에 매우 신중하였고, 무고한 사람을 해칠까 늘 염려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쌓은 음덕이 많았기에 구양수의 어머니는 구양수에게 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나는 네가 앞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네 부친은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으리라고 믿는다.”고 했다 한다.
아버지의 사후에 구양수는 어머니를 따라 백부인 歐陽曄이 推官으로 있는 隨州(지금의 湖北)로 가서 생활하였다. 집안이 가난하여 그의 어머니 鄭氏는 갈대로 땅에 써서 구양수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10세 무렵 구양수는 이웃에게서 책을 빌려 읽으며 혹 손수 베끼기도 했는데, 다 베끼기도 전에 내용을 줄줄 욀 수 있을 정도로 총명하였고, 《昌黎先生文集》 6권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古文에 뜻을 두게 되었다.
구양수는 仁宗 天聖 원년(1023) 17세 때 처음으로 隨州의 鄕試를 보았지만 그의 用韻이 官韻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낙방하였고, 天聖 5년에는 禮部試에 낙방하였다. 天聖 6년, 당시의 名士인 胥偃을 찾아가 자신의 지은 글을 보여주었다. 서언은 구양수의 문장에 감탄하여 구양수를 자신의 문하에 받아들였다. 그해 겨울 구양수는 서언과 함께 宋나라의 수도인 開封으로 갔고, 天聖 7년 봄에 國子監에서 거행한 考試에서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며, 가을에는 國學의 解試에서 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天聖 8년 24세 때 구양수는 정월에 禮部試(進士試)에 수석으로 급제하였고, 3월에는 崇政殿 御試에서 甲科 14等으로 합격하여 將仕郞 試秘書省校書郞 西京留守推官에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낙양에 부임한 구양수는 尹洙, 梅堯臣 등과 사귀며 古文과 詩歌를 지어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고, 스승 胥偃의 딸과 혼인한다. 이때부터 구양수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고문에 깊이 빠져들었다. 27세 때 구양수의 아내가 출산하다가 1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해에 承奉郞으로 승진하였다.
仁宗 景祐 원년(1034), 從8品 宣德郞으로 진급하였고 임기가 차서 낙양에서 襄城으로 돌아왔다. 試大理評事 兼監察御使에 제수되었고, 鎭南軍節度掌書記 館閣校勘에 임명되었다. 諫議大夫 楊大雅의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이듬해 부인 楊氏가 사망하였다.
이제 출세의 길이 열렸으나 구양수는 성품이 質直하여 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였다. 景祐 3년(1036)에 范仲淹이 呂夷簡에게 국정의 폐단을 지적하였다가 朋黨으로 지목당해 饒州로 좌천당하였다. 당시 尹洙 등은 글을 올려 범중엄을 구하려 노력하다가 함께 좌천당하였는데, 정작 知諫院으로 있던 高若訥만은 간언을 올리지 않았고 도리어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구양수가 〈與高司諫書〉란 편지를 보내어 인간의 염치도 모르는 자라고 꾸짖었다가 夷陵縣令으로 좌천당하였다. 후일에 범중엄이 陝西로 나가면서 구양수를 從事官으로 임명하자, 구양수가 웃으면서 “예전의 일이 어찌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한 것이겠습니까. 함께 물러나는 것은 괜찮아도 함께 진출하지는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사양했다.
이 시기에 거의 1,000년에 이르는 정치적 혼란시대를 다룬 역사서인 《五代史記》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엄격하고 공정한 史觀에 입각하여 정치적 소외세력인 순교자, 반란자, 매국노 등에 대해서도 별도의 지면을 할애하여 기술하였으니, 이는 종전에는 없었던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景祐 4년(1037) 31세 때 구양수는 薛奎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 그해 12월 光化軍 乾德令으로 轉任되었다. 34세 때에는 다시 館閣校勘을 맡아서 《崇文總目》을 편수하였고 太子中允으로 전임되었다. 이해 장남 發이 출생했다. 35세 때 《숭문총목》을 완성하고 集賢校理로 전임되었다.
仁宗 慶曆 2년(1042) 4월에 知禮院이 되어 시대의 폐단을 지적하는 글을 올리고 外任을 자청, 滑州通判이 되었다.
慶曆 3년 37세 때 仁宗이 言路를 넓히기 위해 諫官의 수를 늘리면서 구양수 등을 知諫院으로 삼고, 余靖을 右正言으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4월에 구양수는 수도인 開封으로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구양수는 同修起居注에 임명되었고, 불과 한 달 만에 右正言 知制誥에 임명되었다.
慶曆 4년 8월, 龍圖閣直學士 河北轉運按察使에 제수되었고, 11월에는 朝散大夫로 승진하고 信都縣開國子에 봉해져 식읍 5백 호를 하사받았다. 이해 河東路轉運使의 命을 받들고 河東에 갔다. 송나라 개국공신 潘美가 河東 지방을 통수할 때 도적들에게 침략받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변방 백성들에게 이주정책을 펴서, 변방 일대 農地에 농경을 금하고 空地로 비워두었다. 이것을 禁地라고 하는데, 이후로 空地가 매우 광범하게 발생하였다. 이때 구양수가 解禁을 하여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청하였다.
呂夷簡이 재상을 그만두고 간신인 夏竦이 樞密使가 되었는데, 다시 추밀사를 빼앗아 杜衍에게 임명하고, 富弼‧韓琦‧范仲淹 등을 선발해 임용하였다. 이에 강직한 학자인 石介가 〈慶曆聖德詩〉를 지어서 간사한 자를 물리치기 쉽지 않고 어진 이를 등용하기 어려움을 말하면서 은근히 하송을 지목하자, 하송이 노하여 자기편들과 합세하여 黨論을 조작, 범중엄‧두연‧한기 및 구양수를 지목하여 黨人이라 하였다. 구양수가 이에 유명한 〈朋黨論〉을 지어 인종에게 올렸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차남 奕이 출생하였다.
이로부터 구양수는 반대편의 비방과 공격을 받게 되었다. 景祐 2년(1035)에 구양수의 妹夫 張龜正이 세상을 떠나자 구양수의 누이가 어린 딸을 데리고 구양수에게 와서 의지하였다. 10년 뒤인 慶曆 5년(1045)에 어떤 사람이 장귀정의 재산으로 전답을 사서 구양수의 문서로 만들어놓고, 구양수를 지목하여 재물을 탐내어 의리를 배신하였다고 誣告하였다. 이른바 ‘歐陽脩外甥女張氏案’이라는 사건인데, 이로 말미암아 구양수는 知制誥 知滁州로 좌천되었다. 滁州에 있으면서 유명한 〈醉翁亭記〉를 지었다. 이때부터 醉翁이란 호를 쓰기 시작했다.
慶曆 7년에 사면되었고 開國伯에 봉해져 식읍 3백 호를 더 받았다. 이해 삼남 裴가 출생하였다. 그 이듬해 起居舍人 知揚州로 자리를 옮겼다.
仁宗 皇祐 원년(1049), 知穎州로 부임하여 西湖의 경치를 보고 은퇴한 후 이곳에 은거하리라 생각하였다. 이해 4월에 禮部郎中으로 전임하였고, 8월에 龍圖閣直學士로 복직하였다. 이듬해 知應天府를 거쳐 10월에 吏部郎中으로 전임되었다.
皇祐 4년 46세 때 母親 鄭氏가 사망하여 관직을 떠났다. 이듬해 喪期를 마치고 조정에 들어가니, 구양수의 머리털이 하얗게 센 것을 보고 인종이 측은히 여겨 判流內銓에 임명하였다. 이에 구양수가 다시 기용될 것을 두려워한 반대편이 구양수가 내시들을 가려서 도태시킬 것을 청하는 내용의 奏疏를 작성하였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그 奏疏를 위조하였다. 이 주소가 都下에 돌아다니자 내시들이 이를 갈았다. 楊永德이란 자가 무고한 말로 구양수를 中傷, 외직으로 내쫓아 知同州로 보내니, 여론이 억울하게 생각하여 구양수를 구하는 의논이 많았다. 그래서 마침내 구양수를 조정에 머물러두어 翰林學士가 되게 하고 史館修撰에 임명해 《新唐書》를 編修하게 하였다.
인종 至和 2년(1055), 49세 때 知蔡州 右諫議大夫가 되었고, 이듬해 樂安郡開國侯에 봉해졌다. 그 이듬해 51세 때 權知禮部貢擧 禮部侍郞 三班院判官에 제수되었다. 이 시기에 구양수는 조정에 있으면서 천하의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삼았다.
이미 景祐 연간부터 尹洙와 함께 古文을 장려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천하의 학자들에게 고문에 가까운 글을 지으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그리하여 선비들이 모두 고문을 짓게 되었고, 구양수는 드디어 천하 문장의 宗匠이 되었다. 과거시험의 위원장격인 權知貢擧로 있을 때 당시 文風의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이전에 괴벽한 문장을 지어 과거에 급제한 자들을 거의 다 축출하고, 平淡하고 典要한 문장을 추구하여 文風이 크게 바뀌었다.
이때 구양수가 발탁한 인재는 蘇軾‧蘇轍 형제와 曾鞏 등이 있고, 蘇洵‧王安石 등을 조정에 천거하기도 하였다.
嘉祐 3년(1058)에는 龍圖閣學士 權知開封府가 되었다. 包靑天으로 잘 알려진 전임자인 包拯은 위엄으로 開封을 다스렸는데, 구양수는 모든 일을 순리대로 처결하고 위엄을 내세우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묻자, “사람의 재주와 성품은 저마다 장단점이 있으니, 실로 잘하는 것을 버리고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다.” 하였다 한다.
嘉祐 5년 《新唐書》가 완성되자 禮部侍郞에 제수되고 樞密副使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부재상에 해당하는 參知政事가 되었다.
英宗 治平 元年(1064) 58세 때에는 吏部侍郞이 되어 英宗 초년의 親政을 도왔다. 조정에서 토론할 때 옳지 못한 사안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爭執하니, 영종이 구양수를 대면한 자리에서 칭찬하여 말하기를 “성품이 강직하여 사람들의 원망을 피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다.
治平 3년 60세 때부터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고, 61세 때에는 觀文殿學士 刑部尙書로 知亳州가 되었다. 이후 致仕를 청한 것이 여섯 차례였으나 끝내 영종이 따라주지 않아 62세 때에는 兵部尙書로 자리를 옮기고 知靑州가 되었다. 그 후 檢校太保 宣徽南院使 判太原府에 제수되어 세 차례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神宗 熙寧 3년(1070) 64세 때 知蔡州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六一居士란 호를 썼다. 그 이듬해 觀文殿學士 太子少師로 致仕하고, 자신이 그토록 노년을 보내고자 했던 潁州로 돌아왔다.
熙寧 5년 7월에 장남 發 등과 함께 자신의 문집인 《六一居士集》을 編定하고 그달에 세상을 떠났다. 太子太師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文忠이다.
구양수의 생애를 압축하면 宋代 문학에 古文을 다시 도입하고 儒敎의 원리를 통해 政界를 개혁하고자 노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장려하여 키워준 王安石의 新法 중 농민에게 낮은 이자로 대출해주는 靑苗法을 반대하였고, 유교의 원리에 입각하여 당시의 정계를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유능한 인재들을 적극 추천했다. 그는 韓愈의 抑佛政策을 지지했으나 韓愈보다는 온건한 입장이었다.
이 밖에도 역사가로서 구양수는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新五代史》를 편찬하고, 조정에 돌아와서는 宋祁 등과 함께 《新唐書》를 편찬하였다. 金石文 수집을 좋아하여, 《集古録》을 정리하여 사료 편찬에 금석문을 활용하였으며, 畵家로서는 새로운 文人畵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는 역사서 외에도 도합 150권이 넘으며, 그의 서재는 1만 권이 넘는 책과 고대의 문학 유품 및 고고학 자료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3. 歐陽脩의 文學


구양수의 문학은, 文에서는 韓愈를 계승하여 宋代에 古文運動을 부활시켰고, 詩에서는 형식에 치우치고 섬약한 西崑體의 風格을 지양하고 宋詩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唐宋八大家文抄》의 편자 茅坤은 서문에서 구양수의 문학을 이렇게 논평하였다.

西漢 이래로 太史公 司馬遷만을 유독 일컫는 것은 그 문장이 거침없이 치닫고 비분해 오열하듯 하여 정신을 쏟는 곳에 왕왕 문장을 엮고 서술함에 있어 오묘한 경지를 홀로 얻었기 때문이니, 비유하자면 瀟湘, 洞庭湖 가에서 仙姬를 만났을 때 멀리서 볼 수는 있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수백 년이 지나서 韓昌黎(韓愈)가 나타났으나 그는 문호를 따로 열었다. 그리고 또 3백 년이 지나 歐陽子가 나타났다.
나는 그가 당대의 將相‧學士‧大夫 등의 墓誌‧碑表를 찬술한 것과 《五代史》에서 梁‧唐 두 시대의 本紀 및 기타 명신의 雜傳 등을 찬술한 것을 읽어보았더니, 太史公과 거의 高下를 겨룰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歐陽子가 벗에게 보내 글을 논한 편지에서는 이러한 글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 奏疏와 箚子 같은 글들은 자신의 뜻을 잘 개진하고 利害를 분별하여 오로지 임금을 感悟시키는 것으로 말하자면, 漢나라에서는 晁錯‧賈誼에 비길 만하고 唐나라에서는 魏徵‧陸贄에 비길 만하다. 宋 仁宗이 일찍이 조정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구양수처럼 뛰어난 사람을 어디에서 얻었는가?”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序‧記, 書‧論 같은 글들도 비록 한창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으나, 그 자태가 거침없이 나와 특유의 운치와 文瀾을 이루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一唱三歎’에 여운이 끊이지 않게 한다. 내가 그래서 그의 글을 유독 좋아하여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세상의 문인 학사들 중 태사공의 뛰어난 경지를 얻은 이는 오직 구양자 한 사람뿐이다.’ 하였던 것이다.

구양수의 문장을 司馬遷에 비긴 것은 문장가에게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구양수는 산문뿐 아니라 詩‧賦‧詞 등 모든 문학 장르에 능하였지만, 여기서는 주로 이 책과 관련하여 산문의 특색에 대해 서술하겠다. 구양수의 작품은 송나라 周必大가 편집하여 《歐陽文忠公全集》으로 간행하였는데, 산문은 대략 5백 편에 가깝다. 이에 대한 諸家의 논평을 소개한다.
먼저 蘇洵은 구양수에게 올린 편지에서,

집사의 문장은 여유롭고 曲盡하여 왕복하여 백 구비로 꺾여도 조리가 시원스러워 間斷이 없으며, 기운이 다하고 말이 극도에 이르러 말을 급하게 하고 의론을 남김없이 다할 때에도 느긋하고 한가로워 어렵게 글을 쓰느라 고생하는 태도가 없습니다.…집사의 문장은 孟子‧韓子의 문장이 아니고 歐陽子의 문장입니다.


하였다. 그의 아들 蘇轍은,

공은 문장에 있어서 천부적인 재능이 넉넉하여 상세하고 간략함이 법도에 맞았고, 조용하게 변화하여 聲色을 크게 과장하지 않는데도 이치가 절로 通暢하여 짧은 글이든 큰 논변이든 짓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하였다. 蘇軾은,

구양자는 大道를 논하는 것은 韓愈와 같고, 일을 논하는 것은 陸贄와 같고, 일을 기록하는 것은 司馬遷과 같고, 詩賦는 李白과 같으니, 이는 내 말이 아니라 천하 사람들의 말이다.


하였으니, 여러 大家들의 장점을 集大成했다고 극찬한 것이다. 또한 소식은 “구양자는 오늘날의 韓愈이다.” 하였다.
이 밖에도 구양수의 문장에 대해 논평한 글들을 보면 대체로 문장이 자연스럽고 조리가 통창하며 모든 문체에 두루 능하다고 하였다. 구양수의 산문은 대개 議論 쪽은 浩蕩하고 雄健하며 격조가 높고 기세가 세찬 반면, 抒情 쪽은 감정이 풍부하고 音韻이 그윽하고 맑다고 한다. 이에 대해 曾鞏은 “인위적인 법도를 제거하여 다듬은 흔적 없이 자연스럽다.[絶去刀尺 渾然天成]” 하였고, 韓琦는 “자연스럽게 얻어서……다듬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得之自然……不見痕迹]” 하였다.

구양수 산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曾鞏과 蘇軾이다. 曾鞏의 문장은 風格에서 구양수와 매우 흡사하다. 소식은 구양수의 산문을 더욱 계승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嘉祐 2년(1057) 知貢擧로 있으면서 구양수는 소식의 〈上梅直講書〉를 읽고 감탄하여 “소식의 서찰을 읽으매 나도 모르게 땀이 났다. 통쾌하고 통쾌하도다! 이 늙은이가 그에게 한 걸음을 양보해 길을 비켜주어야겠다. 기쁘고 기쁘다.”
하였다.
구양수는 韓愈를 계승하여 文을 통하여 道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경전 공부를 중시하였고, 경전을 통해 도를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 구양수는 문학 공부에도 매우 심혈을 기울였으며, 문장을 지을 때 修辭를 매우 중시하여 반복해 고치고 다듬었다. 그는 문장을 지음에 있어 三多의 원칙을 주장했으니, 많이 보고 많이 짓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나의 평생 문장은 三上에서 지은 것이 많으니, 말 위와 베게 위와 측간 위에서이다.”
하였다.
위에서 언급했거니와 구양수는 문장에서 平淡하고 典要함을 추구하였는데, 이는 韓愈의 문장을 배운 결과이다. 그리하여 그의 문장은 간결하고 평이하며 자연스럽고 논리적이다. 그는 자신이 문학의 대가일 뿐 아니라 知貢擧, 樞密副使, 參知政事 등 조정의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蘇洵, 蘇軾, 蘇轍, 曾鞏, 王安石 등을 이끌어서 宋代에 古文運動을 주도한 문단의 盟主였다는 점에서도 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4. 우리나라 文學에 끼친 影響


구양수는 거의 모든 문학 장르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만, 그래도 그의 특장은 산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양수의 문집은 늦어도 고려 중기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널리 읽혔던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中宗 때에는 그의 문집인 《居士集》 50권을 국가에서 간행하였으며, 선집인 《歐文抄》도 널리 읽혔다.
구양수와 蘇軾의 서간문을 선별해 모은 《歐蘇手簡》은 世宗이 특히 좋아하였으며, 서간문 학습의 교재로 널리 읽혔다.
뿐만 아니라 구양수의 글이 실려 있는 《古文眞寶》, 《文章軌範》, 《文章正宗》, 《唐宋八大家文抄》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속속 간행되었고, 正祖는 당송팔대가의 고문 100편을 손수 선별하여 《唐宋八子百選》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이는 正祖가 朱子의 서간문 100편을 모아서 《朱書百選》을 편찬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가 당송고문을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구양수의 문장을 배운 사람이 많지만 農巖 金昌協(1651∼1708)은 특히 구양수의 문장에 대한 이해가 깊어 탁월한 논평들을 내었다. 끝으로 구양수 문장에 대한 농암의 총평 몇 가지를 소개한다. 개별 작품에 대한 논평은 각 작품에 가서 인용하기로 한다.


韓愈의 碑誌文은 곧바로 서술하고, 구양수의 비지문은 錯綜하여 서술한다. 韓愈 문장의 체제는 근엄하니 그 뛰어남이 字句를 빚어내는 데 있고, 구양수 문장은 말이 雅馴하니 그 뛰어남이 篇章의 변화에 있다.



韓愈는 文格이 바르고 힘이 크며, 구양수는 운치가 飄逸하고 변화가 원만하다.



韓愈는 《尙書》‧《春秋左氏傳》의 법을 숭상하였고, 구양수는 風騷와 司馬遷의 맛을 얻었다.



韓愈의 글은 鼓舞하여 읽으매 사람으로 하여금 기운이 일게 하며, 구양수의 글은 詠歎하여 읽으매 사람으로 하여금 심취하게 한다.



《詩經》 〈國風〉과 〈離騷〉의 맛으로 문장을 지은 분은 오직 歐陽公뿐이다. 혹자가 “〈豐樂亭記〉, 〈峴山亭記〉 같은 글이 그러한가?” 하기에 “그에 가깝다. 그러나 이 글들뿐 아니라 다른 글들도 대체로 모두 그렇다. 반복하여 영탄하는 곳을 보면 바로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王弇州(명나라 王世貞)는 스스로 班固와 司馬遷을 배웠다고 하고서 碑誌에서 敍事할 때 힘을 다해 摹寫하여 마치 古人을 뒤따라 잡으려는 것처럼 하지만, 기실 宋代의 구양수‧왕안석에 훨씬 못 미친다. 지금 歐陽公이 지은 碑誌들을 읽어보면 綱領을 이끌어내고 요긴한 곳들을 착종하여 갖가지 법을 다 갖추었으며, 간략하면서도 모든 사적을 다 포괄하고 상세하면서도 서술이 번다하지 않으며, 意思는 한가롭되 실정은 곡진히 묘사하였다. 게다가 그 風神이 돋보이는 곳은 왕왕 마치 그림과도 같으니, 鹿門 茅坤이 “태사공 사마천의 정수를 얻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谿谷(張維)의 문장은 전아하고 이치에 맞아 비록 송나라 대가에 가까운 듯하지만 너무 평이하고 완만하다. 송나라 문장으로 구양공 같은 분은 비록 느긋하고 평이하며 부드럽고 느슨한 듯하지만, 奉事나 奏箚에서 利害를 지적하고 사정을 摹寫함이 곡진하고 절실해서 사람의 골수에 파고드는 듯하여, 군주가 들으면 마음을 움직여 開悟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 序‧記‧碑誌‧祭文 등의 글들은 風神이 굳세고 아름다우며 音調가 飄逸하고 跌宕하여 잠깐 사이에 感慨하고 一唱三歎의 여운이 있어, 왕왕 탄식해 한숨을 쉬다 숨이 끊어지려는 듯한 곳이 있다. 이것이 계곡이 미칠 수 없는 까닭이다.
역주
역주1 이미 景祐 연간부터………크게 바뀌었다. : 《唐宋八大家文抄》 〈歐陽文忠公本傳〉, “權知貢擧 文士以新奇相尙 文體大壞 修深革其弊 前以怪僻在高第者 黜之幾盡 務求平淡典要 士人初怨 怒罵譏中 稍信服 已而文格變而復正”
역주2 집사의 문장은………문장입니다. : 《古文眞寶》 後集 7권 〈上歐陽內翰書〉, “執事之文 紆餘委備 往復百折 而條達疎暢 無所間斷 氣盡語極 急言竭論 而容與閒易 無艱難勞苦之態……執事之文 非孟子韓子之文 而歐陽子之文也”
역주3 공은 문장에………못하는 것이 없었다. : 蘇轍 《欒城集》(四庫全書本) 後集 23권 〈歐陽文忠公墓道碑〉, “公之於文 天材有餘 豐約中度 雍容俯仰 不大聲色 而義理自勝 短章大論 施無不可”
역주4 구양자는 大道를………말이다. : 《古文眞寶》 後集 8권 〈六一居士集序〉, “歐陽子論大道似韓愈 論事似陸贄 記事似司馬遷 詩賦似李白 此非余言也 天下之言也”
역주5 이 밖에도………[得之自然……不見痕迹]” 하였다. : 歐陽脩 《文忠集》(四庫全書本) 附錄 3권, 〈墓碣銘 幷序〉.
역주6 소식의 서찰을………기쁘고 기쁘다 : 上同書 149권 〈與梅聖兪書〉, “讀軾書 不覺汗出 快哉快哉 老夫當避路放他出一頭地也 可喜可喜”
역주7 그는 문장을 지음에………것이다. : 陳師道 《後山集》 23권 〈詩話〉, “永叔謂爲文有三多 看多 做多 商量多也”
역주8 나의 평생 문장은………위에서이다. : 《文忠集》 127권 〈歸田錄〉, “余平生所作文章 多在三上 乃馬上枕上厠上也”
역주9 조선 中宗 때에는………널리 읽혔다. : 黃一權, 〈韓國에서의 歐陽脩 산문 전파와 평가에 관한 연구〉, 《中國語文學》 제53집(2009. 6) 193~217쪽 참조.
역주10 韓愈의 碑誌文은………변화에 있다. : 《農巖集》 34권 〈雜識 外篇〉, “韓碑多直敍 歐碑多錯綜 韓體謹嚴 其奇在於句字陶鑄 歐語雅馴 其奇在於篇章變化”
역주11 韓愈는 文格이………원만하다. : 上同, “韓格正而力大 歐調逸而機圓”
역주12 韓愈는 《尙書》………얻었다. : 上同, “韓本尙書左氏之法 歐得風騷太史之旨”
역주13 韓愈의 글은………심취하게 한다. : 上同, “韓文鼓舞 讀之使人氣作 歐文詠歎 讀之使人心醉”
역주14 그에 가깝다………하였다. : 上同, “以國風離騷之旨爲文章 唯歐公爲然 或曰 如豐樂亭峴山亭記之類 是否 曰 近之 然不獨此也 他文大抵皆然 觀其反復詠歎處 卽是”
역주15 게다가 그 風神이………한 말이다. : 上同, “王弇州自謂學班馬 其爲碑誌敍事 極力摹畫 若將以追踵古人 而其實遠不及宋之歐王 今讀歐公諸碑誌 其提挈綱領 錯綜關節 種種有法 簡而能該 詳而不繁 意度閒暇 而情事曲盡 風神生色處 又往往如畫 茅鹿門以爲得太史公之髓者此也”
역주16 谿谷(張維)의 문장은………까닭이다. : 上同, “谿谷之文 典則理致 雖近宋大家 然失之太平緩 宋文如歐公 雖若寬平和緩 而其封事奏箚 指陳利害 摸寫事情 委曲深切 刺骨透髓 令人主聽之 不得不動心開悟 其序記碑誌祭文等文 風神遒麗 音調逸宕 俯仰感慨 一唱三歎 往往有歔欷欲絶處 此所以不可及也”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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