蓋其自傷不得親見聖人之作하고 而傳者失其眞이어늘 莫可考正而云也라
余讀經解
하야 至
하고 又讀今周易有何謂子曰者
하고 至其繫辭
하야는 則又曰聖人設卦
하며
說者言當秦焚書時하야 易以卜筮로 得獨不焚하고 其後漢興에 他書雖出이나 皆多殘缺이어늘 而易經以故獨完이라
然如經解所引은 考於今易亡之하니 豈今易亦有亡者邪아
昔에 孔子門人追記其言하야 作論語하되 書其首必以子曰者는 所以別夫子與弟子之言이요
若文言者夫子自作이면 不應自稱子曰이요 又其作於一時하야 文有次第하니 何假子曰以發之리오
蓋漢之易師가 擇取其文하야 以解卦體하되 至其有所不取하얀 則文斷而不屬이라 故以子曰起之也라
其先言何謂而後言子曰者는 乃講師自爲答問之言爾니 取卦體以爲答也라
然則今易皆出乎講師臨時之說矣니 幸而講師所引者는 得載于篇이로되 不幸其不及引者는 其亡豈不多邪아
歷弟子之相傳하고 經講師之去取하야 不徒存者不完하니 而其僞謬之失을 其可究邪아
是則孔子專指爻辭爲繫辭어늘 而今乃以孔子贊易之文으로 爲上下繫辭者하니 何其謬也아
孔子言聖人設卦繫辭焉이라하니 是斥文王周公之作爲繫辭니
況其文乃槪言易之大體하며 雜論易之諸卦하야 其辭非有所繫하니 不得謂之繫辭也라
然
이면 自漢諸儒
로 已有此名
하니 不知從何而失之也
로다
是皆險怪奇絶하야 非世常言이라 無爲有訓故考證이어늘 而學者出其臆見하야 隨事爲解하니 果得聖人之旨邪아
文言繫辭有可攷者는 其證如此하고 而其非世常言無可攷者를 又可知矣어늘 今徒從夫臆出之說하니 果可盡信之邪아
田何之易
은 傳自孔子
하야 有上下二篇
하고 又有彖象繫辭文言說卦等
하야 而有章句
하니 凡學有章句者
는 皆祖之田氏
라
焦贛之易은 無所傳授하야 自得乎隱者之學하고 專於陰陽占察之術하니 凡學陰陽占察者는 皆祖之焦氏라
惟以彖象文言等十篇으로 解上下經하니 凡以彖象文言等으로 參入卦中者는 皆祖之費氏라
田焦之學
은 廢於漢末
하고 費氏獨興
하야 遞傳至
이라
而王弼所注에 或用康成之說하니 是弼卽鄭本而爲注라
구양공歐陽公이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과 〈문언전文言傳〉이 공자孔子의 글이 아니라고 여긴 것은 바로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서경書經》의 내용을 모두 믿는다면 《서경》이 없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셨다.
대저 맹자는 배우기를 좋아하신 분이니 어찌 유독 《서경》에 있어서만 소홀히 하셨겠는가.
이는 대개 성인聖人께서 지으신 것을 친견親見할 수 없고, 그것을 전한 자가 그 진의眞意를 잃어버렸는데도 고정考正할 길이 없음을 스스로 상심하시어 한 말일 것이다.
내가 《예기禮記》 〈경해經解〉를 읽다가 “털끝만 한 차이로 천 리나 어긋난다.”는 《주역周易》의 말을 인용한 부분에 이르렀고, 또 지금의 《주역》을 읽어보니 “하위何謂(……무슨 말인가?)‧자왈子曰(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부분이 있으며, 〈계사전繫辭傳〉에 이르러서는 또 말하기를 “성인이 괘卦를 만들었다.”
‧“말을 붙였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그 진의眞意를 고찰하고자 하였으나 할 수 없었다.
이런 뒤에야 맹자의 탄식이 격발되는 바가 있어 말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해설하는 자가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분서갱유焚書坑儒하던 때를 당하여 《주역》은 점치는 책[복서卜筮]라는 이유로 홀로 분서焚書되지 않을 수 있었고, 그 뒤 한漢나라가 일어남에 다른 경서들은 비록 세상에 다시 출현했어도 모두 손상되고 결락된 것이 많았으나 《주역》은 앞서의 이유로 홀로 완전할 수 있었다.”라고 한다.
그렇지만 〈경해〉에서 인용한 내용 같은 경우 지금의 《주역》에서 찾아봐도 없으니, 어쩌면 지금의 《주역》에도 망실된 부분이 있는 것인가?
이(지금의 《주역》) 역시 완본完本이 될 수 없다.
옛적에 공자의 문인들이 공자의 말씀을 추후에 기록하여 《논어論語》를 지으면서 구절의 첫머리에 반드시 “자왈子曰”이라고 적은 것은, 부자夫子와 제자弟子의 말을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또 그 말씀은 한 가지 일이 아니며 그 일은 한 때가 아니므로, 문장은 이어지는데 말을 차례 짓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 가지 일이 바뀔 때마다 반드시 “자왈子曰”로 시작한 것이다.
《주역周易》 〈문언전文言傳〉과 같은 경우, 공자께서 직접 지으셨다면 응당 “자왈子曰”이라고 자칭하지 않았을 것이요, 또 한 때에 지어 문장에 차례가 있는 글이니, 어찌 “자왈子曰”로 시작했겠는가.
이에 지금의 《주역》에 실린 〈문언전〉은 공자가 지은 〈문언전〉의 완전한 편篇이 아님을 알겠다.
대개 한漢나라 때 《주역》의 강사講師가 〈문언전〉의 글을 가려 취하여 괘체卦體를 해설하였는데, 취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문장이 끊어져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왈子曰”로 시작한 것이다.
먼저 “하위何謂”라고 말하고서 그 뒤에 “자왈子曰”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강사가 자문자답한 말이니, 괘체卦體를 취하여 답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또한 공양자公羊子와 곡량자穀梁子가 《춘추春秋》에 대한 전傳을 지으면서 먼저 “하何”나 “갈曷”이라고 말하고서 그 뒤에 스승이 전한 내용을 말하여 전문傳文으로 삼은 것과 같다.
그러니 지금 〈계사전繫辭傳 상上〉에 무릇 “자왈子曰”이 있는 부분은 또한 모두 강사의 설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주역》은 모두 강사가 강론할 때에 임하여 했던 말에서 나온 것이니, 다행히 강사가 인용한 내용은 《주역》에 실릴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미처 인용하지 않은 부분은 그 망실된 것이 어찌 많지 않겠는가.
제자들이 서로 전하는 과정을 거치고 강사가 취사선택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비단 남아 있는 것이 불완전해졌을 뿐만이 아니니, 그 착오가 생긴 것들을 궁구해낼 수가 있겠는가.
대저 “계繫”라는 것은 붙이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말을 붙여서 그 길흉을 판단한 것이다.
이 때문에 “효爻”라고 하니, 그 말이 각각 하나의 효爻에 연결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 보면 공자孔子께서는 오로지 효사爻辭를 가리켜 계사繫辭라고 하신 것이거늘, 지금은 이에 공자께서 《주역》에 대해 찬술讚述하신 글을 상上‧하下 〈계사전繫辭傳〉으로 삼았으니, 어찌 그리도 잘못되었는가.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어떤 사람은 문왕文王이 지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주공周公이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성인聖人이 괘卦를 만들고서 말을 붙이셨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문왕과 주공이 지은 것을 가리켜 계사繫辭로 삼은 것이다.
그러니 굳이 다시 공자 자신이 지은 글을 스스로 명명하여 또 계사繫辭라고 할 것이 없다.
더군다나 공자께서 지으신 글은 《주역》의 대체大體를 개괄적으로 말하면서 《주역》의 여러 괘를 섞어 논한 것이어서 그 말을 붙일 곳이 없으니, 계사繫辭라고 부를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한漢나라 유자儒者들에게서부터 이미 이러한 명칭이 있었으니,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한漢나라는 주周나라와 가장 가까운 시기의 나라이니 응당 착오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漢나라에서 계사繫辭라고 했던 것은 지금의 계사繫辭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역》 수괘需卦의 효사爻辭에 이르기를 “피에서 기다림이니 구멍에서 나온다.[수우혈需于血 출자혈出自穴]”라 하고, 간괘艮卦의 효사에 이르기를 “허리에 멈추니 등뼈를 벌여놓았다.[간기한艮其限 열기인列其夤]”라 하고, 규괘睽卦의 효사에 이르기를 “돼지가 진흙을 지고 수레 가득 귀신이 실려 있음을 봄이다.[견시부도見豕負塗 재귀일거載鬼一車]”라 하였다.
이는 모두 험벽하고 기괴하여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아니므로, 훈고訓詁와 고증考證을 할 수 없거늘 학자들이 억측을 하여 일에 따라 풀이를 하니, 과연 성인의 뜻을 얻은 것이겠는가.
〈문언전〉과 〈계사전〉에서 고찰할 수 있는 것들은 그 증좌가 이와 같고, 《주역》은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아니어서 고찰할 수 없다는 것을 또 알 수 있거늘, 지금 한갓 억측에서 나온 설을 따랐으니 과연 다 믿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맹자께서 탄식하신 “없는 것만 못하다.”라는 것이다.
《주역》의 전주傳注가 다른 경전들에 비해 더욱 많으나 왕필王弼에서 그쳤고, 그 뒤에 비록 저술한 자가 있으나 반드시 모두 전해주고 전해받은 것은 아니고, 단지 왕필 때의 것을 전하였을 따름이다.
대저 《주역》은 한漢나라에 이르러 세 가지로 나뉘었으니, 전하田何와 초공焦贛과 비직費直의 《주역》이 있다.
전하田何의 《주역》은 공자로부터 전해져서 상上‧하下 두 편이 있고, 또 〈단전彖傳〉‧〈상전象傳〉‧〈계사전繫辭傳〉‧〈문언전文言傳〉‧〈설괘전說卦傳〉 등이 있어서 저절로 10편이 되고 장구章句를 두었으니, 무릇 장구章句를 둔 학자들은 모두 전씨田氏를 본받은 것이다.
초공焦贛의 《주역》은 전수받은 바가 없어서 은자隱者의 학문에서 자득하였고, 음양陰陽을 점찰占察하는 역술易術을 전공하였으니, 무릇 음양의 이치를 가지고 점찰占察하는 학자들은 모두 초씨焦氏를 본받은 것이다.
비직費直의 《주역》 또한 전수받은 바가 없고 장구章句도 없다.
오직 〈단전彖傳〉‧〈상전象傳〉‧〈문언전文言傳〉 등의 10편으로 상上‧하下 두 편의 경문經文을 풀이하였으니, 무릇 〈단전彖傳〉‧〈상전象傳〉‧〈문언전文言傳〉 등을 괘卦에 섞어 넣은 학자들은 모두 비씨費氏를 본받은 것이다.
전씨田氏와 초씨焦氏의 학문은 한漢나라 말엽에 없어졌고 비씨費氏만이 흥성하여 여러 대를 전하여 정강성鄭康成에 이르렀다.
왕필이 주석한 부분에 정강성鄭康成의 설이 인용되기도 하였으니 왕필이 정강성鄭康成의 판본에 주석을 단 것이다.
지금 세상에 통행되는 것은 오직 왕필의 《주역》이 있을 뿐이니, 그 원류源流는 비씨費氏에게서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