記先春亭하되 却本堤하고 次之以賓客之館而後에 及亭하야 以周單子之言論으로 爲案하니 所謂以經飾吏治라
景祐三年秋에 淸河張侯가 以殿中丞으로 來守泗上하야
旣至에 問民之所素病하야 而治其尤暴者하니 曰暴莫大於淮라
越明年春에 作城之外堤하야 因其舊而廣之하니 度爲萬有九千二百尺이요 用人之力이 八萬五千이라
然人力出於州兵하고 而石出乎南山하야 作大役而民不知하니 是爲政者之私我也라
不出一力而享大利는 不可라하야 相與出米一千三百石하야 以食役者러라
堤成에 高三十三尺이요 土實石堅하야 捍暴備災에 可久而不壞라
於是
에 因前
之亭新之
하야 爲勞餞之所
하야 曰
이라하고
一以視出納하야 曰某亭이라하며 一以爲舟者之寓舍하야 曰通漕亭이라하고
然後曰 吾亦有所休乎인저하고 乃築州署之東城上爲先春亭하야 以臨淮水而望西山하다
是歲秋에 予貶夷陵하야 過泗上할새 於是에 知張侯之善爲政也라
昔周
聘楚而過陳
할새 見其道穢而川澤不陂梁
하고 客至不授館
하며 羈旅無所寓
하고 遂知其必亡
하니
前司封員外郞張侯夏守是州에 築堤以禦之하니 今所謂因其舊者是也라 是役也에
07. 사주泗州의 선춘정先春亭에 대한 기문記文
선춘정先春亭에 대해 기문記文을 쓰되 도리어 제방에 근본을 두고 빈객의 객관을 다음으로 이야기한 뒤에 정자에 대해 말하여 주周나라 단자單子의 언론言論으로 주안主案을 삼았으니, 이른바 경經으로써 지방관의 다스림을 윤색했다는 것이다.
경우景祐 3년 가을에 청하淸河 장후張侯가 전중승殿中丞으로 와서 사주泗州의 수령이 되었다.
이곳에 도착하자 백성들이 평소 폐해로 여기던 것을 묻고서 그중에 가장 큰 폐해를 다스렸으니, 가장 큰 폐해는 회수淮水가 범람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었다.
이듬해 봄에 성의 바깥 제방을 만들어 옛 제방에다 그 규모를 확장하니 길이가 19,200척尺이었고 인력人力을 쓴 것이 85,000명이었다.
사주泗州의 백성들이 말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이로운 일이지만 큰 역사役事이다.
그러나 사주泗州의 군사를 내어 인력으로 쓰고 남산南山에서 돌을 캐내어 큰 역사役事를 일으켰는데도 백성은 역사役事를 일으켰는지조차 알지 못하니, 이는 정사를 펴는 사람이 우리를 보살펴준 것이다.
그러니 작은 힘도 보태지 않고 큰 이익을 누리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고는 서로 함께 쌀 1,300석石을 내어 역부役夫들을 먹였다.
제방이 완성되자 높이는 33척尺이고, 흙은 튼튼하고 돌은 단단하여 재해를 대비하면서 오래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만하였다.
이윽고 말하기를 “사주泗州는 사방으로 길이 통하는 고을인지라 빈객이 이르는 경우 예禮가 있어야 한다.”라고 하고는,
이에 이전에 있던 장후당蔣侯堂의 정자를 새로 수리하여 위로하고 전송하는 장소로 만들고는 사소정思邵亭이라 명명하고,
또 전인前人에게 아름다움을 미루고 이 고을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뜻을 기록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주泗州는 천하의 물이 모이는 곳인지라 해마다 조곡漕穀을 반드시 여기에 보관한다.”라고 하여,
이에 상풍창常豐倉 서쪽 문 두 개의 협실夾室을 수리하여
하나는 출납을 맡게 하고는 모정某亭이라 이름하고, 하나는 뱃사람들이 머물 곳으로 삼아서 통조정通漕亭이라 하였다.
그런 뒤에 말하기를 “나도 쉴 곳이 있어야겠다.”라고 하고는, 이에 이 고을 관청 동쪽 성城 위에 선춘정先春亭을 지어서 회수淮水를 굽어보고 서산西山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해 가을에 내가 이릉夷陵으로 폄적되어 임지로 갈 때에 사천泗川 가를 지나갔는데, 이에 장후張侯가 정사를 잘했음을 알았다.
옛날 주周나라 단자單子가 초楚나라에 빙문聘問 가면서 진陳나라를 지나갈 때에 진陳나라의 도로가 더럽고 강과 못에 제방과 다리가 없으며 객이 이르러도 숙소를 마련해주지 않으며 나그네가 머물 곳이 없음을 보고서 진陳나라가 필시 망할 것임을 알았다.
대개 성곽城郭과 도로道路와 객관客館과 여사旅舍는 모두 삼대三代에 정사를 폈던 법이고, 《주례周禮》에서는 더욱 이 제도를 삼가 드러내 재해를 대비하는 곳으로 삼았다.
지금 장후張侯가 태수가 되었을 때에 백성들이 재해를 대비할 수 있게 제방을 먼저 만들었고 다음으로 빈객賓客들이 왕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 뒤에야 스스로 휴식할 곳을 생각하였으므로 정사를 잘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해마다 큰 홍수가 발생하여 사주泗州가 거의 물에 잠겼다.
전前 사봉원외랑司封員外郞 장하張夏가 이 고을에 수령이 되었을 때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았으니, 지금 이른바 옛 제방에다 그 규모를 넓혔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역사役事에 제방이 큰일이기 때문에 내가 큰일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이 작품은 비록 정자에 관한 기문이지만 제방을 기록한 것이 상세하니, 그중 큰일을 중하게 여긴 것이다.
정자를 지은 내력이 이미 자세하지 않기 때문에 정자 이름인 선춘先春의 뜻을 풀이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