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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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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篇 看他以客形主處 亦自遠識 及多轉調니라
惟儼 姓魏氏 杭州人이라
少遊京師三十餘年하야 雖學于佛이나 而通儒術하야 喜爲辭章하고 與吾亡友으로 交最善이라
曼卿 遇人無所擇하고 必皆盡其忻懽이요 惟儼 非賢士不交하야 有不可其意 無貴賤 一切閉拒絶去하야 不少顧하니
曼卿之兼愛 惟儼之介 所趨雖異 而交合無所間이라
曼卿嘗曰 君子이라한대 惟儼曰 不然하다
吾所以不交妄人이라 故能得天下士하니
若賢不肖混이면 則賢者安肯顧我哉리오하니 以此 一時賢士多從其遊
하야 不出其戶 十五年이라
士嘗遊其室者 禮之惟恐不至하되 及去爲公卿貴人하얀 未始一往干之
然嘗竊怪平生所交 皆當世賢傑이로되 未見卓卓著功業如古人可記者
因謂世所稱賢才 若不笞兵走萬里立功海外 則當佐天子號令賞罰於이니 苟皆不用이면 則絶寵辱하며 遺世俗하야 自高而不屈이니
尙安能酣豢於富貴而無爲哉
醉則以此誚其坐人하니 人亦復之以謂遺世自守 古人之所易
若奮身逢時하야 欲必就功業이면 此雖聖賢難之
今子老於浮圖하야 不見用於世하야 而幸不踐窮亨之塗어늘 乃以古事之已然而責今人之必然邪
然惟儼雖傲乎退偃於一室이나 天下之務 當世之利病 與其言 終日不厭하니 惜其將老也已로다
曼卿死 惟儼亦買地京師之東하야 以謀其終하고
乃斂平生所爲文數百篇하야 示予曰
曼卿之死 旣已表其墓하니 願爲我序其文하되 然及我之見也하라
嗟夫 惟儼旣不用於世하야 其材莫見於時 若考其筆墨馳騁文章贍逸之能하면 可以見其志矣리라


11. 승려 유엄惟儼문집文集에 대한 서문
이 편은 객으로서 주인을 형용한 부분에 또한 별도로 원대한 식견과 많은 문장의 변화를 보아야 한다.
유엄惟儼은 성이 씨이니 항주杭州 사람이다.
어릴 때에 타향인 경사京師에 와서 30여 년을 지내면서 비록 불교佛敎를 배웠지만 유술儒術에 통달하여 문장 짓기를 좋아하였고, 나의 망우亡友 만경曼卿과 교분이 가장 두터웠다.
만경曼卿은 사람을 만날 때에 가리는 바가 없고 반드시 모두 그들과 즐거움을 다하였으며, 유엄惟儼은 어진 선비가 아니면 사귀지 않아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일체 사귐을 거절하고 교분을 끊고 떠나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다.
만경曼卿의 사람을 두루 사랑함과 유엄惟儼의 굳은 지조는 추향하는 바는 비록 다르지만 서로 잘 맞아 조금의 틈도 없었다.
만경曼卿이 일찍이 “군자는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한 사람을 친히 해야 한다.”라고 말하니, 유엄惟儼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나는 망령된 사람과 사귀지 않기 때문에 능히 천하의 선비와 사귈 수 있었다.
만약 현자와 불초한 이가 섞여 있다면 현자들이 어찌 나를 돌아보려 하였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한때의 현사들이 대부분 종유한 것이다.
상국사相國寺에 거처하며 문을 나서지 않은 지 15년이 되었다.
일찍이 승사僧舍에 온 선비를 예우禮遇하되 오직 극진히 예우禮遇하지 못할까 걱정하더니, 그 선비가 떠나 공경公卿귀인貴人이 됨에 미쳐서는 한번도 찾아가 만나주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평생 사귄 사람은 모두 당세의 어질고 걸출한 사람이지만 고인처럼 기록할 만한 우뚝이 공을 드러낸 사람은 보지 못한 것을 나는 이상하게 여겼다.
인하여 “세상에서 일컫는 현재賢才는 만약 병사를 독려하여 만 리를 나아가 해외에서 공을 세우지 않으면 응당 명당明堂에서 천자를 도와 호령號令하고 상벌賞罰을 내려야 하니, 만일 이 두 경우에 모두 쓰이지 못한다면 영욕榮辱을 끊고 세속을 버리고서 자신을 높여 뜻을 굽히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현재賢才가 아니면〉 오히려 어찌 부귀를 탐하면서 무위無爲를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술에 취하면 이로써 좌중座中의 사람을 꾸짖으니, 사람이 또한 대답하여 이르기를 “세상을 버리고 자신을 지키는 것은 옛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다.
만약 몸을 떨치고 일어나 좋은 시운時運을 만나 반드시 공업功業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는 비록 성현聖賢이라도 어렵게 여기니, 주공周公공자孔子궁달窮達이 다른 이유이다.
지금 그대는 승려로 늙어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여 다행히 궁달窮達의 길을 밟지 않았는데, 이에 옛사람들도 오히려 어렵게 여긴 일을 가지고 지금 사람들에게 반드시 실천하기를 요구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엄惟儼은 비록 일실一室초연超然하게 물러나 은거해 있지만 천하의 일과 당세의 이익이나 병폐에 대해 그와 이야기를 하면 종일토록 실증나지 않았으니 그가 장차 늙어감이 안타깝다.
만경曼卿이 세상을 떠나자 유엄惟儼은 또한 경사京師의 동쪽에 땅을 사서 여생을 보낼 작정을 하고,
이에 평생 지은 글 수백 편을 모아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만경曼卿이 죽었을 때에 이미 그대가 그의 묘표墓表를 썼으니, 나를 위하여 이 글에 서문을 써주되 내가 생전에 볼 수 있게 해달라.”라고 하였다.
아, 유엄惟儼이 이미 세상에 쓰이지 않아 그의 재주가 당시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만약 필묵筆墨이 거침없고 문장이 풍부하면서 자유분방한 재능을 살펴보면 그의 뜻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歐陽脩의 《居士集》 自註에 의거하면 慶曆 원년(1041)에 지은 글이다.
역주2 曼卿 : 曼卿은 石延年(994~1041)의 字이다. 北宋 宋城 사람으로 또 다른 字는 安仁이다. 여러 차례 進士試를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大理寺丞, 祕閣校理, 太子中允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石曼卿詩集》 1권이 있다.
역주3 泛愛而親仁 : 《論語》 〈學而〉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弟子가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恭遜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仁한 사람을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을 행하고 餘力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4 相國浮圖 : 相國寺를 가리킨다. 河南省 開封市에 위치한 사원으로 北宋시대에 가장 번성하였다. 北齊 때인 555년에 창건되었고 宋 至道 2년(996)에 중건되었다. 金의 침입 이후 쇠퇴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淸 乾隆 연간(1736~1795)에 지어진 것이다.
역주5 明堂 : 고대 제왕이 政敎를 행하고 반포하던 곳으로, 조회를 하고 제사를 드리고 선비를 선발하고 학문을 가르치는 등의 일을 거행하였다. 후대에는 궁궐과 별도로 近郊의 동남쪽에 明堂을 건립하여 古制를 보존하였다.
역주6 周孔所以窮達異也 : 周公은 武王과 成王을 보좌하여 政令을 시행하였으니 達했다 할 수 있고, 孔子는 列國을 주유하며 곳곳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니 窮했다 할 수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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