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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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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韻語中長短錯綜하고 而寫情可涕
維年月日 具官脩 謹以明日 祗役于滑이라 謹用淸酌庶羞之奠하야 致祭于故副閣舍人謝公之靈하노라
嗚呼謝公이여 性明於誠하야 履蹈其方이라 其於死生 固已自達이니 而天下之士所以嘆息而不已者 惜時之良이라
況於吾徒 師友之分이니 情親義篤 其何可忘
이라 寓書眞州 哀其親老하야 而勉以自強이러라
其後二年 再遷漢上할새 風波霧毒 凡萬二千里러니이라
初來謁公 迎我而笑하고 與我別久 憐其貌若故而氣揚이라 淸風之館이요 覽秀之涼 坐竹林之修蔭하고 泛水芰之淸香이라
及告還邑하야 할새 走書來報 喜詠于章이라
이러니 歡言未幾 遽問于牀이요 不見五日 而入哭其堂이라
嗚呼謝公이여 年不得하고 而位止于郞이로되 惟其歿也 哭者爲之哀하고 不識者爲之相弔하야 或賻其家하고 或力其喪하니
嗟夫 爲善之效 得此而已 庸何傷이리오 富貴偶也 壽夭數也 奚較其少多而短長이리오
若公之有言著于文하고 行著于事하고 材著于用하야 旣久而愈彰하니 此吾徒可以無大恨이요 而君子謂公爲不亡이라
滑人來迎하니 脩馬當北이나 而不卽去者 以公而彷徨이라 始脩將行 期公餞我러니 今其去也 來奠公觴이로다
玆言悲矣 公其聞乎 抑不聞也 徒有淚而浪浪이라 尙享


01. 謝希深에 대한 祭文
韻語 중에 長短句가 섞여 있고 을 서술한 부분은 읽으면 눈물을 흘릴 정도이다.
某年 某月 某日具官 歐陽脩는 삼가 내일 滑州使命을 받아 떠나야 하므로 맑은 술과 여러 음식을 갖추어 副閣舍人 謝公靈前에 제사를 올립니다.
아, 謝公이여 天性에 밝아 大道를 실천하였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실로 이미 스스로 통달하였으니 천하의 선비들이 탄식해 마지않는 이유는 당시 賢良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서입니다.
더구나 우리들은 師友의 인연이 있으니 친밀한 과 돈독한 의리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景祐 초기에 제가 峽州로 갔었는데 공은 江東에 있었습니다. 眞州로 편지를 보내와 어버이가 연로함을 슬퍼하여 스스로 힘쓰도록 면려하셨습니다.
2년 뒤에 다시 漢上으로 옮겨 갈 때에 풍파와 독한 안개 속에 만이천 리 길을 갔는데 南陽에서 공을 만났습니다.
처음 와서 공을 뵈었을 때에 저를 맞이하며 웃으셨고 저와 이별한 지 오래됨에 모습은 예전 그대로이고 氣像이 당당함을 좋아하였습니다. 淸風의 관사와 覽秀의 정자에서 그늘진 대나무 숲 사이에 앉고 맑은 향기 풍기는 수초 가득한 물에 배를 띄웠습니다.
읍으로 돌아갈 것을 고하고서 靈昌에 관직을 얻었을 때 답장을 보내옴에 시문을 기쁘게 읊조렸습니다.
에서 파직되어 돌아갈 곳이 없어 공이 다스리는 고을에 와서 객지생활을 하였는데, 즐겁게 이야기 나눈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갑자기 병상에서 문병을 하였고, 5일을 보지 못한 사이에 공의 에 들어가 곡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謝公이여 나이는 中壽를 누리지 못하고 지위는 에 그쳤지만 죽음에 곡하는 사람들은 슬퍼하고, 모르던 사람들도 서로 조문하여 어떤 이는 집안에 賻儀를 주고 어떤 이는 喪事에 힘으로 도왔습니다.
아, 을 행한 공효는 이를 얻으면 그만이니 어찌 가슴 아파하겠습니까. 富貴는 우연히 얻는 것이고 장수와 요절은 天命이니 어찌 적고 많으며 짧고 긴 것을 따지겠습니까.
공의 말은 문장에 드러났고 행실은 일에 드러났으며 재능은 관직생활에 드러나 이미 오래 지날수록 더욱 드러나니 이 때문에 우리들은 큰 여한이 없을 수 있고 군자는 공이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滑州의 사람들이 와서 맞이하니 저의 행차는 북쪽으로 가야 했지만 즉시 떠나지 못한 것은 공의 일로 머뭇거렸기 때문입니다. 처음 제가 떠나려 할 때에 공이 저를 전별해줄 것을 기대했는데 지금은 공이 떠났기에 와서 공에게 술 한 잔 올립니다.
이 말이 슬프니 공은 듣습니까. 아니면 듣지 못합니까. 한갓 눈물만 주룩주룩 흐릅니다. 尙享.


역주
역주1 祭謝希深文 : 이 글은 康定 元年(1040) 봄에 歐陽脩가 滑州武成軍節度判官으로 부임하기 전에 지은 것이다. 希深은 謝絳의 자이다. 富陽 사람으로 進士試에 급제하여 仁宗 때에 知制誥, 判吏部太常禮院 등을 역임하였다. 歐陽脩보다 13세 많았고, 歐陽脩가 젊은 시절 西京에 있을 때부터 忘年交를 맺었다.
역주2 景祐之初……而公在江東 : 景祐 3년(1036) 좌천되어 峽州夷陵令이 되었는데, 당시 謝絳은 富陽에서 居喪 중에 있었으므로 江東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3 會公南陽 : 寶元 2년(1039) 2월에 謝絳은 守鄧州가 되었고, 梅堯臣은 襄城의 읍재가 되어 謝絳과 함께 길을 떠나 南陽에서 歐陽脩와 만나 열흘간 머물다 돌아갔다.
역주4 得官靈昌 : 寶元 2년에 作者가 옛 직임에 다시 보임되어 滑州武成軍節度判官이 되었다. 靈昌은 옛 치소가 현재 河南 滑縣 서남쪽에 있었다.
역주5 罷縣無歸 來客公邦 : 작자가 일찍이 이맘때에 어머니를 모시면서 南陽에서 待次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6 中壽 :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50세를 가리킨다. 謝絳이 45세에 졸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앞의 권30 〈石曼卿墓表〉 ‘中壽’ 주석 참조.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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