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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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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具公之行事及祁伯之銘以來하야 告曰 唯陳氏 世有顯人이라
文惠公歷事太宗眞宗而相今天子하니 其出處始終之大節 可考不誣如此
故敢請以墓隧之碑라하야늘
予爲考其世次하야 得其所以基于初하고 盛于中하고 有于終하야 而大施于其後者하야 曰 信哉
陳氏載德하야 晦顯以時로되 其畜厚來遠이라 故能發大而流長이라호라
自公五世以上이니 皇高祖翔 當五代時하야掌書記러니 建欲帝蜀이어늘 以逆順禍福譬之하되 不聽이라
棄官하고 하야 遂爲西水人이러라
皇曾祖 齊國公諱詡 皇祖 楚國公諱昭汶이요 皇考 秦國公諱省華 皆開府儀同三司 太師尙書令兼中書令이라
이러니하야 始事聖朝하야 爲左諫議大夫
其配曰燕國大夫人馮氏 公其次子也
諱堯佐 字希元이니 擧進士及第하야 累遷하고 하야 用理獄有能績하야이러니 以言事切直으로하다
自潮還 獻詩數百篇하니 而大臣亦薦其文學하야 得直史館하고
丁秦公憂하야 服除 하고 徙京西河東河北三路하야 糾察在京刑獄하다
天禧三年 編次進士라가 坐誤差其第하야 이러니 未至 丁燕國大夫人憂하다
河決滑州하니 天子念非公不可塞하야 乃起公知滑州하다
할새 徙公京西轉運使하야 以辦其事하다
入爲三司戶部副使하고 徙副度支하며 拜知制誥하고 兼史館修撰하다
同知天聖二年貢擧하고 知通進銀臺司하며 遷龍圖閣直學士 知河南府하다
徙幷州하야 知審官院 開封府하며 拜翰林學士하고 兼龍圖閣學士하다
七年 拜樞密副使하야 其年八月 參知政事러니 居二歲間 凡三請罷러라
又徙라가 復徙永興하고 又徙鄭州하고 累官至戶部侍郞하고 景祐四年四月 召拜同中書門下平章事러라
公爲人剛毅篤實하고 好古博學하야 居官無大小 所至必聞이러라
潮州惡溪 鰐魚食人하야 不可近이러니 公命捕得하야 鳴鼓于市하고 以文告而戮之하니 鰐患屛息이라
潮人歎曰 이러니 今公 戮鰐而懼하니 所爲雖異 其能使異物醜類 革化而利人 一也
吾潮 間三百年而得二公하니 幸矣라하다
在潮 修孔子廟 韓公祠하고 率其州民之秀者하야 就於學하다
知壽州 遭歲大饑 公自出米爲糜하야 以食餓者하니 吏民以公故 皆爭出米하야 其活數萬人이로되 公曰 吾豈以是爲私惠耶아하다
蓋以令率人 不若身先而使其從之樂也
錢塘江隄 以竹籠石이라 而潮嚙之하야 不數歲 輒壞而復理
公歎曰 隄以捍患而反病民이라하고 乃議易以薪土러니 而害公政者 言于朝하야 以爲非便이라
是時 하야 主言者以黜公하니 公爭不已어늘
乃徙公京西而籠石爲隄러니 數歲 功不就하야 民力大困이라
卒用公議하니 隄乃成이라
河東地寒而民貧일새 奏除石炭稅하며 減官冶鐵課歲數十萬以便民하고 曰 轉運 征利之官이라
利有本末하니 下有餘則上足이라
吾豈爲俗吏哉아하다
太行山 當河東河北兩路之界
公以謂晉自前世爲險國하니 常先叛而後服者 恃此也라하야 其在河東 하니 而太行之險通이라
行者德公以爲利한대 曰 吾豈爲今日利哉리오하다
河決하야 壞滑州하니 水力悍甚하야 湍激이면 幷人以沒하야 不見蹤跡者 不可勝數
公躬自暴露하야 晝夜督促하고 創爲木龍하야 以巨木騈齒하야 浮水上下하야 殺其暴하니 隄乃成이라
又爲長隄하야 以護其外하니 滑人得復其居
相戒曰 不可使後人忘我陳公이라하야 因號其隄爲陳公隄라하다
開封府治京師 公以謂治煩之術 任威以擊彊하며 盡察以防姦 譬於激水而欲其澄也
故公爲政 一以誠信이라
每歲正月 夜放燈이면 則悉籍惡少年하야 禁錮之러니 公召少年하야 諭曰 尹以惡人待汝하니 汝安得爲善이리오
吾以善人待汝하노니 汝其爲惡耶아하고 因盡縱之하니 凡五夜 無一人犯法者러라
이러니 縣吏惡其明察하야 欲中以事로되 而詁公廉하야 事不可得이라
乃欲以苛動京師하야 自錄事以下 空一縣하야 皆逃去하니 京師諠言詁政苛暴
是時 猶聽政이러니 怒詁하야 欲加以罪한대
公爲樞密副使 力爭之하야 以謂罪詁則姦人得計而沮能吏라하니 詁由是獲免하다
公十典大州하고 六爲轉運使하야 常以方嚴肅下하야 使人知畏而重犯法이나 至其過失하면 則多保佑之
故未嘗按黜一下吏러라
公貶潮州 其所言事 蓋人臣所難言者
平生奏疏로되 悉焚其稿하며 其他文章 有文集三十卷하고 又有野廬編潮陽編愚丘集하니 多慕韓愈爲文이라
與修眞宗實錄하고 又修國史故事러라
知制誥者 常先試其文辭어늘 天子以公文學 天下所知라하야 不復命試하니 自國朝以來 不試而知制誥者及公二人而巳
公居官 不妄進取
爲太常丞者十三年不遷하고 爲起居郞者七年不遷이라
自議錢塘隄하야 爲丁晉公所黜後 晉公益用事하야 專威福이라
故人子弟 以公久于外라하야 多勉以進取한대
公曰 惟久然後見吾守라하야 如是十五年이러니 今天子卽位 晉公事敗하야 投海外
公乃見召用하다
公初作相 以唐所對策으로 進曰 天下治亂 自朝廷始 朝廷賞罰 自近始
凡蕡之所究言者 皆當今之弊 此臣所欲言이요 而陛下之所宜行이요 且臣等之職也라하니 天子嘉納之하다
公在相位不久 其年冬雷地震하고 星象數變이라
公言 位在臣上이어늘 而病不任事하고 位皆在下라하야 乃引漢故事하야 以災異自責求罷하야 章凡四上이라
明年三月 拜淮康軍節度使 檢校太傅 同中書門下平章事 判鄭州하다
康定元年五月 以太子太師致事하니 詔大朝會立宰相班이라
遂居于鄭하니 其起居飮食 康寧如少者
後四年 年八十有二 以疾卒于家하다
公居家 以儉約爲法하야 雖已貴라도 常使其子弟 親執賤事하고 曰 孔子固라하고 作爲善箴하야 以戒子孫이라
公前娶曰杞國夫人宋氏 後娶曰沂國夫人王氏
秦公三子 長曰堯叟 爲樞密使 同中書門下平章事 季曰堯咨 爲武信軍節度使 皆擧進士第一이라
及三子已貴하야도 秦公尙無恙하야 每賓客至其家 公及伯季 侍立左右하니 坐客䠞蹜不安求去어든 秦公笑曰 此學子輩耳라하니
故天下皆以秦公敎子爲法하고 而以陳氏世家爲榮이러라
公之孫四十人이며 曾孫二人이요 合伯季之後 若子若孫若曾孫 六十有八人이요 女若孫曾五十有四人이로되 而仕于朝者 多以才稱於時하니 嗚呼 可謂盛矣로다
銘曰
陳氏高節
在汚全潔이라
閟德潛光하야
有俟而發이라
其發惟時
自公啓之
英英伯季
踵武偕來로다
相車崇崇하니
武節之雄이라
高幢巨轂
惟世有封하니
尙書中書
儀同太師로다
祖考在前하고
孫曾盈後어늘
公居于中하고
伯季左右
惟勤其始하야
以享其終이요
唯能其約하야
以有其豐이라
休庸顯
播美家邦하니
有遠其貽
有大其繼
刻詩垂聲하야
以質來裔하노라


04. 태자태사로 치사한 증사공 겸시중 문혜 진공의 신도비명
영천공潁川公신정新鄭안장安葬되고 난 뒤에 그 아들 상서주객낭중尙書主客郞中 술고述古 등 일곱 사람이 영천공의 사적事迹태상시太常寺시장諡狀기백祁伯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진씨陳氏는 대대로 현달顯達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우리 선정先正 문혜공文惠公께서는 태종太宗진종眞宗을 차례로 섬기고 지금 천자天子를 도와 재상을 지내셨으니, 이분의 평생 출처出處대절大節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감히 묘수墓隧에 세울 비명碑銘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진씨의 세차世次를 상고하여 처음에 기반을 잡고 중간에 성대해지고서 끝에 결실을 잘 맺어, 그 뒤에 세상에 크게 쓰인 까닭을 알고 나서 “참으로 그러하구나.
진씨陳氏세덕世德을 품고서 시대에 따라 묻히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였으나, 그 축적함이 깊고 유래가 오래되었기에 빛나고 드러나며 오랜 세월 이어져 올 수 있었다.”라고 하였다.
공의 5세조世祖 이상은 박주博州 사람이니 고조부 오대五代시대에 왕건王建을 위해 서기書記를 맡았는데, 왕건이 에서 황제에 즉위하려고 하자 역순逆順화복禍福의 이치를 가지고 깨우쳤지만 왕건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을 버리고 낭주閬州서수西水에 거처를 마련하여 마침내 서수西水 사람이 되었다.
증조부는 제국공齊國公 이고 조부는 초국공楚國公 소문昭汶이고 부친은 진국공秦國公 성화省華니 모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태사상서령太師尙書令 겸중서령兼中書令이었다.
부터 아래로 3의 선조들이 에서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는데 진공秦公에 이르러 비로소 본조本朝를 섬겨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었다.
그 부인은 연국대부인燕國大夫人 풍씨馮氏인데 공은 그 둘째 아들이다.
공은 요좌堯佐이고 희원希元이니 진사시進士試급제及第하여 누차 승진하여 태상승太常丞이 되었고, 개봉부록사참군開封府錄事參軍을 맡아 옥사獄事를 처결하는 데 재능과 치적이 있어 개봉부추관開封府推官으로 옮겼는데 언사가 직절直切하다고 하여 조주통판潮州通判으로 폄적貶謫되었다.
조주에서 돌아와 수백 편을 올리니 대신大臣 역시 그가 문학文學이 있다고 천거하여 직사관直史館이 되었고 수주壽州여주廬州 두 주의 지사知事제점부계제현공사提點府界諸縣公事가 되었다.
진공秦公의 상을 당하여 상을 마친 뒤에 판삼사도찰원判三司都察院 양절전운사兩浙轉運使가 되었고 임지를 경서京西, 하동河東, 하북河北 3로 옮겨 경사京師형옥刑獄규찰糾察하였다.
천희天禧 3년(1019)에 어시御試에 올릴 진사進士의 순위를 편차하였다가 그 등제 순위를 잘못 편차한 죄에 걸려 악주감다장鄂州監茶場으로 폄적되었는데, 미처 부임하기 전에 모친 연국대부인燕國大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이듬해에 하수河水활주滑州에서 터지니 천자께서 공이 아니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비로소 공을 나오게 하여 지활주知滑州로 삼았다.
건흥乾興 원년元年(1022)에 영정릉永定陵을 조성할 때, 공을 경서전운사京西轉運使로 옮겨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조정에 들어와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가 되었고 탁지부사度支副使로 옮겼으며 지제고知制誥에 배수되고 사관수찬史館修撰을 겸대하였다.
천성天聖 2년(1024)의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고 통진은대사通進銀臺司를 맡았으며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지하남부知河南府로 옮겼다.
병주幷州로 옮겨 지심관원知審官院 개봉부開封府가 되었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에 배수되고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를 겸대하였다.
천성 7년(1029)에 추밀부사樞密副使에 배수되고 나서 그해 8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는데 두 해 동안 모두 세 번 해임되기를 청하였다.
명도明道 2년(1033)에 〈참지정사를〉 그만두고 지영흥군知永興軍이 되어 부임하는 길에 정주鄭州를 지나다가 광인狂人에게 무함誣陷을 당하였는데 어사중승御史中丞 범풍范諷이 공에게 죄가 없음을 변론하여 지려주知廬州로 옮겼다.
동주同州로 옮겼다가 다시 영흥永興으로 옮기고 또 정주鄭州로 옮기고는 누차 승진하여 호부시랑戶部侍郞이 되었고, 경우景祐 4년(1037) 4월에 조정으로 불려가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독실篤實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학문이 박흡博洽하여 역임한 관직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부임한 곳마다 반드시 〈잘 다스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주潮州악계惡溪악어鰐魚가 사람을 잡아먹어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는데, 공이 명하여 악어를 잡아 저자에서 북을 울리고 글을 지어 고유告諭하면서 죽이니 악어로 인한 폐해가 사라졌다.
조주 백성들이 탄식하면서 “옛날 한문공韓文公은 악어를 타일러 악어가 그 말을 듣게 하였는데 지금 공은 악어를 죽여 악어를 두렵게 하였으니, 〈두 분 공이〉 한 일은 비록 다르지만 괴이한 동물과 추악한 무리를 잘 변화시켜 사람을 이롭게 한 것은 똑같다.
우리 조주가 300년 사이에 두 공을 만났으니 다행이다.”라고 하였다.
조주에 있을 적에 공자孔子한공韓公(한유韓愈)의 수축修築하고 조주 백성 가운데 뛰어난 자들을 이끌어 학교에 들어가게 하였다.
수주壽州를 다스릴 적에 큰 흉년을 만나자 공이 스스로 쌀을 내어 죽을 만들어 굶주린 자들을 먹이니 아전과 백성들이 공의 솔선으로 인해 모두들 다투어 쌀을 내어놓아 살린 사람이 수만 명이었으나, 공은 “내 어찌 이 일을 내 개인적인 시혜施惠로 여기겠는가.”라고 하였다.
대개 명령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은 몸소 솔선하여 그들로 하여금 즐겁게 따르게 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전당강錢塘江의 제방은 대나무로 바구니를 만들어 돌을 담아 쌓아둔 것인데 물결에 침식되어 몇 해 지나지도 않았는데 번번이 무너져서 다시 수리하였다.
공이 탄식하면서 “제방은 재해災害를 막으려고 만드는 것인데 도리어 백성을 괴롭게 하는구나.”라 하고, 이에 신초薪草를 섞은 흙으로 바꿀 것을 논의하였는데 공의 정사政事를 방해하는 자가 조정에 상언上言하여 그것이 편리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때에 정진공丁晉公참지정사參知政事로 있어 상언한 자의 주장에 따라 공을 파직하니 공이 쟁집하여 마지않았다.
이에 공의 임지를 경서京西로 옮기고 대나무로 바구니를 만들어 돌을 담아 쌓아서 제방을 만들었는데, 몇 해가 지나도 공사를 마치지 못하여 민력民力이 크게 손상되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공의 논의대로 하니 제방이 그제야 이루어졌다.
하동河東은 지역이 춥고 백성들이 가난하였기에 석탄세石炭稅를 없애며 에서 해마다 수십 만이나 부과하는 야철冶鐵을 줄일 것을 상주上奏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고, “전운轉運은 이익을 징수하는 관리이다.
하지만 이익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으니 아래의 백성들이 넉넉하면 위의 위정자가 풍족하기 마련이다.
내 어찌 속리俗吏나 하는 짓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태항산太行山하동河東하북河北 양로兩路의 경계에 있다.
공이 “은 옛날부터 험고險固한 나라였으니 항상 먼저 반란하고 늦게야 항복한 것은 이 험고함을 믿어서였다.”라고 여기고서 하동河東에 있을 적에 택주로澤州路를 뚫었고, 뒤에 하북河北으로 옮겼을 때 회주로懷州路를 뚫으니 험고한 태항산에 길이 통하게 되었다.
이 길을 다니는 자들이 공에게 감사하면서 이롭게 여겼는데, 공은 “내 어찌 지금 사람들이 이롭게 여긴다는 평판을 위해 이렇게 했겠는가.”라고 하였다.
하수河水의 제방이 터져서 활주滑州를 휩쓸어버렸는데, 물살이 너무 세어 가 떠내려갈 때마다 물결이 더 거세지면 사람도 함께 쓸려 들어가서 종적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공이 몸소 앞으로 나서서 밤낮으로 독촉하고 목룡木龍을 만들고서 큰 나무를 겹쳐놓고 위아래로 물에 띄워 거센 물살이 잦아들게 하니 제방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또 긴 제방을 만들어 그 바깥을 보호하니 활주 백성들이 살던 곳을 회복하게 되었다.
서로 경계하기를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진공陳公을 잊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서 그 제방을 진공제陳公隄라고 불렀다.
개봉부開封府에서 경사京師를 다스릴 적에 공은 “번잡함을 다스리는 방법이 위세를 부려 강한 것을 공격하고 가혹하게 규찰하여 간사함을 막는 것은, 비유하자면 물을 때리면서 그 물이 맑아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공은 정사를 펼 때에 한결같이 성신誠信으로 임하였다.
매년 정월마다 밤에 등불을 놓게 되면 품행이 나쁜 소년들을 다 기록하고서 금고禁錮시켜 놓곤 하였는데, 공이 소년들을 불러 타이르기를 “예전의 들이 악한 사람으로 너희들을 대하니 너희들이 어찌 선행을 할 수 있었겠느냐.
내가 선한 사람으로 너희들을 대하노니 너희들이 악을 행하겠느냐.”라 하고 이어 다 풀어주니, 닷새 밤 동안에 법을 어기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태상박사太常博士 진고陳詁상부현祥符縣을 맡았는데 현리縣吏가 진고가 정사政事를 밝게 살피는 것을 싫어하여 빌미를 잡아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진고가 공정하고 청렴하여 빌미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결국에는 진고가 가혹한 정사를 펼친다고 경사京師를 요동시키려고 녹사錄事 이하 모든 아전들이 상부현을 비우고서 다 도망가니, 경사에서 과연 진고의 정사가 가혹하다고 떠들어댔다.
이때에 장헌명숙태후章獻明肅太后가 아직 수렴청정하고 있었는데 진고에게 노하여 죄를 주려고 하자,
공이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있었기에 힘써 간쟁하여 “진고에게 죄를 주면 간사한 이들이 이 계책을 가지고 유능한 관리를 모해謀害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진고가 이로 인해 죄를 면할 수 있었다.
공은 열 차례 대주大州를 맡아 다스렸고 여섯 차례 전운사轉運使가 되어, 항상 방정하고 근엄함으로 아랫사람을 다스려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게 하고 범법하는 일을 어려워하게 하였지만, 실수로 잘못하는 경우에는 보호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하리下吏 한 명도 조사하여 파출罷黜한 적이 없었다.
공이 조주潮州에 폄적되었을 때 정사를 논의한 것이 대개 신하가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평생 주소奏疏를 올린 것이 매우 많았으나 그 원고를 다 불태웠으며, 기타 문장은 문집文集 30권이 있고 또 《야려편野廬編》, 《조양편潮陽編》, 《우구집愚丘集》이 있으니 한유韓愈를 사모하여 〈그 문체를 배워〉 지은 글이 많았다.
진종실록眞宗實錄》을 편수編修하는 데 참여하고 또 국사고사國史故事를 편수하였다.
지제고知制誥라는 자리는 항상 먼저 그 문사文辭를 시험하여 선발하는데, 천자께서 공의 문학文學은 천하 사람들이 아는 것이라 하여 다시 시험하라고 명하지 않으니 국조國朝 이래로 시험을 거치지 않고 지제고가 된 자는 오직 양억楊億과 공 두 사람뿐이었다.
공은 관직에 있을 적에 함부로 승진하려고 하지 않았다.
태상승太常丞으로 있을 때에는 13년 동안 옮기지 않았고, 기거랑起居郞으로 있을 때에는 7년 동안 옮기지 않았다.
전당錢塘의 제방에 대해 논의하여 정진공丁晉公에게 파출된 뒤로는 진공晉公이 더욱 실권을 잡아 형벌과 벼슬을 독단으로 휘둘렀다.
그래서 벗들과 자제子弟들이 공이 외직에 오래 있었다고 하면서 높은 관직을 얻으라고 권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자 공이 “오랜 세월을 보낸 뒤에야 나의 조수操守를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15년을 보냈는데, 지금 천자께서 즉위하시자 진공晉公은 패망하여 해외海外에 유배되었다.
그래서 공이 비로소 불려 등용되었다.
공이 처음 재상이 되었을 적에 나라 유분劉蕡대책對策한 글을 가지고 올리면서 “천하의 치란治亂조정朝廷에서 시작되고 조정의 상벌賞罰은 가까운 데서 시작됩니다.
무릇 유분이 소회를 다 개진한 말은 모두 지금의 폐단이니, 이는 신이 드리고 싶은 말이고 폐하께서 마땅히 행하셔야 하는 일이며 또 신들의 직책입니다.”라고 하니, 천자께서 가납嘉納하셨다.
공이 재상의 지위에 있은 지 오래되지 않아 그해 겨울에 우레가 치고 지진地震이 일어났으며 성상星象이 자주 변하였다.
공이 “왕수王隨는 지위가 신의 위에 있는데 병으로 정사를 맡고 있지 않고 정림程琳 등은 지위가 모두 신의 아래에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이에 나라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재이災異가 일어난 일로 자책하면서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하여 소장을 모두 네 차례 올렸다.
이듬해 3월에 회강군절도사淮康軍節度使 검교태부檢校太傅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정주判鄭州에 배수되었다.
강정康定 원년元年(1040) 5월에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치사하니 대조회大朝會재상宰相의 반열에 서라고 명하였다.
마침내 정주鄭州에 가서 살았는데 기거起居음식飮食이 젊은 사람처럼 강녕康寧하였다.
4년 뒤 나이 82세에 질병으로 집에서 졸하였다.
공은 가정家庭에서 지낼 적에 검약儉約을 법도로 삼아 비록 지위가 이미 존귀해진 뒤에도 항상 자기 자제들로 하여금 직접 비천卑賤한 일을 하도록 하면서 “공자孔子께서 본래 비천한 일을 잘하는 것이 많으셨다.”라 하고 〈위선잠爲善箴〉을 지어 자손들을 경계하였다.
임종臨終할 때 수십 마디 말을 입으로 말하여 스스로 자기 묘지墓誌를 지었다.
공의 전취前娶기국부인杞國夫人 송씨宋氏이고 후취後娶기국부인沂國夫人 왕씨王氏이다.
자식은 아들이 10명이니 장자長子술고述古이고, 차자次子비부원외랑比部員外郞 구고求古,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학고學古,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 도고道古, 대리평사大理評事 관각교감館閣校勘 박고博古, 전중승殿中丞 수고修古, 비서성정자祕書省正字 이고履古, 광록시승光祿寺丞 유고游古, 대리시승大理寺丞 습고襲古,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 상고象古이다.
진공秦公의 세 아들은 장자는 요수堯叟추밀사樞密使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이고, 막내는 요자堯咨무신군절도사武信軍節度使이니 모두 진사시에 1등으로 급제하였다.
세 아들이 이미 존귀해진 뒤에도 진공이 여전히 건강하여 빈객들이 그 집에 찾아올 때마다 공과 형, 아우가 곁에서 모시고 서 있으니 앉은 손님들이 움츠러들면서 불안해하며 가겠다고 하면, 진공이 웃으면서 “이들은 배우는 아이들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이 진공이 자식을 가르치는 방식을 본보기로 삼았고 진씨陳氏세가世家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공의 손자는 40명이며 증손자는 2명이고 형과 아우의 후손을 합하면 아들, 손자, 증손이 68명이고, 딸, 손녀, 증손녀가 54명인데,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재예로 당시 사람들에게 일컬어지고 있으니, 아, 성대하다고 이를 만하다.
은 다음과 같다.
진씨陳氏의 높은 지절志節
혼탁한 세상에서 깨끗함을 보전하였네
덕을 감추고 빛을 숨기어
오래 기다린 뒤에 드러났다네
음덕이 발복發福하는 것은 때가 있으니
공으로부터 봉록이 시작되었네
빼어나고 빼어난 형과 아우가
공을 이어 함께 나아왔도다
재상의 수레 높고 높으니
무덕武德이 걸출한 분이라네
높은 깃발과 호화로운 수레는
사세四世에 걸쳐 여섯 이 누렸네
세대世代마다 봉국封國을 받으니
로다
상서尙書중서中書를 지내고
의동儀同태사太師를 맡았다네
조부와 부친이 앞에 계시고
손자와 증손이 뒤에 가득한데
공은 그 가운데 자리하고
형과 아우가 좌우에 있었네
오직 그 처음에 부지런하여
그 마지막까지 봉록을 누렸고
오직 그 검약을 잘 실천하여
그 부유함을 소유하였어라
아름다운 공덕과 드러난 명성이
온 나라에 퍼져 있으니
선조들은 먼 후대에 음덕을 끼치고
후인들은 창대하게 되리라
명문銘文을 새기고 명성을 남겨서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노라


역주
역주1 : 이 글은 慶曆 4년(1044)에 지은 것이다. 陳公은 陳堯佐로, 자는 希元이고 시호는 文惠이다. 《宋史》에 傳記가 있다.
역주2 潁川公旣葬于新鄭 : 潁川公은 자세하지 않다. 어쩌면 潁水가 新鄭을 경유해 흘러서 그렇게 명명한 것인 듯하다. 新鄭은 지금의 河南省 新鄭縣이다.
역주3 其子尙書主客郞中述古等七人 : 尙書主客郞中은 尙書省 禮部의 屬官으로, 賓禮로 四夷의 조공을 받는 일을 관장한다. 述古는 《宋史》 〈陳堯咨傳〉에는 陳堯咨의 아들로 되어 있다.
역주4 太常之狀 : 太常寺에서 審査하고 封爵한 狀을 가리킨다.
역주5 先正 : 先代의 신하이다. 《尙書》 〈說命 下〉 ‘昔先正保衡’에 대한 孔安國의 傳에 “正은 長官으로, 先世에 장관을 지낸 신하를 말한다.”라고 하였다.
역주6 博州 : 宋代에는 河北東路에 속하였고 治所가 지금 山東省 聊城에 있었다.
역주7 王建 : 五代시대 前蜀을 건립한 사람이다. 903년에서 918년까지 在位하였다. 자가 充圖로, 許州 舞陽 사람이다. 唐末에 杜審權을 따라 농민 봉기를 진압하고서 天復 3년(903)에 蜀王으로 봉해졌다. 開平 원년(907)에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成都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蜀이라고 하니 역사에서는 前蜀으로 일컬어진다.
역주8 遯于閬州之西水 : 閬州는 지금의 四川省 閬中으로 宋代에는 利州路에 속하였다. 西水는 閬中의 縣名이다. 저본에는 ‘遯’자가 없는데 본집을 참고하여 보충하였다.
역주9 皇曾祖……不顯于蜀 : 詡와 昭汶은 모두 史書에 보이지 않고 省華는 아래 주석에 자세하다. ‘皆開府儀同三司……’句는 ‘不顯于蜀’과 서로 모순이 되니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라고 한다면 ‘開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不’자가 ‘丕’자가 되어야 할 듯하다. 그렇지 않으면 諛墓文이 된다.
역주10 秦公 : 陳堯佐의 부친 陳省華로, 진요좌로 인해 秦公에 추증되었다. 진성화는 자가 善則으로 처음에 孟昶을 섬겼는데 宋나라에서 籠城主簿, 櫟陽令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吏部流內銓으로 옮기고 開封府知事를 지냈으며 光祿卿, 左諫議大夫를 지냈다. 68세로 졸하니 太子少師에 특별히 추증되었다.
역주11 太常丞 : 太常寺丞으로, 卿‧少卿과 함께 태상시의 관원인데 禮樂, 郊廟, 社稷, 陵寢 등에 관한 일을 맡았다.
역주12 知開封府錄事參軍 : 개봉부의 屬官으로, 府內 各曹의 문서를 관리하고, 府內의 일들을 규찰하는 일을 맡았다.
역주13 府推官 : 개봉부추관으로 지위는 司事參軍의 위이다. 府內에 判官, 推官 네 명이 있어 일을 나누어 맡고 함께 그 장관을 보좌하였다.
역주14 通判潮州 : 潮州는 宋代에 廣南東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潮州에 있었다. 通判은 州의 보좌관으로 知州를 도와 州의 일을 맡았다.
역주15 知壽廬二州 提點府界諸縣公事 : 壽州는 宋代에 淮南西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壽春에 있었고, 廬州는 淮南西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廬州에 있었다. 提點府界諸縣公事는 관명으로, 提點開封府界諸縣鎭公事를 말한다. 司法, 刑獄 및 河渠 등의 일을 관장하였다.
역주16 判三司都察院 兩浙轉運使 : 判三司都察院은 三司使의 속관인 三部勾院判官을 가리킨다. 三部勾院判官은 鹽鐵, 度支, 戶部 三院의 勾當官이 되어 천하의 金, 穀, 百物을 출납하고 장부에 기록하며 그 실수와 오류를 살펴 조사하는 일을 맡았다. 兩浙은 兩浙路로 치소는 杭州에 있었다.
역주17 御試 : 殿試라고 하기도 하는데 황제가 친히 시험을 보이는 것이다. 宋나라 제도에 擧子가 禮部에서 시험을 보는 것을 省試라고 하는데 성시에서 합격하면 등제한 거자의 성명을 순서대로 안배하고 올려서 다시 御試를 보았다.
역주18 貶監鄂州茶場 : 鄂州는 宋代에 荊湖北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鄂州에 있었다. 監茶場은 관명으로, 茶場을 관리하는 稅官이다.
역주19 明年 : 天禧 4년(1020)인데, 《宋史》 〈眞宗紀〉에는 河水가 滑州에서 터진 일이 천희 3년에 기록되어 있다. 滑州는 宋代에 京西北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白馬에 있었다.
역주20 乾興元年 作永定陵 : 眞宗이 이해 正月에 승하하여 永定陵에 安葬하였다.
역주21 (三)[二] : 저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본집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역주22 永興軍 : 지금의 陝西省 東部 및 河南省 西部 일대를 포괄하는데 치소는 京兆府에 있었다.
역주23 行過鄭州……御史中丞范諷辨公無罪 : 《宋史》 〈陳堯佐傳〉에 “태후가 돌아가시자 집정 대신들이 많이 파직되었다. 陳公이 戶部侍郞 知永興軍으로 鄭州를 지날 적에 郡人 王文吉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告變하니 御史中丞 范諷에게 조사하게 하였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라고 한 일을 가리킨다. 范諷은 자가 補之로, 진사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御史中丞 光祿卿 給事中이 되었다. 《宋史》에 傳記가 있다.
역주24 同州 : 宋代에 永興軍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馮翊에 있었다.
역주25 昔韓文公 諭鰐而聽 : 韓愈가 지은 〈祭鰐魚文〉을 가리킨다.
역주26 丁晉公參知政事 : 丁晉公은 丁謂로 蘇州 長洲 사람이다. 자는 謂之이고 다른 자는 公言이다. 太宗 때 진사에 급제하고 眞宗 景德 연간에 右諫議大夫 權三司使가 되었다. 얼마 뒤 王欽若과 함께 황제의 뜻에 영합하여 道觀을 크게 짓고 여러 차례 吉祥과 災異를 보고하였다. 天禧 3년(1019) 參知政事가 되어 이듬해 寇準을 몰아내고 재상으로 승진하여 晉國公에 봉해졌다. 환관 雷允恭과 결탁하여 정사를 독단하였는데 乾興 원년 仁宗이 즉위한 뒤 崖州司戶參軍으로 폄적되었다가 뒤에 祕書監에 제수되고 光州에서 죽었다.
역주27 鑿澤州路……鑿懷州路 : 澤州는 宋代에 河東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山西省 晉城縣 서북쪽에 있었다. 河北은 黃河 이북 지역이다. 懷州는 송대에 河北西路에 속했는데 치소는 지금의 河南省 沁陽에 있었다.
역주28 〈公〉 : 저본에는 ‘公’이 없으나, 본집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9 (歸)[埽] : 저본에는 ‘歸’로 되어 있으나, 본집에 의거하여 ‘埽’로 바로잡았다. 埽는 고대에 黃河의 물길을 다스릴 때 볏짚, 돌덩이, 나뭇가지 등을 한데 모아 묶어서 둥근 기둥 모양으로 만들어서 기슭을 보호하거나 물길을 막는 데 쓰던 물건이다.
역주30 太常博士陳詁 知祥符縣 : 陳詁는 자가 天經으로, 晉江 사람이다. 大中祥符 元年(1008)에 進士가 되어 同知太常禮院, 祠部員外郞을 역임하고 지방으로 나가 祥符縣을 맡았다. 마지막에는 兵部員外郞을 지내고 졸하여 兵部尙書에 추증되었다. 祥符縣은 지금의 河南省 開封市 서쪽에 있다.
역주31 〈果〉 : 저본에는 ‘果’가 없으나, 본집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32 章獻明肅太后 : 眞宗劉皇后(968~1033)로, 이름은 娥이다. 진종이 崩御할 때 조서를 내려 아직 어린 仁宗을 보좌하여 攝政하게 하였다. 明道 2년(1033)에 졸하자 諡號를 章獻明肅이라고 하였다.
역주33 (猶)[尤] : 저본에는 ‘猶’로 되어 있으나, 본집에 의거하여 ‘尤’로 바로잡았다.
역주34 楊億 : 자는 大年으로, 蒲城 사람이다. 11살에 太宗이 그 명성을 듣고 대궐로 불러와 詩賦를 시험하게 하였다. 祕書省正字에 제수되었는데 뒤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眞宗 때 두 번 翰林學士가 되었고 工部侍郞까지 올랐다. 諡號는 文이다. 사람됨이 올곧고 名節을 숭상하였으며 문장을 잘하였는데 典章制度에 밝아 《冊府元龜》 1,000권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저서에 《括蒼集》, 《武夷集》, 《潁陰集》, 《韓城集》, 《退居集》 등이 있다.
역주35 劉蕡 : 자가 去華로, 昌平 사람이다. 침착하고 헌걸차면서 智謀가 있어 커다란 포부로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그 당시 환관들이 권력을 독점하니 유분이 늘 통분하였다. 100명의 儒者들을 大庭에 불러 策問하였는데 그 對策에서 당시의 폐단을 두루 말하니 시험관이 이를 보고 탄복하였지만 환관들이 두려워 감히 취하지 못하였다. 令狐楚와 牛僧孺가 불러 幕僚로 삼았고 祕書郞에 제수되었다. 환관들이 그를 몹시 싫어하여 죄를 엮어 무함하여 柳州로 폄적되었다가 거기서 졸하였다. 유분이 대책한 일은 大和 2년(828) 唐 文宗이 100여 명의 유자들을 불러 召對할 때 유분이 上言한 것을 가리킨다. 新舊 《唐書》의 本傳에 보인다.
역주36 王隨 : 자가 子正으로, 進士 甲科에 급제하여 황제의 총애를 자주 입어 明道 연간에 江淮安撫使가 되었다가 다시 戶部侍郞, 參知政事에 배수되었고 이윽고 吏部侍郞, 知樞密院事가 더해졌다. 그렇지만 오래지 않아 질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황제가 닷새에 하루만 조회하라고 명하였다. 陳堯佐, 韓億, 石中立과 함께 執政하였다. 諡號는 文惠이다. 《宋史》 本傳에 보인다.
역주37 程琳 : 앞의 〈鎭安軍節度使同中書門下平章事贈太師中書令程公神道碑銘〉에 보인다.
역주38 多能鄙事 : 《論語》 〈子罕〉에 나오는 말이다.
역주39 臨卒……自誌其墓 : 《宋史》 本傳에 “〈陳堯佐가〉 스스로 그 묘지를 짓기를 ‘82세까지 수를 누렸으니 요절한 것 아니고 관직이 1품에 이르렀으니 비천하지 않으며 使相으로 녹봉을 받았으니 욕되지 않았다. 이 세 가지를 통해 그럭저럭 부모님 넋이 깃든 곳으로 돌아가 쉴 수 있겠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40 子男十人……太常寺太祝象古 : 《宋史》 〈陳堯咨傳〉에는 博古와 述古가 陳堯佐의 아우 陳堯咨의 아들로 되어 있어 이곳과 다르다.
역주41 四世六公 : 陳堯佐의 증조부 陳詡, 조부 陳昭汶, 부친 陳省華는 모두 太師에 추증되었다. 형 陳堯叟는 檢校太尉를 지내고 진요좌는 太子太師로 물러났는데 모두 司空에 추증되었고, 아우 陳堯咨는 太尉에 추증되었다. 太尉, 司徒, 司空 혹은 太師, 太傅, 太保를 三公이라고 일컬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42 惟世有封 秦楚及齊 : 陳氏 가운데 封國을 받은 자는 세 사람으로 秦國公 省華, 楚國公 昭汶, 齊國公 詡이다.
역주43 : 본집에는 ‘聞’으로 되어 있다. ‘問’과 ‘聞’은 통용하여 ‘名聲’을 뜻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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