而歐陽公序之에 只道其故舊凋落之意하니 隱然可見이라
余竊不自揆
하야 少習爲
하야 因得論次當世賢士大夫功行
하니 自
以來
로 名卿鉅公
이 往往見於余文矣
라
至於朋友故舊가 平居握手言笑에 意氣偉然하야 可謂一時之盛이어늘 而方從其遊라가 遽哭其死하고 遂銘其藏者는 是可歎也라
蓋自
之亡
으로 逮今二十五年之間
에 相繼而歿
하야 爲之銘者
가 至二十人
이요 又有余不及銘
과 與雖銘而非交且舊者
는 皆不與焉
하니 嗚呼
라 何其多也
아
不獨善人君子를 難得易失이요 而交游零落이 如此하니 反顧身世死生盛衰之際에 又可悲夫인저
而其間又有不幸罹憂患하고 觸網羅하야 至困阨流離以死와 與夫仕宦連蹇하야 志不獲伸而歿하고 獨其文章이 尙見於世者하니 則又可哀也歟인저
然則雖其殘篇斷稿라도 猶爲可惜이온 況其可以垂世而行遠也아
故余於
之歿
에 旣已銘其壙
하고 又類集其文而序之
에 其言尤感切而殷勤者
는 以此也
라
陳留江君鄰幾
가 常與聖兪子美遊
하고 而又與聖兪
로 하니 余旣誌而銘之
하고 後十有五年
에 로다
雖知名於時나 仕宦久而不進하고 晩而朝廷이 方將用之러니 未及而卒이라
其學問通博하고 文辭雅正深粹而論議多所發明하며 詩尤淸澹閑肆可喜라
강린기江鄰幾의 글이 지금 전하지 않으니 응당 문장이 매우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구양공歐陽公이 서문을 지을 때에 단지 고구故舊들이 조락凋落했다는 뜻만 말하였으니 문장이 뛰어나지 않음을 은연중에 볼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서 어릴 때에 명장銘章 짓는 법을 배워 당세의 어진 사대부의 공적과 행실을 서술하였으니, 명도明道와 경우景祐 연간 이후 명경名卿과 거공鉅公들이 왕왕 나의 글에 보인다.
붕우朋友와 고구故舊들의 경우에는 평소 그들과 악수하고 담소를 나눌 때는 의기가 호방하여 한때에 성대하였다고 할 만한데, 바야흐로 종유하다 갑자기 그들의 죽음에 곡하고 마침내 무덤에 명문銘文을 짓는 데에 이르는 것은 탄식할 만하다.
윤사로尹師魯가 죽은 뒤로 지금까지 25년 사이에 서로 잇달아 죽어 명문銘文을 지어준 사람이 20명에 이르고, 또 내가 미처 명문銘文을 지어주지 못한 사람과 비록 명문銘文을 지어 주었지만 교유하거나 고구故舊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이 속에 들지 못했으니, 아, 어쩌면 이리도 많단 말인가.
선인善人과 군자君子를 얻기 어렵고 잃기 쉬울 뿐만 아니라 교유하던 사람들도 사라져가는 것이 이와 같으니, 사생死生과 성쇠盛衰의 즈음에 신세身世를 돌아봄에 또 슬퍼할 만하다.
그 사이에 또 불행히 우환을 만나고 국법을 저촉하여 곤액을 당하여 이리저리 떠돌다 죽거나 벼슬살이가 연이어 잘못되어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죽고 오직 문장만이 오히려 세상에 드러난 사람도 슬퍼할 만하다.
그렇다면 비록 얼마 남지 않은 시문과 불완전한 원고일지라도 오히려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데, 더구나 세상에 드리워져 후세에 남길 글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내가 성유聖兪와 자미子美가 죽은 뒤에 이미 그들의 무덤에 묘지명墓誌銘을 지었고, 또 그들의 글을 분류하고 모아 서문을 쓸 때에 그 말이 더욱 비감悲感하고 간절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진류陳留 강린기江鄰幾 군이 늘 성유聖兪‧자미子美와 종유하고, 또 성유聖兪와 같은 시기에 죽었으니 내가 이미 묘지명墓誌銘을 지었고, 15년 뒤에 회서淮西로 와서 태수가 되어 또 그의 집에서 문집을 얻어 서문을 지었다.
강린기江鄰幾는 꿋꿋하고 인후仁厚한 군자君子이다.
비록 당시에 이름은 알려졌지만 벼슬길에는 오랫동안 나아가지 못하였고, 만년에 조정이 한창 그를 등용하려고 하였는데 등용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학문은 통달하고 박흡博洽하며 문사는 전아하고 순수하며 논의는 발명한 바가 많았으며, 시는 더욱 청담淸澹하고 한사閑肆하여 좋아할 만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이 이미 세상에 저절로 유행하고 있으니 실로 나의 말로 인해 명성이 오르거나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특히 여기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대개 감회가 있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