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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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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江鄰幾文 今不傳하니 當非其文之至者
而歐陽公序之 只道其故舊凋落之意하니 隱然可見이라
余竊不自揆하야 少習爲하야 因得論次當世賢士大夫功行하니以來 名卿鉅公 往往見於余文矣
至於朋友故舊 平居握手言笑 意氣偉然하야 可謂一時之盛이어늘 而方從其遊라가 遽哭其死하고 遂銘其藏者 是可歎也
蓋自之亡으로 逮今二十五年之間 相繼而歿하야 爲之銘者 至二十人이요 又有余不及銘 與雖銘而非交且舊者 皆不與焉하니 嗚呼 何其多也
不獨善人君子 難得易失이요 而交游零落 如此하니 反顧身世死生盛衰之際 又可悲夫인저
而其間又有不幸罹憂患하고 觸網羅하야 至困阨流離以死 與夫仕宦連蹇하야 志不獲伸而歿하고 獨其文章 尙見於世者하니 則又可哀也歟인저
然則雖其殘篇斷稿라도 猶爲可惜이온 況其可以垂世而行遠也
故余於之歿 旣已銘其壙하고 又類集其文而序之 其言尤感切而殷勤者 以此也
陳留江君鄰幾 常與聖兪子美遊하고 而又與聖兪 하니 余旣誌而銘之하고 後十有五年 로다
鄰幾 毅然仁厚君子也
雖知名於時 仕宦久而不進하고 晩而朝廷 方將用之러니 未及而卒이라
其學問通博하고 文辭雅正深粹而論議多所發明하며 詩尤淸澹閑肆可喜
然其文已自行於世矣 固不待余言以爲輕重이라
而余特區區於是者 蓋發於有感而云然이라


07. 강린기江鄰幾문집文集에 대한 서문
강린기江鄰幾의 글이 지금 전하지 않으니 응당 문장이 매우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구양공歐陽公이 서문을 지을 때에 단지 고구故舊들이 조락凋落했다는 뜻만 말하였으니 문장이 뛰어나지 않음을 은연중에 볼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서 어릴 때에 명장銘章 짓는 법을 배워 당세의 어진 사대부의 공적과 행실을 서술하였으니, 명도明道경우景祐 연간 이후 명경名卿거공鉅公들이 왕왕 나의 글에 보인다.
붕우朋友고구故舊들의 경우에는 평소 그들과 악수하고 담소를 나눌 때는 의기가 호방하여 한때에 성대하였다고 할 만한데, 바야흐로 종유하다 갑자기 그들의 죽음에 곡하고 마침내 무덤에 명문銘文을 짓는 데에 이르는 것은 탄식할 만하다.
윤사로尹師魯가 죽은 뒤로 지금까지 25년 사이에 서로 잇달아 죽어 명문銘文을 지어준 사람이 20명에 이르고, 또 내가 미처 명문銘文을 지어주지 못한 사람과 비록 명문銘文을 지어 주었지만 교유하거나 고구故舊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이 속에 들지 못했으니, 아, 어쩌면 이리도 많단 말인가.
선인善人군자君子를 얻기 어렵고 잃기 쉬울 뿐만 아니라 교유하던 사람들도 사라져가는 것이 이와 같으니, 사생死生성쇠盛衰의 즈음에 신세身世를 돌아봄에 또 슬퍼할 만하다.
그 사이에 또 불행히 우환을 만나고 국법을 저촉하여 곤액을 당하여 이리저리 떠돌다 죽거나 벼슬살이가 연이어 잘못되어 뜻을 펼치지 못한 채 죽고 오직 문장만이 오히려 세상에 드러난 사람도 슬퍼할 만하다.
그렇다면 비록 얼마 남지 않은 시문과 불완전한 원고일지라도 오히려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데, 더구나 세상에 드리워져 후세에 남길 글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내가 성유聖兪자미子美가 죽은 뒤에 이미 그들의 무덤에 묘지명墓誌銘을 지었고, 또 그들의 글을 분류하고 모아 서문을 쓸 때에 그 말이 더욱 비감悲感하고 간절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진류陳留 강린기江鄰幾 군이 늘 성유聖兪자미子美와 종유하고, 또 성유聖兪와 같은 시기에 죽었으니 내가 이미 묘지명墓誌銘을 지었고, 15년 뒤에 회서淮西로 와서 태수가 되어 또 그의 집에서 문집을 얻어 서문을 지었다.
강린기江鄰幾는 꿋꿋하고 인후仁厚군자君子이다.
비록 당시에 이름은 알려졌지만 벼슬길에는 오랫동안 나아가지 못하였고, 만년에 조정이 한창 그를 등용하려고 하였는데 등용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학문은 통달하고 박흡博洽하며 문사는 전아하고 순수하며 논의는 발명한 바가 많았으며, 시는 더욱 청담淸澹하고 한사閑肆하여 좋아할 만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이 이미 세상에 저절로 유행하고 있으니 실로 나의 말로 인해 명성이 오르거나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특히 여기에 정성을 다하는 것은 대개 감회가 있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역주
역주1 : 이 글은 宋 神宗 熙寧 4년(1071)에 지은 것이다. 鄰幾는 江休復(1005~?)의 字이다. 宋나라 開封府 陳留 사람이다. 進士에 합격한 뒤 藍山尉와 大理寺丞, 殿中丞, 集賢校理를 역임하였고 蘇舜欽과 교유하였다. 문장이 醇雅하고 시에도 뛰어났으며 隷書를 잘 썼다. 거문고와 바둑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에 《春秋世論》, 《嘉祐雜志》, 《唐宜鑒》 등이 있다.
역주2 銘章 : 銘文을 가리킨다. 문체의 하나로 사람의 일생을 기록하여 器物에 새기는 것인데, 때로는 자신을 경계하는 말을 器物에 새기기도 한다. 神道碑, 墓表, 墓誌銘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역주3 明道景祐 : 明道와 景祐는 宋 仁宗의 연호로 明道는 1032년부터 1033년까지, 景祐는 1034년부터 1037년까지 사용하였다.
역주4 尹師魯 : 師魯는 尹洙(1001~1047)의 字이다. 北宋 河南府 사람으로 仁宗 天聖 2년(1024)에 進士가 되었고, 起居舍人, 直龍圖閣을 역임하였다. 范仲淹이 貶謫되자 師友가 죄를 졌으니 자신도 죄를 피할 수 없다고 上奏하다 쫓겨나 唐州에서 酒稅를 감독하였다. 성격이 안으로는 강직하지만 겉으로는 온화했으며 박학하고 도량이 넓었다. 歐陽脩와 함께 古文을 창도하였고 河南先生이라 불렸다. 저서에 《河南先生文集》 28권이 전해온다.
역주5 聖兪 : 梅堯臣(1002~1060)의 字이다. 宋나라 安徽 宣城 사람으로 호는 宛陵이다. 蘇舜欽‧歐陽脩 등과 함께 盛唐의 시를 근본으로 하여 당시 유행하던 西崑體를 일소하고, 새로운 宋詩의 開祖가 되었으며 杜甫 이후 최고의 시인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저서에 《宛陵集》 60권 등이 있다.
역주6 子美 : 蘇舜欽(1008~1048)의 자이다. 자세한 내용은 〈蘇氏文集序〉 참조.
역주7 同時以卒 : 梅堯臣은 《歐陽文忠公文集》 권33 〈梅聖兪墓誌銘〉을 참고해보면 嘉祐 5년(1060) 4월 癸未日에 죽었고, 江鄰幾는 《歐陽文忠公文集》 권33 〈江鄰幾墓誌銘〉을 참고해보면 같은 해 같은 달 乙亥日에 죽었으니 梅堯臣보다 8일 먼저 죽었다.
역주8 來守淮西……得其文集而序之 : 淮西는 唐나라 方鎭의 이름으로 완칭은 淮南西路이다. 大曆 이후로 蔡州에 治所를 두었다. 歐陽脩의 〈年譜〉에 “熙寧 3년(1070) 7월에 蔡州의 태수가 되고 9월에 蔡州에 도착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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