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莊宗雄心處 與歐陽公之文으로 可上下千古
嗚呼
盛衰之理 雖曰天命이나 豈非人事哉
原莊宗之所以得天下與其所以失之者 可以知之矣
世言之將終也 以三矢 賜莊宗而告之曰
이요 어늘 而背晉以歸梁하니 此三者 吾遺恨也
與爾三矢하노니 爾其無忘乃父之志하라하야늘
莊宗受而藏之于廟하고 其後用兵 則遣從事하야 以一告廟하야 請其矢하야 盛以錦囊하야 負而前驅하고 及凱旋而納之러라
方其하고 하야 入于太廟하야 還矢先王하고 而告以成功하야는 其意氣之盛 可謂壯哉인저
及仇讐已滅하고 天下已定하얀 이라
豈得之難而失之易歟
抑本其成敗之迹而皆自於人歟
書曰 이라하니 憂勞 可以興國이요 逸豫 可以亡身 自然之理也
故方其盛也하얀 擧天下之豪傑하야도 莫能與之爭이러니 及其衰也하얀 하야 爲天下笑하니
夫禍患 常積于忽微하고 而智勇多困於所溺이니 豈獨伶人也哉


11. 《오대사五代史》 〈영관전伶官傳〉에 대한
장종莊宗웅심雄心 부분이 구양공歐陽公의 문장과 천고千古고하高下를 다툴 만하다.
아아!
성쇠盛衰의 이치는 비록 하늘의 이라 하지만 어찌 사람의 일이 아니겠는가.
후당後唐 장종莊宗이 천하를 얻은 까닭과 천하를 잃은 까닭을 궁구窮究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진왕晉王이 임종할 때 화살 세 개를 장종莊宗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은 나의 원수이다.
연왕燕王은 내가 세운 자이고 거란契丹은 나와 맹약하여 형제가 된 나라이거늘 을 배반하고 의 편이 되었으니, 이 셋에 대해서는 내가 죽어도 이 남는다.
너에게 화살 세 개를 주노니, 너는 네 아비의 뜻을 잊지 말라.”라고 하였다.
장종이 그 화살을 받아서 종묘宗廟에 보관해두었다가 그 후 군사를 출동시킬 때면 종사관從事官을 시켜 하나의 소뢰少牢로써 종묘에 고하고 그 화살을 가져가겠다고 청하여 그 화살을 비단 주머니에 담아서 짊어지고 앞에서 말을 달려갔다가 개선凱旋하면 종묘에 반납하였다.
부자父子를 포승으로 묶고 군신君臣의 머리를 상자에 담아 와서 종묘에 들어가 선왕先王께 화살을 돌려 드리고 성공을 고할 때를 당해서는, 그 의기의 성대함이 씩씩했다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원수들이 이미 멸망하고 천하가 이미 평정됨에 미쳐서는 한 사내가 밤중에 소리치자 난리를 일으키는 자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였다.
이에 황급히 동쪽으로 도망쳐 나와서 적을 보기도 전에 사졸士卒들이 흩어지니, 임금과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여 하늘에 맹서하며 머리카락을 자르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으니, 어쩌면 그리도 쇠약해졌는가!
어쩌면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운 것인가?
아니면 그 성공과 패망의 자취를 궁구해보면 모두 사람에게서 비롯하는 것인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가득 참은 덜어냄을 부르고 겸손함은 보탬을 받는다.”라고 하였으니, 근심과 노고는 나라를 일으킬 수 있고, 안일安逸유락遊樂은 몸을 망칠 수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융성할 때에는 온 천하의 호걸도 그와 싸울 수 없었는데, 쇠약해졌을 때에는 수십 명의 영인伶人 따위가 그를 곤궁하게 하여 몸은 죽고 나라는 멸망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대저 화환禍患은 늘 지극히 미세한 일에서 쌓이고 지용智勇을 갖춘 호걸은 대개 자신이 탐닉하는 바에 의해 곤궁하게 되는 법이니, 어찌 유독 영인뿐이겠는가.


역주
역주1 五代史伶官傳論 : 이 글은 《新五代史》 권25 〈伶官傳〉에서 뽑은 것이다. 伶官은 관직을 제수받은 伶人이다. 영인은 연극, 歌舞, 음악 연주 등을 하는 藝人이다. 〈영관전〉은 後唐 莊宗의 총애를 받은 伶官 敬新磨‧景進‧史彦琼‧郭從謙 등이 정치를 망치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莊宗은 後唐의 군주 李存勖의 廟號이다.
역주2 晉王 : 莊宗 李存勖(856~906)의 아버지인 李克用을 가리킨다. 唐나라 말엽에 山西省 일대를 割據하고 있다가 晉王에 봉해졌다.
역주3 梁 吾仇也 : 梁은 後梁의 태조인 朱全忠을 가리킨다. 李克用이 주전충과 함께 黃巢의 난을 진압하는 데 戰功을 세웠다. 이극용이 주전충과 원수가 된 사연을 《新五代史》 권4 〈唐本紀〉에는 “이극용이 汴州를 지나면서 封禪寺에서 군사를 쉬게 하고 있었는데, 주전충이 上源驛에서 이극용에게 饗應을 베풀었다. 밤에 술자리가 끝나고 이극용은 취하여 누워 있었는데 복병이 나오고 불길이 일었다. 侍者 郭景銖가 촛불을 끄고 이극용을 침상 아래 숨긴 다음 물을 이극용의 얼굴에 뿌려 술기운을 깨게 하고 난리가 일어났음을 말해주었다. 마침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불을 껐고, 이극용은 從者 薛鐵山‧賀回鶻 등의 도움을 받아 자기 軍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극용은 후에 숙적 朱全忠에게 太原에서 포위되어 위협을 받던 중 병사하였다.
역주4 燕王 吾所立 : 燕王은 劉仁恭‧劉守光 父子를 가리킨다. 《新五代史》 권39 〈雜傳〉 제27에 “유인공이 戍兵을 거느리고 幽州를 공격하러 가는 길에 居庸關에 이르러 패전하여 달아나 晉나라로 가니, 晉王이 그를 壽陽의 鎭將으로 삼았다. 유인공은 꾀와 속임수가 많고 사람을 잘 섬겼고, 진왕이 아끼는 장수인 蓋寓를 더욱 잘 섬겼다. 그리하여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말하기를 ‘燕에 있을 때 죄 없이 讖言 때문에 쫓겨났다.’고 하면서 이어 燕의 허실을 말하고 燕을 차지할 수 있는 계책을 말하였다. 이에 晉王이 더욱 믿고 그를 아꼈다. 乾寧 元年에 晉이 李匡儔를 격파하고 유인공을 幽州留後로 삼고 자기가 신임하는 燕留得 등 10여 명을 남겨두어 유인공의 군사를 감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당나라 조정에 청하여 유인공을 檢校司空 盧龍軍節度使에 제수되게 하였다. 그런데 그 후 晉이 羅弘信을 공격할 때 유인공에게 병력을 보내주길 청하였는데 유인공이 병력을 주지 않았다. 진왕이 서찰을 보내 조금 질책하니, 유인공이 크게 노하여 晉의 使者를 구금하고 燕留得 등을 죽이고 배반하였다. 이에 진왕이 직집 토벌하러 갔다가 安塞에서 大敗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5 契丹 與吾約爲兄弟 : 거란은 遼 太祖 耶律阿保機를 가리킨다. 《新五代史》 권73 〈四夷附錄〉 제2에 “梁이 唐의 帝位를 찬탈하려 할 때 晉王 李克用이 거란으로 사신을 보내니, 야율아보기가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가서 雲州 樂城에서 이극용과 회합하였다. 술자리가 벌어져 술에 취하자 이극용과 야율아보기가 서로 손을 잡고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다. 이극용이 금과 비단을 많이 주고 함께 군사를 일으켜 梁을 격파하기를 기약하였으며, 야율아보기는 말 천 필을 晉에 주었다. 그러나 야율아보기는 돌아간 뒤에 맹약을 배반하고 使者 袍笏梅老를 梁에 보내 함께 擧兵하여 晉을 멸망시키자고 하였다. 이극용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원한을 품었다.”라고 하였다.
역주6 少牢 : 제사의 규모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희생으로 소‧양‧돼지를 모두 사용하는 경우를 太牢라고 하고, 양과 돼지만 사용하는 경우를 少牢라고 한다. 《禮記 玉藻 嚴陵方氏 注》
역주7 係燕父子以組 : 914년에 後唐 莊宗 李存勖이 장수를 보내 幽州를 격파하고 劉仁恭과 劉守光 부자를 사로잡아 압송하여 太原에 돌아와서 종묘에 바쳤다. 《舊五代史》 권28 〈唐書 莊宗紀〉에 “晉陽에 이르러 포승으로 유인공과 유수광을 묶어서 호령하며 들어왔다. 이날 유수광의 목을 베고 대장 李存霸를 시켜 유인공을 代州로 압송하고 그의 심장을 칼로 찔러 피를 내어서 武皇陵에 올려 고한 다음 斬首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8 函梁君臣之首 : 923년에 李存勖이 大梁을 격파하자 梁 末帝 朱友貞이 部將을 시켜 자신을 죽이게 하였다. 《舊五代史》 권10 〈梁書 末帝紀 下〉에 “황제가 도읍인 中都가 함락하고 晉나라 군대가 장차 이를 것이란 말을 듣고, 控鶴都將 皇甫麟을 불러 이르기를 ‘나는 晉나라 사람과 대대로 원수이니, 저들의 처형을 기다릴 수 없다. 卿이 나의 목숨을 끊어서 원수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황보인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자 황제가 ‘경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장차 나를 팔아넘기겠는가?’라고 하니, 황보인이 칼을 잡고 자기 목을 찌르려 하자 황제가 그 칼을 잡았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면서 대성통곡하였다. 戊寅日 저녁에 황보인이 建國樓 아래에서 칼로 찌르니, 황제가 崩御하였다. 황보인은 즉시 자결하였다.……莊宗이 河南尹 張全義에게 詔命을 내려 장사 지내주게 하고 황제 목을 태묘에 보관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9 一夫夜呼 亂者四應 : 926년에 貝州의 군졸 皇甫暉가 軍中에서 도박하다가 자신이 지자 군졸들을 충동질하여 변란을 일으켜 鄴城을 점거하였다. 이에 邢州‧滄州 등지에 주둔하던 군사들이 이어서 병란을 일으켜 호응하였다. 《新五代史 권49 皇甫暉傳》
역주10 蒼皇東出……何其衰也 : 皇甫暉가 반란을 일으키자 後唐 莊宗이 이극용의 양자인 李嗣源을 시켜 진압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사원이 군사들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어 鄴城의 叛軍들과 연합하여 도성으로 쳐들어왔다. 장종이 당황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나아가 萬乘鎭에 이르니, 이사원이 이미 大梁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장종이 서둘러 돌아오다가 洛陽城 동쪽의 石橋에 이르러 술을 마시며 슬피 우니, 장수 元行欽 등 100여 명이 머리털을 자르고 목숨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하늘에 맹서하고는 임금과 신하들이 서로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역주11 滿招損 謙受益 : 《書經》 〈虞書 大禹謨〉에 “가득 참은 덜어냄을 부르고 겸손함은 보탬을 받는 것이 바로 하늘의 도이다.[滿招損 謙受益 時乃天道]”라고 하였다.
역주12 數十伶人困之 而身死國滅 : 後唐 莊宗이 梁을 멸망시킨 뒤로 音樂과 女色에 빠져서 伶人들을 총애하여 관직을 주니, 조정의 政事가 혼란해졌다. 李嗣源의 반란이 일어난 뒤 영인 출신인 郭從謙이 기회를 틈타서 난리를 일으켰는데, 莊宗이 流矢를 맞아서 죽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