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歲에 皇考崇國公觀爲綿州軍事推官이라 六月二十一日寅時에 公生이라
是歲
에 崇公終於泰州軍事判官
이라 公叔父
注+曄時任隨州推官
하야 因卜居焉
이라 公母夫人鄭氏年方二十九
라 携公往依之
하야 遂家于隨
라
貧無資
하야 以荻畫地
하야 教公書字
라 稍長
에 多誦古人篇章
하니 使學爲詩
라 叔父後歷閬州推官江陵府掌書記
하고 仕至二千石
하고 이라
是歲
에 葬崇公于吉州吉水縣瀧岡
注+其後至和元年, 析吉水縣之報恩鎭, 置永豐縣, 遂隷永豐.이라
公年十歲라 在隨라 家益貧하야 借書抄誦이라 州南大姓李氏子好學하야 公多游其家하야 於故書中에 得唐韓昌黎文六卷하야 乞以歸하야 讀而愛之이라 爲詩賦에 下筆如成人하니 都官曰 奇童也로다 他日必有重名이라하다
是歲
에 公應擧隨州
하야 試左氏失之誣論
이라 其略云
라하다 人已傳誦
이러니 坐賦逸
하야 黜
이라
是歲
에 公携文謁胥學士
注+偃於漢陽
하니 胥公大奇之
하야 留置門下
라 冬
에 携公泛江
하야 如京師
라
是春에 公從胥公하야 在京師라 試國子監爲第一하야 補廣文館生이라 秋에 赴國學解試하야 又第一이라
正月
에 試禮部
하니 翰林學士晏公
注+殊知貢擧
라 公復爲第一
이라 三月
에 御試崇政殿
하야 公甲科第十四名
이라 五月
에 授將仕郞
秘書省校書郞
하고 充西京留守推官
이라
三月
에 公至西京
이라 錢文僖公
注+惟演爲留守
하니 幕府多名士
라 與尹
注+洙師魯梅
注+堯臣聖俞尤善
하야 日爲古文歌詩
하야 遂以文章名冠天下
라 初
에 胥公許以女妻公
이러니 是歲
에 親迎于東武
라
是春及秋
에 兩游嵩嶽
이라 秋
에 蓋從通判謝絳
하야 奉御香告廟也
라 禮畢
에 同游五人
이 皆見峭壁大書神淸之洞
注+ 公又嘗行縣, 視旱蝗.이라
正月
에 以吏事如京師
하야 因省叔父于漢東
이라 三月還洛
에 夫人胥氏卒
하니 時生子未逾月
이라 九月
에 할새 公至鞏縣陪祭
라 十二月
에 進階承奉郞
이라
三月
에 西京秩滿
하야 歸襄城
이라 五月
에 如京師
라 會前留守王文康公
注+曙入樞府
하야 薦召試學士院
이라 閏六月乙酉
에 授宣德郞試大理評事兼監察御史
하고 充鎭南軍節度掌書記館閣校勘
이라
秘閣所藏書多脫謬
하야 七月甲辰
에 詔
編定
하야 하야 著爲總目
하니 公預焉
이라 是歲
에 再娶諫議大夫楊公
注+大雅女
라
是歲七月에 公同產妹之夫張龜正死于襄城하니 謁告視之라 九月에 夫人楊氏卒이라
公年三十이라 是歲에 天章閣待制權知開封府范仲淹이 言事忤宰相하야 落職하야 知饒州라 公切責司諫高若訥하니 若訥以其書聞하야 五月戊戌에 降爲峽州夷陵縣令이라
公自京師로 沿汴絶淮泝江하야 奉母夫人하야 赴貶所하야 十月至夷陵이라
三月
에 謁告至許昌
하야 娶薛簡肅公
注+奎女
라 是夏
에 叔父都官卒
이라 九月
에 還夷陵
이라 十二月壬辰
에 移光化軍乾德縣令
이라
二月
에 知制誥謝希深
注+絳出守鄧州
에 梅聖俞將宰襄城
하야 與希深偕行
이라 五月
에 公謁告往會
하야 留旬日而還
이라
六月甲申
에 復舊官
하고 權武成軍節度判官廳公事
라 公自乾德
으로 奉母夫人
하야 於南陽
이라 冬
에 暫如襄城
이라
是春에 赴滑州라 時范文正公起爲陜西經略招討安撫使하야 辟公掌書記어늘 辭不就라
六月辛亥
에 召還
하야 復充館閣校勘
하고 仍修崇文總目
이라 十月
에 轉太子中允
이라 癸巳
에 라 是歲
에 子發生
이라
五月庚戌
에 權同知太常禮院
한대 以見修崇文總目辭
하야 許之
라 八月乙酉
에 許州對公事回
하야 依舊供職
注+曾孫建世編年載此, 未詳.이라
十一月丙寅
에 祀南郊
할새 하야 引終獻
이라 十二月
에 加騎都尉
라 己丑
에 崇文總目成
하야 改集賢校理
라
正月丁巳
에 이라 三月丙辰
에 御試進士
賦
할새 公擬進一首
하니 賜勅書獎諭
라 四月丙子
에 復差同知禮院
이라
어늘 宰相呂夷簡薦富弼報聘
하니 人皆危之
라 公上書引
하야 乞留弼
한대 不報
라
五月
에 復應詔上書
하야 極陳弊事
라 八月
에 請外
하야 九月
에 通判滑州
하야 十月
라
是歲에 仁宗廣言路하고 修政事하니 人多薦公宜爲臺諫이라 三月에 召還하야 癸巳에 轉太常丞知諫院이라 四月에 至京이라
十二月己亥
에 어늘 公辭
라 辛丑
에 有旨不試
하고 直以右正言知制誥
하야 仍供諫職
이라
丁未
에 同詳定
이라 是月立春
에 祭
할새 爲獻官
하고 尋例賜
이라
三月庚午
에 兼判
이라 四月乙未
에 契丹賀生辰人使御筵於都亭驛
하고 己亥
에 命公使河東
하야 計度
及盜鑄鐵錢竝
虧額利害
라
七月에 還京師라 八月甲午에 保州軍叛하고 契丹聲言討西夏라 癸卯에 除公龍圖閣直學士河北都轉運按察使라
九月
에 三朝典故成書
하니 以公嘗預編纂
으로 賜詔獎諭
라 十一月
에 하야 進階朝散大夫
하고 封信都縣開國子食邑五百戶
라
是春
에 이라 時
杜正獻范文正韓忠獻富文忠公
이 以黨論相繼去
하니 公上書辨之
라
小人素已憾公
이러니 會公
하니 諫官錢明逸因以財產事及公
하야 下開封鞫治
라
府尹楊日嚴觀望傅會하니 上命戶部判官蘇安世入內供奉官王昭明監勘하야 得無他어늘 八月甲戌에 猶落龍圖閣直學士하고 罷都轉運按察使하야 降知制誥知滁州라 十月甲戌에 至郡이라 是歲에 子奕生이라
十二月에 以南郊恩으로 加上騎都尉하고 進封開國伯하고 加食邑三百戶라 是歲에 子棐生이라
閏正月乙卯에 轉起居舍人하고 依舊知制誥하고 徙知揚州하야 二月庚寅에 至郡이라
正月丙午에 移知潁州하야 二月丙子에 至郡하야 樂西湖之勝하야 將卜居焉이라 四月丙戌에 轉禮部郞中하고 八月辛未에 復龍圖閣直學士라 是歲에 子辯生이라
七月丙戌
에 改知應天府
하고 兼南京留守司事
라 己酉
에 至府
라 十月己未
에 라 是歲
에 이라
三月壬戌
에 丁母夫人憂
하야 歸潁州
라 四月
에 舊官
이어늘 公固辭
하니 八月
에 許之
라
八月에 自潁州護母喪하야 歸葬吉州之瀧岡하고 胥楊二夫人祔焉이라 是冬에 復至潁이라
五月에 服闋하야 除舊官職하야 赴闕이라 六月癸巳에 朝京師하야 乞郡이어늘 不許라 七月甲戌에 權判流內銓이라
하여 戊子
에 出知同州
라 判吏部南曹吳充
이 爲公辨明
이로대 不報
라
知諫院范鎭一再極言하고 而參知政事劉沆方提擧修唐書에 亦乞留公修書라 八月丙午에 沆拜相하고 戊申에 詔公修唐書라 九月辛酉에 遷翰林學士하고 壬戌에 兼史館修撰하고 又差勾當三班院이라
十月乙巳
에 할새 攝侍中
하야 捧盤取水
라 十二月庚戌
에 臘饗
할새 攝太尉行事
라
三月
에 同孫抃考試諸司寺監人吏
라 六月己丑
에 하고 已而
오 乞外
하야 改翰林侍讀學士集賢殿修撰
하고 出知蔡州
라 侍御史趙抃知制誥劉敞上疏留公
하니 七月戊午
에 復領舊職
이라
八月辛丑에 假右諫議大夫하고 充賀契丹國母生辰使하야 將持送仁宗御容이러니 會虜主殂라 癸丑에 改充賀登位國信使라 十二月庚戌에 宿虜界松山이라
公年五十이라 二月甲辰에 使還하야 進北使語錄이라 閏三月丁亥에 判太常寺兼禮儀事라 孟夏薦饗에 攝太尉行事라 五月癸未에 知通進銀臺司兼門下封駁事라 乙未에 免勾當三班院이라
六月甲子
에 奉勅祈晴醴泉觀
이라 八月壬戌
에 知益州張方平除三司使
하고 甲子
에 詔公
三司公事
하야 以俟其至
하고 而命李淑代知銀臺司
라
乙亥
에 車駕詣景靈宮
하야 朝拜天興殿
할새 充贊導禮儀使
하고 又朝謁眞宗及章懿太后
할새 攝太常卿
이라
九月辛卯
에 大慶殿行
할새 爲贊引太常卿
이라 禮成
에 加上輕車都尉
하고 進封樂安郡開國侯
하고 加食邑五百戶
라 十二月
에 被差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
이라
正月癸未
에 權知禮部貢擧
하니 賜御書文儒二字
라 乙已
에 하고 轉右諫議大夫
라 三月癸卯
에 爲
發哀苑中
할새 攝太常卿
이라
六月丙寅
에 進封兗國公主
하고 七月壬午
에 命公攝禮部侍郞
하야 以印授冊使
라 乙未
에 兼判尙書禮部
라 九月己卯
에 兼判秘閣秘書省
이라
十一月辛巳
에 權判史館
이라 丙申
에 權知審刑院
하고 하야 辛丑免
이라 十二月辛亥
에 權判三班院
이라
癸亥
에 權奉安明德元德章穆三后御容於
하고 車駕行酌獻禮
할새 充禮儀使
라 是月
에 被差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
이라
正月壬午에 上幸興國寺及啓聖院하야 朝謁太祖太宗神御殿할새 攝太常卿이라 二月癸卯에 契丹遣使告其國母哀하니 差公館伴이라
三月辛未에 兼侍讀學士하니 以員多固辭不拜라 癸未에 充宗正寺同修玉牒官이라 甲午에 同陳旭考試在京百司等人이라 六月庚戌에 加龍圖閣學士權知開封府라
二月戊辰
에 免開封
하고 轉給事中同提擧在京諸司庫務
라 是月
에 充御試進士詳定官
하니 賜御書善經二字
라 四月丁卯
에 奏告今冬太廟親行
之禮
라
癸酉
에 孟夏薦饗
할새 竝攝太尉行事
라 丙子
에 兼充群牧使
라 六月甲申
에 刪定
라 九月丁酉
에 奉勅祈晴相國寺
라
十月壬申에 車駕朝饗景靈宮하고 癸酉에 祫饗太廟할새 竝攝侍中行事라 丁丑에 加護軍하고 食實封二百戶라
四月丁卯
에 孟夏薦饗太廟
할새 攝太尉行事
라 七月戊戌
에 上新修唐書二百五十卷
하고 庚子
에 하야 轉禮部侍郞
이라 九月丁亥
에 兼翰林侍讀學士
라 十月庚午
에 車駕朝拜景靈宮天興殿
하고 朝謁眞宗及章懿太后神御殿
할새 攝侍中
이라
十一月辛丑에 拜樞密副使하고 加食邑五百戶食實封二百戶라 甲寅에 同修樞密院時政記라 十二月에 被差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三月戊申에 侍上幸後苑하야 賞花華景亭하고 釣魚涵曦亭하고 遂宴太淸樓라 閏八月辛丑에 轉戶部侍郞參知政事하고 進封開國公하고 加食邑五百戶食實封二百戶어늘 公辭轉官하니 許之라
九月庚申에 同修中書時政記라 十二月丙戌에 臘享太廟할새 攝太尉行事라
正月己酉朔
에 大慶殿朝賀
할새 攝侍中
하야 承旨宣制
라 三月乙卯
에 祈雨南郊
할새 攝太尉行事
라 辛酉
에 이라
四月壬午
에 上嘉祐編勅
이라 七月庚戌
에 差充明堂
라 九月戊申
에 文德殿
할새 攝侍中
하야 奏
이라
己酉
에 朝饗景靈宮
하고 庚戌
에 朝饗太廟
할새 竝攝司徒
라 辛亥
에 明堂
하고 己未
에 進階正奉大夫
하고 加柱國
하고 仍賜推忠佐理功臣
이라
十二月丙申
에 上幸龍圖天章閣
하야 召輔臣至待制三司副使以上臺諫官皇子宗室駙馬都尉管軍
하야 觀
御書
하고 又幸寶文閣
하야 親
하야 分賜群臣
이라
公得雙幅大書歲字
한대 下有御押
하고 加以御寶
하며 王珪夾題八字云 嘉祐御札賜歐陽修
하고 仍於絹尾
에 書翰林學士臣王珪奉聖旨題賜名
이라 又出御制觀書詩一首
하야 令群臣屬和
注+하고 遂宴群玉殿
이라
庚子
에 再召近臣及三館臣僚
하야 赴天章閣
하야 觀三朝瑞物太宗眞宗御集
하고 次赴寶文閣
하야 觀御飛白書
하고 賜公
字
하고 復燕群玉殿
이라 後數日
에 公以狀進詩謝
注+라
按兩宴皆有賜書
로대 而實錄及
하고 當時
에 亦不及庚子再賜
하고 而實錄及序
에 又不及館職預召
하고 惟東齋記事言之
라
에 明言群玉殿所賜
하니 時子履任集賢校理
하야 與東齋記事合
이라 但不知是日公得何字
나 其爲金花牋則無疑
라
然
에 乃云黃絹兩大字
는 又何也
오 云 鸞拂
舞
라하고 하니 得非預坐者衆
하야 所賜或不同耶
아
實錄
에 二十三日丙申二十七日庚子
로대 而岐公序乃作戊申壬子
하니 不應差誤如此
니 殆傳寫訛耳
注+ “黃金塗紙看揮毫.” 又司馬溫公涑水記聞, 亦載兩賜飛白.라
二月乙亥
에 奉勅充沈貴妃冊禮使
注+不及行禮라 四月壬申
에 英宗卽位
라 甲戌
에 奉勅書大行皇帝哀冊謚寶
라
甲申에 覃恩하야 轉戶部侍郞하고 進階金紫光祿大夫하고 加食邑五百戶하고 食實封二百戶하고 仍賜推忠協謀佐理功臣이라
乙酉에 奉勅篆受命寶하니 其文曰 皇帝恭膺天命之寶라 五月戊辰에 爲皇帝祈福於南郊할새 攝太尉行事라 七月戊申에 押伴契丹祭吊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八月癸巳
에 奉勅篆大行皇帝謚寶
하니 其文曰 神文聖武明孝皇帝之寶
라 十月乙酉
에 이라 十二月庚午
에 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
이라
四月甲午에 奉勅祈雨社稷이라 閏五月戊辰에 特轉吏部侍郞이라 八月辛丑에 奉勅祈晴太社라 十二月壬子에 差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是春에 上表乞外어늘 不允이라 四月辛丑景靈宮奉安仁宗御容에 車駕行酌獻之禮할새 攝侍中이라 八月에 以大雨水로 再乞避位어늘 不允이라
九月辛酉에 提擧編纂太常禮書百卷成에 詔名太常因革禮하고 賜銀絹이라 十一月庚午에 車駕朝饗景靈宮하고 辛未에 饗太廟하고 壬申에 祀南郊할새 攝司空行事라 進階光祿大夫하고 加上柱國食邑五百戶라
三月三日
에 賜
하니 時初頒明天曆
에 適值丁巳
라 是月
에 以言者指
爲邪說
하니 力求去
어늘 不允
이라 七月癸酉
에 薦饗太廟
할새 攝太尉行事
라
十二月癸未에 奉勅篆皇帝尊號寶하니 其文曰 體乾膺曆文武廣孝皇帝之寶라 乙巳에 押伴契丹賀正旦人使御筵於都亭驛이라
正月丁巳
에 神宗卽位
라 戊辰
에 覃恩
하야 轉尙書左丞
하고 進階
하고 加食邑五百戶
하고 食實封二百戶
하고 仍賜推忠協謀同德佐理功臣
이라
二月
에 第三子棐登進士第
라 是月
에 하니 上察其誣
하야 斥之
어늘 公力求去
라 三月壬申
에 除觀文殿學士
하고 轉刑部尙書知亳州
하고 改賜推誠保德崇仁翊戴功臣
이라
閏三月辛巳
에 宣簽書駐泊公事
하고 陛辭
에 乞
過潁少留
하니 許之
라 五月甲辰
에 至亳
이라 六月戊申
에 視事
라
是歲에 連上表乞致仕어늘 不允이라 八月乙巳에 轉兵部尙書하고 改知靑州하고 充京東東路安撫使라 九月丙申에 至靑이라 十一月丁亥에 郊祀恩하야 加食邑五百戶하고 食實封二百戶라 是歲에 築第於潁이라
三月
에 內侍王延慶便道傳宣撫問
하고 仍賜香藥一銀合
하고 又遞賜新校定前漢書
하니 以公嘗預刊定也
라 冬
에 어늘 不允
이라
四月壬申에 除檢校太保宣徽南院使判太原府河東路經略安撫監牧使하고 兼竝代澤潞麟府嵐石路兵馬都總管이어늘 公堅辭不受라 七月辛卯에 改知蔡州라 九月甲寅에 至蔡라 是歲에 更號六一居士라
公在蔡에 累章告老러니 六月甲子에 以觀文殿學士太子少師致仕하고 七月에 歸潁이라 八月에 將祀明堂할새 詔赴闕陪位어늘 公上章乞免하니 從之라 禮成에 賜衣帶器幣牲餼라
崇寧三年
에 追封秦國公
하고 政和三年
에 追封楚國公
注+皆以子棐遇郊恩이라
文忠公年譜不一이요 惟桐川薛齊誼廬陵孫謙益曾三異三家爲詳하니 雖用舊例나 每列其著述에 考文力之先後라 然篇章不容盡載하니 次序寧免疑混이리오
如公曾孫建世以告勅宣劄爲編年도 尙多差互어늘 況餘人乎아 今参稽衆譜하고 傍採史籍하야 而取正於公之文이라
凡居士集外集은 各於目錄에 題所撰歲月하고 而闕其不可知者하며 奏議表章之類는 則隨篇注之하야 定爲文集一百五十三卷하니
居士集五十卷
은 公所定也
라 故寘于首
하고 外集二十五卷次之
하고 易童子問三卷
注+詩本義別行於世外制集三卷内制集八卷表奏書啟四六集七卷奏議十八卷雜著述十九卷集古錄跋尾十卷又次之
하고 書簡十卷終焉
이라
考公行狀컨대 惟闕歸榮集一卷이로대 往往散在外集이요 更俟博求라 别有附錄五卷하니 紀公德業이라 此譜專敍出處하되 詞簡而事粗備하니 覧者當自得之라
慶元二年二月十五日에 郡人登仕郞胡柯는 謹記하노라
진종眞宗 경덕景德 4년(1007, 진종眞宗10) 정미丁未년 1세
이해에 황고皇考 숭국공崇國公 관觀이 면주군사추관綿州軍事推官이 되었다. 6월 21일 인시寅時에 공이 태어났다.
대중상부大中祥符 원년(1008, 진종11) 무신戊申년 2세
대중상부 2년(1009, 진종12) 기유己酉년 3세
대중상부 3년(1010, 진종13) 경술庚戌년 4세
이해에
숭공崇公이
태주군사판관泰州軍事判官으로 재직 중에
고종考終하였다. 공의
숙부叔父가
注+이름은 엽曄이다. 당시
수주추관隨州推官을 맡아 그곳에 살고 있었다. 공의
모부인母夫人 정씨鄭氏는 당시 나이 스물아홉으로 공을 이끌고 가서 의탁하여 마침내
수주隨州에 거주하게 되었다.
집이 가난하고 재산이 없어 억새로 땅에 획을 그어 공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조금 자라서 고인古人의 편장篇章을 많이 외우니 시詩를 배우게 하였다. 숙부는 후에 낭주추관閬州推官과 강릉부장서기江陵府掌書記를 역임하고 벼슬이 이천석二千石에 이르렀고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으로 세상을 떠났다.
대중상부 4년(1011, 진종14) 신해辛亥년 5세
이해에
길주吉州 길수현吉水縣 상강瀧岡에
숭공崇公을 장사 지냈다.
注+그 뒤 지화至和 원년元年(1054)에 길수현吉水縣의 보은진報恩鎭을 분리하여 영풍현永豐縣을 두니 마침내 영풍永豐에 속하게 되었다.
대중상부 5년(1012, 진종15) 임자壬子년 6세
대중상부 6년(1013, 진종16) 계축癸丑년 7세
대중상부 7년(1014, 진종17) 갑인甲寅년 8세
대중상부 8년(1015, 진종18) 을묘乙卯년 9세
대중상부 9년(1016, 진종19) 병진丙辰년 10세
공의 나이 10세였다. 수주隨州에 있었다. 집이 더욱 가난해져 책을 빌려 베껴놓고 외웠다. 고을 남쪽의 대성大姓인 이씨李氏의 아들이 학문을 좋아하여 공이 그 집에 많이 놀러가 고서古書 가운데에서 당唐나라 때 한창려韓昌黎(한유韓愈)의 문집 6권을 얻어 빌려서 돌아와 읽으며 애호愛好하였다. 시부詩賦를 지으면 성인이 지은 것과 같으니, 도관공都官公이 말하기를 “기특한 아이로다. 훗날 반드시 대단한 명성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희天禧 원년(1017, 진종20) 정사丁巳년 11세
천희 2년(1018, 진종21) 무오戊午년 12세
천희 3년(1019, 진종22) 기미己未년 13세
천희 4년(1020, 진종23) 경신庚申년 14세
천희 5년(1021, 진종24) 신유辛酉년 15세
건흥乾興 원년(1022, 진종25) 임술壬戌년 16세
인종 천성天聖 원년(1023, 인종1) 계해癸亥년 17세
이해에 공이 수주隨州에서 과거에 응시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실착은 속임에 있다는 것에 대한 논論〉으로 시험을 보았다. 그 대략大略에 이르기를 “진晉나라에서 돌이 말하고 신莘 땅에 신이 내려왔네. 문 안의 뱀이 다투고 문 밖의 뱀이 상하며 새 귀신은 크고 옛 귀신은 작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이미 이 글을 전하며 외웠는데 부賦에 관운官韻을 빠뜨리는 결격 사유에 걸려 낙방하였다.
천성 2년(1024, 인종2) 갑자甲子년 18세
천성 3년(1025, 인종3) 을축乙丑년 19세
천성 4년(1026, 인종4) 병인丙寅년 20세
공의 나이 20세였다. 수주隨州에서 공의 이름을 예부禮部에 추천하였다.
천성 5년(1027, 인종5) 정묘丁卯년 21세
천성 6년(1028, 인종6) 무진戊辰년 22세
이해에 공이 자신이 지은 글을 가지고
서학사胥學士를
注+이름은 언偃이다. 한양漢陽에서
배알拜謁하니
서공胥公이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라 여기고 문하에 머물게 하였다. 겨울에 서공이 공을 데리고
강江을 건너
경사京師로 갔다.
천성 7년(1029, 인종7) 기사己巳년 23세
이해 봄에 공이 서공胥公을 따라 경사京師에 있었다.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제일등第一等을 차지하여 광문관생廣文館生에 보임補任되었다. 가을에 국학해시國學解試에 응시하여 또 제일등을 차지하였다.
천성 8년(1030, 인종8) 경오庚午년 24세
정월에 예부시에 응시하니
한림학사翰林學士 안공晏公이
注+이름은 수殊이다. 지공거知貢擧였다. 공이 다시 제일등을 차지하였다. 3월에
숭정전崇政殿에서
어시御試를 보아 공이
갑과甲科 제14
명名에 올랐다. 5월에
장사랑將仕郞과
시비서성교서랑試秘書省校書郞을 제수 받고
서경유수추관西京留守推官에
충임充任되었다.
천성 9년(1031, 인종9) 신미辛未년 25세
3월에 공이
서경西京에 이르렀다.
전문희공錢文僖公이
注+이름은 유연惟演이다. 유수留守가 되니
막부幕府에
명사名士들이 많았다. 공은
윤尹注+이름은 수洙이다.사로師魯,
매梅注+이름은 요신堯臣이다.성유聖俞와 더욱 친밀하여 날마다
고문가시古文歌詩를 지어 마침내 문장으로 천하에 으뜸이라는 명성이 났다. 당초
서공胥公이 딸을 공에게 시집보내기로 허락했는데 이해에
동무東武에서
친영親迎하였다.
명도明道 원년(1032, 인종10) 임신壬申년 26세
이해 봄과 가을에 두 번
숭악嵩嶽을 유람하였다. 가을에
통판通判 사강謝絳을 따라
어향御香을 받들고
숭악묘嵩岳廟에
고제告祭하였다.
제례祭禮를 마치고 함께 유람한 다섯 사람이 모두 가파른 절벽에 큰 글씨로 ‘
신청지동神淸之洞’이라고 써져 있는 것을 보았다.
注+부록附錄 뒤의 사희심謝希深이 매성유梅聖俞에게 준 편지에 자세히 보인다. 공이 또 일찍이 현縣을 순행巡行하여 가뭄과 황충해蝗蟲害를 살폈다.
명도 2년(1033, 인종11) 계유癸酉년 27세
정월에 공무로 경사京師에 간 길에 한동漢東에서 숙부叔父를 문안하였다. 3월에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부인 서씨胥氏가 졸卒하니, 아들을 낳은 지 한 달도 넘기지 않은 때였다. 9월에 장헌황후莊獻皇后 유씨劉氏와 장의황후莊懿皇后 이씨李氏를 정릉定陵에 부장祔葬할 때 공이 공현鞏縣에 이르러 성상이 올리는 제사에 참례하였다. 12월에 승봉랑承奉郞으로 품계가 올랐다.
경우景祐 원년(1034, 인종12) 갑술甲戌년 28세
3월에
서경西京의 임기가 만료되어
양성襄城으로 돌아왔다. 5월에
경사京師로 갔다. 마침
전前 유수留守 왕문강공王文康公이
注+이름은 서曙이다. 추밀원樞密院에 들어가 공을 천거하여
시학사원試學士院으로 부름을 받았다.
윤閏6월
을유乙酉일에
선덕랑宣德郞 시대리평사試大理評事 겸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제수 받고
진남군절도장서기鎭南軍節度掌書記 관각교감館閣校勘에
충임充任되었다.
삼관三館과
비각秘閣에 소장된 서적들에
탈락脫落과
오류誤謬가 많아 7월
갑진甲辰일에
조명詔命으로
위관委官에게
편정編定하게 하여
개원開元 때의
사부서목四部書目을 본떠서
총목總目을 만드니 공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해에
간의대부諫議大夫 양공楊公의
注+이름은 대아大雅이다. 딸을
재취再娶로 맞았다.
경우 2년(1035, 인종13) 을해乙亥년 29세
이해 7월에 동복同腹 누이의 남편 장귀정張龜正이 양성襄城에서 죽으니 휴가를 청해 가서 살폈다. 9월에 부인 양씨楊氏가 졸卒하였다.
경우 3년(1036, 인종14) 병자丙子년 30세
공의 나이 30세였다. 이해에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 권지개봉부權知開封府 범중엄范仲淹이 시사時事를 말하면서 재상宰相을 거슬러 파직되어 지요주知饒州가 되었다. 공이 사간司諫 고약눌高若訥을 준절하게 책망하니 고약눌이 그 글을 성상聖上에게 아뢰어 5월 무술戊戌일에 강등되어 협주峽州 이릉현령夷陵縣令이 되었다.
공이 경사京師에서 변하汴河를 따라 내려가 회수淮水를 건너 장강長江을 거슬러 올라가서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폄소貶所로 향하여 10월에 이릉夷陵에 이르렀다.
경우 4년(1037, 인종15) 정축丁丑년 31세
3월에 휴가를 청해
허창許昌에 이르러
설간숙공薛簡肅公의
注+이름은 규奎이다. 딸을 아내로 맞았다. 여름에 숙부
도관공都官公이
졸卒하였다. 9월에
이릉夷陵으로 돌아왔다. 12월
임진壬辰일에
광화군光化軍 건덕현령乾德縣令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원寶元 원년(1038, 인종16)
무인戊寅년
注+11월에 개원改元하였다. 32세
3월에 건덕乾德으로 부임하였다. 이해에 서부인胥夫人이 낳은 아들이 요절하였다.
보원 2년(1039, 인종17) 기묘己卯년 33세
2월에
지제고知制誥 사희심謝希深이
注+이름은 강絳이다. 지등주知鄧州로 나가게 되었을 때
매성유梅聖俞도
양성현령襄城縣令으로 나가게 되어 사희심과 함께 갔다. 5월에 공이 휴가를 청해 가서 이들과 모여 열흘을 머무르고 돌아왔다.
6월 갑신甲申일에 옛 관직을 회복하고 권무성군절도판관청공사權武成軍節度判官廳公事가 되었다. 공이 건덕乾德에서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남양南陽에서 대차待次하였다. 겨울에 잠시 양성襄城에 갔다.
강정康定 원년(1040, 인종18)
경진庚辰년
注+2월에 개원改元하였다. 34세
이해 봄에 활주滑州로 부임하였다. 당시 범문정공范文正公이 협서경략초토안무사陜西經略招討安撫使로 기용되어 공을 장서기掌書記로 초빙하였는데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6월 신해辛亥일에 조정으로 불려 돌아가 다시 관각교감館閣校勘에 충임充任되고 이어서 ≪숭문총목崇文總目≫을 편수編修하였다. 10월에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승전升轉하였다. 계사癸巳일에 예서禮書를 공동 편수하였다. 이해에 아들 발發이 태어났다.
경력慶歷 원년(1041, 인종19) 신사辛巳년 35세
5월
경술庚戌일에
권동지태상례원權同知太常禮院이 되었는데 현재 ≪
숭문총목崇文總目≫을 편수 중이라는 이유로 사양하여 허락받았다. 8월
을유乙酉일에
허주許州에서
공사公事를
주대奏對하고 돌아와 예전대로
공직供職하였다.
注+증손曾孫 건세建世의 〈편년編年〉에 이 사실이 실려 있으나 상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11월 병인丙寅일에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낼 때 섭태상박사攝太常博士가 되어 종헌관終獻官을 인도하였다. 12월에 기도위騎都尉가 더해졌다. 기축己丑일에 ≪숭문총목≫이 완성되어 집현교리集賢校理로 개차改差되었다.
경력 2년(1042, 인종20) 임오壬午년 36세
정월 정사丁巳일에 별두別頭 거인擧人을 고시考試하였다. 3월 병진丙辰일에 진사進士들에게 〈응천이실부이문應天以實不以文〉이라는 주제로 부賦를 짓게 하는 어시御試를 보일 때 공이 한 수를 의작擬作해 올리니 칭찬하는 칙서勅書를 내려 표창하였다. 4월 병자丙子일에 다시 동지례원同知禮院에 차임差任되었다.
거란契丹이 범사泛使를 보내 관남關南의 땅을 요구하자 재상 여이간呂夷簡이 부필富弼을 보빙사報聘使로 천거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공이 상서上書하여 안진경顏眞卿이 이희열李希烈에게 사신 갔던 일을 들어 부필을 만류할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답하지 않았다.
5월에 다시 조명詔命에 응해 상서上書하여 폐단을 낱낱이 아뢰었다. 8월에 외직을 청해 9월에 활주통판滑州通判이 되어 10월에 활주에 이르렀다.
경력 3년(1043, 인종21) 계미癸未년 37세
이해에 인종仁宗이 언로言路를 넓히고 정사政事를 정비하니 사람들이 많이들 공을 대간臺諫으로 삼아 마땅하다고 천거하였다. 3월에 조정으로 불려 돌아와 계사癸巳일에 태상승太常丞 지간원知諫院으로 승전升轉하였다. 4월에 경사京師에 이르렀다.
9월 무진戊辰일에 비의緋衣와 은어銀魚를 하사받고 기사己巳일에 국조훈신國朝勳臣의 명단을 공동으로 상세히 심사하여 정하고 병술丙戌일에 삼조三朝(태조太祖·태종太宗·진종眞宗)의 전고典故를 공동 편수編修하였다. 10월 무신戊申일에 동수기거주同修起居注에 발탁되었다.
12월 기해己亥일에 소시召試하여 지제고知制誥를 삼으려 했는데 공이 사양하였다. 신축辛丑일에 성지聖旨로 시험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우정언右正言으로 지제고知制誥를 삼아 그대로 간관諫官의 직임을 맡게 하였다.
정미丁未일에 편칙編勅을 공동으로 상세히 심사하여 정하였다. 이달 입춘立春에 서태일궁西太一宮에 제사 지낼 때 헌관獻官이 되고 곧 규례에 따라 자장복紫章服을 하사받았다.
경력 4년(1044, 인종22) 갑신甲申년 38세
3월 경오庚午일에 판등문검원判登聞檢院을 겸하였다. 4월 을미乙未일에 거란契丹의 하생신사賀生辰使에게 도정역都亭驛에서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이 되었고 기해己亥일에 공에게 명하여 하동河東에 가서 인주麟州의 폐치廢置와 사사로이 철전鐵錢을 주조하는 일과 반석礬石에 부과하는 세금의 감액減額에 대한 이해利害 관계를 파악하게 하였다.
7월에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8월 갑오甲午일에 보주保州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거란은 서하西夏를 토벌하겠다고 공표하였다. 계묘癸卯일에 공에게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하북도전운안찰사河北都轉運按察使를 제수하였다.
9월에 삼조三朝의 전고典故가 책으로 완성되니 공이 일찍이 편찬에 참여했으므로 조명詔命을 내려 장유獎諭하였다. 11월에 성상이 남교南郊에서 교제郊祭를 지낸 후 은혜를 베풀어 조산대부朝散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신도현개국자信都縣開國子 식읍食邑 5백호戶에 봉해졌다.
경력 5년(1045, 인종23) 을유乙酉년 39세
이해 봄에 진정수眞定帥 전황田況이 진주秦州로 옮기니, 공이 부사府事를 권지權知한 지 석 달째였다. 당시 이부二府의 두정헌공杜正獻公(두연杜衍)과 범문정공范文正公(범중엄范仲淹)과 한충헌공韓忠獻公(한기韓琦)과 부문충공富文忠公(부필富弼)이 붕당朋黨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서로 이어서 조정을 떠나니 공이 상서上書하여 변론하였다.
소인들이 평소부터 공에게 유감을 품고 있었는데 때마침 공의 생질녀甥姪女 장씨張氏가 범법犯法하자 간관諫官 전명일錢明逸이 이를 빌미로 그 집 재산과 관련된 일을 공과 엮어 사건을 개봉부開封府에 내려 심리審理하게 하였다.
부윤府尹 양일엄楊日嚴이 사태를 관망하면서 권세에 영합하니 성상이 호부판관戶部判官 소안세蘇安世와 입내공봉관入內供奉官 왕소명王昭明에게 명해 조사하게 하여 별다른 혐의가 없음을 확인하였는데, 8월 갑술甲戌일에 도리어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와 도전운안찰사都轉運按察使에서 파직되어 지제고知制誥 지저주知滁州로 좌천되었다. 10월 갑술甲戌일에 저주滁州에 도착하였다. 이해 아들 혁奕이 태어났다.
경력 6년(1046, 인종24) 병술丙戌년 40세
공이 저주滁州에 있으면서 취옹醉翁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경력 7년(1047, 인종25) 정해丁亥년 41세
12월에 성상이 남교南郊에서 교제郊祭를 지낸 후 은혜를 베풀어 상기도위上騎都尉를 더하고 개국백開國伯을 진봉進封하고 식읍食邑 3백호戶를 더하였다. 이해에 아들 비棐가 태어났다.
경력 8년(1048, 인종26) 무자戊子년 42세
윤閏정월 을묘乙卯일에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승전升轉하고 예전대로 지제고知制誥를 맡고 지양주知揚州로 자리를 옮겨 2월 경인庚寅일에 고을에 도착하였다.
황우皇祐 원년(1049, 인종27) 기축己丑년 43세
정월 병오丙午일에 지영주知潁州로 옮겨 2월 병자丙子일에 고을에 도착하여 서호西湖의 승경勝景을 좋아하여 장차 그곳에 거주하려 하였다. 4월 병술丙戌일에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승전升轉하고 8월 신미辛未일에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로 복직하였다. 이해에 아들 변辯이 태어났다.
황우 2년(1050, 인종28) 경인庚寅년 44세
7월 병술丙戌일에 지응천부知應天府로 개차改差되고 남경유수사사南京留守司事를 겸하였다. 기유己酉일에 부府에 도착하였다. 10월 기미己未일에 성상이 명당明堂에서 은혜를 널리 베풀어 이부낭중吏部郞中으로 승전升轉시키고 경거도위輕車都尉를 더하였다. 이해에 영주潁州에 전답을 사기로 매성유梅聖俞(매요신梅堯臣)와 약속하였다.
황우 3년(1051, 인종29) 신묘辛卯년 45세
황우 4년(1052, 인종30) 임진壬辰년 46세
3월 임술壬戌일에 모부인母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영주潁州로 돌아왔다. 4월에 이전 관직을 내려 기복起復시키자 공이 고사固辭하니 8월에 공의 뜻을 허락하였다.
황우 5년(1053, 인종31) 계사癸巳년 47세
8월에 영주潁州에서 모부인母夫人을 운구運柩하여 길주吉州의 상강瀧岡으로 돌아와 장사 지내고 서부인胥夫人과 양부인楊夫人을 부장祔葬하였다. 이해 겨울에 다시 영주로 왔다.
지화至和 원년(1054, 인종32)
갑오甲午년
注+3월에 개원改元하였다. 48세
5월에 상喪을 마치고 이전 관직을 제수 받고 대궐로 나아갔다. 6월 계사癸巳일에 경사京師에 입조入朝하여 지방 고을 자리를 청하였는데 허락받지 못했다. 7월 갑술甲戌일에 권판류내전權判流內銓이 되었다.
때마침 소인들이 공이 내시內侍들을 태거汰去할 것을 주청奏請했다고 날조하니 내시들이 원망하고 노여워하여 호종요胡宗堯를 승진시켜 임명하는 것은 부당不當하다는 일로 공을 공격하여 무자戊子일에 지동주知同州로 나갔다. 판이부남조判吏部南曹 오충吳充이 공을 위해 변호하였으나 조정에서 답하지 않았다.
지간원知諫院 범진范鎭이 여러 차례 극간極諫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유항劉沆도 ≪당서唐書≫ 편수編修의 제거提擧로 있으면서 공을 조정에 머무르게 하여 ≪당서≫ 편수를 맡길 것을 청하였다. 8월 병오丙午일에 유항이 재상에 배수되고 무신戊申일에 조명詔命으로 공에게 ≪당서≫를 편수하게 하였다. 9월 신유辛酉일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승진하고 임술壬戌일에 사관수찬史館修撰을 겸하고 또 구당삼반원勾當三班院에 차임差任되었다.
10월 을사乙巳일에 경령궁景靈宮 천흥전天興殿에 조향朝饗할 때 섭시중攝侍中이 되어 쟁반을 받들고 물을 받았다. 12월 경술庚戌일에 효혜孝惠․효장孝章․숙덕淑德․장회황후章懷皇后의 사당에 납향臘饗할 때 섭태위攝太尉가 되어 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지화 2년(1055, 인종仁宗33) 을미乙未년 49세
3월에 손변孫抃과 함께 여러 사司, 시寺, 감監의 관리들을 고시考試하였다. 6월 기축己丑일에 상서上書하여 재상 진집중陳執中을 논핵論劾하고 얼마 뒤 외직을 청하여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으로 개차改差되고 지채주知蔡州로 나갔다. 시어사侍御史 조변趙抃과 지제고知制誥 유창劉敞이 공을 조정에 머물게 해달라고 상소하니, 7월 무오戊午일에 다시 이전 관직을 받았다.
8월 신축辛丑일에 임시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고 거란契丹 국모國母의 생신生辰을 축하하는 사절使節에 충원되어 장차 인종仁宗의 어용御容을 가지고 가서 전달하려 했는데 때마침 오랑캐 임금이 죽었다. 계축癸丑일에 거란 군주의 등극을 축하하는 국신사國信使로 바꾸어 충원되었다. 12월 경술庚戌일에 오랑캐 국경인 송산松山에 묵었다.
가우嘉祐 원년(1056, 인종34)
병신丙申년
注+9월에 개원改元하였다. 50세
공의 나이 50세였다. 2월 갑진甲辰일에 사행使行에서 돌아와 ≪북사어록北使語錄≫을 올렸다. 윤閏3월 정해丁亥일에 판태상시判太常寺 겸예의사兼禮儀事가 되었다. 맹하孟夏에 제향祭享을 올릴 때 섭태위攝太尉가 되어 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5월 계미癸未일에 지통진은대사知通進銀臺司 겸문하봉박사兼門下封駁事가 되었다. 을미乙未일에 구당삼반원勾當三班院에서 면직되었다.
6월 갑자甲子일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예천관醴泉觀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8월 임술壬戌일에 지익주知益州 장방평張方平을 삼사사三司使에 제수하고 갑자甲子일에 조명詔命으로 공에게 권발견삼사공사權發遣三司公事를 맡게 하여 장방평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고 이숙李淑에게 명하여 지은대사知銀臺司를 대리代理하게 하였다.
을해乙亥일에 성상의 거가車駕가 경령궁景靈宮에 가서 천흥전天興殿에 조배朝拜할 때 찬도례의사贊導禮儀使에 충원되고 또 진종眞宗과 장의태후章懿太后의 신어전神御殿에 조알朝謁할 때 섭태상경攝太常卿이 되었다.
9월 신묘辛卯일에 대경전大慶殿에서 공사례恭謝禮를 행할 때 찬인贊引과 태상경太常卿이 되었다. 예를 다 거행하고 상경거도위上輕車都尉가 더해지고 낙안군樂安郡 개국후開國侯에 진봉進封되고 식읍食邑 5백호가 더해졌다. 12월에 거란契丹의 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도정역都亭驛에서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으로 차임差任되었다.
가우 2년(1057, 인종35) 정유丁酉년 51세
정월正月 계미癸未일에 권지례부공거權知禮部貢擧가 되니 성상이 “문유文儒” 두 글자를 적어 하사하였다. 을이乙已일에 마감磨勘하고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승전升轉하였다. 3월 계묘癸卯일에 적청狄靑을 위해 원중苑中에서 애도哀悼를 표할 때 섭태상경攝太常卿을 맡았다.
6월 병인丙寅일에 복강공주福康公主를 연국공주兗國公主로 진봉進封하고 7월 임오壬午일에 공에게 명하여 섭례부시랑攝禮部侍郞이 되어 인장印章을 책사冊使에게 주게 하였다. 을미乙未일에 판상서예부判尙書禮部를 겸하였다. 9월 기묘己卯일에 판비각비서성判秘閣秘書省을 겸하였다.
11월 신사辛巳일에 권판사관權判史館이 되었다. 병신丙申일에 권지심형원權知審刑院이 되고 호숙胡宿이 돌아와 예전대로 복귀하기를 기다려 신축辛丑일에 면직되었다. 12월 신해辛亥일에 권판삼반원權判三班院이 되었다.
계해癸亥일에 명덕明德, 원덕元德, 장목章穆 세 황후皇后의 어용御容을 계성원啓聖院에 임시로 봉안奉安하고 성상의 거가車駕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 예의사禮儀使에 충원되었다. 이달에 거란契丹의 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도정역都亭驛에서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으로 차임差任되었다.
가우 3년(1058, 인종36) 무술戊戌년 52세
정월 임오壬午일에 성상이 흥국사興國寺와 계성원啓聖院에 거둥하여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신어전神御殿에 조알朝謁할 때 섭태상경攝太常卿을 맡았다. 2월 계묘癸卯일에 거란契丹이 사신을 보내 국모상國母喪을 알리니 공을 관반사館伴使로 차임差任하였다.
3월 신미辛未일에 시독학사侍讀學士를 겸하게 하니, 인원이 많다는 이유로 고사固辭하고 숙배肅拜하지 않았다. 계미癸未일에 종정시宗正寺의 동수옥첩관同修玉牒官에 충원되었다. 갑오甲午일에 진욱陳旭과 함께 경사京師의 여러 관사官司의 관리들을 고시考試하였다. 6월 경술庚戌일에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 권지개봉부權知開封府를 더하였다.
가우 4년(1059, 인종37) 기해己亥년 53세
3월 무진戊辰일에 지개봉부知開封府에서 면직되고 급사중給事中 동제거재경제사고무同提擧在京諸司庫務로 승전升轉하였다. 이달에 어시진사상정관御試進士詳定官에 충원되니 성상이 “선경善經” 두 글자를 적어 하사하였다. 4월 정묘丁卯일에 상주上奏하여 이번 겨울에 태묘太廟에서 협향祫饗의 예를 성상이 친히 행해야 함을 고하였다.
계유癸酉일에 맹하孟夏의 세시제향歲時祭享을 올릴 때 섭태위攝太尉를 아울러 맡아 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병자丙子일에 군목사群牧使에 겸하여 충원되었다. 6월 갑신甲申일에 ≪경우광악기景祐廣樂記≫를 산정刪定하였다. 9월 정유丁酉일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상국사相國寺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10월 임신壬申일에 성상이 경령궁景靈宮에서 조향朝饗을 올리고 계유癸酉일에 태묘에서 협향을 올릴 때 섭시중攝侍中을 아울러 맡아 제례를 행하였다. 정축丁丑일에 호군護軍이 더해지고 실제 식읍食邑 3백호戶에 봉해졌다.
가우 5년(1060, 인종38) 경자庚子년 54세
4월 정묘丁卯일에 태묘太廟에 맹하孟夏의 세시제향歲時祭享을 올릴 때 섭태위攝太尉로 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7월 무술戊戌일에 새로 찬수撰修한 ≪당서唐書≫ 250권을 올리고 경자庚子일에 추상推賞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승전升轉하였다. 9월 정해丁亥일에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를 겸하였다. 10월 경오庚午일 하원절下元節에 성상이 경령궁景靈宮 천흥전天興殿에 행차하여 조배朝拜하고 진종眞宗과 장의태후章懿太后의 신어전神御殿에 조알朝謁할 때 섭시중攝侍中을 맡았다.
11월 신축辛丑일에 추밀부사樞密副使에 배수하고 식읍食邑 5백호戶를 더하고 실제 식읍 2백호에 봉하였다. 갑인甲寅일에 ≪추밀원시정기樞密院時政記≫를 공동으로 찬수하였다. 12월에 거란契丹의 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도정역都亭驛에서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으로 차임差任되었다.
가우 6년(1061, 인종39) 신축辛丑년 55세
3월 무신戊申일에 후원後苑에 거둥하는 성상을 모시고서 화경정華景亭에서 꽃을 감상하고 함희정涵曦亭에서 낚시하고 태청루太淸樓에서 연회를 가졌다. 윤閏8월 신축辛丑일에 호부시랑戶部侍郞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전升轉시키고 개국공開國公을 진봉進封하고 식읍食邑 5백호戶를 더하고 실제 식읍 2백호에 봉하였는데, 공이 관직의 승진은 사양하니 허락하였다.
9월 경신庚申일에 ≪중서시정기中書時政記≫를 공동으로 찬수撰修하였다. 12월 병술丙戌일에 태묘太廟에 납향臘享을 올릴 때 섭태위攝太尉로 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가우 7년(1062, 인종40) 임인壬寅년 56세
정월 기유己酉일 초하루에 대경전大慶殿에서 조하朝賀할 때 섭시중攝侍中이 되어 성지聖旨를 받들어 제명制命을 선포하였다. 3월 을묘乙卯일에 남교南郊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때 섭태위攝太尉로 제사祭事를 집행하였다. 신유辛酉일에 삼관三館과 비각秘閣에서 서적書籍을 필사하고 교정하는 일을 관장하고 동역경윤문同譯經潤文이 되었다.
4월 임오壬午일에 ≪가우편칙嘉祐編勅≫을 올렸다. 7월 경술庚戌일에 명당로부사明堂鹵簿使로 차출되었다. 9월 무신戊申일에 문덕전文德殿에서 주청치재奏請致齋를 할 때 섭시중이 되어 중엄中嚴과 외판外辦을 아뢰었다.
기유己酉일에 경령궁景靈宮에서 조향朝饗하고 경술庚戌일에 태묘太廟에서 조향할 때 모두 섭사도攝司徒를 맡았다. 신해辛亥일에 명당明堂에서 대향大饗을 올리고 기미己未일에 정봉대부正奉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주국柱國이 더해지고 이어서 추충좌리공신推忠佐理功臣을 하사받았다.
12월 병신丙申일에 성상이 용도각龍圖閣과 천장각天章閣에 거둥하여 보신輔臣과 대제待制, 삼사三司의 부사副使 이상 관원, 대간관臺諫官, 황자皇子, 종실宗室, 부마도위駙馬都尉, 관군管軍을 불러 삼성三聖의 어서御書를 관람하고 또 보문각寶文閣에 거둥하여 친히 비백서飛白書를 써서 신하들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다.
공은 ‘
세歲’자를 큰 글씨로 쓴
쌍폭雙幅을 얻었는데 아래에는
어압御押이 있고
어보御寶를 찍었으며,
왕규王珪가 글자 곁에 “
가우어찰사구양수嘉祐御札賜歐陽脩(
가우어찰嘉祐御札을
구양수歐陽脩에게 하사한다.)”라는 여덟 글자를 적고, 비단 끝에는 “
한림학사翰林學士 신臣 왕규가
성지聖旨를 받들어 하사받은 신하의 이름을 쓴다.”라고 적었다. 또 성상이 지은 〈
관서觀書〉 시 한 수를 꺼내어 신하들에게 화답하게 하고
注+공이 화답한 시가 〈외집外集〉에 실려 있다. 마침내
군옥전群玉殿에서 연회를 열었다.
경자庚子일에 다시
근신近臣과
삼관三館의 신료들을 불러 천장각으로 가서
삼조三朝의
서물瑞物,
태종太宗과
진종眞宗의
어집御集을 관람하고 다음으로 보문각으로 가서
어비백서御飛白書를 관람하고 공에게
김화전金花牋에 적은 글자를 하사하고 다시 군옥전에서 연회를 열었다. 며칠 뒤 공이
사장謝狀을 올려 시로 사례하였다.
注+사장謝狀은 사륙집四六集에 실려 있고 시는 거사집居士集에 실려 있다.
살펴보건대 두 연회 때 모두 글을 하사하였는데, ≪실록實錄≫과 범촉공范蜀公(범진范鎭)의 ≪동재기사東齋記事≫에는 병신丙申일에 하사한 일만 실려 있고, 당시 왕기공王岐公(왕규王珪)이 친히 조명詔命을 받들어 지은 서문序文에도 경자庚子일에 재차 하사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실록≫과 서문에는 또 관직館職의 신하들이 부름에 참여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고 ≪동재기사≫에서만 언급하였다.
공이 육자이陸子履(육경陸經)의 집에 보관된 비백자飛白字에 기문記文을 쓰면서 군옥전群玉殿에서 하사받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당시 육자리는 집현교리集賢校理를 맡고 있어 ≪동재기사≫의 내용과 부합한다. 다만 이날 공이 어떤 글자를 얻었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김화전金花牋에 쓴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나 진무기陳無己(진사도陳師道)의 〈육일당도서시六一堂圖書詩〉에 “누른 비단의 두 대자大字”라고 한 것은 또 어째서인가? 한충헌공韓忠獻公(한기韓琦)의 사시謝詩에 “난새는 궁초宮綃를 스치며 춤춘다.”라고 하였고 호문공공胡文恭公(호숙胡宿)은 〈사어비백선자謝御飛白扇子〉 시를 지었으니,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아 하사한 물건이 혹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실록≫에는 23일
병신丙申일과 27일
경자庚子일이라고 되어 있는데,
기공岐公의 서문에는
무신戊申일과
임자壬子일이라고 되어 있으니 응당 이처럼 차이가 날 수는 없다. 분명
전사傳寫 과정의 착오일 것이다.
注+기공岐公의 〈재관서再觀書〉 시에 “황금을 바른 종이에 글씨 쓰는 것을 보네.”라고 하였고, 또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의 ≪속수기문涑水記聞≫에도 두 번 비백飛白을 하사한 일이 실려 있다.
이달에 도정역都亭驛에서 거란契丹의 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으로 차출되었다.
가우 8년(1063, 인종41) 계묘癸卯년 57세
2월
을해乙亥일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심귀비책례사沈貴妃冊禮使에
충임充任되었다.
注+행례行禮에 이르지는 않았다. 4월
임신壬申일에
영종英宗이 즉위하였다.
갑술甲戌일에 칙명을 받들어
대행황제大行皇帝(
인종仁宗)의
애책哀冊과
시보謚寶를 썼다.
갑신甲申일에 황제가 은택을 널리 베풀어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승전升轉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식읍食邑 5백호戶가 더해지고 실제 식읍 2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좌리공신推忠協謀佐理功臣을 하사받았다.
을유乙酉일에 칙명을 받들어 수명보受命寶를 전자篆字로 쓰니 “황제공응천명지보皇帝恭膺天命之寶”라는 글이었다. 5월 무진戊辰일에 황제를 위하여 남교南郊에서 복을 빌 때 섭태위攝太尉로 제례祭禮를 집행하였다. 7월 무신戊申일에 도정역都亭驛에서 거란契丹의 제조사祭吊使에게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이 되었다.
8월 계사癸巳일에 칙명을 받들어 대행황제의 시보를 전자로 쓰니 “신문성무명효황제지보神文聖武明孝皇帝之寶”라는 글이었다. 10월 을유乙酉일에 태묘太廟의 증축 수리가 완성되자 명하여 7실七室에 고하게 하였다. 12월 경오庚午일에 도정역에서 거란의 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어연을 베풀 때 압반관이 되었다.
치평治平 원년(1064, 영종英宗1) 갑진甲辰년 58세
4월 갑오甲午일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사직社稷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윤閏5월 무진戊辰일에 특명으로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승전升轉되었다. 8월 신축辛丑일에 칙명을 받들어 태사太社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12월 임자壬子일에 도정역都亭驛에서 거란契丹의 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으로 차출되었다.
치평 2년(1065, 영종2) 을사乙巳년 59세
이해 봄에 표문表文을 올려 외직外職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4월 신축辛丑일에 경령궁景靈宮에 인종仁宗의 어용御容을 봉안하면서 성상이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 섭시중攝侍中이 되었다. 8월에 큰 비가 내린 일로 재차 사직辭職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9월 신유辛酉일에 태상례서太常禮書 100권의 편찬을 주관한 일이 완성되자 조명詔命으로 ≪태상인혁례太常因革禮≫라 이름하고 은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11월 경오庚午일에 성상이 경령궁에 거둥하여 조향朝饗을 올리고 신미辛未일에 태묘太廟에 제향하고 임신壬申일에 남교南郊에 제사할 때 섭사공攝司空으로 제례祭禮를 집행하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상주국上柱國과 식읍食邑 5백호戶를 더하였다.
치평 3년(1066, 영종3) 병오丙午년 60세
3월 3일에 상사연上巳宴을 내리니 당시 처음으로 ≪명천력明天曆≫을 반포할 때가 마침 정사丁巳일이었다. 이달에 언관言官이 복의濮議를 사설邪說로 지목하니 공이 힘써 사직을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7월 계유癸酉일에 태묘太廟에 제향을 올릴 때 섭태위攝太尉로 제례祭禮를 집행하였다.
12월 계미癸未일에 칙명勅命을 받들어 황제皇帝의 존호보尊號寶를 전자篆字로 쓰니, “체건응력문무광효황제지보體乾膺曆文武廣孝皇帝之寶”라는 글이었다. 을사乙巳일에 도정역都亭驛에서 거란契丹의 하정단사賀正旦使에게 어연御筵을 베풀 때 압반관押伴官이 되었다.
치평 4년(1067, 영종4) 정미丁未년 61세
정월 정사丁巳일에 신종神宗이 즉위하였다. 무진戊辰일에 황제가 널리 은혜를 베풀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승전升轉하고 특진特進으로 품계가 오르고 식읍食邑 5백호戶가 더해지고 실제 식읍 2백호에 봉해지고 추충협모동덕좌리공신推忠協謀同德佐理功臣을 하사받았다.
2월에 셋째 아들 비棐가 진사進士에 급제하였다. 이달에 어사御史 팽사영彭思永과 장지기蔣之奇가 유언비어로 공을 더럽히니 성상이 무함誣陷임을 살피고 물리쳤는데 공이 힘써 사직을 청하였다. 3월 임신壬申일에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에 제수되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지박주知亳州로 승전升轉하고 추성보덕숭인익대공신推誠保德崇仁翊戴功臣으로 고쳐 하사받았다.
윤閏3월 신사辛巳일에 첨서선휘원사僉書宣徽院事 주박공사駐泊公事가 되고 하직 인사를 올릴 때 편도便道로 영주潁州에 들러 잠시 머물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5월 갑진甲辰일에 박주에 당도하였다. 6월 무신戊申일에 공무를 시작하였다.
희령熙寧 원년(1068, 신종神宗1) 무신戊申년 62세
이해에 연이어 표문表文을 올려 치사致仕를 청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8월 을사乙巳일에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승전升轉하고 지청주知靑州로 개차改差되고 경동동로안무사京東東路安撫使에 충임充任되었다. 9월 병신丙申일에 청주靑州에 당도하였다. 11월 정해丁亥일에 성상이 교사郊祀를 지내고 은혜를 베풀어 식읍食邑 5백호戶를 더하고 실제 식읍 2백호에 봉했다. 이해에 영주潁州에 집을 지었다.
희녕 2년(1069, 신종2) 기유己酉년 63세
3월에 내시 왕연경王延慶이 편도便道로 와서 성상의 말을 전하며 위문慰問하고서 향약香藥 한 은합銀合을 하사하고 또 새로 교정한 ≪전한서前漢書≫까지 하사하니 공이 이 책의 교정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겨울에 개인적인 생활의 편의를 위해 수주壽州의 관직을 청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희녕 3년(1070, 신종3) 경술庚戌년 64세
4월 임신壬申일에 검교태보檢校太保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 판태원부判太原府 하동로경략안무감목사河東路經略安撫監牧使를 제수하고 대주代州․택주澤州․노주潞州․인주麟州․부주府州․남주嵐州․석주로石州路의 병마도총관兵馬都總管을 아울러 겸하게 했는데 공이 완고하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7월 신묘辛卯일에 지채주知蔡州로 개차改差되었다. 9월 갑인甲寅일에 채주蔡州에 당도하였다. 이해에 육일거사六一居士로 호를 고쳤다.
희녕 4년(1071, 신종4) 신해辛亥년 65세
공이 채주蔡州에서 여러 차례 소장을 올려 나이가 들어 사직해야 함을 고했는데 6월 갑자甲子일에 관문전학사觀文殿學士 태자소사太子少師로 치사致仕하고 7월에 영주潁州로 돌아왔다. 8월에 명당明堂에서 제사祭祀하려 할 때 조명詔命으로 궐에 나와 배위陪位하게 하였는데 공이 소장을 올려 임무를 면해달라 청하니 조정에서 따랐다. 명당의 제례를 지낸 후 공에게 옷과 띠와 기물과 폐백과 제사고기를 하사하였다.
희녕 5년(1072, 신종5) 임자壬子년 66세
윤閏7월 경오庚午일에 공이 훙서薨逝하였다. 8월 정해丁亥일에 태자태사太子太師를 증직하였다.
희녕 7년(1074, 신종7) 8월에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注+시의諡議는 부록附錄에 보인다.
희녕 8년(1075, 신종8) 9월 을유乙酉일에 개봉부開封府 신정현新鄭縣 정현향旌賢鄉에 장사 지냈다.
원풍元豐 3년(1080, 신종13) 12월에 아들이 조정에 나아가 국가의 대례大禮를 만나 태위太尉를 증직하였다.
원풍元豐 원년(1085, 신종18) 12월에 태사太師를 증직하고 강국공康國公을 추봉追封하였다.
소성紹聖 3년(1096, 철종哲宗11) 5월에 연국공兗國公을 추봉追封하였다.
숭녕崇寧 3년(1104,
휘종徽宗3)에
진국공秦國公을
추봉追封하고,
정화政和 3년(1113, 휘종13)에
초국공楚國公을
추봉追封하였다.
注+모두 아들 비棐가 교은郊恩을 만났기 때문이다.
문충공文忠公의 연보年譜는 한 종류가 아닌데 오직 동천桐川 설제의薛齊誼와 여릉廬陵 손겸익孫謙益과 증삼이曾三異 세 사람의 것이 상세하니, 비록 구례舊例를 준용하였으나 매번 저술著述을 나열하면서 문장력의 선후先後를 고찰하였다. 그러나 공의 저작이 다 실리지 못했으니 차서次序에 어찌 의심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공의 증손曾孫 건세建世가 칙서勅書와 차자箚子로 연대 순서를 맞춘 것조차도 착오가 많거늘 하물며 나머지 사람이겠는가. 이제 여러 연보를 참고하고 사적史籍을 두루 채집한 다음 공의 글에 맞추어보았다.
무릇 〈거사집居士集〉과 〈외집外集〉은 각각 목록에 작품을 지은 연도와 달을 적고, 알 수 없는 것은 빼놓았으며, 주의奏議와 표장表章 종류는 편마다 주석하여 문집 153권으로 찬정撰定하였다.
〈거사집〉 50권은 공이 찬정한 것이므로 머리에 두고 〈외집〉 25권은 그 다음에 두고 〈
역동자문易童子問〉 3권,
注+〈시본의詩本義〉가 별도로 세상에 유행한다. 〈
외제집外制集〉 3권, 〈
내제집内制集〉 8권, 〈
표주서계사륙집表奏書啟四六集〉 7권, 〈
주의奏議〉 18권, 〈
잡저술雜著述〉 19권, 〈
집고록발미集古錄跋尾〉 10권은 또 그 다음에 두고 〈
서간書簡〉 10권은 마지막에 두었다.
공의 행장行狀을 살펴보건대 오직 〈귀영집歸榮集〉 1권이 빠졌는데 왕왕 〈외집〉에 흩어져 있고 다시 널리 수집하기를 기다린다. 별도로 〈부록附錄〉 5권이 있으니 공의 덕업德業을 기록하였다. 이 연보는 전적으로 공의 출처出處를 서술하되 글이 간이簡易하고 사적이 대강 갖추어져 있으니, 살펴보는 사람이 응당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원慶元 2년(1196, 영종寧宗2) 2월 15일에 군인郡人 등사랑登仕郞 호가胡柯는 삼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