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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1)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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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右臣等伏見故起居舍人直龍圖閣 文學議論 爲當世所稱이요 忠義剛正 有古人之節이라
其後元昊僣叛 用兵一方하니 當國家有西顧之憂하야 思得材謀之臣하야 以濟多事하야 而洙自初出師 至於元昊納款 始終常在兵間하야 比一時之人 最爲宣力이어늘 而群邪醜正하야 誣搆百端 卒陷罪辜하야 流竄以死
嚮蒙陛下仁聖恩憐하야 哀其寃枉하야 特賜淸雪하야 俾復官資하니 足以感動群心하고 勸勵忠義
今洙孤幼 竝在西京 家道하야 衣食不給이라
洙止一男構하니 年方十餘歲 惸然無依하니 實可嗟惻이라
伏見將來 在近群臣 皆得奏蔭子孫하니
伏望聖慈 錄洙遺忠하고 憫洙不幸하야 特賜其子一官하야 庶霑寸祿하야 以免饑寒하면
則天地之仁 幽顯蒙德이라
臣等忝列侍從 媿無獻納하니 苟有所見이면 不敢不言이로소이다
謹具狀奏聞하고 伏候勅旨하노이다


06. 윤구尹構에게 관직 한 자리를 줄 것을 청하는
바른 의논은 옛사람이 땔나무를 지고 가며 노래하던 손숙오孫叔敖의 자손을 녹용錄用한 것과 같다.
신 등은 삼가보건대 기거사인起居舍人 직용도각直龍圖閣 윤수尹洙는 문학과 의논이 당세에 일컬어졌고 충의 강직하여 고인古人의 절개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조정에 발탁되어 관각館閣에 있으면서 권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써 중인衆人을 배척하여 범중엄范仲淹의 일을 논하다가 마침내 이 때문에 좌천되어 조정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후에 원호元昊가 참람되게 모반하여 한 방면에서 군사를 동원하게 되니, 국가가 서쪽 방면을 돌아보는 근심이 있어 재능과 지모가 있는 신하를 얻어 다사다난한 시국을 구제하려고 생각할 때를 당하여, 윤수가 처음 군사를 출동할 때부터 원호가 화친을 청할 때까지 시종 늘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그 당시 사람들에 비해 가장 많은 힘을 썼는데도, 간사한 자들이 정직한 군자를 시기하여 온갖 방법으로 모함하니 마침내 무고한 죄에 빠져 귀양을 가서 죽고 말았습니다.
예전에 인성仁聖하신 폐하께서 은혜를 베풀어 그 억울한 정상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죄를 씻어주고 다시 관자官資를 회복하게 해주시니,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충의를 권면할 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윤수尹洙의 어린 아들이 모두 서경西京에 있는데 집안 형편이 몹시 가난하여 의식衣食이 부족할 지경입니다.
윤수는 단지 한 아들 만을 두었는데 나이 현재 10여 세에 외로워 의지할 데가 없으니, 실로 측은해 탄식할 만합니다.
삼가 보건대 장차 협향祫享대례大禮를 거행하려는 즈음에 근방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자손에게 음직蔭職을 내려달라고 주청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윤수의 충성을 잊지 마시고 윤수의 불행을 불쌍히 여겨 특별히 그 아들에게 한 관직을 내려주어 조금의 녹봉을 받아 기한飢寒을 면하게 해주소서.
그렇게 하시면 천지와 같은 인애에 저승의 윤수와 이승의 그 아들이 모두 은덕을 입을 것입니다.
신 등은 외람되이 시종의 반열에 있으면서 아무런 충언忠言을 올린 게 없어 부끄러운 터라 진실로 소견이 있으면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을 갖추어 아뢰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


역주
역주1 乞與尹構一官狀 : 이 글은 仁宗 嘉祐 4년(1059)에 지어졌다. 尹構는 尹洙의 아들이다.
역주2 古人錄孫叔敖之裔而負薪行歌者 : 춘추시대 楚나라 재상 孫叔敖가 莊王을 도와 霸業을 이루었다. 그러나 손숙오는 천성이 청렴결백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처자식은 매우 곤궁한 생활을 해야 했다. 손숙오와 친했던 악공인 優孟이 손숙오의 의관을 걸치고 손바닥을 치며 담소하였는데 한 해쯤 되자 손숙오 생전의 모습과 꼭 같게 되었다. 우맹이 손숙오 차림을 하고 장왕을 찾아가 손숙오처럼 행동하자 장왕이 깜짝 놀라 그를 다시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다. 우맹이 사양하면서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그 노래 끝 구절에, “초나라 재상 손숙오는 죽을 때까지 청렴했으나 지금 그의 처자식은 가난하고 곤궁하여 땔나무를 팔아 끼니를 때우니 재상이 되어서 무엇하랴.” 하니, 장왕이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손숙오의 자손을 불러 땅을 봉해주었다. 《史記 滑稽列傳》
역주3 尹洙 : 자는 師魯이고 벼슬은 起居舍人 直龍圖閣에 이르렀다. 문장의 풍격이 簡古하고 시를 잘 지었다. 歐陽脩는 〈尹師魯墓銘〉에서 당대에 문학과 논변이 뛰어나다는 명망이 있고 窮達과 禍福에 임하는 그의 절개가 옛 군자에 손색이 없다고 평하였다. 《唐宋八大家文抄 宋大家歐陽文忠公文抄 尹師魯墓銘》
역주4 初蒙朝廷擢在館閣…遂坐貶黜 : 《宋史》 〈尹洙傳〉에 “대신의 천거로 조정에 들어와서 館閣校勘이 되었고 太子中允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范仲淹이 좌천되었는데 칙명으로 백관에게 붕당을 짓는 것을 경계한다는 내용의 방을 朝堂에 붙이니, 윤수가 上奏하기를 ‘범중엄은 본디 충성스럽고 절개가 곧은 사람으로 신은 그와 스승과 벗의 의리가 있으니, 범중엄의 黨인 셈입니다. 지금 범중엄이 붕당을 지었다는 이유로 죄를 받았으니, 신이 구차히 면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재상이 노하여 관각교감에서 落職되고 다시 掌書記 監唐州酒稅가 되었다.” 하였다.
역주5 屢空 : 孔子가 제자 顔回를 두고 “안회는 도에 가까웠고 자주 끼니를 굶었다.[子曰 回也其庶乎 屢空]” 한 데서 온 말로, 집이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임을 뜻한다. 《論語 先進》
역주6 祫享大禮 : 大祫이라고도 하는데 合祭이다. 즉 遷廟한 먼 조상의 신주와 아직 천묘하지 않은 가까운 조상의 신주를 太祖廟에 모셔놓고 지내는 제사이다. 三年喪을 마치고 새 신주를 宗廟에 들여 모실 때 한 차례 거행하고, 그 다음해 禘祭 때 또 한 차례 거행하고, 이후로는 5년에 한 차례씩 거행한다. 《宋史》 〈仁宗本紀〉에 “嘉祐 4년(1059) 10월 癸酉日에 태묘에서 大祫을 거행하며 大赦令을 내리고 百官에게 은혜를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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