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 出其
而悲曰 吾妻謝氏亡矣
라하고 丐我以銘而葬焉
이라
予諾之未暇作이러니 居一歲中에 書七八至에 未嘗不以謝氏銘爲言하고
謝氏生於盛族하야 年二十以歸吾하야 凡十七年而卒이라 卒之夕에 斂以嫁時之衣하니 甚矣라 吾貧可知也라
然謝氏怡然處之하야 治其家에 有常法하야 其飮食器皿을 雖不及豐侈나 而必精以旨하며
其衣無故新而澣濯縫紉하야 必潔以完하고 所至에 官舍雖卑陋나 而庭宇灑掃하야 必肅以嚴하고 其平居에 語言容止 必從容以和러라
吾窮於世久矣라 其出而幸與賢士大夫遊而樂하고 入則見吾妻之怡怡而忘其憂하야 使吾不以富貴貧賤累其心者는 抑吾妻之助也라
吾嘗與士大夫語에 謝氏多從戶屛竊聽之하고 間則盡能商榷其人才能賢否及時事之得失이 皆有條理러라
吾官吳興할새 或自外醉而歸하면 必問曰 今日孰與飮而樂乎아하야 聞其賢者也則悅하고
否則歎曰 君所交皆一時賢儁이어늘 豈其屈己下之邪아 惟以道德焉이라 故合者尤寡러니 今與是人飮而歡邪아하다
而天旱且蝗如此하니 我爲婦人이라 死而得君葬이면 我幸矣라하니 其所以能安居貧而不困者는 其性識明而知道理가 多此類라
嗚呼라 其生也迫吾之貧하고 而沒也又無以厚焉하니 謂惟文字可以著其不朽라
且其平生에 尤知文章爲可貴하니 歿而得此면 庶幾以慰其魂이요 且塞予悲라 此吾所以請銘於子之勤也라하니 若此어니 予忍不銘가
夫人
은 享年三十七
이요 用夫恩
하야 封南陽縣君
이라 二男一女
라 以其年七月七日
로 卒于
라
梅氏世葬宛陵
이나 以貧不能歸也
라 某年某月某日
에 葬于
之某縣某原
하다
銘曰 高崖斷谷兮
여 之原
이로다 山蒼水深兮
여 土厚而堅
이로다
居之可樂兮여 卜者曰然이라 骨肉歸土兮여 魂氣升天이로다 何必故鄕兮오 然後爲安이리오
나의 벗 宛陵 梅聖兪가 吳興에서 와서 그 부인을 哭한 詩를 꺼내놓고 슬퍼하면서 “나의 아내 謝氏가 세상을 떠났네.”라고 말하고, 나에게 銘을 청하여 받아 장사 지내려 하였다.
내가 그의 청을 수락하고는 지을 겨를이 없었는데 한 해 동안 〈梅聖兪의〉 서신이 일고여덟 번 올 적에 謝氏의 銘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아내는 故 太子賓客 諱 濤의 딸이고 希深의 누이이네. 希深 부자는 당대의 명망 있는 분들로 대대로 顯達하였네.
謝氏가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나이 스물에 나에게 시집와서 17년을 함께하다 졸하였네. 졸하던 날 밤에 시집올 때의 옷으로 斂襲하였으니 몹시도 내가 가난했음을 알 만하네.
그렇지만 謝氏는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면서 집안을 다스릴 때 일정한 법도가 있어, 음식과 그릇을 비록 풍성하게 하지는 못하였지만 반드시 정갈하고 맛있는 것으로 마련하였고,
그 의복은 헌옷과 새옷에 상관없이 빨고 바느질하여 반드시 깨끗하고 온전하게 하였고, 부임하는 곳에 官舍가 비록 낡았더라도 뜰과 집을 청소하여 반드시 엄숙하게 하였고, 평소 거처할 때 언어와 행동을 반드시 조용히 온화하게 하였네.
내가 세상에서 곤궁하게 지낸 지 오래였네. 그런데 집을 나서서는 다행히 어진 士大夫들과 교유하며 즐거워하고 집에 들어오면 내 아내의 온화한 모습을 보고 그 근심을 잊어, 나로 하여금 富貴와 貧賤으로 마음을 얽매지 않게 해준 것은 바로 내 아내의 內助라네.
내가 일찍이 士大夫들과 이야기할 때 謝氏가 문과 병풍 뒤로 몰래 듣고는 간간이 그 사람의 재능과 어짊 및 時事의 득실을 다 판별해내곤 하였는데 이것들이 모두 條理가 있었네.
내가 吳興에서 벼슬살이할 때 간혹 밖에서 취하여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오늘 누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즐거운 것입니까?’라고 물어 어진 자와 마신 것을 들으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탄식하면서 ‘당신께서 교유하는 분들은 모두 당대의 어질고 뛰어난 이들인데 어찌 자신을 굽혀 그들에게 낮추는 것입니까. 오직 道德으로 사귀므로 마음이 맞는 자가 더욱 적었는데 지금 이런 사람들과 마시고 즐거워하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이해에 南方에 가뭄이 들었다. 우러러 날아가는 蝗蟲을 보고 탄식하기를, ‘지금 서쪽 변방의 군대가 아직 풀리지 않아 천하가 더욱 곤궁하고 도적들이 江淮에서 갑자기 일어났는데
가뭄에다 황충이 이와 같으니 저는 일개 부인인지라 죽어서 당신께서 저를 장사 지내주실 수 있으면 다행이겠습니다.’라고 하니, 내 아내가 가난에 처함을 편안히 여기고 곤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性識이 밝고 道理를 안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기 때문이네.
아, 아내는, 살아서는 나의 가난에 시달리고 죽어서는 또 후한 葬事를 치르지 못했으니, 오직 글만이 아내를 不朽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네.
게다가 아내가 평소에 文章이 귀한 줄 더욱 잘 알았으니 죽어서 이를 얻는다면 그 혼령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고 나의 슬픔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네.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간절하게 銘을 청하는 이유라네.” 사정이 이러하니 내가 차마 銘을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인은 享年 37세이고 남편의 恩典을 통해 南陽縣君에 봉해졌다. 2남 1녀가 있다. 이해 7월 7일에 高郵에서 졸하였다.
梅氏는 대대로 宛陵에 장사를 지냈으나 가난하여 돌아갈 수가 없는지라 모년 모월 모일에 潤州의 某縣 某原에 장사 지냈다.
銘은 다음과 같다. 높은 언덕 깊숙한 골짜기여 京口의 언덕이로다 산은 푸르고 물은 깊음이여 흙이 두텁고 견고하도다
머물러 살기에 즐거워할 만함이여 터를 보는 이가 마땅하다 하네 骨肉이 흙으로 돌아감이여 혼령의 氣運이 하늘로 올라가도다 어찌 꼭 고향에 돌아가 그런 뒤에야 편안하겠는가
唐荊川이 말하였다. “부인의 德을 서술함은 간결하나 文辭를 서술함은 자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