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守貞
은 河陽人也
라 晉高祖鎭河陽
할새 以爲客將
하고 其後常從高祖
라가 高祖卽位
에 拜客省使
하다 하다
出帝卽位에 楊光遠反하야 召契丹入寇하니 守貞領義成軍節度使하야 爲侍衛親軍都虞候하야 從出帝幸澶州라
以奇兵入鄆州
하야 渡
하야 柵於河東
이어늘 守貞馳往破之
하니 契丹兵多溺死
하고 獲馬數百匹裨將七十餘人
이라
徙領泰寧軍節度使하야 以兵二萬討之하니 光遠降이어늘 其故吏宋顔悉取光遠寶貨名姬善馬하야 獻之守貞이라 守貞德之하야 陰置顔麾下라
是時에 凡出師破賊에 必有德音하야 赦其餘類한대 而光遠黨與十餘人皆亡命하야 捕之甚急이라 樞密使桑維翰緩其制書하야 久而不下러니
言事者告顔匿守貞所하야 詔取顔殺之라 守貞大怒하야 乃與維翰有隙하다
賊平行賞
에 守貞悉以黦茶
給之
하니 軍中大怒
하야 以帛裹之
하야 爲人首
하야 梟於木間曰 守貞首也
라하다
守貞以功拜同平章事하고 賜以光遠舊第어늘 守貞取旁官民舍하야 大治之하야 爲京師之甲이라 出帝臨幸하야 燕錫恩禮가 出於諸將하다
契丹入寇하야 出帝再幸澶州할새 杜重威爲北面招討使하고 守貞爲都監이라 晉兵素驕어늘 而守貞重威爲將하야 皆無節制하니 行營所至에 居民豢圉一空하고 至於草木皆盡이라
이라하야 出入之費
가 常不下三十萬
하니 由此
로 晉之公私重困
이라
守貞與重威等으로 攻下秦州하고 破滿城하야 殺二千餘人이라 還에 爲侍衛親軍都指揮使하고 領天平軍節度使하고 又領歸德하다
是時
에 이어늘 延壽詐言思歸
하니 願得晉兵爲應
하며 而契丹
亦詐以瀛州降
하니 出帝以爲然
하야 命杜重威等將兵應之
하다
初에 晉大臣皆言重威不忠하야 有怨望之心하니 不可用이라하야늘 乃用守貞이라
是時에 重威鎭魏州한대 守貞嘗將兵往來過魏에 重威待之甚厚하야 多以戈甲金帛奉之라
出帝嘗謂守貞曰 卿嘗以家財散士卒하니 可謂忠於國者乎인저라하야늘 守貞謝曰 皆重威與臣者라하고 因請與重威俱北이라
於是
에 卒以重威爲招討使
하고 守貞爲都監
하야 屯于
하다 契丹寇鎭定
하니 守貞等軍于中渡
라가 遂與重威降于契丹
이라
하니 守貞懼不自安
하야 以謂漢室新造
하고 隱帝初立
하니 天下易以圖
라
而門下僧總倫以方術陰干守貞하야 爲言有非常之相이라하야늘 守貞乃決計反이라
而趙思綰先以京兆反
하야 遣人以
遺守貞
하니 守貞大喜
하야 以爲天人皆應
이라하고 乃發兵
하야 西據潼關
하야 招誘草寇
하니 所在竊發
이라
漢遣白文珂常思等
하야 出軍擊之
한대 已而
오 王景崇又以鳳翔反
이라 景崇與思綰
으로 遣人推守貞爲秦王
하니 守貞拜景崇等官爵
하고 又遣人間以
遺吳蜀契丹
하야 使出兵以牽漢
이라
文珂等攻景崇思綰하야 久無功이어늘 隱帝乃遣樞密使郭威하야 率禁兵將文珂等하야 督攻之라 諸將皆請先擊思綰景崇이어늘 威計未知所向이라
行至華州에 節度使扈彥珂謂威曰 三叛連衡하야 以守貞爲主하니 守貞先敗면 則思綰景崇可傳聲而破矣라 若捨近圖遠하야 使守貞出兵于後하고 思綰景崇拒戰于前이면 則漢兵屈矣라하야늘 威以爲然하야 遂先擊守貞하다
是時에 馮道罷相하야 居河陽한대 威初出兵에 過道家問策이라 道曰 君知博乎아라하야늘 威少無賴하야 好蒲博이라 以爲道譏之하야 艴然而怒라
道曰 凡博者錢多則多勝하고 錢少則多敗하나니 非其不善博이라 所以敗者는 勢也니라 今合諸將之兵하야 以攻一城하니 較其多少에 勝敗可知라하니 威意大悟하야 謀以遲久困之하야
乃與諸將으로 分爲三柵하야 柵其城三面하되 而闕其南하고 發五縣丁夫하야 築長城以連三柵이라
守貞出兵하야 壞長城하니 威輒補其所壞하고 守貞輒出爭之어늘 守貞兵常失十三四라
如此逾年에 守貞城中兵無幾而食又盡하야 殺人而食하니 威曰 可矣라하고 乃爲期日하야 督兵四面攻而破之하다
初
에 守貞召總倫
하야 問以濟否
하니 總倫曰 王當自有天下
나 然
方災
하니 俟殺人垂盡
이면 則王事濟矣
라하야늘 守貞以爲然
이라
及城破
에 守貞與妻子自焚
한대 漢軍入城
하야 於煙燼中
에 斬其首
하야 傳送京師
하야 梟於南市
하고 하다
이수정李守貞은 하양河陽 사람이다. 진晉 고조高祖가 하양을 진수鎭守할 때 객장客將으로 삼았고 그 뒤에도 늘 고조를 따르다가 고조가 즉위하자 객성사客省使에 배수되었다. 안주安州에서 마전절馬全節이 이금전李金全을 격파하는 것을 감군監軍하여 그 공로로 선휘사宣徽使에 배수되었다.
출제出帝가 즉위하자 양광원楊光遠이 반란을 일으켜 거란契丹을 불러들여 침공하도록 하니, 이수정이 의성군절도사義成軍節度使를 맡고 시위친군도우후侍衛親軍都虞候가 되어 출제를 따라 전주澶州로 갔다.
마답麻答이 기병奇兵으로 운주鄆州로 들어와 마가구馬家口를 건너 하동河東에 영채를 세우자 이수정이 급히 가서 격파하니 거란 병사 대부분이 물에 빠져 죽었고 말 수백 필을 얻고 거란의 비장裨將 70여 명을 사로잡았다.
태령군절도사泰寧軍節度使로 자리를 옮겨 2만의 병사로 양광원을 토벌하니 양광원이 항복하였는데 양광원의 옛 관속官屬 송안宋顔이 양광원의 보화寶貨와 아름다운 여인과 좋은 말을 모두 가져다 이수정에게 바쳤다. 그러자 이수정이 고맙게 여겨 송안을 몰래 휘하에 두었다.
이때 군대가 출정하여 적을 격파하면 반드시 덕음德音을 내려 나머지 당여黨與들의 죄를 사면해주었는데, 양광원의 당여 10여 명이 모두 도주하여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긴급하게 수색을 하던 중이었으므로 추밀사樞密使 상유한桑維翰이 잔당들의 죄를 사면하는 제서制書의 시행을 늦추어 오랫동안 하달下達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사政事를 논하는 관원이 이수정의 처소에 송안을 숨긴 사실을 고발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송안을 잡아다 주살誅殺하니 이수정이 크게 노하여 마침내 상유한과 틈이 벌어졌다.
적을 평정하고 논공행상論功行賞할 때 이수정이 장사將士들에게 모두 검게 변질된 다茶와 염목染木을 지급하니 군중軍中이 크게 노하여 명주를 싸서 말아 사람머리 모양으로 만들어 나무 사이에 효시梟示하고서 말하기를 “이수정의 머리이다.”라고 하였다.
이수정은 전공戰功으로 동평장사同平章事에 배수되고 양광원의 옛 저택을 하사받았는데 이수정이 주위의 관사官舍와 민가民家를 빼앗아 크게 저택을 수리하여 경사京師에서 으뜸가는 집이 되었다. 출제가 이수정의 저택에 거둥하여 연회를 열어 은례恩禮를 베푼 것이 다른 장수들보다 월등하였다.
거란契丹이 침공하여 출제出帝가 다시 전주澶州로 거둥할 때 두중위杜重威가 북면초토사北面招討使가 되고 이수정李守貞이 도감都監이 되었다. 진晉나라 병사들은 본래 교만방자하였는데 이수정과 두중위가 장수가 되어 모두 단속을 하지 않으니 행영行營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의 외양간이 텅 비고 심지어 초목까지 다 없어졌다.
처음 군대가 출병할 때 상급을 하사하면서 “괘갑전掛甲錢”이라 하였고 군대가 돌아오자 또 노고를 치하하는 상급을 더 내려 “사갑전卸甲錢”이라 하여 군대가 들고 나는 비용이 항상 30만萬을 밑돌지 않으니 이 때문에 진나라의 관부와 민간의 곤궁이 가중되었다.
이수정이 두중위 등과 함께 진주秦州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만성滿城을 격파하여 2천여 명을 살해하였다. 돌아와서 시위친군도지휘사侍衛親軍都指揮使가 되고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를 맡고 또 귀덕군歸德軍을 맡았다.
이때에 출제出帝가 사람을 보내 서신으로 조연수趙延壽를 불러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조연수가 거짓으로 돌아가고 싶으니 진晉나라의 병력이 호응해 주기를 원한다고 말하였으며 거란契丹의 고모한高牟翰 역시 거짓으로 영주瀛州를 가지고 항복하니 출제가 그 말을 믿고서 두중위杜重威 등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호응하게 하였다.
당초에 진나라 대신大臣들이 모두 말하기를 “두중위는 불충不忠하여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여 마침내 이수정李守貞을 등용하였다.
이때 두중위는 위주魏州를 진수鎭守하고 있었는데 이수정이 일찍이 병사를 이끌고 왕래하다가 위주를 지나게 되면 두중위가 매우 후하게 대우하여 창과 갑옷 등의 병장기와 금과 비단 등의 폐물을 많이 증여하였다.
출제가 일찍이 이수정에게 이르기를 “경卿이 일찍이 가재家財를 내어 사졸士卒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나라에 충성하는 자라고 이를 만하도다.”라고 하였는데, 이수정이 겸양하며 말하기를 “이는 모두 두중위가 신에게 준 것입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두중위와 함께 북쪽으로 출병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마침내 두중위를 초토사招討使로 삼고 이수정을 도감都監으로 삼아 무강武疆에 주둔시켰다. 거란이 진주鎭州와 정주定州를 침공하니 이수정 등이 중도中渡에 주둔하고 있다가 마침내 두중위와 함께 거란에 투항하였다.
거란이 이수정을 사도司徒로 삼았고 거란이 경사京師를 침범할 때 이수정을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에 배수하였다.
한漢 고조高祖가 경사京師에 입성하자 이수정李守貞이 와서 조현朝見하니 태보太保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에 배수하였다.
고조가 붕어崩御하고 두중위가 죽으니, 이수정이 두려워 불안해하면서 ‘한漢나라는 새로 일어났고 은제隱帝는 막 즉위하였으니 천하를 도모해보기 쉽다.’라고 생각하였다.
문객門客으로 있는 승려 총륜總倫이 방술方術로 이수정의 마음을 몰래 얻고자 하여 이수정에게 비상非常한 상相이 있다고 말하자 이수정이 마침내 계책을 결정하여 반란하였다.
조사관趙思綰이 이보다 먼저 경조京兆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고서 사람을 보내 자황의赭黃衣를 이수정에게 보내니 이수정이 크게 기뻐하며 하늘과 사람이 모두 감응한다고 여기고 마침내 출병하여 서쪽으로 동관潼關을 점거하고서 산림山林의 도적들을 꾀어내 도처에서 몰래 난을 일으키게 했다.
한나라에서 백문가白文珂와 상사常思 등에게 출병하여 공격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 왕경숭王景崇이 또 봉상鳳翔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경숭이 조사관과 함께 사람을 보내 이수정을 진왕秦王으로 추대하니 이수정이 왕경숭 등에게 관작官爵을 배수하고 또 사람을 보내 은밀히 납환서蠟丸書를 오吳와 촉蜀과 거란契丹에 주어 출병하여 한나라를 견제하게 하였다.
백문가 등이 왕경숭과 조사관을 공격하여 오랫동안 전공戰功을 세우지 못하자 은제가 이에 추밀사樞密使 곽위郭威를 보내 금병禁兵을 이끌고 백문가 등을 거느리고서 공격을 독려하게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먼저 조사관과 왕숭경을 칠 것을 청하였는데 곽위가 계책을 어떻게 정해야 할 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행군하여 화주華州에 이르렀을 때 절도사 호언가扈彥珂가 곽위에게 이르기를 “세 반적叛賊이 연합하여 이수정을 주인으로 삼았으니 이수정이 먼저 패하면 조사관과 왕숭경은 소문만 듣고도 격파될 것입니다. 만약 가까운 곳을 버려두고 먼 곳을 도모하다가 이수정은 후방에서 병사를 내고 조사관과 왕숭경은 앞에서 항전하게 한다면 한나라 병사들이 꺾일 것입니다.”라고 하자 곽위가 옳게 여기고 마침내 먼저 이수정을 공격하였다.
이때 풍도馮道가 재상에서 파직되어 하양河陽에 거居하고 있었는데 곽위郭威가 처음 출병하였을 때 풍도의 집에 들러 계책을 물었다. 풍도가 말하기를 “그대는 도박賭博을 아시오?”라고 하였는데, 곽위는 어릴 때 무뢰배로 도박을 좋아하였으므로 풍도가 자신을 기롱한다고 여겨 불끈 성을 내었다.
풍도가 말하기를 “무릇 도박하는 자는 돈이 많으면 많이 이기고 돈이 적으면 많이 패하는 법이니, 도박을 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패배의 원인이 판세에 있기 때문이오. 지금 여러 장수의 병사를 합쳐 성 하나를 공격하니, 병력의 많고 적음을 비교해보면 승패를 알 수 있소.”라고 하니, 곽위가 크게 깨닫고 지구전으로 적을 피곤하게 할 계책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장수들과 병력을 나누어 세 영채를 만들어 성의 세 면에 세우되 그 남쪽은 영채를 세우지 않고서 다섯 현縣의 장정을 징발하여 장성長城을 쌓아 세 영채와 연결하였다.
이수정이 출병하여 장성을 무너뜨리니 곽위는 그때마다 무너진 곳을 보수하였고 이수정은 그때마다 나와서 싸웠는데 이수정은 항상 병력의 열에 서넛을 잃었다.
이렇게 한 해를 넘기자 이수정의 성 안 병력은 얼마 없게 되었고 식량마저 다 떨어져 사람을 죽여 먹으니, 곽위가 “되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날을 정해 병사를 독려하여 사면에서 공격하여 이수정을 격파하였다.
당초에 이수정李守貞이 총륜總倫을 불러 왕업을 이룰 수 있을지 물으니, 총륜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응당 천하를 소유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분야分野에 바야흐로 재앙이 있으니 사람들을 살육하는 일이 다 끝나기를 기다려서 하시면 왕의 사업을 이루실 것입니다.”라고 하자, 이수정이 옳게 여겼다.
한번은 장리將吏들과 모여 크게 술을 마시다가 이수정이 손가락으로 호랑이 그림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가 천명天命을 받을 사람이라면 호랑이의 발바닥을 맞힐 것이다.”라고 하고 활을 당겨 한 발에 맞히니 장리들이 모두 절하며 경하慶賀하였다. 이 일로 이수정은 더욱 자부하였다.
성이 격파되자 이수정이 처자식들과 스스로 분사焚死하였는데 한漢나라 군대가 입성하여 잿더미 속에서 그 시신의 머리를 참하여 경사京師로 전송傳送하여 남시南市에 효시梟示하고 그 잔당들은 모두 책살磔殺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