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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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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文旨曠達하니 歐陽公所自解脫在此
六一居士 하야 自號醉翁이러니 旣老而衰且病 하얀 則又更號六一居士하다
客有問曰 六一 何謂也 居士曰
吾家藏書一萬卷이요 이요 有琴一張하며 有碁一局하고 而常置酒一壺로다
客曰 是爲五一爾 柰何 居士曰
以吾一翁으로 老於此五物之間하니 是豈不爲六一乎
客笑曰 子欲逃名者乎
而屢易其號하니로다
余將見子疾走하야 大喘渴死라도 而名不得逃也리라 居士曰
吾固知名之不可逃 然亦知夫不必逃也
吾爲此名 聊以志吾之樂爾로라
客曰 其樂如何 居士曰
吾之樂 可勝道哉
方其得意於五物也 하며하고 이라도 未足喩其樂且適也
然常患不得極吾樂於其間者 世事之爲吾累者衆也
其大者有二焉하니 勞吾形于外하고 憂患思慮 勞吾心于內하야 使吾形不病而已悴하고 心未老而先衰하니
尙何暇於五物哉
雖然이나 吾自乞其身於朝者三年矣러니 一日天子惻然哀之하야 賜其骸骨하야 使得與此五物偕返於田廬하야 庶幾償其夙願焉하니
此吾之所以志也로다
客復笑曰 子知軒裳珪組之累其形하고 而不知五物之累其心乎 居士曰
不然하다
累於彼者 已勞矣 又多憂어니와 累於此者 旣佚矣 幸無患하니 吾其何擇哉
於是 與客俱起하야 握手大笑曰 置之어다
區區不足較也라하고 已而歎曰
夫士少而仕 老而休 蓋有不待七十者矣
吾素慕之하니 宜去一也
吾嘗用於時矣로되 而訖無稱焉하니 宜去二也
壯猶如此한대 今旣老且病矣어늘 乃以難强之筋骸 貪過分之榮祿이면 是將違其素志而自食其言이니 宜去三也
吾負三宜去하니 雖無五物이라도 其去宜矣
復何道哉
熙寧三年九月七日六一居士自傳하노라


10. 육일거사전
글 뜻이 광달曠達하니 구양공歐陽公이 스스로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웠던 점이 여기에 있다.
육일거사六一居士가 처음 저산滁山으로 폄적貶謫되어 취옹醉翁이라고 자호自號하였는데, 늙어 쇠하고 병든 뒤에 영수潁水 가로 물러나 쉬려고 했을 때에는 또 육일거사六一居士로 호를 고쳤다.
이 묻기를 “육일六一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거사가 말하였다.
“우리 집에 장서藏書가 일만 권이요, 삼대三代 이래의 금석문金石文 자료를 집록集錄한 것이 일천 권이요, 거문고가 한 벌 있으며 바둑판이 하나 있고 항상 술 한 병을 두고 있다오.”
객이 말하기를 “이는 오일五一(다섯 가지가 하나씩 있는 것)인데 어찌된 일입니까?”라고 하니, 거사가 말하였다.
“이 늙은이 한 사람이 다섯 가지 물건 사이에서 늙으니 이 어찌 육일六一이 되지 않겠소?”
객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름을 피하고자 하는 사람입니까?
누차 호를 바꾸니 이는 장자莊子의 이른바 그림자를 두려워하여 해 가운데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장차 보건대 그대가 질주하여 크게 헐떡거리며 목이 말라 죽더라도 이름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거사가 말하였다.
“내 참으로 이름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또한 굳이 피할 것도 없음을 알고 있소.
내가 이러한 이름을 지은 것은 애오라지 이로써 나의 즐거움을 표명한 것일 뿐이라오.”
객이 말하기를 “그 즐거움이 어떠합니까?”라고 하니, 거사가 말하였다.
“나의 즐거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소?
바야흐로 다섯 가지 물건에서 득의得意할 때에는 태산太山이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빠른 우레가 기둥을 부수어도 놀라지 않으며, 비록 동정호洞庭湖 들판에서 구소九韶가 울려 퍼지고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큰 전투를 보더라도 즐겁고도 뜻에 맞는 이 정회情懷를 형용하기에는 부족할 것이오.
그러나 이 물건들 사이에서 나의 즐거움을 지극히 하지 못할까 항상 근심하는 것은 세상일이 나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 많아서외다.
그 큰 것으로는 두 가지가 있으니, 수레며 의복, 옥규玉圭인수印綬는 바깥에서 나의 형체를 수고롭게 하고, 근심걱정과 사려思慮는 안에서 나의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나의 형체로 하여금 병들기도 전에 이미 초췌하게 만들고 마음으로 하여금 늙기도 전에 먼저 쇠하게 만든다오.
그러니 오히려 어느 겨를에 다섯 가지 물건을 누리겠소.
비록 그러하나 내가 조정에 이 몸의 은퇴를 스스로 청한 것이 3년이었는데, 하루는 천자께서 측은히 여기시고서 은퇴를 허락해주시어 나로 하여금 이 다섯 가지 물건과 더불어 함께 전려田廬로 돌아가 거의 숙원夙願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셨소.
이것이 내가 〈육일六一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즐거움을〉 표명한 까닭이라오.”
객이 다시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수레며 의복, 옥규와 인수가 그 형체에 누를 끼치는 것은 알고 다섯 가지 물건이 그대의 마음에 누를 끼치는 것은 알지 못하십니까?”라고 하니, 거사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저것에 누를 받는 것은 이미 수고롭고 또 근심도 많거니와, 이 다섯 가지 물건에 누를 받는 것은 이미 편안하고 다행히 근심이 없으니, 내 어찌 가리겠소?”
이에 객과 함께 일어나 악수하고 크게 웃으며 “그만둡시다.
소소한 것들은 따질 만한 것이 못 되오.”라 하고는, 잠시 후 탄식하며 말하였다.
“대저 선비가 젊어서는 벼슬하고 늙어서는 물러나 쉬니, 대개 70세가 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물러나 쉰 이들이 있었소.
내가 평소 그들을 사모하였으니, 이것이 마땅히 떠나야 할 첫 번째 이유라오.
내가 일찍이 당세에 등용되었지만 끝내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마땅히 떠나야 할 두 번째 이유라오.
장년壯年이었을 때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지금 이미 늙고 병들었거늘 이에 힘써 일하기 어려운 근골筋骨로 분수에 넘치는 영예榮譽이록利祿을 탐한다면 이는 장차 평소 지녔던 뜻을 저버리고 스스로 식언食言하는 셈이니, 이것이 마땅히 떠나야 할 세 번째 이유라오.
내가 세 가지 마땅히 떠나야 할 이유를 지녔으니, 비록 다섯 가지 물건이 없다 하더라도 떠나는 것이 마땅하외다.
다시 무엇을 말하겠소.”
희령熙寧 3년 9월 7일 육일거사는 스스로 을 짓노라.


역주
역주1 : 이 전은 熙寧 3년(1070) 9월 7일에 지은 것이다. 이해 7월에 구양수가 靑州知事에서 蔡州知事로 改差되었는데 9월에 채주에 당도하여 이 傳을 지었다. 主客이 문답하는 형식으로 된 이 글에는 구양수 晩年의 심회가 그대로 표출되어 있다.
역주2 初謫滁山 : 慶曆 6년(1046)에 구양수가 지금의 安徽省 滁縣인 滁州로 좌천되었을 때의 일을 가리킨다.
역주3 將退休於潁水之上 : 熙寧 元年(1068)에 구양수가 潁州에 있으면서 가옥을 짓고 은퇴하며 살 거처로 준비한 일을 가리킨다. 이보다 앞서 皇祐 元年(1049)에 구양수가 潁州知事가 되었을 때 영주와 西湖의 풍광에 반하여 梅堯臣과 더불어 이곳에 전답을 사서 만년에 물러나 은거할 곳으로 삼자고 약속한 바가 있다.
역주4 集錄三代以來金石遺文一千卷 : 구양수가 편저한 《集古錄》을 가리킨다.
역주5 莊生所謂畏影而走乎日中者也 : 《莊子》 〈漁父〉에 “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기 발자국을 싫어하여 그것을 떨쳐내려고 달려 도망친 자가 있었는데, 발을 들어 올리는 횟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발자국도 더욱 많아졌고 달리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림자가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달리기가 아직 더디다고 생각해서, 쉬지 않고 질주하여 마침내는 힘이 다하여 죽고 말았다. 그늘에서 그림자를 쉬게 하고 조용히 멈추어 발자국을 쉬게 할 줄 몰랐으니 어리석음이 또한 심하다.”라고 하였다.
역주6 太山在前而不見 疾雷破柱而不驚 : 《鶡冠子》 〈天則〉에 “나뭇잎 하나가 눈을 가려도 태산을 보지 못하고, 두 알의 콩이 귀를 막으면 우레 소리를 듣지 못한다.[一葉蔽目 不見泰山 兩豆塞耳 不聞雷霆]”라고 하였다.
역주7 響九奏於洞庭之野 : 《莊子》 〈至樂〉에 “堯임금의 음악인 咸池나 舜임금의 음악인 九韶를 洞庭의 들판에서 성대하게 연주하면 새들은 그것을 듣고 날아가 버리며 짐승들은 그것을 듣고 달아나며 물고기는 그것을 듣고 물속 깊이 내려가 버리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그 둘레를 빙 둘러 에워싸고 감상한다.”라고 하였다.
역주8 閱大戰於涿鹿之原 : 涿鹿은 고대에 黃帝가 蚩尤와 크게 전투를 벌여 치우를 사로잡아 죽인 장소이다.
역주9 軒裳珪組 : 軒裳은 신분이 고귀한 사람이 지니는 수레와 의복을 뜻하고, 珪組는 벼슬아치가 지니는 玉圭와 印綬를 가리킨다. 전하여 모두 官爵을 비유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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