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宋祕書起宰相家世冑로 而以難易立論에 似有深淺이라
가 甘藜藿而修仁義
하야 毁譽不干其守
하고 饑寒不累其心
은 此衆人以爲難而君子以爲易
이라
生于高門
하야 하되 而躬布衣韋帶之行
하야 其驕榮佚欲之樂
이 生長于其間而不溺其習
하며 日見乎其外而不動乎其中
은 此雖君子
라도 猶或難之
라
學行足以立身而進不止하고 材能足以高人而志愈下는 此雖聖人이라도 亦以爲難也라
이라하니 以舜禹之明
으로도 猶以是爲相戒懼
어든 況其下者哉
아
하고 顯于朝廷
하며 登于
하야 淸德著于一時
하며 令名垂於後世
로되
君少自立하야 不以門地驕于人하고 旣長에 學問好古爲文章하니 天下賢士大夫가 皆稱慕其爲人이로되
而君慊然常若不足于己者
하고 守官太學
에 甘寂寞以自處
하야 日與寒士往來
하고 而從先生
하야 講論道德
하야 以求其益
이라
夫生而不溺其習은 此蓋出於天性이요 其見焉而不動于中者는 由性之明하야 學之而後至也라
하며 高而愈下
하니 予自其幼
로 見其長
에 行而不倦
하며 久而愈篤
하니
遭時奮身하야 竊位于朝하야 守其貧賤之節하되 其臨利害禍福之際에 常恐其奪也라
以予行君子之所易者라도 猶若是하니 知君行聖賢之所難者爲難能也라
歲之三月
에 來自京師
하야 拜其舅氏
하고 予得延之
하야 聽其論議而慕其爲人
하니 雖與之終身久處而不厭也
라
07. 태학太學으로 돌아가는 비서승祕書丞 송군宋君을 보내는 서문
비서승祕書丞 송민구宋敏求가 재상가의 후손인 점을 가지고 실천하기 쉬움과 어려움으로써 입론함에 심천深淺이 있는 듯하다.
누추한 마을에서 사는 선비가 거친 나물을 달게 먹으며 인의仁義를 수양하여 비방과 예찬이 그 조수操守를 범하지 못하고 주림과 추위가 그 마음을 얽매지 못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어렵게 여기지만 군자는 쉽게 여긴다.
고귀高貴한 가문에서 태어나 대대로 높은 관직을 세습하면서도 한미寒微한 선비의 행실을 몸소 실천하면서 그 교만함과 영예로움, 편안함과 욕망을 누리는 즐거움에 둘러싸여, 그 사이에서 생장하면서도 그 습속에 젖어들지 않으며 날마다 그 외물을 보면서도 그 심중心中에 흔들리지 않는 것은 비록 군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어렵게 여기기도 하는 것이다.
학행學行이 족히 입신立身하고 진보하여 멈추지 않으며 재능才能이 족히 남보다 뛰어나면서도 뜻이 더욱 겸손한 것은 비록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자만自滿하고 자대自大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또 이르기를 “네가 자랑하지 않고 과시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명철했던 순舜임금과 우禹임금조차도 오히려 이것으로 서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였는데 하물며 그들만 못한 자이겠는가.
광평廣平의 송군宋君은 선헌공宣獻公의 아들이다.
선헌공은 문장文章으로 당대의 종사宗師가 되었고 조정에서 현달하였으며 임금을 보필하는 지위에 올라 맑은 덕망이 한 시대에 드러나며 아름다운 명성이 후세에 드리워졌다.
그렇지만 송군은 어려서부터 자립하여 가문이 고귀하다고 남에게 교만하게 굴지 않았고, 장성해서는 배우고 물으며 옛것을 좋아하여 이를 바탕으로 문장을 지으니, 천하의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 그 사람됨을 칭찬하고 사모하였다.
그런데 송군은 겸허하게 항상 마치 자신이 부족한 듯이 처신하였고, 태학太學에서 관원으로 있으면서 스스로 적막하게 생활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면서 날마다 한미寒微한 선비들과 왕래하고 선생先生과 국자國子를 종유從遊하며 도덕道德을 강론하여 유익함을 구하였다.
무릇 〈고귀한 가문에서〉 생장하면서도 그 습속에 젖어들지 않은 것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고, 그 외물을 보면서도 심중心中에 흔들리지 않은 것은 명철한 천성을 바탕으로 하여 배운 뒤에 그 경지에 이른 것이다.
진보하여 그치지 않고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하였으니, 내가 그를 어린 시절부터 장성하기까지 살펴본 바로는 실천하면서 게으르지 않고 오래될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그가 장차 이르지 못할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맹자孟子가 이른바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경우라고 하겠다.
좋은 때를 만나 일신一身을 분발하여 무능한 몸으로 조정에서 관직을 차지하고서 그 빈천한 절조節操를 지키되 그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의 기로에 처하여서는 항상 그 절조를 잃을까 염려하였다.
내가 군자君子가 쉽게 여기는 것을 실천하려고 해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송군이 성현聖賢도 어렵게 여기는 것을 실천하는 일이 하기 어려운 일임을 알겠다.
올해 3월에 도성에서 와서 그 외숙에게 인사드리고 내가 남재南齋에서 그를 맞이하여 그 의론을 듣고 그 사람됨을 사모하게 되었으니, 비록 그와 종신토록 오래 함께 있더라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이다.
며칠 머물다가 떠나가니 그가 떠나는 길에 해줄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