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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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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歐公異日相略 亦槪見於此矣
當與參看이라
天下之事 有本末하고 其爲治者 有先後하니 略矣
後世之治天下 未嘗不取法於三代者 以其推本末而知所先後也
之爲治也 以理數均天下하고 以爵地等邦國하며域民하고 以職事任官하야 天下有定數하고 邦國有定制하며 民有定業하고 官有定職하야
使下之共上으로 勤而不困하고 上之治下 簡而不勞하야 財足於用하야 而可以備天災也 兵足以禦患하야 而不至於爲患也
凡此具矣 然後飾禮樂하며 興仁義하야 以敎道之
是以 其政易行하며 其民易使하야 風俗淳厚而王道成矣
雖有荒子孱孫繼之라도 猶七八百歲而後已
夫三王之爲治 豈有異於人哉리오
財必取於民하고 官必養於祿하며 禁暴必以兵하고 防民必以刑하니 與後世之治者大抵同也
然後世常多亂敗어늘 而三王獨能安全者 何也
三王善推本末하며 知所先後하고 而爲之有條理
後之有天下者 孰不欲安且治乎리오마는 用心益勞而政益不就하야 諰諰然常恐亂敗及之로되
而輒以至焉者 何也
以其不推本末하며 不知先後
今之務衆矣로되 所當先者五也
其二者 有司之所知 其三者則未之思也
足天下之用 莫先乎財하며 繫天下之安危 莫先乎兵하니 此有司之所知也
然財豐矣로되 取之無限而用之無度 則下益屈而上益勞하고 兵强矣로되 而不知所以用之 則兵驕而生禍하리니 所以節財用兵者 莫先乎立制
制已具備 兵已可使하고 財已足用하리니 所以共守之者 莫先乎任人이라
是故 均財而節兵하야 立法以하며 任賢以守法하며 尊名以厲賢하나니
此五者相爲用 有天下者之常務 當今之世所先이어늘 而執事者之所忽也
今四海之內 非有亂也 上之政令 非有暴也 天時水旱 非有大故也 君臣上下 非不和也
以晏然至廣之天下 無一間隙之端이로되하며
敢有崛彊之王하며 何也
生齒之數 日益衆하며 土地之産 日益廣하며 公家之用 日益急하고 四夷不服하며 中國不尊하며 天下不實者 何也
以五者之不備故也
請試言其一二하리이다
方今農之趣耕 可謂勞矣 工商取利乎山澤 可謂勤矣 上之征賦榷易商利之臣 可謂纖悉而無遺矣
이면 則天下公私乏絶하니 是無事之世 民無一歲之備하고 而國無數年之儲也
以此知財之不足也
古之善用兵者 可使之赴水火러니 有司不敢役하고 必不得已而暫用之 則謂之借倩이라
彼兵相謂曰官倩我라하고 而官之文符에도 亦曰倩이라
夫賞者 所以酬勞也어늘
三年而一徧 所費八九百萬이로되 有司不敢緩月日之期
兵之得賞 不以無功知媿하고 乃稱多量少하고 하야 小不如意 則群聚而呼하야 持梃欲擊天子之大吏하니 無事之時에도 其猶若此
以此知兵驕也
夫財用悉出而猶不足者 以無定數也 以兵之敢驕者 以用之未得其術이라
以此知制之不立也
夫財匱兵驕하며 法制未一而莫有奮然忘身許國者
以此知不任人也
不任人者 非無人也
彼或挾材蘊知하되 特以時方惡人之好名이라 各藏畜收斂하야 不敢奮露하야 惟恐近於名하야 以犯時人所惡
是以 人人變賢爲愚하니 愚者無所責하고 賢者被하야 遂使天下之事 將弛廢而莫敢出力以爲之하니
此不尙名之弊者 天下之最大患也
故曰五者之皆廢也
前日之亂 可謂極矣
夫五代之主 豈皆愚者邪 其心豈樂禍亂而不欲爲久安之計乎
顧其力有不能爲者 時也
當是時也하야 東有하고 西有하고 北有하고 南有하야 天下分爲十三四하야 四面環之하고
以至狹之中國으로도 又有叛將强臣 割而據之하야 其君天下者 類皆爲國日淺하고 威德未洽이라
强君武主 力而爲之하야 僅以自守 不幸孱子懦孫 不過一再傳而復亂敗
是以 養兵如兒子之啖虎狼이라도 猶恐不爲用이어든 尙何敢制리오
以殘弊之民人으로 贍無貲之征賦하야 이라도 猶恐不足이어든 尙何曰節財以富民이리오
天下之勢 方若弊廬하야 補其奧則隅壞하고 整其桷則棟傾하야 枝撑扶持하야 苟存而已
是以 兵無制하며 用無節이면 國家無法度하야 一切苟且而已
今宋之爲宋 八十年矣
外平僭亂하야 無抗敵之國하며 內削方鎭하야 無强叛之臣하고 天下爲一 海內晏然하야 爲國不爲不久 天下不爲不廣也
라하니 言有資者 其爲易也
方今承之基業하고 据萬乘之尊名하야 以有四海一家之天下하고 하야 莫不內輸하야
惟上之所取 不可謂乏財
六尺之卒 荷戈勝甲하야 力彀하고 彎二石之弓者 數百萬이라
惟上制而令之 不可謂乏兵이요
中外之官 居職者數千員이며 官三班吏部常積者又數百이요 하야 而應詔者萬餘人이요 試禮部者七八千이라
惟上之擇이니 不可謂乏賢이요
民不見兵革 於今幾四十年矣 外振兵武하야 하고 內修法度하야 興德化
惟上之所爲 不可謂無暇
以天子之慈聖仁儉으로 得一二明智之臣하야 相與而謀之 天下積聚 可如 制禮作樂 可如이요 奮發威烈以耀名譽 可如漢武帝唐太宗之顯赫이요 論道德 可興堯舜之治
然而財不足用於上而下已弊하고 兵不足威於外而敢驕於內하고 制度不可爲萬世法而日益叢雜하야 一切苟且 不異五代之時하니 此甚可嘆也
是所謂居得致之位하고 當可致之時하고 又有能致之資어늘 然誰憚而久不爲乎


01. 에 대한
구양공歐陽公의 훗날의 재상宰相 경략經略이 여기에서도 대략 보인다.
응당 왕형공王荊公의 〈만언서萬言書〉와 참고해서 봐야 한다.
천하의 일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그 다스리는 방도에는 선후先後가 있으니, 요순堯舜의 글에 대략 구비되어 있습니다.
후세에 천하를 다스릴 때 삼대三代에서 법을 취하지 않은 적이 없는 것은 본말本末을 미루어 먼저하고 뒤에 할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왕三王이 다스릴 때 천리天理천수天數로 천하를 다스리고 작위爵位봉지封地방국邦國을 구분하였으며 정전井田으로 백성을 한계 짓고 직사職事로 관리를 임용하여, 천하는 정해진 법수法數가 있고 방국邦國은 정해진 제도가 있으며, 백성은 정해진 직업이 있고 관리는 정해진 직임이 있었습니다.
아래에서 위로 바치는 일로 부지런하되 괴롭지 않고, 위에서 아래를 다스리는 일로 간이簡易하되 수고롭지 않게 하여, 재물이 용도에 넉넉하여 천재天災에 대비할 수 있고, 군대가 환란을 막기에 충분하여 근심이 되는 데 이르지 않게 하였습니다.
무릇 이러한 일들을 구비한 뒤에 예악禮樂을 꾸미고 인의仁義를 흥기하여 이를 가르치고 인도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 정사가 쉽게 행해졌으며 그 백성들을 쉽게 부려서 풍속이 순후하고 왕도王道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황음荒淫하고 잔약孱弱한 자손이 지위를 계승한 경우도 있었지만, 오히려 7, 8백 년이 지난 뒤에야 끝난 것입니다.
대저 삼왕三王의 다스림이 어찌 남과 다름이 있겠습니까.
재물은 반드시 백성에게 취하고 관리는 반드시 녹봉으로 길러주며, 포란暴亂을 금지하기를 반드시 군대로써 하고 적민賊民을 방비하기를 반드시 형벌로써 하였으니, 후세의 다스림과 대체로 같았습니다.
그러나 후세에는 늘 어지러이 패망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삼왕三王만 홀로 안정시키고 보전하였던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삼왕三王본말本末을 잘 미루고, 먼저하고 뒤에 할 것을 알아, 천하를 다스리는 데 조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천하를 소유한 자가 누군들 안정되고 잘 다스려지기를 원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용심用心이 수고로울수록 정사가 더욱 성취되지 아니하여 전전긍긍 늘 어지러이 패망하는 상황에 미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번번이 무너지고 만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본말本末을 미루지 못하고, 선후先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힘쓸 일이 많은데, 먼저 해야 할 것은 다섯 가지입니다.
그중 두 가지는 유사有司가 담당하는 것이고, 그중 세 가지는 생각하지 않아서입니다.
천하의 용도用度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재물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안위安危가 달린 문제는 군대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니, 이는 유사有司가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이 풍족한데도 한정 없이 취하고 한도 없이 쓰면 백성은 더욱 고갈되고 관리는 더욱 수고로울 것이며, 군대가 강성한데도 이를 운용할 줄 모르면 군대가 교만하여 화란을 일으킬 것이니, 재물을 절약하고 군대를 운용하는 방법은 법제法制를 확립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법제가 구비되고 나면 군대를 부릴 수 있고 재물이 용도에 넉넉해질 것이니, 이를 함께 지키는 방법은 적임자에게 맡기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재물을 고르게 하고 군대를 조절한 다음, 법을 세워서 제재制裁하고 어진 이에게 맡겨서 법을 지키고 명망이 있는 사람을 존중하여 어진 이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서로 쓰임이 되는 이 다섯 가지는 천하를 소유한 자가 늘 힘써야 할 일이고, 오늘날 세상에 먼저 해야 할 일인데도 일을 맡은 자들이 소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해四海 안이 혼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부의 정령政令이 포악함이 있는 것도 아니며, 천시天時수한水旱이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화목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지극히 넓은 안정된 천하를 가지고 틈 하나 생길 단서가 없는데도, 남이南夷가 감히 천자天子가 명한 관리를 죽이고, 서이西夷에 감히 오만불손한 이 있으며, 북이北夷에 감히 대등한 를 행하는 가 있는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인구人口의 숫자가 날로 더 많아지고 토지의 생산이 날로 더 넓어지고 국가의 용도가 날로 더 촉급해지며, 사이四夷가 복종하지 않고 중국中國이 존엄하지 않고 천하가 튼실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다섯 가지가 구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번 그 한두 가지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오늘날 농부가 들에 가서 경작하는 것이 수고롭다 할 만하고, 공상工商산택山澤에서 이익을 취하는 것이 부지런하다 할 만하고, 위에서 무역에 따른 손익을 따져 세금을 부과하는 신하가 빠짐없이 자세하게 살핀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명도明道경우景祐 연간처럼 한번 수한水旱을 만나기라도 하면 공가公家사가私家를 막론하고 천하가 텅 비어버리니, 이는 태평무사한 시대에 백성에게는 한 해의 대비도 없고 나라에는 몇 년의 저축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재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의 군대를 잘 운용한 자는 수화水火 속으로 달려들게 할 수 있었는데, 오늘날 상군廂軍금군禁軍유사有司가 감히 부리지 못하고 기어이 마지못해 잠깐 쓸 경우에는 ‘빌려 쓴다.[借倩]’고 이릅니다.
저 군사들은 서로 “관청에서 우리를 빌렸다.[官倩我]”라고 하고, 관청의 문서에도 “빌렸다.[倩]”고 작성합니다.
무릇 이란 노고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례大禮를 이유로 노고도 없는 자들에게 3년에 한 차례씩 상을 내려 비용이 8, 9백만 전이나 드는데도, 유사有司가 감히 정해진 월일月日을 늦추지 못합니다.
군사들이 상을 받으면 아무런 공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마침내 많고 적음을 따지고 좋은 것을 가까이하고 나쁜 것을 싫어하여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떼 지어 모여 부르짖으며 몽둥이를 들고 천자의 대리大吏를 치려고 하니, 아무런 일이 없을 때에도 오히려 이러합니다.
이것으로 군대가 교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재용財用을 다 지출하였는데도 오히려 부족한 까닭은 정해진 수가 없기 때문이고, 군대가 감히 교만한 까닭은 운용運用에 그 방법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법제法制가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용이 떨어지고 군대가 교만하며 법제가 완비되지 않았는데도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에 몸 바쳐 보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으로 적임자에게 맡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적임자에게 맡기지 않는 것은 적임자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저들은 혹 재주를 지니고 지혜를 쌓고 있으면서도 단지 당세 사람들이 바야흐로 남들이 명예名譽를 좋아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에 저마다 감추고 수렴하여 감히 떨쳐 드러내지 못하고, 오직 명예를 가까이하여 당세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하기만 합니다.
이 때문에 사람마다 모두 어짊을 바꾸어 어리석은 짓을 하니, 어리석은 자는 책망할 것도 없고 어진 자는 기롱과 질시를 당하여 마침내 천하의 일로 하여금 장차 풀어지고 무너지는데도 감히 힘을 내어 다스릴 이가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명예를 숭상하지 않는 폐단이 천하의 가장 큰 병통입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가 모두 무너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날 오대五代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고 이를 만합니다.
53년 동안 다섯 을 가진 열세 명의 군주가 바뀌었는데, 나라를 잃거나 시해를 당한 자가 여덟이며, 길게는 10여 년에 지나지 않고 심한 경우는 3, 4년 만에 멸망하였습니다.
오대五代의 군주가 어찌 모두 어리석은 자이겠으며, 그 마음이 어찌 화란禍亂을 즐거워하여 장구하게 안정시킬 생각을 하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힘으로 할 수 없는 점이 있으니, 때입니다.
이때를 당하여 동쪽에는 분진汾晉이 있고, 서쪽에는 기촉岐蜀이 있고, 북쪽에는 강호强胡가 있고, 남쪽에는 강회江淮민광閩廣오월吳越형담荊潭이 있어서, 천하가 열세넷으로 나누어져 사면四面이 중국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지극히 좁은 중국의 경우에도 배반한 장수와 강성한 신하가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기에, 천하에 군주 노릇 하는 자가 대체로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힘이 날로 약해지고 위엄과 은택이 두루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강성한 군주와 용맹한 군주가 힘을 다해 다스려 근근이 스스로 지켰을 뿐, 불행하게도 잔약孱弱한 자손이 불과 한두 번 정도만 전하고 다시 어지러이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군사를 기르기를 아이가 범과 이리에게 먹이를 주듯이 하더라도 오히려 써먹지 못할까 두려운데, 오히려 어떻게 감히 제어하겠습니까.
잔폐殘弊한 백성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부세賦稅를 공급하게 하여 몹시 가혹하게 세금을 매기더라도 오히려 부족할까 두려운데, 오히려 어떻게 재물을 절약하여 백성을 부유하게 한다고 하겠습니까.
천하의 형세가 바야흐로 낡은 오두막 같아서 아랫목을 보수하면 모퉁이가 무너지고 서까래를 손질하면 기둥이 기울어져 떠받치고 버티면서 구차하게 보존하고 있을 뿐이니, 오히려 어느 겨를에 전대前代모범模範을 본받아 제도를 세우겠습니까.
이 때문에 군사를 제어하지 못하고 용도를 절약하지 못하면, 국가에 법도가 없어서 모든 것이 구차할 따름입니다.
지금 나라가 개국한 지 80년이 되었습니다.
밖으로는 참람하게 난을 일으키는 자들을 평정하여 대적하는 나라가 없고, 안으로는 방진方鎭의 권력을 약화하여 강성하고 배반하는 신하가 없으며, 천하가 통일되자 해내海內가 편안하여 나라가 오래지 않은 게 아니고 천하가 넓지 않은 게 아닙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한다.”라고 하였는데, 밑천이 있는 자가 공을 이루기 쉽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삼성三聖이 닦아놓은 왕업王業을 계승하고 만승萬乘 천자天子라는 드높은 칭호를 차지하여, 사해四海가 한집과 같이 일통一統된 천하를 소유하고 대우大禹공물貢物부세賦稅를 바치던 땅을 모두 포괄하여 바치고 실어 보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오직 위에서 취하는 것일 뿐이니, 재물이 부족하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육척六尺의 군졸로 창을 들고 갑옷을 입은 채 힘을 다해 오석五石의 쇠뇌를 당기고 이석二石의 활을 당기는 자들이 수백만입니다.
오직 위에서 제어하고 명령하기만 할 뿐이니, 군대가 부족하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중외中外의 관원으로 직임을 맡고 있는 자들이 수천 명이고, 삼반원三班院이부吏部에 늘 대기 중인 관원이 또 수백 명이며, 3년마다 한 번씩 포의布衣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조령詔令에 응하는 자가 만여 명이고, 예부禮部에 응시하는 자가 7, 8천입니다.
오직 위에서 뽑기만 할 뿐이니, 어진 이가 부족하다고 이를 수 없습니다.
백성들이 전쟁을 겪지 않은 지가 지금 거의 40년 가까이 되었는데, 밖으로는 군대의 무력武力을 진작하여 변방을 막고 안으로는 법도法度를 닦아 덕화德化를 일으켰습니다.
오직 위에서 실행하는 데 달렸으니, 겨를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자애롭고 성스러우며 인자하고 검소한 천자께서 명철하고 지혜로운 한두 신하를 얻어 서로 더불어 이를 도모하면, 천하에 쌓이고 모이는 재물이 나라 문제文帝경제景帝 때처럼 풍부해질 수 있고, 를 제정하고 음악音樂을 만드는 것이 성주成周 때처럼 성대해질 수 있으며, 위엄과 공렬을 떨쳐 일으켜 명예를 빛내는 것이 무제武帝 태종太宗처럼 혁연해질 수 있고, 도덕道德을 논하면 요순堯舜의 다스림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물은 위에서 쓰기에도 부족한데 아래 백성들은 이미 피폐하고, 군대軍隊는 밖에서 위무威武를 떨치지도 못하면서 감히 안에서 교만을 떨고, 제도制度는 만세의 법이 되지 못하여 날로 더욱 번다해지기만 하여 이 모든 구차한 것이 오대五代 때와 다르지 않으니, 이 점이 몹시 한탄스럽습니다.
이른바 이룩할 수 있는 지위에 처하고 이룩할 수 있는 때를 당하고 이룩할 수 있는 바탕이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여 오래도록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역주
역주1 本論上 : 이 글은 慶曆 2년(1042)에 지은 것이다. 당시 歐陽脩가 京師에서 太子中允을 맡고 있으면서 《崇文總目》을 編修하는 데 참여하고 있었다. 《宋史》 권11 仁宗 3년 條에 의거해보면, 경력 2년 5월 甲寅에 詔令을 내려 弘文館, 集賢殿, 史館의 대신과 신료들에게 封事를 올리도록 하고 請對를 허락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구양수가 上書하여 다섯 가지의 급선무를 진술한 것이다.
本集에는 이 글의 제목 아래 “〈本論〉 3편 가운데 中篇, 下篇은 《居士集》 권17에 실려 있는데, 이 글은 바로 구양공이 만년에 刪去한 上篇이다.”라는 注가 있는데, 이는 周必大가 《文忠集》을 편집하면서 추가한 것이다.
역주2 王荊公 : 王安石(1021~1086)으로, 자는 介甫, 호는 臨川 또는 半山이다. 唐宋八大家 중 한 사람으로, 22세에 進士가 된 다음 地方官으로 오랫동안 전전하면서 정치개혁의 꿈을 키웠다. 仁宗에게 올린 〈萬言書〉가 그 한 가지이며, 《周禮》의 정신을 실천해보려는 것이 그 理想이었다. 그리하여 神宗 熙寧 2년(1069)에 參知政事에 임명되어 靑苗法, 免役法, 市易法을 내용으로 하는 新法을 시행하여 현실제도의 개혁을 주도하였으나 많은 폐단을 남겼으며, 舊黨으로 불렸던 사람들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아 哲宗의 즉위와 함께 모두 폐지되었다. 《宋史 권327 王安石傳》
역주3 萬言書 : 帝王에게 올리는 長篇의 建議文으로, 王安石이 올린 〈上皇帝萬言書〉를 가리킨다.
역주4 堯舜之書 : 《書經》의 〈堯典〉과 〈舜典〉을 가리킨다.
역주5 三王 : 三代의 聖王인 夏나라의 禹王, 殷나라의 湯王, 周나라의 文王ㆍ武王을 가리킨다.
역주6 井田 : 夏‧殷ㆍ周 三代 때 시행하였던 田地制度로, 농지 1里를 ‘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중앙의 1구역을 公田으로 삼고, 주위의 8구역을 私田으로 삼아 여덟 농가에 나누어 私有로 맡기고, 공동으로 公田을 경작하게 하여 그 수확을 국가에 바치게 하였다.
역주7 而於 : 本集에는 ‘而已’로 되어 있다. 本集에 의거하면 “不知先後而已”가 된다.
역주8 制財 : 四庫全書 《唐宋八大家文抄》에는 ‘制之’로 되어 있다.
역주9 南夷敢殺天子之命吏 : 《宋史》 권494 〈蠻夷 3〉을 상고해보면, 大中祥符 6년(1013)에 “蠻人이 지난 겨울 天河를 침략하였고, 지금 또 融州 廂陽의 여러 성채를 노략하여 거주민을 약탈하고 巡檢 樊明을 살해하였다.[蠻人去冬寇天河 今又鈔融州廂陽諸砦 剽劫居民 害巡檢樊明]”라고 하였고, 또 “甲峒蠻이라는 자가 있어 신하로 交阯에 복속하였는데, 이따금 出兵하여 邕州를 침략하였다. 景祐 3년(1030)에 일찍이 思陵州 憑祥峒의 生口를 약탈하고 鎭將 登龍을 죽이고 갔다.[有甲峒蠻者 亦役屬交阯 間出寇邕州 景祐三年 嘗掠思陵州憑祥峒生口 殺登龍鎭將而去]”라고 하였으며, 《宋史》 권9 〈仁宗 1〉에 “安化의 蠻人들이 宜州와 融州를 침략하였다.[安化蠻寇宜融州]”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을 포괄하여 가리킨 말이다.
역주10 西夷敢有崛彊之王 : 西夏의 元昊가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라 참칭한 일을 가리킨다. 元昊는 李曩霄의 본명이다. 西夏 사람으로 李德明의 아들인데 宋나라로부터 趙氏 성을 하사받아 趙元昊라고도 칭한다. 송나라 신하 노릇 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다가, 仁宗 明道(1032∼1033) 초에 西夏의 왕위를 세습하여 ‘顯道’라는 연호를 쓰고, 寶元(1038∼1039) 초에 ‘天授’라는 연호를 僭稱하여 황제 노릇을 하였다. 뒤에 송과 싸워 승리하였으나 사망과 부상자가 상반되므로 화의를 애걸하여 夏國主로 봉해져서 그대로 나라에서 帝 노릇을 하였다. 《宋史 권485 夏國 上》, 《宋史 권485 元昊列傳》
역주11 西夷 : 本集에는 ‘西夏’로 되어 있다.
역주12 北夷敢有抗禮之帝 : 북방 오랑캐인 契丹의 수령이 平起 平坐하여 대등한 예를 행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13 一遇水旱 如明道景祐之間 : 宋나라 明道 원년(1032)에 京東, 淮南, 江東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었으며, 明道 2년에는 京畿, 京東, 河北, 河東 등지에 蝗災가 발생하고, 淮南, 江東, 兩川에 대기근이 들었는데, 이 일들을 가리킨다. 明道와 景祐는 모두 宋 仁宗의 연호이다.
역주14 廂禁之軍 : 廂軍과 禁軍을 가리킨다. 廂兵과 禁兵이라고도 한다. 宋나라 초기에 여러 州의 군사 가운데 용맹한 자들을 선발하여 京師로 보내 皇帝의 宮禁을 숙위하거나 京師를 수비하는 禁軍으로 충원하고, 나머지는 本城에 그대로 놔두어 廂軍으로 삼았는데, 廂軍은 훈련이나 전투를 시키지 않고 勞役에만 충당하였다.
역주15 今以大禮之故 不勞之賞 : 조정에서 중요한 典禮를 행할 때마다 군병들이 아무런 노고가 없더라도 일정한 포상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를 말한다. 大禮는 황제의 嗣位나, 황제와 태후의 誕辰, 황후와 태자의 冊封 등 중요한 典禮를 가리킨다.
역주16 比好嫌惡 : ‘3을 고르고 4를 고른다.[挑三揀四]’와 같은 말로, 경박하게 꼬치꼬치 자신에게 이로운 것만 따져 고른다는 말이다.
역주17 譏疾 :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議疾’로 되어 있다.
역주18 五代 : 唐나라 末期에 일어났던 後梁ㆍ後唐ㆍ後晉ㆍ後漢ㆍ後周의 다섯 王朝를 가리킨다.
역주19 五十三年之間……甚者三四歲而亡 : 後梁은 황제가 둘이었는데 기간이 17년에 불과하고, 後唐은 황제가 넷이었는데 14년에 불과하고, 後晉은 황제가 둘이었는데 12년에 불과하고, 後漢은 황제가 둘이었는데 5년에 불과하고, 後周는 황제가 셋이었는데 10년에 불과하였다. 907년 後梁의 太祖 周晃이 唐 哀帝를 이어 後梁을 세운 때로부터, 960년 宋 太祖 趙匡胤이 後周의 恭帝를 폐하고 宋나라를 세울 때까지 다섯 王朝에 황제가 13명이었고, 기간은 53년이었다. 나라를 잃거나 시해를 당한 황제가 모두 8명인데, 後梁의 太祖 周晃, 末帝 周瑱, 後唐의 莊宗 李存勖, 愍帝 李從厚, 末帝 李從珂, 後晉의 出帝 石重貴, 後漢의 隱帝 劉承祐, 後周의 恭帝 柴宗訓이다.
역주20 汾晉 : 汾水 유역으로 五代十國의 하나인 劉崇이 세운 北漢을 가리킨다.
역주21 岐蜀 : 鳳翔을 할거하여 자칭 岐王이라 일컬은 李茂貞과, 王建이 세운 前蜀과, 孟知祥이 세운 後蜀을 가리킨다.
역주22 强胡 : 契丹을 가리킨다.
역주23 江淮閩(민)廣吳越荊潭 : 江淮는 楊行密이 세운 吳와 李昪이 세운 南唐을 가리키며, 閩廣은 王審知가 세운 閩과 劉巖이 세운 南漢을 가리키며, 吳越은 錢鏐가 세운 吳越을 가리키며, 荊潭은 高季興이 세운 南平國과 馬殷이 왕 노릇 한 楚를 가리킨다.
역주24 頭會箕斂 : 머릿수를 헤아려 키로 쓸어 담듯이 곡식을 거두어간다는 뜻으로, 가혹하게 세금을 매기는 것을 이른다.
역주25 尙何暇法象規圜矩方而爲制度乎 : 어느 겨를에 前代의 模範을 본받아 각종 典章 制度를 세울 수 있겠냐는 말이다. 規圜은 원그림쇠로 그린 圓形이고, 矩方은 곱자로 그린 方形으로, 前代의 模範을 비유한다.
역주26 語曰……多錢善賈 : 《韓非子》 〈五蠹〉에 “속담에 ‘소매가 길면 춤을 잘 추고, 돈이 많으면 장사를 잘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밑천이 많은 자가 공을 이루기가 쉽다는 말이다.[鄙諺曰 長袖善舞 多錢善賈 此言多資之易爲工也]”라고 하였다.
역주27 三聖 : 宋나라 太祖와 太宗과 眞宗 세 황제를 가리킨다.
역주28 盡大禹貢賦之地 : 〈禹貢〉의 貢物과 賦稅를 바치던 九州의 땅을 모두 소유하였다는 뜻으로, 賦稅를 바치는 땅이 몹시 넓음을 나타낸 말이다. 大禹는 禹임금으로, 여기서는 《書經》 〈虞書 禹貢〉을 가리킨다.
역주29 五石之弩 : 무게 600斤의 쇠뇌를 말한다. 石은 무게 단위로 120斤이 1石이다.
역주30 三歲一詔布衣 : 3년마다 한 차례씩 황제의 명으로 과거를 실시하여 布衣를 선발하였다는 말이다. 布衣는 벼슬이 없는 평민으로, 과거 응시생을 가리킨다.
역주31 攘夷狄 : 四庫全書本에서 《文忠集》에는 ‘服沙漠’으로 되어 있고, 《唐宋八代家文抄》에는 ‘捍邊圉’로 되어 있다.
역주32 文景之富 : 文景은 漢나라 文帝와 景帝의 병칭이다. 후세의 이른바 ‘文景之治’라 일컫는 이 시기에는, 德政을 베풀어 産業이 발전하고 經濟가 번영하여 천하가 안정되었다.
역주33 成周之盛 : 成周는 본래 西周의 東都 洛邑을 말하는데, 周公이 成王을 보좌하면서 禮를 제정하고 음악을 만들어 禮樂이 크게 흥성하였던 시대를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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