凡士之蘊其所有而不得施於世者는 多喜自放於山巓水涯之外하야 見蟲魚草木風雲鳥獸之狀類하야 往往探其奇怪하고
內有憂思感憤之鬱積이면 其興於怨刺하야 以道羈臣寡婦之所歎하고 而寫人情之難言하니 蓋愈窮則愈工이라
予友梅聖兪
는 하고 累擧進士
에 輒抑於有司
하야 이 凡十餘年
이라
年今五十
이로되 猶從
하야 爲人之佐
하야 鬱其所蓄
하야 不得奮見於事業
이라
其家宛陵하야 幼習於詩하야 自爲童子로 出語已驚其長老하고 旣長에 學乎六經仁義之說하야 其爲文章이 簡古純粹하야 不求苟說於世하니 世之人이 徒知其詩而已라
然時無賢愚히 語詩者는 必求之聖兪요 聖兪亦自以其不得志者樂於詩而發之라
故其平生所作이 於詩尤多하니 世旣知之矣나 而未有薦于上者라
昔
이 嘗見而歎曰 二百年無此作矣
라하니 雖知之深
이나 亦不果薦也
라
若使其幸得用於朝廷
하야 作爲
하야 以歌詠大宋之功德
하야 薦之淸廟而追商周魯頌之作者
면 豈不偉歟
아
柰何使其老不得志而爲窮者之詩하야 乃徒發於蟲魚物類羈愁感歎之言아
世徒喜其工하고 不知其窮之久而將老也하니 可不惜哉아
聖兪詩旣多
에 不自收拾
하니 其妻之兄子
가 懼其多而易失也
하야 하야 次爲十卷
이라
予嘗嗜聖兪詩而患不能盡得之일새 遽喜謝氏之能類次也라
其後十五年에 聖兪以疾卒于京師어늘 余旣哭而銘之하고
因索于其家
하야 得其遺稿千餘篇
하야 幷
所藏
하야 掇其尤者六百七十七篇
하야 爲一十五卷
하노라
내가 들으니 세상 사람들은 ‘시인은 영달한 사람은 적고 곤궁한 사람은 많다.’라고 하니 어찌 그렇겠는가.
세상에 전해오는 시는 대부분 옛날 곤궁한 사람의 말에서 나온 것이다.
무릇 소유한 재능을 온축하고도 세상에 펴지 못한 선비는 대부분 산속이나 물가에서 스스로 한가하게 살면서 벌레와 물고기, 풀과 나무, 바람과 구름, 새와 짐승들의 모습을 보고서 왕왕 기괴함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내면에 근심과 감분感憤이 켜켜이 쌓이면 원망하고 풍자하는 마음을 일으켜 버림받은 신하와 과부가 내는 한탄을 시로 말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말들을 묘사하니, 대체로 곤궁할수록 더욱 훌륭한 시가 나온다.
그렇다면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곤궁하게 된 뒤라야 훌륭한 시가 나오는 것이다.
나의 벗 매성유梅聖兪는 어릴 때 음보蔭補로 관리가 되었고, 여러 번 진사進士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시험관이 뽑아주지 않아 주현州縣에서 하급관리에 머문 것이 모두 10여 년이었다.
지금 나이가 50세인데, 오히려 벽서辟書를 좇아 남의 보좌관이 되어 뛰어난 재주를 쌓아두고도 사업에 크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는 완릉宛陵에 거주하면서 어릴 때부터 시를 익혀 동자童子일 때부터 지은 글이 이미 장로長老들을 놀라게 하였고, 장성한 뒤에는 육경六經과 인의仁義의 설을 배워 지은 문장이 간결하고 고아하고 순수하여 구차하게 세속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시만을 알 뿐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현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가릴 것 없이 시를 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성유聖兪를 손꼽았고, 성유聖兪 또한 스스로 뜻을 얻지 못한 것을 기꺼이 시로 발산하였다.
그러므로 평생 지은 것이 시에서 더욱 많았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지만 조정에 천거한 사람은 없었다.
옛날 왕문강공王文康公이 일찍이 그의 시를 보고 감탄하여 “200년 동안 이런 작품은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비록 깊이 알아준 것이지만 그 역시 천거하지는 않았다.
만약 다행히 조정에 등용되어 아송雅頌을 지어 대송大宋의 공덕을 노래하여 태묘太廟에 올려져 《시경詩經》의 〈상송商頌〉, 〈주송周頌〉, 〈노송魯頌〉의 작품을 뒤잇게 하였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았겠는가.
어찌하여 그에게 늙도록 뜻을 얻지 못해 곤궁한 자의 시를 짓게 하여 이에 한갓 벌레와 물고기, 각종 물류들에 관한 말과 나그네 시름과 감탄하는 말을 발하게 하였단 말인가.
세상에서는 한갓 그가 시를 잘 짓는다는 것을 좋아할 뿐 그가 오랫동안 곤궁하게 지내며 늙어가는 줄 모르니 애석하지 않겠는가.
성유聖兪의 시가 이미 많음에 스스로 수습하지 않았으니, 그의 처조카인 사경초謝景初가 시가 많지만 쉽게 유실될까 걱정하여 낙양洛陽에서 오흥吳興에 이르는 동안 지은 시를 가져다 편차하여 10권을 만들었다.
나는 일찍이 성유聖兪의 시를 좋아하여 모두 다 볼 수 없을까 걱정하였기 때문에, 대번에 사씨謝氏가 성유聖兪의 시를 분류하고 편차한 것을 기뻐하였다.
15년 뒤에 성유聖兪가 경사京師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내가 곡한 뒤에 묘지명墓誌銘을 썼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작품들을 찾아내 유고遺稿 1,000여 편을 얻어서 예전부터 보관하고 있던 것과 아울러 뛰어난 작품 677편을 모아 15권으로 만들었다.
아, 나는 성유聖兪의 시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논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