諸子因之하야 益得肆其異說하야 至於戰國하야 蕩而不反하니
然後
하야 聖人之學
이 幾乎其息
이러니 最後
가 獨用詩書之言
하야 貶異扶正
하야 著書以非諸子
하되 尤以
爲急
이러라
嘗以學干諸侯라가 不用하야 退老蘭陵하니 楚人尊之러라
가 莫不盡用荀卿子
하니 蓋其爲說
이 最近於聖人而然也
라
鄭昊
가 少爲詩賦
하야 擧進士
하야 已中第
하고 遂棄之曰 此不足學也
라하고 始從先生長者學問
하야 慨然有好古不及之意
라
鄭君年尙少而性淳明하고 輔以彊力之志하야 得其是者而師焉에 無不至也라
將更其名하야數以請이어늘 予使之自擇하니 遂改曰荀이라
然自
하니 使其與
로 幷進於孔子之門
이면 吾不知其先後也
로다
世之學者 苟如荀卿이면 可謂學矣니 而又進焉이면 則孰能禦哉리오
余旣嘉君善自擇而慕焉하고 因爲之字曰叔希하야 且以勗其成焉하노라
삼대三代의 성세盛世가 쇠망해갈 무렵에 학문이 폐기되어 도道가 밝혀지지 못하니 이렇게 된 뒤에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였다.
노자老子가 주周나라의 혼란에 염증을 느끼고부터 그 잗다란 식견으로 성인聖人의 학술이 여기에 그친다고 여겨 비로소 인의仁義을 비판하고 성지聖智를 헐뜯었다.
그러자 이후로 제자諸子들이 노자의 주장을 이어받아 더욱 그 이설異說를 마음대로 주장하게 되어 전국戰國시대에 이르러서는 지나치게 방자해져 정도正道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 뒤에 산연山淵과 제진齊秦, 견백堅白과 이동異同의 논변이 발흥해서 성인의 학문이 거의 사라지게 되었는데, 마지막에 순경자荀卿子가 홀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말을 써서 이단異端을 폄척貶斥하고 정도正道를 부식扶植하여 글을 지어 제자諸子를 비판하되 학문을 권장하는 일을 더욱 급선무로 삼았다.
그는 일찍이 배운 바를 가지고 제후諸侯들에게 벼슬을 구하다가 쓰이지 않게 되자 물러나 난릉蘭陵에서 여생을 보내니 초楚나라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전국戰國의 혼란이 평정됨에 미쳐서 삼대三代 때의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이 세상에 아직 다 나오지는 못했다.
한漢나라의 대유大儒인 가생賈生ㆍ사마천司馬遷 같은 무리들이 순경자荀卿子의 학설을 모두 쓰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 학설이 가장 성인聖人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형양滎陽의 정호鄭昊가 젊어서 시부詩賦를 공부하여 진사進士 시험에 응시하여 이미 급제하고는 마침내 그때껏 공부하던 시부를 버리면서, “이는 배울 것이 못 된다.”고 말하고는 비로소 연덕年德이 높은 스승을 따라 묻고 배우면서 옛 경전經典을 좋아하면서 그때에 태어나지 못함을 개탄慨歎하는 뜻이 있었다.
정군鄭君은 나이가 아직 젊고 성품이 순명淳明한 데다 굳세고 강한 의지까지 있어서 그 올바른 이를 만나 스승으로 삼음에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이름을 고치고자 하여 자주 나에게 부탁하였는데 내가 그에게 스스로 선택하게 하니 마침내 그는 ‘순荀’이라고 개명하였다.
여기에서 더욱 그의 과단성 있는 의지를 보겠다.
순경荀卿이라는 이는 일찍이 성인聖人을 친히 만나뵌 적은 없고 한갓 그 글을 읽고 터득하였다.
그렇지만 자사子思‧맹자孟子 이하는 그 마음속으로 모두 경시하였으니, 만약 그가 자유子游‧자하子夏와 함께 공자孔子의 문하에 나아갔다면 나는 누가 더 뛰어났을지 알지 못하겠다.
세상의 배우는 자들이 만약 순경荀卿처럼 한다면 학문한다고 이를 만하니 또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누가 그 진보를 막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미 정군鄭君이 잘 스스로 선택하여 사모한 것을 가상하게 여기고 이어 그에게 숙희叔希라고 자字를 지어 주고서 그가 순경처럼 덕德을 완성하기를 권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