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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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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歐公以文爲贄하야 投時相하니 與韓昌黎同이요 而其自謙之中 實以自譽하니 殊不放倒自地歩
某不佞 疲軟不能强筋骨하야 與工人田夫 坐市區服畎畝하야 爲力役之勞하고 獨好取古書文字하야 考尋前世以來聖賢君子之所爲 與古之車旗服器名色等數하야 以求國家之治賢愚之任하고
至其炳然而精者하얀 時亦盜取하야 飾爲文辭하야 以自欣喜
然其爲道閎深肆大 非愚且迂能所究及일새 用功益精 力益不足이라
其勞反甚於市區畎畝하되 而其所得 較之誠有不及焉하니 豈勞力而役業者 成功易하고 勤心而爲道者 至之難歟
欲悔其所難而反就其易하니 則復慙聖人之言하야 不敢叛棄
故退失其小人之事하고 進不及君子之文하야 茫然其心 罔識所嚮하니 若棄車川游하야 漫於中流하고 不克攸濟하야 回視陸者 顧瞻徨徨이라
然復思之컨대 人之有材能하고 抱道德하고 懷智慮하야 而可自肆於世者 雖聖與賢이라도 未嘗不無不幸焉이라 有不幸其身者矣
今以六尺可用之軀 生太平有道之世하야 無進身毁罪之懼하니 是其身時偶三者 皆幸於古人之所有者로되 獨不至焉이니 豈天之所予 不兩足歟
亦勉之未臻歟
伏惟明公履道懷正하야 以相天下하야 上以承天子社稷之大計하고 下以理公卿百職之宜하야 賢者任之以能하고 不賢者任之以力하야 由士大夫 下至於工商賤技 皆適其分而收其長이라
如脩之愚 旣不足任之能하고 亦不堪任以力이요 徒以常有志於學也
하야 因自顧其身時偶三者之幸也 不能黙然以自羞 謹以所業雜文五軸으로하야 以俟進退之命焉이라


04. 당시 재상宰相에게 보낸 편지
구공歐公이 글로 폐백을 삼아서 당시 재상에게 보냈으니 한창려韓昌黎(韓愈)와 같고, 스스로 겸손한 가운데 실은 자신을 칭찬하였으니 자기의 지위를 전혀 떨어뜨리지 않았다.
불녕不佞은 지치고 연약하여 근골筋骨의 힘을 억지로 써서 공인工人농부農夫들과 저잣거리에서 장사하거나 논밭에서 일하여 노동의 일을 할 수 없고, 유독 고서古書의 문장을 가지고 전세前世 이래 성현聖賢 군자君子들이 한 일과 고대古代의 수레‧깃발‧복장服章기물器物명색名色의례儀禮예수禮數를 고찰하여 국가의 선치善治현우賢愚의 직임에 대한 방도를 찾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장이 찬연燦然하여 정밀한 것에 이르러서는 때때로 연구하고 절취竊取하여서 수식해 문사文辭를 지어 스스로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서에 담긴 굉대宏大하고 심원深遠함이, 우매하고 우활한 제가 궁구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힘써 공부함이 정밀할수록 힘은 더욱 부족하였습니다.
그 수고로움이 도리어 저잣거리에서 장사하거나 논밭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심하였지만 그 소득은 이와 비교해보면 참으로 못 미치는 점이 있으니, 어쩌면 육체의 힘을 써서 일을 하는 것은 공효功效를 이루기 쉽고, 마음의 힘을 써서 를 찾는 것은 경지에 이르기가 어려운 게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일을 선택한 것을 뉘우쳐 쉬운 일로 나아가고자 한즉 산을 만듦에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다고 한 성인의 말씀에 다시 부끄러워 감히 그만두어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러나서는 소인의 일을 잃고 나아가서는 군자의 문장에 미치지 못하여 마음이 아득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였으니, 마치 수레를 버리고 시내에서 헤엄치다가 물 한가운데에서 헤매고 건너가지 못하여 기슭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면서 눈동자가 불안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건대 사람이 재능을 갖고 도덕을 품으며 지혜를 갖추어 스스로 세상에 재능을 펼 수 있는 자는 비록 성인聖人현인賢人일지라도 불행한 측면이 없지 않으니, 임금이 반신불수가 되었던 것과 극극克郤이 절름발이였던 것과 좌구명左丘明이 장님이 되었던 것은 그 몸에서 불행했던 경우이며, 관문關門을 지키며 딱따기를 치고 허둥지둥 분주했던 것은 맹자孟子가 전국시대에 살고 양웅揚雄신실新室에 벼슬함이 그 시대에서 불행했던 경우이며, 젊을 때부터 재주가 있었고 학문을 한 것이 삿되지 않았으니 가의賈誼훼방毁謗을 받았고 동중서董仲舒금고禁錮를 당했던 것은 비록 괜찮은 시대는 만났으나 임금의 지우知遇에 불행했던 경우입니다.
지금 6의 쓸 만한 몸으로 가 있는 태평한 시대에 살면서 세상에 진출해 비방을 받을 두려움이 없으니, 이는 몸과 시대와 지우知遇 세 가지가 모두 고인古人들의 경우보다 다행하지만 고인들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 것이니, 어쩌면 하늘의 부여賦與가 양쪽을 다 충족하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노력이 부족한 것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명공明公은 도를 실천하고 바른 뜻을 품고서 천하의 재상이 되어, 위로는 천자와 사직社稷대계大計를 이어받고 아래로는 공경公卿백관百官의 직책을 옳게 다스려, 현능賢能한 사람은 그 재능으로 일을 맡기고 현능하지 못한 사람은 그 몸의 힘으로 일을 맡겨, 사대부로부터 아래로 공상工商의 미천한 기능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들의 분수에 맞게 하고 그들의 장점을 수용하셨습니다.
우매한 저의 경우는 이미 재능으로 일을 맡지도 못하였으며 또한 몸의 힘으로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저 늘 학문에 뜻을 두고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행히도 유사有司의 직책에서 문장으로 재능을 시험하게 되었기에,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신의 몸과 시대와 지우知遇 세 가지의 다행함을 돌아봄에, 아무 글도 올리지 않고 잠자코 있음으로써 자신을 수치스럽게 할 수는 없어, 삼가 제가 지은 글 다섯 집지執贄의 예물로 삼아 문지기에게 올려서 가부可否의 명을 기다립니다.


역주
역주1 投時相書 : 이 편지는 景祐 원년(1034)에 쓴 것이다. 이해에 歐陽脩는 西京留守 推官의 임기가 차서 襄城으로 돌아왔고 이해 5월에 京師에 이르렀다. 마침 이때 구양수는 王曙의 추천으로 召命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學士院에 들어갔다. 이어 宣德郞에 제수되었고 大理評事 兼監察御使가 되었고, 鎭南君節度使掌書記‧館閣校勘이 되었다. 이 글은 학사원에 들어가기 전, 처음 京師에 왔을 때 쓴 것으로 보인다. 이때 재상은 李迪과 呂夷簡인데 이 편지에서 재상이 누군지는 알 수 없다.
역주2 穿蠹 : 춘추시대 楚 莊王이 “옛날에 물그릇이 뚫어지고 가죽옷이 좀 먹지 않으면 사방에 나가지 않는다.[古者 杅不穿 皮不蠹 則不出於四方]” 한 데서 온 말로, 여기서는 오랫동안 글을 읽고 연구함을 뜻한다. 《春秋公羊傳 宣公 12년》
역주3 爲山一簣止焉 : 孔子가, 학자가 학문하는 것을 비유하여 “비유하면 산을 만듦에 마지막 흙 한 삼태기를 붓지 않아 산을 이루지 못하고 그만두는 것도 나 자신이 그만두는 것과 같으며, 비유하면 산을 만드는 데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처음 붓는 것이라 하더라도 나아감은 나 자신이 나아가는 것과 같다.[譬如爲山 未成一簣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進 吾往也]”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4 禹之偏枯 : 偏枯는 半身不遂, 즉 오늘날의 중풍과 같은 것이다. 《莊子》 〈盜跖〉에 “禹임금은 偏枯하였다.[禹偏枯]”라고 하였는데, 成玄英의 疏에 “治水하느라 고생하면서 비바람을 많이 맞아서 편고한 병이 들어 반신불수가 되었다.[治水勤勞 風櫛雨沐 致偏枯之疾 半身不遂也]”라고 하였다.
역주5 郤克之跛 : 郤克은 춘추시대 晉나라 사람으로, 成公 때 大夫가 되었는데 절름발이였다고 한다. 齊나라에 갔을 때 頃公이 휘장 안에서 부인에게 극극을 보게 하였는데, 극극이 다리를 절며 섬돌을 오르는 것을 보고 부인이 웃었다. 이에 극극이 원한을 품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春秋左氏傳 宣公ㆍ成公》
역주6 丘明之盲 : 丘明은 춘추시대 左丘明의 가리킨다. 그는 《春秋左氏傳》을 짓고 失明한 채 《國語》를 지었다 한다. 《史記 太史公自序》
역주7 抱關擊柝……有不幸其時者矣 : 抱關擊柝은 關門을 지키며 딱따기를 치는 일을 하는 낮은 관리를 말한다. 孟子가 “관문을 지키며 딱따기를 치는 사람도 모두 일정한 직책이 있어 임금에게 녹을 먹나니, 일정한 직책도 없이 임금에게서 하사받는 것을 不恭하다고 여기는 것이다.[抱關擊柝者 皆有常職 以食於上 無常職而賜於上者 以爲不恭也]” 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萬章 下》
棲惶奔走는 허둥지둥 분주하다는 뜻으로 벼슬하는 것을 말한다.
新室은 王莽이 漢나라를 찬탈하여 세운 나라인 新을 가리킨다. 揚雄이 왕망 조정의 大夫가 되어 왕망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지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양웅이 秦나라는 나쁘고 왕망의 新나라는 좋다는 뜻으로 〈劇秦美新〉이란 글을 지었다. 《文選 권48 劇秦美新》
역주8 少焉而材……有不幸其偶者矣 : 少焉而材는 젊을 때부터 재주가 있었다는 뜻으로, 漢나라 賈誼를 가리킨다. 그는 불과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文帝의 신임을 얻어 太中大夫로 발탁되어 服色‧制度‧官名 등을 개혁하려고 하다가, 당시 대신이었던 周勃‧灌嬰 등의 참소를 입고 長沙王 太傅로 좌천되었다가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漢書 권48 賈誼傳》
學焉而不回는 학문이 바르다는 뜻으로 漢나라 학자 董仲舒를 가리킨다. 젊을 때부터 《春秋》를 전공하여 景帝 때에 博士가 되었다. 평소 방문에 휘장을 드리우고 講誦에 열중하여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3년 동안 정원을 내다보지 않으니, 學士들이 모두 존중했다. 그는 “仁人은 그 義를 바르게 하고 그 利를 꾀하지 않으며, 그 道를 밝히고 그 공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孔子의 문하에서는 어린 동자들도 五伯를 말하기 부끄러워하는 것은 그들이 속임수와 힘을 앞세우고 仁義를 뒤로했기 때문이다.[仁人者 正其誼 不謀其利 明其道 不計其功 是以 仲尼之門 五尺之童羞稱五伯 爲其先詐力而後仁誼也]”라고 하였다. 동중서는 災異에 대해 말했다가 禁錮를 당했다. 《史記 권121 儒林列傳 董仲舒傳》, 《漢書 권56 菫仲舒傳》
역주9 今幸以文字試於有司 : 學士院에 들어가게 된 것을 가리킨다. 학사원은 翰林學士院의 준말로, 임금의 명령인 制書를 작성하는 일을 관장하기 때문에 문장으로 재능을 시험한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10 閽人 : 문지기이다. 편지에서 상대방을 높여 곧바로 호칭하지 못하고 문지기를 대신 호칭하는 것으로, 상대방을 執事라 부르는 것과 같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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