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允
은 鎭州人也
라 少事鎭州
하야 爲
參軍
이러니 唐莊宗討張文禮
할새 允脫身降
이어늘
莊宗繫之獄하고 文禮敗에 乃出之하야 爲魏州功曹하다 趙在禮辟節度推官하고 歷滄兗二鎭掌書記하고 入爲監察御史하고 累遷水部員外郎知制誥하다
皇子重美爲河南尹
하야 掌六軍
할새 以允剛介
로 乃拜允給事中
하고 爲六軍判官
이라가 罷遷左散騎常侍
하다
라하니 蓋行赦
라도 不以爲恩
이오 不行赦
라도 不以爲無恩
은 罰有罪故也
라
自古로 皆以水旱則降德音而宥過하고 開狴牢而出囚하야 冀感天心하야 以救其災者는 非也라
假有二人之訟者에 一有罪而一無罪어늘 若有罪者見捨면 則無罪者啣寃이니 此乃致災之道라 非救災之術也라
至使小人遇天災면 則皆喜而相勸以爲惡하야 曰 國將赦矣리니 必捨我以救災리라하리니 如此則是教民爲惡也라
夫天之爲道는 福善而禍淫이니 若捨惡人而變災爲福이면 則是天又喜人爲惡也라
凡天之降災는 所以警戒人主節嗜慾務勤儉恤鰥寡正刑罰而已라하다
是時에 晉高祖方好臣下有言하야 覽之大悅하다 允事漢爲吏部侍郎하다
할새 京師皆恐
하니 允常退朝不敢還家
하고 止于相國寺
라
周太祖以兵入京師
할새 允匿于佛殿
이라가 墜而卒
하니 年六十五
라
장윤張允은 진주鎭州 사람이다. 젊을 때 진주鎭州에서 벼슬하여 장문례張文禮의 참군參軍이 되었는데 당唐 장종莊宗이 장문례를 토벌할 때 장윤은 몸을 빼내어 항복하였다.
그러자 장종이 장윤을 옥에 가두었고 장문례가 패배하자 석방하여 위주공조魏州功曹로 삼았다. 조재례趙在禮가 절도추관節度推官으로 초빙하였고 창주滄州와 연주兗州 두 진鎭의 장서기掌書記를 역임하였으며 조정에 들어가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수부원외랑水部員外郎 지제고知制誥가 되었다.
폐제廢帝의 황자皇子 이중미李重美가 하남윤河南尹이 되어 육군六軍을 관장할 때 장윤의 강개剛介한 성품을 인정하여 장윤을 급사중給事中에 배수하고 육군판관六軍判官으로 삼았다가, 파직하여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승진시켰다.
진晉 고조高祖가 즉위하여 여러 차례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자 장윤이 〈박사론駁赦論〉을 지어 바쳤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관자管子≫에 이르기를 ‘무릇 사면은 이익은 적고 해악은 크니 오래 되면 그 재앙을 이루 다할 수 없고, 사면하지 않는 것은 해악은 적고 이익은 크니 오래 되면 그 복록을 이루 다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漢나라의 오한吳漢이 병이 위독하자 황제가 오한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지 물었는데, 오한이 말하기를 ‘오직 폐하께서 사면령을 내리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사면을 행하더라도 은덕으로 여기지 않고 사면을 행하지 않더라도 은덕이 없다고 여기지 않는 것은 벌을 받는 사람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모두 홍수나 가뭄이 들면 덕음德音을 내려 과오를 용서하고 감옥을 열어 죄수를 방면하여 천심天心을 감동시켜 재앙이 사라지기를 바랐는데, 이는 그릇된 행동입니다.
가령 두 사람이 송사訟事를 한 경우에 한 사람은 죄가 있고 한 사람은 죄가 없는데 만약 죄 있는 자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죄 없는 자가 원한을 품을 것이니, 이는 바로 재앙을 부르는 길이지 재앙을 없애는 방법이 아닙니다.
심지어 소인小人이 하늘이 내리는 재앙을 만나면 모두 기뻐하면서 서로 권하여 악을 행하며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사면할 것이니, 반드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어 재앙을 없애려 할 것이다.’라고 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다면 이는 백성에게 악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대저 천도天道는 선한 이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이에게 재앙을 내리니, 만약 악인을 그냥 내버려 두어 재앙이 변하여 복이 된다면 이는 하늘이 사람들의 악행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무릇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은 인주人主에게 기욕嗜慾을 절제하고 근검에 힘쓰고 홀아비와 과부를 돌보고 형벌을 바르게 집행하라고 경계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이때에 진晉 고조高祖가 바야흐로 신하의 훌륭한 말을 좋아하여 장윤의 글을 보고 크게 기뻐하였다. 장윤은 한漢나라를 섬겨 이부시랑吏部侍郎이 되었다.
은제隱帝가 대신大臣을 주륙誅戮할 때 경사京師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니, 장윤은 항상 조정에서 퇴청하여 감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상국사相國寺에 머물렀다.
주周 태조太祖가 병사를 이끌고 경사로 들어올 때 장윤은 불전佛殿의 승진承塵에 숨어 있다가 떨어져 졸하니 향년 6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