惟魯武康公이 事太宗皇帝하야 秉節治戎하야 出征入衛하야 乃受遺詔輔眞宗하야 有勞有勤하니
公少以父任爲
이러니 할새 公從武康公
하야 出鐵門
하야 爲先鋒
하야 殺獲甚衆
이라
軍至
에 諸將失期
하야 不得進
이어늘 公告其父曰 歸師過險
하니 爭必亂
이라하고 乃以兵前守隘
하야 號其軍曰 亂行者斬
이라하다
由是로 士卒無敢先後하고 雖武康公도 亦爲之按轡하다
追兵望其軍整하고 不敢近하니 武康公歎曰 王氏有子矣라하다
公以氈車로 載勇士爲婦人服하야 盛飾誘之邯鄲道中이라
是時
에 猶臨朝
라 有詔補一軍吏
한대 公曰 補吏
는 軍政也
라
及太后上僊
하야 有司請衛士
이어늘 公以爲故事無爲太后喪坐甲
이라하야 又不奉詔
하니 於是
에 天子知公可任大事
라
明年
에 以
留後同知院事
하고 又明年
에 領
하며 又明年
에 加
러라
公爲將에 善撫士하야 而識與不識皆喜하야 爲之稱譽러라
其狀貌는 雄偉動人하야 雖里兒巷婦로 外至夷狄하야도 皆知其名氏러라
士皆爲之懼로되 公擧止言色이 如平時하고 惟不接賓客而巳라
客有謂公曰 此害公者也라하니 公愀然曰 孔公이 以職言事니 豈害我者리오
於是에 言者終身以爲愧하고 而士大夫服公爲有量이러라
慶曆二年
에 起公爲
러니 未行
에 而契丹聚兵幽涿
하고 遣使者有所求
하니 自河以北皆警
이라
契丹使者가 過澶州라가 見公하고 喜曰 聞公名久矣러니 乃得見於此耶아한대
公爲言已衰老하고 中國多賢士大夫라하고 因指坐客하야 歷陳其世家하니 使者竦聽이러라
是歲
에 徙
하고 改宣徽南院使
이러니 未行
에 徙判定州 兼
都部署
하다
公治其軍에 無撓其私하고 亦不貸其過하니 居頃之에 士皆可用이라
契丹使人이 覘其軍이어늘 或勸公執而戮之한대 公曰 吾軍整而和하니 使覘者得吾實以歸면 是屈人兵以不戰也라하다
明日大閱于郊할새 公執桴鼓誓師에 號令簡明하니 進退坐作이 肅然無聲이라
乃下令曰 具糗糧하고 聽鼓聲하야 視吾旗所向하라하니 契丹聞之震恐이러라
道過京師할새 天子遣中貴人하야 問公欲見否한대 公謝曰 備邊無功이어늘 幸得蒙恩徙內地하니 不敢見이라하다
明年徙
한대 不行
하야 以宣徽使奉朝請
하고 已而出判
하며 六年
에 拜同中書門下平章事 判澶州
하다
又明年
에 한대 不許
하야 以爲
하고 已而復判鄭州徙澶州
하고 除
하야 徙封冀國公
하다
皇祐三年
에 遂以
致仕
하니 大朝會
에 許綴中書門下班
하다
居一歲에 天子思之하야 起爲河陽三城節度使 同中書門下平章事 判鄭州하고 六年에 以本官爲樞密使徙封魯國公하다
使者曰 天子以公典樞密하고 而用富公爲相하니 得人矣라하니 語聞에 上喜하야 賜公御弓一矢五十하다
嘗侍上射할새 辭曰 幸得備位라 大臣擧止는 爲天下所視니 臣老矣라 恐不能勝弓矢라하다
上再三諭之하니 乃手二矢再拜하고 一發中之하야 遂將釋復位한대 上固勉之어늘 再發又中하니 由是左右皆驩呼라
士大夫爭進計策하야 多所改作한대 公笑曰 奈何紛紛가
其在樞密에 亦嘗自請臨邊한대 不許하고 凡大謀議에 必以咨之하되 其在外則遣中貴人詔問하니 其言多見施用이러라
公自致仕로 復起掌樞密하야 凡三歲에 以老求去位가 至六七이라
上爲之不得已
하야 以爲景靈宮使
하고 徙忠武軍節度使
하며 又以爲
하고 五日一朝
에 給扶者以子若孫一人
이라
明年二月辛未에 以疾薨于家하니 詔輟視朝二日하고 發哀于苑中하고 贈太尉中書令하다
其遺言曰 臣有俸祿이 足以具死事하니 不敢復累朝廷이라
天子惻然哀其志하야 以黃金百兩白金三千兩으로 賜其家한대 固辭나 不許라
以其年五月甲申에 葬于管城하고 明年有詔史臣이 刻其墓碑라
臣愚는 以謂自國家西定河湟하고 北通契丹으로 罷兵不用이 幾四十年이러니
一日元昊叛하고 幽燕亦犯約이라 二邊騷動이로되 而老臣宿將無在者라
公於是時에 屹然爲中國鉅人名將하니 雖未嘗躬矢石하야 攻堅摧敵이나 而恩信已足撫士卒하며 名聲已足動四夷라
復起于家하야 保有富貴하고 享終壽考하니 雖古之將帥라도 及于是者가 其幾何人이리오
至于出入勤勞之節과 與其進退綢繆君臣之恩意하얀 可以褒勸後世가 如古詩書所載하니 皆應法可書라
曾祖諱方
은 追封蔣國公
하고 祖諱玄
은 追封
國公
하니 皆贈中書令
이라
父諱超
는 로 贈尙書令
하고 追封魯國公
하고 謚曰武康公
이라
五男四女니 男曰咸熈는 東頭供奉官이러니 蚤卒하고 次曰咸融은 西京左藏庫使 果州團練使요 次曰咸庶는 內殿崇班이러니 蚤卒하고 次曰咸英은 供備庫副使요 次曰咸康은 內殿承制라
01. 충무군절도사 동중서문하평장사 무공 왕공의 신도비명
무공武恭 왕공王公의 사적事迹의 본말本末을 기록한 것이 매우 자세하다.
왕씨王氏의 선조先祖는 상산常山 진정眞定 사람이다.
후세에 하남河南 밀현密縣에 장사 지냈는데 밀현密縣이 나뉘어 관성管城에 들어가게 되어 마침내 정주鄭州 관성管城 사람이 되었고, 그 봉국封國은 누대에 걸쳐 노국魯國을 세습하였다.
노국魯國 무강공武康公이 태종황제太宗皇帝를 섬겨 부절符節을 잡고 군정軍政을 다스려 변방으로 나가서는 정벌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황제를 호위하여, 마침내 태종太宗의 유조遺詔를 받아 진종眞宗을 보필하여 공적이 있고 노고가 있었다.
이에 무강공에게 보답하고 추숭하여 이 노국魯國을 소유하게 하였으니, 이분이 노국魯國 무공공武恭公을 낳았다.
공은 젊어서 부친의 직임으로 인해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는데, 지도至道 2년(996)에 다섯 장수를 보내 이계천李繼遷을 토벌할 적에 공이 무강공武康公을 따라 철문鐵門으로 나가 선봉先鋒이 되어 참수한 수급首級이 매우 많았다.
군대가 오백지烏白池에 이르렀을 때 제장諸將이 때를 놓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자, 공이 부친에게 고하기를 “귀환하는 군사가 험고險固한 곳을 지나가니 여기서 서로 싸우면 반드시 혼란해질 것입니다.”라 하고, 이에 무기를 들고 앞에서 좁은 길목을 지키면서 군사들에게 외치기를 “대오를 어지럽히는 자는 참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사졸士卒들이 감히 먼저 가려고 하지 않았고 무강공武康公조차도 고삐를 잡고 천천히 지나갔다.
추격하던 적병이 그 군대가 정연한 것을 바라보고 감히 다가오지 못하니, 무강공이 “우리 왕씨王氏 가문에 훌륭한 아들이 있구나.”라고 탄복하였다.
뒤에 공은 어전충좌御前忠佐로 군두軍頭와 순검巡檢이 되었는데, 형주邢州와 명주洺州 출신 사내 장홍패張洪霸가 이 두 주州 사이에서 도적들을 규합하였는데도 해가 지나도록 관리들이 체포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공이 전거氈車를 타고 여인의 복장을 한 용사勇士를 싣고서 예쁘게 치장을 하고 한단邯鄲 길에서 적당賊黨들을 꾀어내었다.
적당賊黨들이 다투어 나서며 길을 막고 위협하였는데 마침내 모두 사로잡으니 이 일을 계기로 이름이 알려졌다.
공은 장수 집안의 아들로 진종眞宗을 숙위宿衛하여 내전직內殿直 전전좌반도우후殿前左班都虞候 봉일捧日 좌상도지휘사左廂都指揮使가 되었고 누차 승진하여 영주단련사英州團練使가 되었다.
지금 천자(인종仁宗)가 즉위하시고는 박주단련사博州團練使 지광신군知廣信軍으로 개차改差되었다가 기주지사冀州知事로 옮겼고 강주방어사康州防禦使로 옮겼으며, 용신위龍神衛 봉일捧日 천무사상도지휘사天武四廂都指揮使 시위친군보군마군전전도우후侍衛親軍步軍馬軍殿前都虞候 보군부도지휘사步軍副都指揮使 계복이주관찰사桂福二州觀察使를 역임하였다.
이때에 장헌태후章獻太后가 아직 조정에서 청정聽政하고 있었는데 어떤 군리軍吏 한 명을 보임補任하라고 조서를 내리자, 공이 “군리를 보임하는 것은 군정軍政입니다.
감히 조서를 가지고 우리 군대에 요구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아뢰고 속히 철회하기를 청하였다.
그렇지만 태후太后가 한사코 그를 군리에 보임하려고 하자 공이 조서를 받들지 아니하니 그제야 그만두었다.
태후가 승하하셨을 때 유사有司가 위사衛士를 좌갑坐甲하도록 청하자 공이 고사故事에 태후의 상喪을 위해 좌갑坐甲하는 경우가 없다고 하면서 또 조서를 받들지 아니하니, 이에 천자께서 공에게 대사大事를 맡길 만함을 아셨다.
명도明道 2년(1033)에 검교태보檢校太保 첨서추밀원사僉署樞密院事에 배수拜受되었고 마침내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었다.
이듬해에 봉국군류후奉國軍留後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고, 또 그 이듬해에 안덕군절도사安德軍節度使가 되었으며, 또 그 이듬해에 검교태위檢校太尉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의 직책을 더하였다.
공은 장수로 있을 적에 군사들을 잘 보살펴서 공을 아는 이나 모르는 이 모두 좋아하면서 공을 칭송하였다.
공의 모습은 웅위雄偉함이 사람을 놀라게 하여 비록 마을의 아녀자들로부터 밖으로 오랑캐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그 성명을 알았다.
어사중승御史中丞 공도보孔道輔 등이 어떤 일로 인해 공을 탄핵하니 이에 공을 추밀樞密에서 파직하고 무령군절도사武寧軍節度使를 배수하였다.
그런데도 탄핵하는 이들이 그치지 않자 곧장 우천우위상장군右千牛衛上將軍 지수주知隨州로 삼았다.
그러자 군사들은 다 이 일로 두려워하였지만 공은 행동과 말과 낯빛이 평소대로였고 오직 손님들을 맞이하지 않을 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조주知曹州로 옮겼는데 이때 공도보孔道輔도 졸하였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이 사람은 공을 해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자, 공은 서글퍼하면서 “공공孔公은 자신이 맡은 직책에 따라 〈잘못된 일을〉 말한 것이니 어찌 나를 해친 사람이겠는가.
조정이 한 분의 곧은 신하를 잃어버린 것이 안타깝구나.”라고 말하였다.
이에 탄핵한 자들은 종신토록 그 일을 부끄럽게 여겼고, 사대부들은 공에게 넓은 도량이 있음을 탄복하였다.
경력慶曆 2년(1042)에 공을 기용하여 보정군류후保靖軍留後 지청주知靑州로 삼았는데, 길에 오르기도 전에 거란契丹이 유주幽州와 탁주涿州에서 병사를 모아놓고 사자使者를 보내 요구하는 것이 있으니 하수河水 이북 지역이 모두 긴장하였다.
이에 공에게 보정군절도사保靖軍節度使 지전주知澶州를 배수하였다.
거란契丹의 사자使者가 전주澶州를 지나다가 공을 보고 기뻐하면서 “공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래였는데 여기에서 비로소 뵙게 되는군요.”라고 말하니,
공이 그에게 자신은 벌써 노쇠하였고 중국에는 어진 사대부들이 많다고 말하고는, 이어 앉아 있던 손님을 가리키면서 그 가문의 내력을 일일이 설명하니 사자가 놀라며 경청하였다.
이해에 진정부로眞定府路와 정주로定州路 등의 도부서都部署로 옮겼고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 판성덕군判成德軍으로 개차改差되었는데, 길에 오르기 전에 판정주判定州 겸삼로도부서兼三路都部署로 옮겼다.
공은 군대를 다스릴 때 그 사정私情에 휘둘림이 없었고 또한 그 잘못도 용서하지 않으니 얼마 뒤에는 군사들이 모두 쓸 만하게 되었다.
거란契丹의 사신이 공의 군대를 염탐하자 어떤 이가 공에게 그를 잡아 죽이자고 권하였는데, 공은 “우리 군대는 질서정연하면서도 화합하고 있으니 만일 염탐하는 자가 우리의 실정을 알고 돌아가면 전쟁을 하지 않고도 적군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교외에서 크게 열병閱兵할 적에 공이 북채를 잡고 북을 두드리며 군대에 훈시함에 호령號令이 간명簡明하니, 군사들이 전진하고 후퇴하며 앉고 일어서는 동작이 엄숙하여 웅성거림이 없었다.
이에 군령을 내리기를 “군량을 갖추고 북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든 깃발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라.”라고 하니, 거란이 이를 듣고 놀라 두려워하였다.
이때 마침 다시 강화講和가 이루어져 군대가 해산되었기에 지진주知陳州로 옮기게 되었다.
경사京師를 거쳐 갈 적에 천자가 환관을 보내 공에게 천자를 뵙고자 하는지 물어보게 하였는데, 공이 사양하면서 “국경을 방비하여 전공이 없는데 다행스럽게 은총을 입어 내지內地로 옮기게 되었으니 감히 뵐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하양河陽으로 옮겼는데 길에 오르기 전에 선휘사宣徽使로 봉조청奉朝請이 되었고, 얼마 있다가 외지로 나가 판상주判相州가 되었으며, 6년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전주判澶州에 배수되었다.
이듬해에 정주鄭州로 옮겨 기국공祁國公에 봉해졌다.
다시 이듬해에 치사致仕를 청하였는데 천자가 윤허하지 않고서 회령관사會靈觀使로 삼았고, 이윽고 다시 판정주判鄭州에서 전주澶州로 옮겼으며 집경군절도사集慶軍節度使에 제수되고서 기국공冀國公에 옮겨 봉해졌다.
황우皇祐 3년(1051)에 드디어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치사致仕하니 천자가 대조회大朝會를 열 적에 중서中書와 문하門下의 반열班列에 서도록 윤허하였다.
한 해가 지나자 천자가 공을 생각하여 공을 불러 하양삼성절도사河陽三城節度使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판정주判鄭州를 삼았고, 황우 6년(1054)에 본관本官으로 추밀사樞密使를 삼으면서 노국공魯國公에 옮겨 봉하였다.
얼마 있다가 상上이 부필富弼을 재상宰相으로 삼았다.
이해에 거란契丹의 사자使者가 왔는데 공이 그와 함께 활을 쏘았다.
사자가 “천자께서 공에게 추밀樞密을 맡게 하시고 부공富公으로 재상을 삼으시니 적임자를 얻은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알려지자 상이 기뻐하여 공에게 어궁御弓 1장張과 화살 50개를 하사하였다.
공은 활을 잘 쏘아 늙어서도 솜씨가 줄지 않았다.
상을 모시고 활을 쏠 적에 공이 사양하면서 “다행히 자리나 채우고 지내왔습니다만, 대신大臣의 행동은 천하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니 신이 노쇠하였는지라 궁시弓矢를 감당할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재삼 권유하니 그제야 화살 두 개를 잡고 재배再拜하고서 한 발을 쏘아 과녁을 맞히고는 마침내 궁시를 놓고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상이 한사코 권유하자 다시 쏘아 또 과녁을 맞히니 이로 인해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다 환호하였다.
보원寶元과 경력慶曆 연간에 조원호趙元昊가 하서河西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군대를 파견해도 오랫동안 전공이 없었다.
사대부들이 다투어 계책을 올려 작전을 변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이 웃으면서 “어찌하여 이렇게 분분한 것인가.
군사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경애敬愛할 줄 알게 하면 겁이 많은 자는 용맹해지고 용맹한 자는 교만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길 수 있는 점을 가지고 적을 상대하여 이길 뿐이니 어찌 말을 많이 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추밀樞密로 있을 적에도 일찍이 스스로 변방에 갈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고, 조정에 큰 논의가 있을 적에는 반드시 공에게 자문하되 공이 지방에 있으면 환관을 보내 물었으니, 공의 말이 시행된 것이 많았다.
공이 치사致仕하고 나서 다시 나와 추밀樞密을 담당한 3년 동안에 노쇠함을 이유로 직위職位에서 떠나기를 청한 것이 예닐곱 차례나 되었다.
상이 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경령궁사景靈宮使로 삼고 충무군절도사忠武軍節度使로 옮겼으며, 또 동군목제치사同群牧制置使로 삼고는 닷새에 한 번 조회 갈 적에 아들이나 손자 한 명을 부축하는 이로 삼게 하였다.
이듬해 2월 신미일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황제가 이틀 동안 조회를 정지할 것을 명하고 원중苑中에서 애도哀悼를 표하고 태위중서령太尉中書令에 추증하였다.
공의 유언遺言에 “신의 봉록俸祿이 장사를 치르기에 충분하니 감히 다시 조정에 누를 끼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사자를 보내 신의 상喪을 돕게 하지 마시고 부의를 넉넉하게 보내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천자가 애처로이 그 뜻을 가련하게 여겨 황금黃金 100양兩과 백금白金 3,000냥을 공의 집에 하사하였는데, 고사固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해 5월 갑신일에 관성管城에 장사 지내고, 이듬해 사신史臣에게 명을 내려 공의 묘비墓碑를 새기게 하였다.
어리석은 신은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국가가 서쪽으로 하황河湟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거란契丹과 화친을 맺고부터, 군대를 쉬게 하고 쓰지 않은 지가 거의 40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조원호趙元昊가 반란하고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역시 약속을 어겼는지라 두 변경이 소란해졌는데 노신老臣과 숙장宿將 가운데 살아 있는 이가 없었습니다.
공이 이때에 우뚝하게 중국에서 재덕 있는 사람이자 훌륭한 장수였으니, 비록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몸소 무릅쓰면서 견고한 적을 공격하여 꺾지는 못했지만, 은혜와 신의가 이미 사졸士卒들을 위무하기에 충분하며 명성이 이미 사방 오랑캐들을 진동시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조정에 올라 기무機務를 관장하다가 노쇠함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뒤에 다시 집에서 벼슬길에 나와 부귀를 보유하고 장수를 누렸으니, 비록 옛날의 훌륭한 장수라 하더라도 이러한 데 이른 이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변경에 나가거나 조정에 들어와서 노력하고 수고한 절개와 출사하거나 물러나거나 상관없이 깊었던 군신 사이의 정의情意로 말하자면, 후세 사람들을 장려하고 권면할 수 있는 것이 마치 옛 시서詩書에 수록된 일들과 같으니 모두 본보기가 될 만하고 기록할 만합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국魯國 무공공武恭公은 휘諱가 덕용德用이고 자字가 원보元輔이다.
증조부 휘諱 방方은 장국공蔣國公에 추봉追封되었고 조부 휘諱 현玄은 형국공邢國公에 추봉되었는데, 두 분 다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諱 초超는 건웅군절도사建雄軍節度使로 상서령尙書令에 추증되고 노국공魯國公에 추봉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무강공武康公이다.
이분은 송씨宋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무승군절도사武勝軍節度使 연악延渥의 따님이다.
처음에 안정군부인安定郡夫人이 되었다가 영국공부인榮國公夫人에 추봉되었다.
5남 4녀를 두니 장남 함희咸熈는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을 지냈는데 일찍 졸하였고, 둘째 함융咸融은 서경좌장고사西京左藏庫使 과주단련사果州團練使이고, 셋째 함서咸庶는 내전숭반內殿崇班을 지냈는데 일찍 졸하였고, 넷째 함영咸英은 공비고부사供備庫副使이고, 다섯째 함강咸康은 내전승제內殿承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