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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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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4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01.
康延孝 自梁歸唐하야 期以八日滅梁하고 又及定蜀이어늘 莊宗不能用之하니 而卒以猜忌叛이라
孝雖誅死 而唐之不足以一天下 可槪見矣
康延孝 代北人也 爲太原軍卒하야 有罪亡命于梁이러니 末帝遣段凝하야 軍于河上하고 以延孝爲左右先鋒指揮使하다
延孝見梁末帝任用群小하고 知其必亡하야 乃以百騎奔于唐하야 見莊宗於朝城하니 莊宗解御衣金帶以賜之하고 拜延孝博州刺史 捧日軍使兼南面招討指揮使하다
莊宗屛人하고 問延孝梁事어늘 延孝具言 末帝懦弱한대 趙巖壻也 張漢傑婦家 皆用事하고 段凝姦邪하야 以入金多爲大將하니 自其父時故將皆出其下 王彦章 驍將也어늘 遣漢傑監其軍而制之 小人進任而忠臣勇士皆見疎斥하니 此其必亡之勢也라하다
莊宗又問梁計如何하니 曰 臣仕梁時 竊聞其議하니 期以仲冬大擧하야 遣董璋以陜虢澤潞之衆出石會하야 以攻太原하고 霍彦威以關西汝洛之兵掠邢洺以趨鎭定하고 王彦章以京師禁衛擊鄆州하고 段凝以河上之軍當陛下라하다
莊宗初聞延孝曰梁必亡하고라가 及聞其大擧也하얀 懼曰 其將何以禦之오하니
延孝曰 梁兵雖衆이나 分則無餘 臣請待其旣分하야 以鐵騎五千으로 自鄆趨汴하야 出其不意하야 擣其空虛하면 不旬日 天下定矣라하니 莊宗甚壯其言하다
後董璋等雖不出兵이나 而梁兵悉屬段凝於河上하야 京師無備어늘 莊宗卒用延孝策하야 自鄆入汴하야 凡八日而滅梁이라
以功拜鄭州防禦使하고 賜姓名曰李紹琛하고 二年 遷保義軍節度使하다
三年 征蜀 以延孝爲先鋒排陣斬斫使하야 破鳳州하고 取固鎭하고 降興州하다
與王衍戰三泉 衍敗走하야 斷吉柏江浮橋어늘 延孝造舟以渡하야 進取綿州하다
衍復斷綿江浮橋어늘 延孝謂招撫使李嚴曰 吾遠軍千里하야 入人之國하니 利在速戰이라 乘衍破膽之時하여 但得百騎過鹿頭關하면 彼將迎降不暇 若修繕橋梁하야 必留數日하야 使衍得閉關爲備 則勝負未可知也라하고
因與嚴乘馬浮江하니 軍士隨之濟者千餘人이라 遂入鹿頭關하야 下漢州하다
居三日 後軍始至하니 衍弟宗弼果以蜀降하다 延孝屯漢州하야 以俟魏王繼岌하다
蜀平 延孝功爲多어늘 左廂馬步軍都指揮使董璋 位在延孝下 然特見重於郭崇韜
崇韜有軍事 獨召璋與計議하고 而不問延孝어늘
延孝大怒하야 責璋曰 吾有平蜀之功이어늘 公等遬相從하야 反俛首郭公之門하니 吾爲都將이니 獨不能以軍法斬公邪아하다
璋訴于崇韜하니 崇韜解璋軍職하야 表爲東川節度使하다
延孝愈怒曰 吾冒白刃하고 犯險阻하야 以定이어늘 璋有何功而得旄節가하고 因見崇韜言其不可하다
崇韜曰 紹琛反邪 敢違吾節度아하야늘 延孝懼而退하다
明年崇韜死 延孝謂璋曰 公復俛首何門邪오하니 璋求哀以免하다
繼岌班師 命延孝以萬二千人爲殿이러니 行至武連하야 聞朱友謙無罪見殺하다
友謙有子令德在遂州어늘 莊宗遣使者詔繼岌卽誅之하다 繼岌不遣延孝하고 而遣董璋하니 延孝已自疑하고 及璋過延孝軍 又不謁하니
延孝大怒하야 謂其下曰 南平梁하고 西取蜀 其謀畫出于郭公이나 而汗馬之勞攻城破敵者 我也 今郭公已死하니 我豈得存이리오 而友謙與我俱背梁以歸唐者 友謙之禍 次及我矣라하다
延孝部下皆友謙舊將이라 知友謙被族하고 皆號泣訴于軍門曰 朱公無罪로대 二百口被誅하고 舊將往往從死하니 我等死必矣라하다
延孝遂擁其衆하야 自劍州返入蜀하야 自稱西川節度三州制置等使하고 馳檄蜀人하니 數日之間 衆至五萬이라
繼岌遣任圜以七千騎追之하야 及于漢州하야 會孟知祥夾攻之하니 延孝戰敗被擒하야 載以하다
圜置酒軍中하야 引檻車至坐上이어늘 知祥酌大巵從車中飮之而謂曰 公自梁朝 脫身歸命하야 遂擁節旄하니 今平蜀之功 何患富貴而入此檻車邪아하니
延孝曰 郭崇韜 之臣이라 功在第一이요 兵不血刃而取兩川이어늘 一旦無罪闔門受戮하니 顧如延孝 何保首領이리오 以此不敢歸朝耳라하다
任圜東還 延孝檻車至鳳翔이어늘 莊宗遣宦者殺之하다


01. 강연효康延孝전기傳記
강연효康延孝나라에서 나라로 귀부歸附하여 8일을 기한으로 하여 양나라를 멸망시켰고 또 나라까지도 평정하였는데 장종莊宗이 그를 등용하지 않으니 마침내 시기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강연효는 비록 주살되었으나 당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다.
강연효康延孝대북代北 사람이다. 태원太原군졸軍卒로 있다가 죄를 지어 나라로 망명하였는데, 말제末帝단응段凝을 보내 하상河上에 군사를 주둔하고 강연효를 좌우선봉지휘사左右先鋒指揮使로 삼았다.
강연효가 양 말제가 소인들을 임용하는 것을 보고 나라가 반드시 망할 줄을 알고서 이에 100명의 기병을 데리고 나라로 달아나 장종莊宗조성朝城에서 알현하니, 장종이 어의御衣금대金帶를 풀어 그에게 하사하고 강연효를 박주자사博州刺史 봉일군사捧日軍使 겸남면초토지휘사兼南面招討指揮使에 배수하였다.
장종莊宗이 사람들을 물리고 강연효康延孝에게 나라의 일에 대해 묻자 강연효가 갖추어 말하기를 “말제末帝는 나약한데 조암趙巖은 말제의 사위이고 장한걸張漢傑부가婦家인지라 이들이 모두 권력을 독단하고 있습니다. 단응段凝은 간사한 자로 많은 황금을 바치고 대장大將이 되니 그 아비 때부터의 옛 장수들이 모두 그의 수하가 되었고, 왕언장王彦章은 용맹한 장수인데 장한걸을 보내 그 군대를 감시하여 통제하였습니다. 소인小人들은 나아와 임용되고 충신忠臣용사勇士들은 모두 배척을 당하니, 이는 반드시 패망할 형세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또 양나라의 계획이 어떠한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양나라에 벼슬할 때에 그 의논을 들어보니 중동仲冬을 기점으로 크게 거병하여 동장董璋을 보내 섬주陜州, 괵주虢州, 택주澤州, 노주潞州의 병사를 석회石會로 나가게 하여 태원太原을 공격하고, 곽언위霍彦威를 보내 관서關西, 여주汝州, 낙주洛州의 병사로 형주邢州명주洺州를 노략질하고서 진주鎭州정주定州로 나아가게 하고, 왕언장王彦章을 보내 경사京師금위군禁衛軍으로 운주鄆州를 공격하고 단응을 보내 하상河上의 군사로 폐하陛下와 맞서게 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莊宗이 처음에 강연효康延孝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듣고 기뻐하다가 나라가 대거 침공해 온다는 말을 듣고는 두려워하며 “장차 어떻게 해야 양나라를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강연효가 말하기를 “양나라의 병사兵士는 비록 많지만 나뉘면 남은 병사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청컨대 그들이 나뉘기를 기다려 5천 명의 철기鐵騎를 거느리고 운주鄆州에서 변주汴州로 달려가 생각지도 못한 틈을 타 텅 빈 곳을 공격하면 열흘이 되기도 전에 천하가 평정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장종이 그의 말을 몹시 장하게 여겼다.
후에 동장董璋 등은 비록 출병하지 않았으나 양나라 병사가 모두 황하黃河 가에 주둔한 단응段凝에게 귀속歸屬되어 경사京師에 방비가 없게 되자 장종이 마침내 강연효의 계책을 따라 운주에서 변주로 들어가 무릇 8일 만에 양나라를 멸망시켰다.
강연효는 그 공으로 정주방어사鄭州防禦使에 배수되었고 이소침李紹琛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고, 동광同光 2년(924)에 보의군절도사保義軍節度使로 승진하였다.
동광同光 3년(925)에 나라를 정벌할 때에 강연효康延孝선봉배진참작사先鋒排陣斬斫使로 삼아 봉주鳳州를 격파하고 고진固鎭을 취하고 흥주興州를 항복시켰다.
왕연王衍삼천三泉에서 전투함에 왕연이 패주敗走하여 길백강吉柏江부교浮橋를 끊었는데 강연효가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 나아가 면주綿州를 취하였다.
왕연이 다시 면강綿江부교浮橋를 끊었는데 강연효가 초무사招撫使 이엄李嚴에게 말하기를 “우리 군대가 멀리 천리를 달려와 남의 나라에 들어왔으니 속전速戰하는 것이 유리하다. 왕연이 크게 놀랐을 때를 기회로 삼아 다만 1백 명의 기병으로 녹두관鹿頭關을 통과하면 왕연의 장수들이 지체 없이 우리를 맞이하여 투항할 것이다. 만약 교량을 수리하다 굳이 며칠을 지체하여 왕연에게 관문關門을 닫아 대비할 시간을 준다면 승부를 알 수 없게 된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이엄과 말을 타고 강을 건너니 군사軍士 중에 따라 건넌 자가 1천 명 남짓이었다. 마침내 녹두관으로 들어가 한주漢州를 함락하였다.
주둔한 지 3일 만에 후군後軍이 비로소 이르니, 왕연의 아우 왕종필王宗弼이 과연 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강연효는 한주漢州에 주둔하여 위왕魏王 이계급李繼岌을 기다렸다.
이 평정되자 강연효康延孝의 공이 가장 많았는데 좌상마보군도지휘사左廂馬步軍都指揮使 동장董璋은 지위는 강연효의 아래지만 특별히 곽숭도郭崇韜에게 중용重用되었다.
곽숭도가 군무軍務가 있으면 동장만을 불러 논의하고 강연효에게는 묻지 않았다.
강연효가 크게 노하여 동장을 꾸짖기를 “나는 을 평정한 공이 있거늘 공들은 용렬하게 상종相從하여 도리어 곽공郭公문하門下에 머리를 굽히고 있다. 내가 도장都將이 되었으니 군법軍法으로 공을 참수할 수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동장이 곽숭도에게 호소하니 곽숭도가 동장을 군직軍職에서 해임하고 표주表奏하여 동천절도사東川節度使로 삼았다.
강연효가 더욱 노하여 “나는 시퍼런 창칼을 무릅쓰고 위험한 곳을 공격하여 양천兩川을 평정하였는데, 동장은 무슨 공이 있어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는가.”라고 하고 인하여 곽숭도를 보고 불가함을 말하였다.
곽숭도가 말하기를 “이소침李紹琛이 반란을 일으키려는가. 감히 나의 명을 어기는가.”라고 하자 강연효가 두려워 물러났다.
이듬해에 곽숭도가 죽자 강연효가 동장에게 “공은 어느 문하에 다시 고개를 숙이려는가.”라고 하니 동장이 애걸하여 화를 면하였다.
이계급李繼岌이 회군할 때에 강연효康延孝에게 명하여 1만 2천 명으로 후군後軍이 되게 하였는데, 행군하다 무련武連에 이르러 주우겸朱友謙이 죄 없이 살해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주우겸의 아들 주령덕朱令德수주遂州에 있었는데, 장종莊宗이 사자를 보내 이계급에게 조명詔命을 내려 즉시 주살하게 하였다. 이계급이 강연효를 보내지 않고 동장董璋을 보내니 강연효가 이미 스스로 의심을 품었는데, 동장이 강연효의 군대에 들렀을 때에 또 강연효를 배알拜謁하지 않았다.
그러자 강연효가 크게 노하여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남쪽으로 나라를 평정하고 서쪽으로 을 취한 것은 그 계책이 곽공郭公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성을 공략하고 적을 격파하여 전쟁터를 누비며 공로를 세운 것은 바로 나이다. 지금 곽공이 이미 죽었으니 내가 어찌 살 수 있겠는가. 주우겸은 나와 함께 나라를 배반하고 나라로 귀부歸附한 자이니, 주우겸이 당한 화가 다음에는 나에게 미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연효의 부하部下들은 모두 주우겸의 옛 장수들이므로 주우겸이 멸족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군문軍門에서 하소연하기를 “주공朱公은 죄가 없는데도 일족이 200명이나 주살당하였고 옛 장수들이 왕왕 따라서 죽임을 당하였으니, 우리들은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연효가 마침내 그 무리들을 데리고 검주劍州로부터 으로 되돌아와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삼주제치사三州制置使 등을 자칭自稱하고, 촉인蜀人들에게 급히 격문을 보내니, 수일 내에 병사가 5만 명이 모였다.
이계급이 임환任圜을 보내 7천 명의 기병으로 추격하여 한주漢州에 이르러 맹지상孟知祥과 회합하여 협공하니, 강연효가 전투에서 패하여 사로잡혀 함거檻車에 실려 호송되었다.
임환任圜군중軍中에 술을 마련해 두고 함거檻車를 이끌어 자리 옆에 이르게 하니 맹지상孟知祥이 큰 술잔에 술을 따라 함거檻車 안에서 마시게 하고는 말하기를 “공은 양조梁朝로부터 몸을 빼내 귀순하여 마침내 병권兵權을 얻게 되었으니, 지금 을 평정한 공으로 충분히 부귀富貴를 누릴 수 있을 터인데 어찌 함거檻車에 들어왔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강연효가 말하기를 “곽숭도郭崇韜좌명공신佐命功臣이므로 공로가 제일이고 병사들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양천兩川을 취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죄도 없이 온 집안이 죽임을 당하였으니, 돌아보건대 나와 같은 사람이 어찌 머리를 보존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감히 조정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임환이 동쪽으로 돌아올 때에 강연효의 함거檻車봉상鳳翔에 이르렀는데, 장종莊宗이 환관을 보내 살해하였다.


역주
역주1 康延孝傳 : 康延孝(?~926)는 代北 사람이다. 列傳은 ≪舊五代史≫ 卷74 〈唐書 第50 列傳 第26〉, ≪新五代史≫ 卷44 〈雜傳 第32〉에 각각 실려 있다.
강연효는 梁 末帝가 소인들을 등용하는 것을 보고는 後唐 莊宗에게 歸附하였는데, 양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후당을 공격하자 병사가 없는 틈을 타 양나라 수도로 진격하여 단 8일 만에 梁나라를 멸망시켰다. 후에 蜀을 정벌할 때에도 속전속결을 주장하여 1천 명 남짓으로 漢州를 함락시키는 등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강연효는 郭崇韜가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던 董璋을 東川節度使로 삼아 중용하고, 자신과 함께 양나라를 배반하고 唐나라로 귀부한 朱友謙마저 살해되자 위기를 느껴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李繼岌이 보낸 任圜과 孟知祥의 협공으로 패하여 사로잡혔고 강연효를 태운 檻車가 鳳翔에 도착했을 때 장종이 환관을 보내 살해하였다.
이 열전에서는 강연효가 후당으로 귀부한 뒤 양나라를 평정하고 촉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우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그의 공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곽숭도와의 갈등과 주우겸의 사건을 상세히 서술하여 후당에서도 강연효에게 반란을 일으킬 빌미를 제공하였음을 넌지시 보였다. 이에 茅坤은 史評을 통해 강연효가 시기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주살되었으나 후당이 천하를 통일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여 강연효의 반란을 비판하고 아울러 功臣을 포용하지 못한 후당에게도 책임을 지웠다.
역주2 (樸)[僕] : 저본에는 ‘樸’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僕’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兩川 : 東川과 西川을 말한다. 唐 肅宗 至德 2년에 劍南道에 東川과 西川 두 절도사를 두었던 데서 유래한다.
역주4 檻車 : 죄인을 가두어 호송하거나 맹수를 잡아 나르는 데 쓰는 수레를 말한다.
역주5 佐命 : 古代에 帝王이 천하를 얻으면 자칭 위로 天命에 응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帝王을 보좌하여 創業하는 것을 佐命이라고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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