予始愛之러니 及見世人之歸佛者然後에 知荀卿之說이 繆焉이라
誠使吾民으로 曉然知禮義之爲善이면 則安知不相率而從哉아
佛之說은 熟於人耳하고 入乎其心이 久矣어니와 至於禮義之事하얀 則未嘗見聞이라
今將號於衆하야 曰禁汝之佛하고 而爲吾禮義라하면 則民將駭而走矣리니 莫若爲之以漸하야 使其不知而趣焉이 可也라
蓋患深勢盛이면 則難與敵이니 莫若馴致而去之易也라
今堯舜三代之政
이 其說尙傳
하고 皆在
하니 誠能講而修之
하야 行之以勤
하고 而浸之以漸
하야 使民皆樂而趣焉
하면 則充行乎天下
하야 而佛無所施矣
라
하고 하되 而
하니 當是之時
하야 佛雖不來中國
이나 幾何其不夷狄也
리오
以是而言컨대 王道不明而仁義廢하면 則夷狄之患이 至矣라
方今九州之民이 莫不右袵而冠帶하니 其爲患者는 特佛爾라
其所以勝之之道가 非有甚高難行之說也니 患乎忽而不爲爾라
夫
與乎
朝廷之儀
는 皆天子之大禮也
니 今皆擧而行之
하고 至於所謂蒐狩婚姻喪祭鄕射之禮
하야는 此郡縣有司之事也
니 在乎講明而頒布之爾
라
然非行之以勤
하고 浸之以漸
이면 則不能入於人而成化
니 이라
今之議者가 將曰 佛來千餘歲에 有力者尙無可奈何어늘 何用此迂緩之說爲리오하니
是則以一日之功不速就로 而棄必世之功不爲也니 可不惜哉아
當其始來하야 未見其害라 引而內之러니 今之爲害著矣라 非待先覺之明而後見也라
今佛之盛이 久矣니 乘其窮極之時하야 可以反而變之不難也라
昔三代之爲政이 皆聖人之事業이로되 及其久也하얀 必有弊라
故
하니 就使佛爲聖人
이라도 及其弊也
하얀 猶將救之
어든 況其非聖者乎
아
夫姦邪之士見信於人者는 彼雖小人이나 必有所長하야 以取信이라
蓋其爲說이 亦有可以惑人者하야 使世之君子가 雖見其弊而不思救하니 豈又善惑者歟아
救之
인댄 莫若修其本以勝之
니 捨是而將有爲
면 雖
과 孟軻之辯
과 도 吾見其力未及施
하고 言未及出
하고 計未及行
하야 而先已陷於禍敗矣
니
何則고 患深勢盛하야 難與敵이니 非馴致而爲之면 莫能也라
구양공歐陽公의 〈본론本論〉은 한자韓子(韓愈)의 〈원도原道〉에 비해 한 단계 더 낫다.
옛날 순경자荀卿子의 설에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人性本惡]”라고 하여, 〈성악性惡〉 한 편을 지어 자신의 논리를 견지하였습니다.
제가 처음에는 이를 좋아했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불교佛敎로 귀의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순경荀卿의 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 불법佛法을 배우는 자들은 그 부자父子를 버리고 그 부부夫婦를 끊으니, 사람의 본성에 몹시 어그러지고 또 야금야금 갉아먹는 벌레 같은 폐단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모두 서로 이끌고 불교에 귀의하는 것은 불법에 선善을 설천한다 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예의禮義가 선善임을 환히 알게 하면 서로 이끌고 따르지 않으리라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가르치고 깨우치기를 지극하게 하지 않는 데야 어이하겠습니까.
불교의 설은 사람의 귀에 익숙하고 그 마음에 파고든 지가 오래되었지만, 예의禮義에 대한 일로 말하면 보고 들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장차 대중들에게 호령하여 “너희 불교를 금하고 우리 예의禮義를 행하라.”라고 하면 백성들은 장차 깜짝 놀라 달아날 것이니, 점차적으로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예의禮義에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옳음만 못할 것입니다.
곤鯀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는 막았기 때문에 그 피해가 더욱 사나웠었는데, 우禹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는 인도하자 그 우환이 종식되었습니다.
대체로 우환이 깊고 기세가 치성하면 더불어 맞서기가 어려우니, 차츰차츰 이루어서 제거하는 것이 쉬움만 못할 것입니다.
지금 요순堯舜과 삼대三代의 정사가 그 설이 아직까지 전하고 그 도구가 모두 있으니, 진실로 능히 강구하고 닦아서 부지런히 행하고 점차적으로 적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즐거이 나아가게 하면, 천하에 가득 시행되어 불교가 베풀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사물은 두 개가 동시에 강대할 수 없다.[物莫能兩大]”라고 하였으니, 이는 자연적인 형세입니다.
어찌 굳이 “그 불경佛經을 태우고 그 사찰寺刹을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火其書而廬其居]”라고 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옛날에 융적戎狄과 만이蠻夷가 구주九州 속에 섞여 살았는데, 이른바 ‘서융徐戎’과 ‘백적白狄’, ‘형만荊蠻’과 ‘회이淮夷’ 같은 무리가 이들입니다.
삼대三代가 쇠퇴해진 뒤 이와 같은 무리들이 나란히 중국을 침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진秦나라는 서융西戎으로서 종주宗周를 점거하고, 오吳나라와 초楚나라는 모두 왕王이라 참칭僭稱하였습니다.
《춘추春秋》에 “증자鄫子를 제물祭物로 썼다.”라고 쓰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천伊川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제사 지내는 자를 보았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중니仲尼 또한 옷깃을 왼편으로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니, 이때를 당하여 불교가 비록 중국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 이적夷狄이 아닌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를 가지고 말해보면, 왕도王道가 밝지 않아 인의仁義가 없어지면 이적夷狄의 우환이 이르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지어 중국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천시한 뒤에 왕도王道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현재 구주九州의 백성들은 모두 옷깃을 오른편으로 하고 관대冠帶를 착용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 우환이 되는 것은 단지 불교일 뿐입니다.
이를 이기는 방도가 몹시 고원하여 행하기 어려운 설이 있는 것이 아니니, 소홀히 여겨 행하지 않는 것이 걱정일 따름입니다.
천지天地의 교사郊祀와 종묘宗廟ㆍ社稷의 제사와 조정朝廷의 의식은 모두 천자天子의 중대한 예禮이니 지금 모두 이를 거행하고, 이른바 수수蒐狩ㆍ婚姻ㆍ喪祭ㆍ鄕射 같은 예禮로 말하면 이는 군현郡縣의 유사有司의 일이니 강구하여 밝히고 반포하는 데 달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행하고 점차적으로 적시지 아니하면 사람에게 들어가 교화敎化를 이루지 못하니, 예로부터 왕자王者의 정사는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백성들이 인仁해지는 법입니다.
오늘날 논의하는 자가 장차 “불교가 들어온 지 천여 년 동안 힘 있는 자도 오히려 어떻게 하지 못하였는데, 이렇듯 오활하고 완만한 설을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할 것인데,
이는 하루 안에 빨리 공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나야 공을 이루는 일을 버리고 하지 않는 것이니,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공자孔子께서 용俑을 만든 자는 불인不仁하다고 탄식하였으니, 이는 그 두서를 열어 순장殉葬에 사용하는 데 이를까 탄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상佛像을 만든 자는 용俑을 만든 자보다 오히려 심하지 않겠습니까.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에는 그 폐해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이끌어 받아들였는데, 오늘날에는 폐해가 환히 드러났으니, 선각先覺의 밝은 식견을 기다린 뒤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태연자약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무릇 사물은 지극하면 돌아오고 운수는 궁하면 변하니,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지금 불교가 성행한 지가 오래이니, 그 궁하고 지극한 때를 틈타 돌리고 변화시킬 수 있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옛날 삼대三代의 정사는 모두 성인聖人의 사업이었는데, 그 오래됨에 미쳐서는 반드시 폐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삼대三代가 모두 그 질質과 문文을 바꾸는 방법으로 바로잡았으니, 가령 부처가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 폐단에 미쳐서는 오히려 장차 바로잡아야 하는데, 더구나 성인이 아닌 자임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무릇 간사한 선비가 사람에게 믿음을 받는 것은 저가 비록 소인小人이지만 반드시 장점이 있어서 믿음을 받습니다.
이 때문에 옛날의 인군人君이 여기에 미혹되어 혼란과 멸망에 이르면서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불법佛法이 간악하고도 사특하다 할 만합니다.
그 설이 또한 사람을 미혹시킬 수 있는 점이 있어서 세상의 군자가 그 폐단을 보고서도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못하니, 어찌 또 잘 미혹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또한 바로잡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인 것입니까.
이를 바로잡자면 그 근본을 닦아 이기는 것이 가장 좋으니, 이를 제쳐놓고 다스리고자 하면 비록 맹분孟賁ㆍ夏育의 용맹과 맹가孟軻의 변설과 태공太公의 은밀한 계모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힘을 미처 쓰지도 못하고 말을 미처 꺼내지도 못하고 계모를 미처 행하지도 못한 채, 먼저 이미 화란과 패망에 빠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우환이 깊고 기세가 치성하여 더불어 맞서기 어렵기 때문이니, 차츰차츰 이루어 다스리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근본을 닦아서 이겨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