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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2)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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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歐公本論 較之韓子原道 差勝一層이라
予始愛之러니 及見世人之歸佛者然後 知荀卿之說 繆焉이라
甚矣
人之性善也
然而民皆相率而歸焉者 以佛有爲善之說故也
嗚呼
誠使吾民으로 曉然知禮義之爲善이면 則安知不相率而從哉
奈何敎之諭之之不至也
佛之說 熟於人耳하고 入乎其心 久矣어니와 至於禮義之事하얀 則未嘗見聞이라
今將號於衆하야 曰禁汝之佛하고 而爲吾禮義라하면 則民將駭而走矣리니 莫若爲之以漸하야 使其不知而趣焉 可也
이러니 及禹之治水也하얀 導之則其患息이라
蓋患深勢盛이면 則難與敵이니 莫若馴致而去之易也
今堯舜三代之政 其說尙傳하고 皆在하니 誠能講而修之하야 行之以勤하고 而浸之以漸하야 使民皆樂而趣焉하면 則充行乎天下하야 而佛無所施矣
라하니 自然之勢也
奚必曰 리오
昔者 戎狄蠻夷 雜居九州之間하니 是也
三代旣衰 若此之類 竝侵於中國이라
하고 吳楚之國 皆僭稱王이라
하고 하되하니 當是之時하야 佛雖不來中國이나 幾何其不夷狄也리오
以是而言컨대 王道不明而仁義廢하면 則夷狄之患 至矣
及孔子作春秋하야 然後 王道復明이라
方今九州之民 莫不右袵而冠帶하니 其爲患者 特佛爾
其所以勝之之道 非有甚高難行之說也 患乎忽而不爲爾
與乎朝廷之儀 皆天子之大禮也 今皆擧而行之하고 至於所謂蒐狩婚姻喪祭鄕射之禮하야는 此郡縣有司之事也 在乎講明而頒布之爾
然非行之以勤하고 浸之以漸이면 則不能入於人而成化 이라
今之議者 將曰 佛來千餘歲 有力者尙無可奈何어늘 何用此迂緩之說爲리오하니
是則以一日之功不速就 而棄必世之功不爲也 可不惜哉
하시니 蓋歎乎啓其漸而至於用殉也
然則爲佛者不猶甚於作俑乎
當其始來하야 未見其害 引而內之러니 今之爲害著矣 非待先覺之明而後見也
然而恬然不以爲怪者 何哉
夫物極則反하고 數窮則變 此理之常也
今佛之盛 久矣 乘其窮極之時하야 可以反而變之不難也
昔三代之爲政 皆聖人之事業이로되 及其久也하얀 必有弊
하니 就使佛爲聖人이라도 及其弊也하얀 猶將救之어든 況其非聖者乎
夫姦邪之士見信於人者 彼雖小人이나 必有所長하야 以取信이라
是以 古之人君惑之하야 至於亂亡而不悟
今佛之法 可謂姦且邪矣
蓋其爲說 亦有可以惑人者하야 使世之君子 雖見其弊而不思救하니 豈又善惑者歟
抑亦不得其救之之術也
救之인댄 莫若修其本以勝之 捨是而將有爲 孟軻之辯 吾見其力未及施하고 言未及出하고 計未及行하야 而先已陷於禍敗矣
何則 患深勢盛하야 難與敵이니 非馴致而爲之 莫能也
故曰修其本以勝之라하야
作本論하노라


03. 에 대한
구양공歐陽公의 〈본론本論〉은 한자韓子(韓愈)의 〈원도原道〉에 비해 한 단계 더 낫다.
옛날 순경자荀卿子의 설에 “사람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人性本惡]”라고 하여, 〈성악性惡〉 한 편을 지어 자신의 논리를 견지하였습니다.
제가 처음에는 이를 좋아했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불교佛敎로 귀의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순경荀卿의 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선함이여!
불법佛法을 배우는 자들은 그 부자父子를 버리고 그 부부夫婦를 끊으니, 사람의 본성에 몹시 어그러지고 또 야금야금 갉아먹는 벌레 같은 폐단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모두 서로 이끌고 불교에 귀의하는 것은 불법에 을 설천한다 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
진실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예의禮義임을 환히 알게 하면 서로 이끌고 따르지 않으리라 어떻게 장담하겠습니까.
가르치고 깨우치기를 지극하게 하지 않는 데야 어이하겠습니까.
불교의 설은 사람의 귀에 익숙하고 그 마음에 파고든 지가 오래되었지만, 예의禮義에 대한 일로 말하면 보고 들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장차 대중들에게 호령하여 “너희 불교를 금하고 우리 예의禮義를 행하라.”라고 하면 백성들은 장차 깜짝 놀라 달아날 것이니, 점차적으로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예의禮義에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옳음만 못할 것입니다.
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는 막았기 때문에 그 피해가 더욱 사나웠었는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는 인도하자 그 우환이 종식되었습니다.
대체로 우환이 깊고 기세가 치성하면 더불어 맞서기가 어려우니, 차츰차츰 이루어서 제거하는 것이 쉬움만 못할 것입니다.
지금 요순堯舜삼대三代의 정사가 그 설이 아직까지 전하고 그 도구가 모두 있으니, 진실로 능히 강구하고 닦아서 부지런히 행하고 점차적으로 적시어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즐거이 나아가게 하면, 천하에 가득 시행되어 불교가 베풀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사물은 두 개가 동시에 강대할 수 없다.[物莫能兩大]”라고 하였으니, 이는 자연적인 형세입니다.
어찌 굳이 “그 불경佛經을 태우고 그 사찰寺刹을 집으로 만들어야 한다.[火其書而廬其居]”라고 할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옛날에 융적戎狄만이蠻夷구주九州 속에 섞여 살았는데, 이른바 ‘서융徐戎’과 ‘백적白狄’, ‘형만荊蠻’과 ‘회이淮夷’ 같은 무리가 이들입니다.
삼대三代가 쇠퇴해진 뒤 이와 같은 무리들이 나란히 중국을 침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서융西戎으로서 종주宗周를 점거하고, 나라와 나라는 모두 이라 참칭僭稱하였습니다.
춘추春秋》에 “증자鄫子제물祭物로 썼다.”라고 쓰고,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천伊川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제사 지내는 자를 보았다.”라고 기록하였는데, 중니仲尼 또한 옷깃을 왼편으로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니, 이때를 당하여 불교가 비록 중국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그 이적夷狄이 아닌 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를 가지고 말해보면, 왕도王道가 밝지 않아 인의仁義가 없어지면 이적夷狄의 우환이 이르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 《춘추春秋》를 지어 중국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천시한 뒤에 왕도王道가 다시 밝아졌습니다.
현재 구주九州의 백성들은 모두 옷깃을 오른편으로 하고 관대冠帶를 착용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 우환이 되는 것은 단지 불교일 뿐입니다.
이를 이기는 방도가 몹시 고원하여 행하기 어려운 설이 있는 것이 아니니, 소홀히 여겨 행하지 않는 것이 걱정일 따름입니다.
천지天地교사郊祀종묘宗廟ㆍ社稷의 제사와 조정朝廷의 의식은 모두 천자天子의 중대한 이니 지금 모두 이를 거행하고, 이른바 수수蒐狩ㆍ婚姻ㆍ喪祭ㆍ鄕射 같은 로 말하면 이는 군현郡縣유사有司의 일이니 강구하여 밝히고 반포하는 데 달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행하고 점차적으로 적시지 아니하면 사람에게 들어가 교화敎化를 이루지 못하니, 예로부터 왕자王者의 정사는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백성들이 해지는 법입니다.
오늘날 논의하는 자가 장차 “불교가 들어온 지 천여 년 동안 힘 있는 자도 오히려 어떻게 하지 못하였는데, 이렇듯 오활하고 완만한 설을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할 것인데,
이는 하루 안에 빨리 공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나야 공을 이루는 일을 버리고 하지 않는 것이니,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공자孔子께서 을 만든 자는 불인不仁하다고 탄식하였으니, 이는 그 두서를 열어 순장殉葬에 사용하는 데 이를까 탄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상佛像을 만든 자는 을 만든 자보다 오히려 심하지 않겠습니까.
불교가 처음 들어올 때에는 그 폐해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이끌어 받아들였는데, 오늘날에는 폐해가 환히 드러났으니, 선각先覺의 밝은 식견을 기다린 뒤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태연자약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무릇 사물은 지극하면 돌아오고 운수는 궁하면 변하니,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지금 불교가 성행한 지가 오래이니, 그 궁하고 지극한 때를 틈타 돌리고 변화시킬 수 있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옛날 삼대三代의 정사는 모두 성인聖人의 사업이었는데, 그 오래됨에 미쳐서는 반드시 폐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삼대三代가 모두 그 을 바꾸는 방법으로 바로잡았으니, 가령 부처가 성인이라 하더라도 그 폐단에 미쳐서는 오히려 장차 바로잡아야 하는데, 더구나 성인이 아닌 자임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무릇 간사한 선비가 사람에게 믿음을 받는 것은 저가 비록 소인小人이지만 반드시 장점이 있어서 믿음을 받습니다.
이 때문에 옛날의 인군人君이 여기에 미혹되어 혼란과 멸망에 이르면서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불법佛法이 간악하고도 사특하다 할 만합니다.
그 설이 또한 사람을 미혹시킬 수 있는 점이 있어서 세상의 군자가 그 폐단을 보고서도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못하니, 어찌 또 잘 미혹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또한 바로잡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인 것입니까.
이를 바로잡자면 그 근본을 닦아 이기는 것이 가장 좋으니, 이를 제쳐놓고 다스리고자 하면 비록 맹분孟賁ㆍ夏育의 용맹과 맹가孟軻의 변설과 태공太公의 은밀한 계모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힘을 미처 쓰지도 못하고 말을 미처 꺼내지도 못하고 계모를 미처 행하지도 못한 채, 먼저 이미 화란과 패망에 빠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우환이 깊고 기세가 치성하여 더불어 맞서기 어렵기 때문이니, 차츰차츰 이루어 다스리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근본을 닦아서 이겨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론本論〉을 짓습니다.


역주
역주1 本論下 : 이 글은 慶曆 2년(1042)에 지은 것이다. 위의 두 편과 마찬가지로 詔令에 應對하여 지은 글인데, 中篇의 姉妹篇에 해당한다.
역주2 昔荀卿子之說……以持其論 : 荀卿子는 전국시대의 儒家 사상가로 趙나라 사람이며, 이름은 況이고, 자는 卿이다. ‘性惡說’을 主唱하였는데, 《荀子》 〈性惡〉에 “사람의 본성은 악하니, 그 선은 僞善이다.[人之性惡 其善者僞也]”라고 하였다.
역주3 彼爲佛者……甚戾 : 韓愈가 〈原道〉에서 불교를 논하여 “반드시 너의 君臣을 버리고 너의 父子도 버리며, 너의 서로 살려주고 서로 길러주는 道를 금하여 그 이른바 ‘淸淨’과 ‘寂滅’을 추구한다.[必棄而君臣 去而父子 禁而相生相養之道 以求其所謂淸淨寂滅者]”라고 하고, 또 “그런데 지금은 그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면서 천하와 국가를 도외시하고 天倫을 없애버려, 자식이면서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으며, 신하이면서 그 군주를 군주로 여기지 않으며, 백성이면서 그 일을 일삼지 않는다.[今也 欲治其心而外天下國家 滅其天常 子焉而不父其父 臣焉而不君其君 民焉而不事其事]”라고 하였는데, 歐陽脩의 이 말은 여기에 근본한다.
역주4 : 두
역주5 鯀(곤)之治水也 障之故其害益暴 : 鯀은 四凶 중 한 사람으로, 禹임금의 아버지이다. 堯임금 때 큰 홍수가 나서 黃河가 범람하자, 堯임금이 신하들의 추천으로 鯀을 崇伯으로 봉하여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다. 鯀은 제방을 쌓아 막는 방법으로 홍수를 다스렸으나 결과적으로 홍수의 피해가 더욱 커졌으며, 9년이 되도록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결국은 羽山에서 舜임금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書經 虞書 堯典》
역주6 其具 : 政令을 가리킨다.
역주7 傳曰 物莫能兩大 : 《春秋左氏傳》 莊公 22년 조에 “사물은 두 개가 동시에 强大할 수 없는 법이니, 陳나라가 쇠하여야 이 사람의 후손이 창성할 것이다.[物莫能兩大 陳衰 此其昌乎]”라고 하였다.
역주8 火其書而廬其居 : 韓愈의 〈原道〉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은가? 佛‧老를 막지 않으면 우리의 道가 유행하지 못하고, 佛‧老를 저지하지 않으면 우리의 道가 행해지지 못한다. 따라서 道士와 僧侶를 일반인으로 만들고, 佛經과 道經을 불태우고, 寺刹과 道觀을 집으로 만들어 先王의 道를 밝혀 그들을 인도한다면,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무의탁자, 廢疾이 있는 자들이 봉양을 받게 될 것이니, 이렇게 하면 또한 거의 괜찮아질 것이다.[然則如之何而可也 曰不塞不流 不止不行 人其人 火其書 廬其居 明先王之道以道之 鰥寡孤獨廢疾者有養也 其亦庶乎其可也]”라고 하였다.
역주9 所謂徐戎白狄荊蠻淮夷之類 : 徐戎은 周代에 徐州 지방에 거주하던 부족으로, 東夷 가운데 가장 강대하였다. 白狄은 春秋時代 북방에 거주하던 부족으로, 흰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입었기 때문에 白狄이라 한다. 荊蠻은 남방 荊楚 지방의 오랑캐로, 楚나라를 가리킨다. 淮夷는 西周 때 淮水 유역에 거주하던 부족이다.
역주10 秦以西戎 據宗周 : 중국 서쪽의 戎族인 秦나라가 西周의 故都를 점거하였다는 말이다. 宗周는 周代의 王都를 뜻하는데, 周나라는 諸侯國의 宗主國이었으므로, 인하여 周代의 王都가 있는 곳을 宗周라고 일컫는다.
역주11 春秋書用鄫子 : 《春秋》 僖公 19년 조에 “여름 6월에 宋公이 曹人ㆍ邾人과 曹나라 남방에서 會盟하였다. 鄫子가 會盟하기 위해 邾나라에 가니, 己酉日에 邾人이 鄫子를 잡아 祭物로 썼다.[夏 六月 宋公曹人邾婁人 盟于曹南 鄫子會盟于邾 己酉 邾人執鄫子 用之]”라고 하였다. 鄫子는 鄫나라의 군주이다. 孔子가 《春秋》에서 이렇게 쓴 것은 宋과 邾 兩國이 이미 오랑캐로 변한 것을 책망하려는 의도였는데, 여기서는 오랑캐의 습속에 사람을 가지고 祭祀의 犧牲으로 쓴 사실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역주12 傳記被髮於伊川 : 《春秋左氏傳》 僖公 22년 조에 “이전에 平王이 東遷할 때에 辛有가 伊川에 갔다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야외에서 제사를 지내는 자를 보고 말하기를 ‘백 년이 되지 않아 이곳은 戎이 될 것이다. 周나라의 예가 먼저 없어졌다.’ 하였다.[初 平王之東遷也 辛有適伊川 見被髮而祭於野者 曰不及百年 此其戎乎 其禮先亡矣]”라고 하였다.
역주13 仲尼亦以不左袵爲幸 : 《論語》 〈憲問〉에 “管仲이 桓公을 도와 諸侯의 霸者가 되어 한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管仲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管仲相桓公霸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 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袵矣]”라고 하였다.
역주14 尊中國 而賤夷狄 : 本集에는 ‘孟子가 楊朱ㆍ墨翟의 설을 막은[孟子距楊墨之說]’으로 되어 있다.
역주15 郊天祀地 : 郊外에서 天地에 제사 지내는 일로, 南郊에서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北郊에서는 땅에 제사 지낸다. 郊는 大祀를 말하고, 祀는 群祀를 말한다.
역주16 宗廟社稷 : 宗廟는 天子와 諸侯가 선조에게 제사 지내는 廟宇이고, 社稷은 土神과 穀神이다.
역주17 自古王者之政 必世而後仁 : 《論語》 〈子路〉에 “만일 王者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백성들이 仁해질 것이다.[如有王者 必世而後仁]”라고 하였다. 1世는 30년이다.
역주18 孔子歎爲俑者不仁 : 《孟子》 〈梁惠王 上〉에 “仲尼께서 말씀하시기를 ‘처음 俑을 만든 자는 그 後孫이 없을 것이다.’ 하셨으니, 이는 사람의 형상을 본떠서 장례에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朱子의 集註에 “俑은 葬事에 쓰는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 사람이다. 옛날 장사 지내는 자들은 풀단을 묶어 사람을 만들어서 喪轝를 호위하게 하고는 芻靈이라 일컬었는데, 대략 人形과 같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中古에 俑으로 바꾸었는데, 얼굴과 눈, 움직임까지 있어서 사람과 너무도 유사하였다. 그러므로 孔子께서 그 不仁함을 미워하여 이것을 처음 만든 자는 반드시 後孫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俑 從葬木偶人也 古之葬者 束草爲人 以爲從衛 謂之芻靈 略似人形而已 中古 易之以俑 則有面目機發 而太似人矣 故孔子惡其不仁 而言其必無後也]”라고 하였다.
역주19 三代之術 皆變其質文而相救 : 夏ㆍ商ㆍ周 三代의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文彩를 사용하여 前代의 質朴이 만들어낸 폐단을 바로잡기도 하고, 質朴을 사용하여 文彩가 가져온 병폐를 만회하기도 하였다는 말이다. 《論語》 〈爲政〉에 “殷나라는 夏나라의 禮를 因襲하였으니 損益한 것을 알 수 있으며, 周나라는 殷나라의 禮를 因襲하였으니 損益한 것을 알 수 있다. 혹시라도 周나라를 잇는 자가 있다면 비록 百世 뒤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殷因於夏禮 所損益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 可知也]”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朱子의 集註에 “馬氏가 말하기를 ‘因襲한 것은 三綱과 五常을 이르고, 損益한 것은 文‧質과 三統을 이른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三綱은,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되고, 아비는 자식의 벼리가 되고,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됨을 이른다. 五常은 仁‧義ㆍ禮‧智‧信을 이른다. 文‧質은 夏나라는 忠을 숭상하고, 商나라는 質을 숭상하고, 周나라는 文을 숭상한 것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역주20 賁育之勇 : 賁育은 戰國時代 齊나라의 勇士인 孟賁과 周나라의 力士인 夏育을 말한다. 孟賁은 맨손으로 쇠뿔을 뽑았다고 하고, 夏育은 1,000鈞의 무게를 들어 올렸다고 한다.
역주21 太公之陰謀 : 太公은 太公望으로, 姜尙 또는 呂尙이라고도 한다. 周 文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渭水 가에서 만나 太師로 삼았는데, 文王의 아들 武王을 도와 商나라를 멸하고 周의 천하를 세웠다. 陰謀는 은밀한 計謀를 뜻한다. 太公이 武王을 도와 商紂를 멸할 때 기묘한 계책을 많이 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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