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
에 曰
이라하고 又曰
이라하니 正者
는 所以正天下之不正也
요 統者
는 所以合天下之不一也
니
堯舜之相傳과 三代之相代에 或以至公하고 或以大義하야 皆得天下之正하야 合天下於一이라
是以로 君子不論也니 其帝王之理得而始終之分明故也라
由是
로 有居其正而不能合天下於一者
하니 가 是也
요
有合天下於一而不得居其正者
하니 前世謂秦爲
이 是也
라
自漢而下로 至于西晉하고 又推而下之하야 爲宋齊梁陳하고 自唐而上하야 至于後魏하고 又推而上之면 則爲夷狄이니 其帝王之理舛而始終之際不明이라
自周之亡
으로 迄于
히 實千有二百一十六年之間
에 或理或亂
하고 或取或傳
하고 或分或合
하야 其理不能一槪
라
大抵其可疑之際有三하니 周秦之際也요 東晉後魏之際也요 五代之際也라
秦親得周而一天下하야 其迹無異禹湯이로되 而論者黜之하니 其可疑者一也요
以東晉承西晉則無終하며 以隋承後魏則無始하니 其可疑者二也요
五代之所以得國者雖異나 然同歸於賊亂也어늘 而前世議者獨以梁爲僞하니 其可疑者三也라
堯舜三代之始終은 較然著乎萬世而不疑하니 固不待論而明也어니와 後世之有天下者는 帝王之理或舛하고 而始終之際不明하니 則不可以不疑라
然而論者衆矣라 其是非予奪에 所持者各異하야 使後世莫知夫所從者는 何哉오
自西晉之滅로 而南爲東晉宋齊梁陳이요 北爲後魏北齊後周隋라
私東晉者는 曰 隋得陳然後天下一이라하야 則推其統曰 晉宋齊梁陳隋라하고
私後魏者曰 統必有所受라하야 則推其統曰 唐受之隋하고 隋受之後周하고 後周受之後魏라하고
至其甚相戾也하얀 則爲南史者는 詆北曰虜라하고 爲北史者는 詆南曰夷라하니 此自私之偏說也라
自古王者之興에 必有盛德以受天命하야 或其功澤이 被于生民하고 或累世積漸하야 而成王業하니 豈偏名於一德哉아
至於湯武之起하얀 所以救弊拯民이 蓋有不得已者로되
而曰 五行之運이 有休王하야 一以彼衰하고 一以此勝이라하니
此曆官術家之事요 而謂帝王之興이 必乘五運者는 繆妄之說也니 不知其出於何人이라
蓋自孔子歿로 周益衰亂하야 先王之道不明하야 而人人異學하야 肆其怪奇放蕩之說일새 後之學者가 不能卓然奮力而誅絶之하고 反從而附益其說하야 以相結固라
故自秦推
하야 하니 由漢以來
로 有國者未始不由於此說
이라
惟天下之至公大義라야 可以袪人之疑하야 而使人不得遂其私라
夫心無所私하야 疑得其決이면 則是非之異論息而正統明하니 所謂非聖人之說者를 可置而勿論也라
전傳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정正’을 준수하는 것을 대단하게 여긴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왕王이라고 한 것은 ‘통統’을 하나로 하는 것을 대단하게 여겨서이다.”라고 하였으니, ‘정正’이라는 것은 천하의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는 것이요, ‘통統’이라는 것은 천하의 통일되지 않은 것을 합치는 것이다.
바르지 못하고 통일되지 않은 것으로 말미암은 연후에 정통의 논의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요순堯舜이 서로 전위傳位할 때와 삼대三代가 서로 교체할 적에는 혹은 지공至公으로써 하고 혹은 대의大義로써 하여 모두 천하의 ‘정正’을 얻어서 천하를 하나로 합쳤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들이 논하지 않았던 것이니, 그 제帝와 왕王의 이치가 정당하고 시始와 종終의 구분이 분명하였기 때문이었다.
후세의 어지러운 시기에 이르러서는 참칭僭稱하는 일이 일어나고 자리를 훔치는 행위가 생겨났다.
그로 말미암아 그 ‘정正’을 준수하여도 천하를 하나로 합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으니, 주周 평왕平王 시대에 오吳나라, 서徐나라가 있었던 것이 그것이다.
천하를 하나로 합쳤으나 그 ‘정正’을 준수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니, 전세前世에 “진秦나라는 윤閏이다.”라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정통正統의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한漢나라에서부터 내려와 서진西晉에 이르고, 또 미루어 내려오면 송宋나라, 제齊나라, 양梁나라, 진陳나라가 되고, 당唐나라에서 올라가 후위後魏에 이르고, 또 미루어 올라가면 이적夷狄이 되니, 그 제帝와 왕王의 이치가 어긋나고, 시始와 종終의 경계가 분명하지 못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학자들이 그것을 의심하였고, 시비是非가 또 공정하지 못함이 많게 되었다.
주周나라가 망한 이후로 현덕顯德에 이르기까지 실로 1,216년 동안에 다스려지기도 하고 어지러워지기도 하였으며, 탈취하기도 하고 전하기도 하였으며, 분리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여, 그 이치를 한 가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대개 의심할 만한 경계는 세 가지가 있으니,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의 경계, 동진東晉과 후위後魏의 경계, 오대五代의 경계이다.
진秦나라가 친히 주周나라를 차지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그 자취가 우禹임금이나 탕湯임금과 다를 것이 없는데도 논자論者들은 그를 제외시키니, 그 의심할 만한 것의 첫 번째이다.
동진東晉이 서진西晉을 계승하였으면 종終이 없는 것이고, 수隋가 후위後魏를 계승하였으면 시始가 없는 것이니, 그 의심할 만한 것의 두 번째이다.
오대五代가 나라를 차지한 방식이 비록 다르지만 똑같이 적란賊亂으로 귀결되는데도, 전세前世의 논자論者들이 유독 양梁나라만을 위국僞國이라고 하였으니, 그 의심할 만한 것의 세 번째이다.
요堯, 순舜, 삼대三代의 시始와 종終은 분명하게 만세萬世에 드러나 의심스럽지 않으니 본디 논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지만, 후세에 천하를 소유한 자들은 제帝와 왕王의 이치가 더러 어긋나고 시始와 종終의 경계가 분명하지 못하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바르지 못하고 통일되지 않은 것으로 말미암은 연후에 정통正統의 논의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논자論者들이 많고 그 시비是非‧여탈予奪에 있어서 견지하는 바가 각각 달라서 후세로 하여금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알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그 의심할 만한 경계에 또 자신의 사심私心을 개입시키고 성인聖人의 도를 비난하는 학문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서진西晉이 멸망한 뒤로 남쪽은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이 되고, 북쪽은 후위後魏, 북제北齊, 후주後周, 수隋가 되었다.
동진東晉을 편드는 자는 “수隋나라가 진陳나라를 차지한 뒤에야 천하가 통일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통統을 미루어 “진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수隋”라고 하고,
후위後魏를 편드는 자는 “통統은 반드시 전해 받는 바가 있어야 한다.”라고 하여 그 통統을 미루어 “당唐나라가 수隋나라에서 전해 받았고, 수隋나라가 후주後周에서 전해 받았고, 후주後周가 후위後魏에서 전해 받았다.”라고 하였다.
서로 심하게 대립하기에 이르면 남방南方을 위해 역사를 기술하는 자는 북방北方을 욕하여 ‘노虜’라고 하고, 북방北方을 위해 역사를 기술하는 자는 남방南方을 욕하여 ‘이夷’라고 하니, 이는 개인의 편중된 설일 뿐이다.
옛날부터 왕자王者가 흥할 때에는 반드시 성덕盛德을 갖추어 천명天命을 받았으므로 혹은 그 공택功澤이 생민生民들에게 입혀지기도 하고, 혹은 누대에 걸쳐 누적하여 왕업王業을 이루었으니, 어찌 하나의 덕을 가지고 편중하여 이름을 붙였겠는가?
탕湯‧무武가 일어나기에 이르러서는 폐단을 해소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대개 부득이한 면이 있었는데도,
“오행五行의 운행에 쇠衰하고 성盛함이 있어서, 한 번은 저처럼 쇠衰하고, 한 번은 이처럼 승勝하였다.”라고 하니,
이는 역관曆官이나 술가術家의 일이요, 제왕帝王의 흥함이 반드시 오운五運을 탄다는 것은 무망繆妄한 설이니, 그것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대개 공자孔子가 죽은 뒤로부터 주周나라가 더욱 쇠란衰亂하여 선왕先王의 도道가 밝아지지 못하고, 사람마다 학문을 달리하여, 그 괴기怪奇하고 방탕放蕩한 설을 방자하게 설파했기 때문에, 훗날의 학자學者가 우뚝하게 힘을 쏟아 공격하여 단절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추종하면서 그 설에 덧보태어 서로 결탁하였다.
그러므로 진秦나라부터는 오승五勝을 미루어 스스로 수덕水德을 가지고 이름 붙이니, 한漢나라 이래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처음에 이 설說에서 말미암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이른바 “성인의 도를 비난하는 학문에 빠져 있다.”라는 것이다.
오로지 천하의 지공至公‧대의大義라야 남의 의혹을 없애어서 남들로 하여금 자기 사심私心대로 할 수 없게 할 수 있다.
대개 마음에 편드는 바가 없어서 의심나는 것이 해결되면 시비是非의 이론異論이 종식되고 정통正統이 분명해질 것이니, 이른바 ‘성인聖人의 설을 비난하는’ 자들은 놓아두고 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