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孔子歿而周衰로 接乎戰國하고 秦遂焚書하니 六經이 於是中絶이라가
然後諸儒因得措其異說於其間
하니 如
는 怪妄之尤甚者
라
余嘗哀夫學者가 知守經以篤信하고 而不知僞說之亂經也라
屢爲說以黜之
나 而學者溺其久習之傳
하야 反駭然非予以一人之見
으로 決千歲不可考之是非
하야 欲奪衆人之所
하야 徒自守而世莫之從也
로라
余以謂自孔子沒로 至今二千歲之間에 有一歐陽脩者爲是說矣니 又二千歲에 焉知無一人焉與脩同其說也아
然則同者至于三하면 則後之人은 不待千歲而有也리니 同予說者旣衆이면 則衆人之所溺者를 可勝而奪也리라
其將與天地로 無終極而存也니 以無終極으로 視數千歲면 於其間頃刻爾니
其論
하야 以爲
는 聖人之法爾
니 非有龜書出洛之事也
라하니
然則擧今之世에 固有不相求而同者矣리니 亦何待於數千歲乎아
而偁尤好古하고 能文章하며 其德行聞于鄕里하야 一時賢士皆與之遊러니 以其不達而早死라 故不顯于世라
嗚呼라 知所待者는 必有時而獲이요 知所蓄者는 必有時而施니 苟有志焉이면 不必有求而後合이라
식견識見과 운절韻折이 모두 장심匠心에 속한다.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나고 주周나라가 쇠퇴한 뒤로 전국시대로 이어졌고 진秦나라가 마침내 분서焚書를 하였으니, 육경六經의 전함이 여기에서 중도에 끊어졌다.
그러다가 한漢나라가 흥기하고 오래 지난 뒤에 육경六經이 나왔으니, 산란하고 마멸되어 이미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였다.
그런 뒤에 학자들이 이로 인해 육경六經에 이설異說들을 섞어 넣었으니,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같은 것이 괴망한 것 가운데 더욱 심한 것들이다.
나는 일찍이 저 학자들이 경전經傳의 뜻을 지켜 독실히 믿을 줄만 알고 위설僞說이 경전經傳을 어지럽힌다는 점을 모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누차 글을 지어 지척하였지만 학자들은 오랫동안 익혀왔던 것에 미혹되어, 도리어 깜짝 놀라며 한 사람의 개인적인 소견으로 천고에 고증할 수 없었던 시비를 결단하여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를 빼앗고자 한갓 자신의 것을 지킬 뿐 세상에서 의견을 따라주는 사람이 없다고 나를 비난하였다.
나는 생각건대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로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한 명의 구양수歐陽脩가 이런 말을 하였으니, 또 2천 년 뒤에 나와 같은 말을 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또 2천 년 뒤에 장차 다시 한 사람이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세 명이 되면 후세의 사람은 천 년을 기다리지 않고도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게 될 것이니, 나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이미 많아지면 사람들의 미혹된 바를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장차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게 보존될 책이니 무궁하다는 측면에서 수천 년을 보면 잠깐 사이일 뿐이다.
따라서 내가 먼 훗날까지 나 같은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고, 급급하게 금세今世에 그런 사람을 구하는 것은 아니다.
형산인衡山人인 요의廖倚는 나와 종유한 지 30년이 되었다.
이윽고 《주릉편朱陵編》이라고 부르는 그의 형 요칭廖偁의 유문遺文 100여 편을 꺼내놓았는데,
그 책에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대해 논하여 ‘구주九疇는 성인의 법일 뿐이니, 등에 글씨가 새겨진 신귀神龜가 낙수洛水에서 나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제야 천 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금세今世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내가 후세를 기다린 것은 나의 말로 인하여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한 것이었다.
요칭廖偁 같은 사람은 일찍이 나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으니 아마도 뜻이 부합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상에 서로 구하지 않아도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니 또한 어찌 수천 년을 기다리겠는가.
요씨廖氏는 형산衡山에 거주하며 대대로 시詩를 잘 짓는 것으로 호남湖南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리고 요칭廖偁은 더욱 옛 것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덕행德行이 향리鄕里에 알려져 당시의 어진 선비들이 모두 그와 종유하였는데, 현달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기 때문에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때가 되면 얻고, 온축할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때가 되면 시행되니, 만일 뜻이 있다면 반드시 그런 사람을 찾은 뒤에 만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요칭廖偁과 서로 구하지 않았지만 두 마음이 합치됨을 기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