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歲於洛陽
에 得在
州時所寄書
하야 卒然不能卽報
하고 遂以及今
이라
脩少與時人하야 相接尤寡로되 而譽者無日不聞하니 若幸使盡識舟上人이면 則公操之美를 可勝道哉아
凡人之相親者가 居則握手共席하야 道歡欣하고 旣別則問疾病起居하야 以相爲憂者는 常人之情爾니
夫不以相見爲歡樂하고 不以疾病爲憂問이 是豈無情者乎아
得非相期者在於道爾라 其或有過而不至于道者라야 乃可爲憂也아
近於京師에 頻得足下所爲文하야 讀之甚善하니 其好古閔世之意는 皆公操自得於古人하야 不待脩之贊也라
然有自許太高하며 詆時太過하야 其論若未深究其源者라
此事有本末하야 不可卒然語니 須相見이라야 乃能盡이라
家有足下手作書一通及有
일새 始見之
에 駭然不可識
이라가 徐而視定
하야 辨其點畫
에 乃可漸通
하니 吁
라
書之法이 當爾邪아 曰非也라 古有之乎아 曰無라 今有之乎아 亦曰無也라
脩聞君子之於學
에 是而已
요 不聞爲異也
니 이나 亦曰如此
라
然古之人
이 或有稱
而高世者
하니 考其行
에 亦不過乎君子
하되 但與世之庸人不合爾
요 行非異世
니 蓋人不及而反棄之
하야 擧世斥以爲異者歟
인저
況今書는 前不師乎古하고 後不足以爲來者法하니 雖天下皆好之라도 猶不可爲어든 況天下皆非之어늘 乃獨爲之는 何也오
今足下端然居乎學舍하야 以敎人爲師어늘 而反率然以自異하니 顧學者何所法哉아
今不急止면 則懼他日有責後生之好怪者가 推其事하야 罪以奉歸리니
후진後進을 칭찬하고 또한 후진을 규계規戒하였다.
지난해 낙양洛陽에서, 운주鄆州에 계실 때 부치신 편지를 받고서 경황이 없어 곧바로 답장을 하지 못하고 마침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정성은 편지를 보내지 못한 것처럼 태만하지 않건만, 공조公操께서 알아줄지 알아주지 못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수脩는 경사京師에 온 지 이미 한 해가 지났습니다.
송주宋州는 변수汴水 가에 있으니, 공조公操의 명성이 날마다 남방으로 가는 배와 함께 경사에 이릅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을 허여함이 적어서 만나는 사람은 특히 적은데도 공조를 칭찬하는 말이 하루도 들리지 않는 날이 없으니, 만약 배를 탄 사람들이 다 안다면 공조의 훌륭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서로 친한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손을 잡고 한자리에 앉아서 즐겁게 얘기하다가, 이별한 뒤에는 질병과 기거를 물어서 서로 걱정하는 것은 일반 사람들의 상정常情입니다.
만약 족하의 명성 같은 것을 들었다면 어찌 그 나머지 것을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듣고는 마음이 흐뭇한 것이 또한 직접 만나서 손을 잡는 즐거움만 못지않을 것입니다.
대저 서로 만나는 것을 기쁨으로 삼지 않고 질병이 있는 것을 걱정하여 위문慰問하지 않는 것이 어찌 무정한 자이겠습니까?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것이 도道에 있는지라 혹 잘못하여 도에 이르지 못한 것이 있어야 비로소 걱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자에 경사京師에서 족하가 지은 글을 자주 얻어서 읽어봄에 매우 좋았으니, 그 고도古道를 좋아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뜻은 모두 공조公操가 스스로 고인古人에게서 얻은 것으로 나의 도움을 기다릴 게 없습니다.
그러나 자부自負하는 것이 너무 높고 세상을 비판하는 것이 너무 지나쳐 그 주장하는 말이 마치 그 근원을 깊이 궁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본말本末이 있어 창졸간에 얘기할 수 없으니, 서로 만나야 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있으니, 이제 상세히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공조가 아침에 듣고 저녁에 고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되니, 먼저 말해보겠습니다.
군황君貺의 집에 족하가 손수 쓴 편지 한 통과 〈이상기二像記〉의 석본石本이 있기에 처음 보고서 눈만 휘둥그레 뜨고 알지 못하다가, 서서히 시선이 안정되어 그 점과 획을 변별해보고서야 비로소 차츰 알 수 있었으니, 아!
이윽고 내가 그것을 가지고 남에게 묻기를 “이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한 것인가?”라고 하니 “잘 쓰지 못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서법書法에 맞는가?”라고 하니 “그렇지 않다.”라고 하였고, “옛날에 이렇게 쓴 글씨가 있는가?”라고 하니 “없다.”라고 하였고, “지금은 있는가?”라고 하니 역시 “없다.”라고 하였고,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했는가?”라고 하니 “단지 세상에서 하는 것과 다르게 하고자 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듣건대 군자君子가 학문에 있어서는 옳음을 추구할 따름이고 세상과 다르게 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으니, 학문을 좋아하기로는 양웅揚雄만 한 이가 없지만 역시 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 중에는 혹 독행獨行하여 세상을 높이 초탈했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 행실을 살펴보면 역시 군자에 불과하되 단지 세상의 용렬한 사람들과 뜻이 맞지 않을 뿐이고 행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는 않았으니, 대개 사람들이 그에게 못 미치자 도리어 그를 버리고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배척하여 색다르다고 하는 것일 터입니다.
지나친 사람에 대해서는 성인이 오히려 중용中庸에 나아가게 하고자 했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글씨는 앞으로는 옛날의 서법書法을 본받지 않고 뒤로는 후세의 본보기가 되기에 부족하니, 비록 천하 사람들이 다 좋아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거늘, 하물며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르다고 하는데도 홀로 그렇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는 과연 색다른 것을 좋아하여 고상함을 취하는 것일 터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공조公操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칭찬하게 했다고 한 것은, 어찌 중도中道를 실천하고 떳떳한 덕을 지켜서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역시 자신을 높여서 스스로 색다른 것을 추구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그러한 칭찬을 받았을 터입니다.
옛날에 동자童子를 가르치는 사람은 설 때는 반드시 방정하게 서며 들을 때는 머리를 기울여 엿듣지 않게 하며 늘 속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서, 시초부터 근면勤勉하고 근신勤愼하도록 하고 색다른 것을 보고 현혹될까 오직 염려했습니다.
지금 족하는 단정하게 학사學舍에 앉아서 사람을 가르치는 일로 스승이 되었거늘, 도리어 느닷없이 스스로 색다른 모습을 보이니 도리어 학자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불행히도 학자들이 모두 따라서 본받는다면 족하는 또 과연 홀로 남들과 다르겠습니까?
지금 급히 그만두지 않으면 훗날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후생을 꾸짖는 이가 이 일을 미루어 족하에게 죄를 돌릴까 두렵습니다.
이것이 내가 걱정하여 감히 말해주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