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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3)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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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言近而旨遠이라
嗚呼
하니 所謂命 其果可知乎
貴賤窮亨 用舍進退 得失成敗 其有幸有不幸 或當然而不然이로되 而皆不知其所以然者하니 則推之於天曰有命이라
夫君子所謂知命者 知此而已
蓋小人知在我 故常無所不爲하며 君子知有命이라 故能無所屈하나니
凡士之有材而不用於世하고 有善而不知於人하야 至於老死困窮而不悔者 皆推之有命而不求苟合者也
余讀仲君之文而想見其人也로라
諱訥이요 字樸翁이라
其氣剛하며 其學古하며 其材敏하고 其爲文 抑揚感激하며 勁正豪邁 似其爲人이라
少擧進士하야 官至而止하다
君生於 儒學文章之士得用之時하니 宜其馳騁上下하야 發揮其所畜하야 振耀於當世로되
而獨韜藏抑鬱하야 久伏而不顯者 蓋其不苟屈以合世
故世亦莫之知也하니 豈非知命之君子歟
余謂君非徒知命而不苟屈이요 亦自負其所有者하야 謂雖抑於一時 必將伸於後世而不可揜也
君之旣歿 狀其行하야 以告于史하고 銘之石하야 以藏諸幽하고 而余又序其集하야 以行於世하니
然則君之不苟屈於一時而有待於後世者 其不在吾三人者邪
余雖老且病而言不文이나 其可不勉이리오


08. 중씨仲氏문집文集에 대한 서문
말은 비근하지만 담긴 뜻은 심원하다.
슬프다.
논어論語》에 ‘군자는 을 안다’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은 과연 알 수 있는 것인가.
귀천貴賤궁형窮亨, 용사用舍진퇴進退, 득실得失성패成敗에 행운과 불행이 있고 혹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모두 그렇게 되는 이유를 알지 못하므로 하늘에 미루어 이 있다고들 한다.
대저 군자가 이른바 을 안다는 것은 이것을 아는 것일 뿐이다.
대개 소인은 모든 일이 나에게 달려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늘 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군자는 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능히 굴복하는 바가 없다.
무릇 재주가 있지만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고 이 있지만 남에게 알려지지 않아 늙어 죽을 때까지 곤궁하게 살면서도 후회하지 않는 선비는 모두 이 있음을 미리 헤아려 구차하게 세상과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중씨仲氏의 글을 읽어봄에 그 사람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이고 박옹樸翁이다.
기질은 강하고 학문은 예스러우며 재주는 민첩하고 지은 문장은 억양이 있고 격동적이며 굳세고 호매한 것이 그 사람의 인품과 같았다.
어릴 때 진사에 급제하여 관직은 상서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에 올랐을 뿐이다.
군은 나라가 개국 후 100년 되던 전성全盛했을 시기, 유학과 문장을 하는 선비가 등용될 시기에 태어났으니, 응당 마음껏 재능을 떨쳐 온축했던 바를 발휘하여 당세에 명성을 떨쳤어야 한다.
그러나 홀로 재능을 숨기고 답답하게 살면서 오랫동안 묻혀 드러내지 않은 것은 대개 구차하게 뜻을 굽혀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도 알아주는 이가 없었으니 어찌 을 아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군은 한갓 을 알아 구차하게 뜻을 굽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가 가진 재능을 자부하여 비록 한때엔 답답하게 살았지만 반드시 장차 후세에 펼쳐져 가려지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군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부춘富春손신로孫莘老행장行狀을 지어 사관史官에게 고하고, 임천臨川왕개보王介甫묘지명墓誌銘을 돌에 새겨 무덤에 묻었으며, 내가 또 문집에 서문을 지어 세상에 간행하였다.
그렇다면 군이 한때에 구차하게 뜻을 굽히지 않고서 후세를 기다린 것이 우리 세 사람에게 있지 않겠는가.
아, 내가 비록 늙고 병들어 문장은 잘하지 못하지만 어찌 힘써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 이 글은 治平 4년(1067)에서 熙寧 원년(1068) 사이에 지은 것이다. 仲氏는 歐陽訥(999~1053)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
역주2 語稱君子知命 : 《論語》 〈堯曰〉에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命을 알지 못하면 君子가 될 수 없다.’[子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3 尙書屯田員外郞 : 尙書省 工部의 관원으로 屯田, 營田, 學田, 官庄의 사무를 관장한다. 員外郞은 尙書省 各司의 次官으로 郎中과 함께 郎官으로 불리는데 중앙관리 중 요직에 해당한다.
역주4 有宋百年全盛之際 : 宋나라는 仁宗에 이르러 나라를 개국한 지 거의 100년이 되는데 이 시기가 全盛期로 불렸다. 區陽訥은 宋 眞宗 咸平 2년(999)에 태어나 仁宗朝에 활동하였다.
역주5 富春孫莘老 : 富春은 縣名이고 莘老는 孫覺(1028~1090)의 字이다. 北宋 高郵 사람으로 仁宗 皇祐 元年(1049)에 進士가 되었다. 熙寧 연간에 靑苗法에 반대하다 廣德知軍으로 쫓겨났고, 哲宗이 즉위하자 御史中丞에 임명되었다. 《周易》을 좋아하였고 《春秋》에 조예가 깊었다. 저서에 《春秋經解》, 《易傳》, 《奏議》 등이 있다.
역주6 臨川王介甫 : 介甫는 王安石(1021~1086)의 字이다. 宋나라 撫州 臨川 사람이고 小字는 獾郞이며, 號는 半山이다. 仁宗 慶曆 2년(1042)에 進士가 되었다. 熙寧 2년(1069)에 參知政事가 되어 變法을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三司條例司를 설치해 재정과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富國强兵의 방안을 모색하였으며 靑苗法, 市易法, 募役法, 保甲法, 保馬法을 실시하였다. 7년(1074) 司馬光‧韓琦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재상 자리를 사직하고 江寧府로 옮겼고, 다음 해 다시 복직하였지만 다음 해 다시 파직되어 江寧府로 나갔다. 元豐 3년(1080)에 荊國公에 봉해졌고 諡號는 文이다. 저서에 《王臨川先生集》, 《周官新義》, 《尙書新義》, 《詩經新義》, 《詩義鉤沈》, 《道德經注》 등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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