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唐臣傳
01.
郭崇韜는 代州雁門人也니 爲河東敎練使하다 爲人明敏하고 能應對하야 以幹材見稱하다
中門之職은 參管機要어늘 先時에 吳珙張虔厚等이 皆以中門使로 相繼獲罪러라
知祥懼하야 求外任한대 莊宗曰 公欲避事인댄 當擧可代公者라하니 知祥乃薦崇韜爲中門使하니 甚見親信하니라
晉兵圍
于鎭州
하야 久不下
어늘 而定州
引契丹入寇
라 契丹至新樂
한대 晉人皆恐
하야 欲解圍去
어늘
莊宗未決하니 崇韜曰 契丹之來는 非救文禮라 爲王都以利誘之耳라 且晉新破梁軍하니 宜乘已振之勢요 不可遽自退怯이니이다
莊宗然之하니 果敗契丹하다 莊宗卽位하야 拜崇韜兵部尙書樞密使하다
莊宗登壘하야 望見彦章爲重塹以絶唐軍하고 意輕之하야 笑曰 我知其心矣라 其欲持久以弊我也라하고
卽引短兵出戰이라가 爲彦章伏兵所射하야 大敗而歸하다
莊宗問崇韜計安出고하니 是時에 唐已得鄆州矣라 崇韜因曰 彦章圍我於此는 其志在取鄆州也라
臣願得兵數千하야 據河下流하야 築壘於必爭之地하되 以應鄆州爲名이면 彦章必來爭하리니 旣分其兵이면 可以圖也니이다
然板築之功
은 難卒就
하니 陛下日以精兵挑戰
하야 使彦章兵
으로 不得東
이면 리이다
莊宗以爲然
하고 乃遣崇韜與
將數千人夜行
하야 所過
에 驅掠居人
하고 毁屋伐木
하야 渡河築壘於博州東
하야 晝夜督役
하니 六日壘成
이라
하니 時方大暑
라 彦章兵熱死
하야 及攻壘不克
하야 所失大半
하고 還趨楊劉
한대 莊宗迎擊
하야 遂敗之
하다
康延孝自梁奔唐하야 先見崇韜어늘 崇韜延之臥內하야 盡得梁虛實이라
是時
에 莊宗軍
하고 段凝軍臨河
라 唐自失德勝
으로 梁兵日掠澶相黎陽衛州
하니
而李繼韜以澤潞叛
入于梁
하고 契丹數犯幽涿
하고 又聞延孝言梁方召諸鎭兵欲大擧
하고 唐諸將皆憂惑
하야 以謂成敗未可知
라
莊宗患之하야 以問諸將하니 諸將皆曰 唐得鄆州로되 隔河難守니
不若棄鄆與梁하고 而西取衛州黎陽하야 以河爲界하야 與梁約罷兵毋相攻이면 庶幾以爲後圖니이다
莊宗不悅하야 退臥帳中하야 召崇韜問計하니 崇韜曰 陛下興兵仗義하야 將士疲戰爭하고 生民苦轉餉者가 十餘年矣라
況今大號已建하야 自河以北으로 人皆引首以望成功而思休息이라 今得一鄆州로되 不能守而棄之면 雖欲指河爲界나 誰爲陛下守之리잇고
且唐未失德勝時에 四方商賈가 征輸必集하야 薪蒭糧餉이 其積如山이러니 自失南城하야 保楊劉로 道路轉徙에 耗亡大半이라
而魏博五州는 秋稼不稔하야 竭民而斂이라도 不支數月이니 此豈按兵持久之時乎리오 臣自康延孝來로 盡得梁之虛實하니 此眞天亡之時也라
願陛下分兵守魏하야 固楊劉而自鄆長驅하야 擣其巢穴이면 不出半月에 天下定矣라하니 莊宗大喜曰 此大丈夫之事也라하다
因問司天
하니 司天言歲不利用兵
이라하다 崇韜曰 古者命將
에 이라 況成算已決
하니 區區常談
을 何足信也
리오하니
莊宗卽日下令軍中
하야 歸其家屬於魏
하고 夜渡楊劉
하야 하야 八日而滅梁
하다
莊宗推功하야 賜崇韜鐵券하고 拜侍中成德軍節度使하고 依前樞密使하다
莊宗與諸將으로 以兵取天下어늘 而崇韜未嘗居戰陣이요
徒以謀議居
第一之功
하야 位兼將相
하야 遂以天下爲己任
하야 遇事無所回避
하니 而宦官伶人用事
에 特不便也
러라
及莊宗卽位
하야 二人當爲樞密使
어늘 而崇韜不欲紹宏在己上
하야 乃以
爲樞密使
하고 紹宏爲宣徽使
하다
紹宏失職怨望하니 崇韜因置內勾使하야 以紹宏領之하니 凡天下錢穀出入于租庸者가 皆經內勾라
旣而오 文簿繁多하야 州縣爲弊라 遽罷其事하니 而紹宏尤側目이라
崇韜頗懼하야 語其故人子弟曰 吾佐天子하야 取天下러니 今大功已就에 而群小交興하니 吾欲避之하야 歸守鎭陽하야 庶幾免禍가 可乎아하니
故人子弟對曰 俚語에 曰 騎虎者勢不得下라하니 今公權位已隆하야 而下多怨嫉하니 一失其勢면 能自安乎아하다
崇韜曰 奈何오하니 對曰 今中宮未立而劉氏有寵하니 宜請立劉氏爲皇后하고 而多建天下利害以便民者라
然後退而乞身이면 天子以公有大功而無過라하야 必不聽公去리니 是는 外有避權之名而內有中宮之助하고 又爲天下所悅이니
雖有讒間이나 其可動乎아하니 崇韜以爲然하고 乃上書請立劉氏爲皇后하다
崇韜素廉이러니 自從入洛으로 始受四方賂遺하니 故人子弟或以爲言이어늘
崇韜曰 吾位兼將相
하야 祿賜巨萬
이니 豈少此耶
리오 今藩鎭諸侯
는 多梁舊將
이니 皆主上
之人也
어늘 면 豈無反側
이리오
且藏予私室이 何異公帑이리오 明年에 天子有事南郊한대 乃悉獻其所藏하야 以佐賞給하다
莊宗已郊에 遂立劉氏爲皇后하다 崇韜累表自陳하야 請依唐舊制하야 還樞密使于內臣하고 而幷辭鎭陽한대 優詔不允하다
崇韜又曰 臣從陛下軍朝城하야 定計破梁할새 陛下撫臣背而約曰 事了에 與卿一鎭이라하더시니
今天下一家
에 賢竝進
이라 臣憊矣
니 願乞身如約
이라하니
莊宗召崇韜하야 謂曰 朝城之約은 許卿一鎭이요 不許卿去니 欲捨朕코 安之乎아하다 崇韜因建天下利害二十五事하야 施行之하다
爲成德軍節度使
하고 徙崇韜忠武
하니 崇韜因自陳權位已極
에 言甚懇至
라
莊宗曰 豈可朕居天下之尊하고 使卿無尺寸之地리오하야늘 崇韜辭不已어늘 遂罷其命하고 仍爲侍中樞密使하다
三年夏
에 霖雨不止
하야 大水害民田
하니 民多流死
라 莊宗患宮中暑濕不可居
하야 思得高樓避暑
하다
宦官進曰 臣見長安全盛時
에 에 樓閣百數
러니 今大內
가 不及故時卿相家
라하다
莊宗曰 吾富有天下하니 豈不能作一樓리오하고 乃遣宮苑使王允平營之하다
宦官曰 郭崇韜眉頭不伸
하야 爲租庸惜財用
하니 陛下雖欲有作
이나 其可得乎
리잇가하다
莊宗乃使人問崇韜曰 昔吾與梁對壘於河上할새 雖祁寒盛暑에 被甲跨馬라도 不以爲勞러니 今居深宮蔭廣厦언마는 不勝其熱은 何也오한대
崇韜對曰 陛下昔以天下爲心이러시니 今以一身爲意하니 艱難逸豫에 爲慮不同은 其勢自然也니이다
願陛下無忘創業之難하야 常如河上하시면 則可使繁暑坐變淸涼이라하니 莊宗默然이라가
終遣允平起樓하니 崇韜果切諫이라 宦官曰 崇韜之第가 無異皇居하니 安知陛下之熱이릿고하다 由是로 讒間愈入하다
河南縣令羅貫은 爲人彊直하야 頗爲崇韜所知라 貫正身奉法하야 不受權豪請託이요
宦官伶人有所求請하야 書積几案이라도 一不以報하고 皆以示崇韜라 崇韜數以爲言하니 宦官伶人이 由此切齒하니라
河南自故唐時張全義爲尹으로 縣令多出其門하야 全義厮養畜之러니 及貫爲之하야 奉全義不屈하고 縣民恃全義爲不法者를 皆按誅之라
全義大怒하야 嘗使人告劉皇后하니 從容爲白貫事하고 而左右日夜共攻其短이로되 莊宗未有以發이라
皇太后崩에 葬坤陵하니 陵在壽安이라 莊宗幸陵作所에 而道路泥塗橋壞라
莊宗止輿하고 問誰主者오 宦官曰 屬河南이니이다 因亟召貫하니 貫至하야 對曰 臣初不奉詔하니 請詰主者라하다
莊宗曰 爾之所部어늘 復問何人고하고 卽下貫獄한대 獄吏搒掠하야 體無完膚라
明日에 傳詔殺之한대 崇韜諫曰 貫罪無他요 橋道不修니 法不當死라하다
莊宗怒曰 太后靈駕將發하야 天子車輿往來에 橋道不修어늘 卿言無罪라하니 是는 朋黨也라하니
崇韜曰 貫雖有罪나 當具獄行法于有司니이다 陛下以萬乘之尊으로 怒一縣令하야 使天下人言陛下用法不公하면 臣等之過也라하다
莊宗曰 貫은 公所愛니 任公裁決이라하고 因起入宮하니 崇韜隨之하야 論不已어늘 莊宗自闔殿門하야 崇韜不得入이라 貫卒見殺하니라
而崇韜以讒見危하야 思立大功爲自安之計하고 乃曰 契丹이 爲患北邊하니 非總管이면 不可禦나
은 國之儲副
며 而大功未立
이요 且親王爲元帥
가 唐故事也
라하다
莊宗曰 繼岌은 小子니 豈任大事리오 公爲我擇其副하라 崇韜未及言이어늘 莊宗曰 吾得之矣라 無以易卿也로다하고
乃以繼岌爲西南面行營都統하고 崇韜爲招討使하야 軍政皆決崇韜하다
唐軍入蜀에 所過迎降이어늘 王衍弟宗弼이 陰送款于崇韜하야 求爲西川兵馬留後하니 崇韜以節度使許之하다
軍至成都하니 宗弼遷衍于西宮하고 悉取衍嬪妓珍寶하야 奉崇韜及其子廷誨하다 又與蜀人列狀見魏王하야 請崇韜留鎭蜀한대 繼岌頗疑崇韜어늘
崇韜無以自明하야 因以事斬宗弼及其弟宗渥宗勳하고 沒其家財하니 蜀人大恐하다
崇韜素嫉宦官하야 嘗謂繼岌曰 王有破蜀功하니 師旋이면 必爲太子리이다
俟主上
後
에 當盡去宦官
하고 至於扇馬
하야도 亦不可騎
라하다
繼岌監軍李從襲等이 見崇韜專任軍事하고 心已不平이러니 及聞此言하야 遂皆切齒하야 思有以圖之하다
莊宗聞破蜀하고 遣宦官向延嗣勞軍이어늘 崇韜不郊迎한대 延嗣大怒하야 因與從襲等으로 共構之하다
延嗣還하야 上蜀簿하니 得兵三十萬과 馬九千五百匹과 兵器七百萬과
糧二百五十三萬石과 錢一百九十二萬緡과 金銀二十二萬兩과 珠玉犀象二萬文과 錦綾羅五十萬匹하다
莊宗曰 人言蜀天下之富國也라하야늘 所得이 止於此邪아한대 延嗣因言蜀之寶貨皆入崇韜라하고
且誣其有異志하야 將危魏王하니 莊宗怒하야 遣宦官馬彦珪至蜀하야 視崇韜去就하다 彦珪以告劉皇后하니 劉皇后敎彦珪矯詔魏王殺之하다
崇韜有子五人에 其二從死于蜀하고 餘皆見殺이요 其破蜀所得은 皆籍沒하다
明宗卽位에 詔許歸葬하고 以其太原故宅으로 賜其一孫하다
當崇韜用事時하야 自宰相豆盧革韋悅等으로 皆傾附之라 崇韜父諱弘이니 革等卽因他事하야 奏改弘文館爲崇文館하다
以其姓郭
으로 因以爲
之後
러니 崇韜遂以爲然
하다 其伐蜀也
에 過子儀墓
하야 下馬號慟而去
하니 聞者頗以爲笑
라
然崇韜盡忠國家
하고 有大略
이라 其已破蜀
에 因遣使者
하야 以唐威德
으로 風諭
諸蠻
하야 欲因以綏來之
하니 可謂有志矣
로다
두 列傳은 司馬遷의 ≪史記≫를 모방했으되 그 骨髓를 얻었다.
郭崇韜는 代州 雁門 사람이니 河東敎練使를 지냈다. 사람됨이 明敏하고 應對를 잘하여 일처리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唐 莊宗이 晉王이었을 때 孟知祥이 中門使였고 郭崇韜가 그 副使였다.
중문사라는 직무는 국가의 機務에 관여하였는데 이전에 吳珙‧張虔厚 등이 모두 중문사로 있으면서 연달아 죄를 받았다.
맹지상이 이를 두려워하여 外任을 청하자, 장종이 말하기를 “公이 이 일을 피하려고 한다면 의당 공을 대신할 만한 이를 천거해야 하오.”라고 하니, 맹지상이 이에 곽숭도를 천거하여 중문사로 삼으니 곽숭도가 장종에게 매우 친애와 신뢰를 받았다.
晉나라 군대가 鎭州에서 張文禮를 포위하고서 오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는데 定州 王都가 契丹의 군사를 끌어와서 침략하였다. 거란의 군대가 新樂에 이르자 晉나라 군대가 모두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떠나려 하였는데,
莊宗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니 郭崇韜가 말하기를 “거란이 온 것은 張文禮를 구원하려 해서가 아니라 왕도가 이익으로 거란을 유인하였기 때문일 뿐입니다. 게다가 晉나라가 梁나라 군대를 지금 막 격파하였으니 이미 떨친 勝勢를 타야 할 것이요, 대뜸 스스로 겁먹고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옳다고 여기니 과연 거란을 물리쳤다. 장종이 즉위하여 곽숭도를 兵部尙書 樞密使에 배수하였다.
梁나라 王彦章이 德勝을 격파하니 唐나라 군대가 동쪽으로 물러나 楊劉를 지켰는데 왕언장이 唐나라 군대를 포위하였다.
唐 莊宗이 營壘에 올라 왕언장이 깊은 구덩이를 파서 唐나라 군대의 퇴로를 끊어놓은 것을 바라보고 속으로 하찮게 여기면서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의 의도를 알겠다. 그는 持久戰을 펼치면서 나를 지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고,
곧장 짧은 병기를 든 병사들을 거느리고 出戰하였다가 왕언장의 伏兵에게 화살을 맞고 크게 패하여 돌아갔다.
장종이 郭崇韜에게 묻기를 “무슨 좋은 계책을 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이때에 唐이 이미 鄆州를 함락한지라 곽숭도가 이로 인하여 말하기를 “왕언장이 여기서 우리를 포위한 것은 그 뜻이 운주를 취하려는 데 있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黃河의 下流를 占據하고서 반드시 빼앗아야 하는 곳에 堡壘를 수축하되 운주에 호응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는다면, 왕언장이 반드시 와서 빼앗으려 할 것이니 그의 군대를 분산시키기만 하면 승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修築하는 工役은 금방 이루기가 어려우니 陛下께서 날마다 精兵을 거느리고 그에게 싸움을 걸어 왕언장의 군대로 하여금 동쪽으로 오지 못하도록 해주신다면 열흘이면 보루가 완성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이에 곽숭도와 毛璋을 보내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밤에 행군하여 지나가는 곳마다 거주하는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집을 부수며 나무를 잘라 황하를 건너 博州의 동쪽에 보루를 수축하고서 밤낮으로 공역을 督責하니 엿새만에 보루가 완성되었다.
왕언장이 과연 군대를 이끌고 급히 공격하니 이때 한창 더위가 심한지라 왕언장의 군사들이 熱射病에 걸려 죽어 미처 보루를 공격하여 이기기도 전에 잃어버린 병사가 태반이나 되었고, 회군하여 양류에 다다르자 장종이 그를 맞아 공격하여 마침내 무찔렀다.
康延孝가 梁나라에서 唐나라로 도망쳐 와서 먼저 郭崇韜를 만났는데 곽숭도가 침실 안으로 맞이하여 梁나라의 虛實을 모두 알게 되었다.
이때에 唐 莊宗은 朝城에 주둔하였고 段凝은 臨河에 주둔하였다. 唐나라가 德勝을 잃어버린 뒤로 梁나라 군대가 날마다 澶州‧相州‧黎陽‧衛州를 侵掠하니,
李繼韜는 澤州‧潞州를 가지고 배반하여 梁나라에 투항하고, 契丹은 幽州‧涿州를 자주 침범하였으며, 또 梁나라가 막 여러 鎭의 兵力을 소집하여 군대를 크게 일으키려 한다는 강연효의 말을 듣고는 唐나라의 장수들이 모두 근심하고 의혹하면서 전쟁의 成敗를 알 수가 없다고 여겼다.
장종이 이를 근심하여 장수들에게 물으니,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唐나라가 鄆州를 차지하였으나 黃河를 사이에 두고 있어 지키기가 어려우니,
운주를 버려 梁나라에 주고 서쪽으로 衛州와 黎陽을 취하여 황하를 경계로 삼고서 梁나라와 군대를 물려 서로 공격하지 않기로 약속하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이 계책을 좋아하지 않아 軍幕에 물러나 누운 채로 곽숭도를 불러 계책을 물으니, 곽숭도가 말하기를 “陛下께서 大義를 내걸고 起兵하여 將士들이 戰爭에 지치고 백성들이 軍糧을 수송하느라 허덕인 지가 10여 년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국가의 大號를 이미 세워 황하 이북으로는 사람들이 모두 간절히 목을 뺀 채로 功業을 이루기를 바라고 휴식하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겨우 일개 운주를 함락하였는데도 지키지 못해 버린다면 비록 황하를 지정하여 경계로 삼고자 할지라도 누가 폐하를 위해 지키겠습니까.
게다가 唐나라가 아직 德勝을 잃지 않았을 때에 四方의 상인들이 징수하고 운반하는 물자들이 반드시 그곳에 모여 땔감과 꼴, 양식이 산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南城을 잃고 楊劉를 지키면서부터 도로에서 옮기며 운반할 때 소모되는 물자가 태반입니다.
魏州와 博州 등 다섯 州는 가을걷이 철에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을 쥐어짜서 거두더라도 수개월을 버티지 못하니, 이 어찌 군대를 주둔하면서 오래 버티고 있을 때이겠습니까. 신은 강연효가 도망쳐 온 뒤로 梁나라의 허실을 모두 알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이 梁나라를 망하게 할 때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군대를 나누어 魏州를 지켜 양류를 튼튼하게 하고 운주에서 멀리 내달려 梁나라의 소굴을 부순다면 반달이 지나지 않아 천하가 통일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장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이것이 大丈夫의 사업이다.”라고 하였다.
이 일로 司天監에 자문하니, 사천감에서 말하기를 “올해는 군대를 움직이기에 이롭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곽숭도가 말하기를 “옛날 장수를 임명할 때 凶門을 뚫고 나가게 하였습니다. 하물며 논의를 마친 계책을 실행하기로 이미 결정하였으니 보잘것없는 이의 늘상 하는 이야기를 믿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장종이 그날 즉시 軍中에 명령을 내려 그 家屬을 魏州에 돌려보내고 밤에 양류를 건너 운주에서 汴州로 쳐들어가서 여드레 만에 梁나라를 멸망시켰다.
장종이 論功行賞하여 곽숭도에게 鐵券을 하사하고 侍中 成德軍節度使에 제수하고 이전처럼 樞密使로 있도록 하였다.
莊宗이 장수들과 武力으로 천하를 취하였는데 郭崇韜는 戰場에 직접 있은 적이 없었고,
그저 謀議로 제왕의 창업을 보좌한 제일 큰 공훈을 차지하여 장군과 재상의 지위를 겸임하고서 마침내 천하를 다스리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회피하는 바가 없으니, 宦官과 伶人들이 권세를 휘두르는 데 있어 특히 불편하게 여겼다.
당초에 郭崇韜는 宦官 馬紹宏과 함께 모두 中門使가 되었는데 마소굉이 자신보다 직위가 높았다.
莊宗이 즉위하게 되자 두 사람이 樞密使가 되어야 했는데, 곽숭도는 마소굉이 자기 윗자리에 있는 것을 바라지 않아 이에 張居翰을 추밀사로 삼고 마소굉을 宣徽使로 삼았다.
마소굉이 추밀사의 직위를 잃어 곽숭도를 원망하니 곽숭도가 이로 인해 內勾使를 설치하여 마소굉이 거느리게 하니 租稅로 들고 나는 천하의 錢穀들이 모두 내구사를 거쳤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文簿의 일이 너무 繁多하여 州縣들이 그 폐해를 입기에 갑자기 이 일을 폐지하니 마소굉이 더욱 원한을 품었다.
곽숭도가 몹시 두려워져서 벗과 子弟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자를 보좌하여 천하를 얻었는데 지금 큰 공업을 이루고 나자 소인배들이 분분하게 일어나니 내가 그들을 피하여 돌아가 鎭陽을 지킴으로써 災禍를 면할까 하는데, 가능하겠는가?”라고 하니,
벗과 자제가 대답하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범을 타고 있는 자는 그 형세가 내려올 수 없다.’라고 합니다. 지금 공의 권세와 지위가 이미 매우 높아 아래에 원망하고 질시하는 이가 많으니 한번 그 권세를 잃으면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곽숭도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자, 〈벗과 자제가〉 대답하기를 “지금 中宮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는데 劉氏가 총애를 받고 있으니 유씨를 세워 皇后로 삼을 것을 청하고, 백성을 편하게 해줄 天下의 利害에 관한 일들을 많이 건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 은퇴하기를 구한다면 천자께서 공이 큰 공로가 있고 허물이 없다고 여겨 반드시 공이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는 밖으로는 권세를 사양한다는 명분이 있고 안으로는 중궁의 도움이 있게 되는 것이며 또 천하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니,
비록 讒言과 이간질이 있더라도 〈공의 권세를〉 흔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곽숭도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이에 글을 올려 유씨를 세워 황후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郭崇韜는 평소 청렴하였는데 洛陽에 들어오고부터 비로소 四方에서 들어오는 뇌물을 받으니 벗과 자제 가운데 어떤 이가 이를 지적하여 말하자,
곽숭도가 말하기를 “내가 장수와 재상의 직위를 겸하고 있어 俸祿과 하사받은 재물이 巨萬이나 되니 어찌 이 재물이 부족하겠는가. 지금 藩鎭의 諸侯들은 梁나라의 옛 장수들이 많으니 모두 主上을 해치려고 했다가 신하가 된 사람들인데 지금 이들을 일절 물리친다면 어찌 원한을 품지 않겠는가.
더구나 나의 私家에 보관하는 것이 公家의 창고에 보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듬해 천자가 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이에 그 보관하고 있던 재물을 다 바쳐 賞給에 보태었다.
莊宗이 南郊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마침내 劉氏를 세워 皇后로 삼았다. 郭崇韜가 누차 表文을 올려 자기 의견을 진달하여 唐나라의 옛 제도를 따라 內臣에게 樞密使의 직무를 돌려주고 아울러 자기는 鎭陽으로 물러나기를 청하였는데 장종이 優渥한 조서를 내리며 윤허하지 않았다.
곽숭도가 다시 말하기를 “臣이 陛下를 따라 朝城에 주둔하여 梁나라 군대를 격파할 계책을 정할 때에 폐하께서 신의 등을 어루만지며 약속하시기를 ‘일을 마치면 卿에게 鎭 하나를 주겠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천하가 통일되어 걸출하고 현명한 인재들이 모두 조정에 나오고 있습니다. 신은 지쳤으니 약속하신 대로 직책에서 물러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장종이 곽숭도를 불러 이르기를 “조성에서의 약속은 卿에게 鎭 하나를 허락한 것이지, 경이 떠나라고 허락한 것은 아니니 朕을 버리고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곽숭도가 이에 天下의 利害에 관계된 25가지 일을 건의하여 시행하게 되었다.
李嗣源이 成德軍節度使가 되고 郭崇韜를 忠武軍으로 옮겨주니 곽숭도가 이에 자신의 권세와 지위가 이미 극에 달했다고 진달하면서 〈사양하는〉 말이 몹시 간절하였다.
莊宗이 말하기를 “어찌 朕이 천하의 제일 높은 자리에 앉아서 경에게 작은 땅조차 없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곽숭도가 사양하여 마지않자 마침내 그 임명을 철회하고 그대로 그를 侍中 樞密使에 임명하였다.
同光 3년(925) 여름에 장맛비가 그치지 않아 큰물이 民田에 피해를 입히니 유랑하다 죽는 백성들이 많았다. 莊宗은 宮中이 무덥고 습해 지내지 못하겠다고 힘들어하면서 높은 樓閣을 세워 더위를 피하려고 생각하였다.
宦官이 나아와 말하기를 “신은
長安이 전성했던 시절에
大明宮과
興慶宮에
樓閣이 백으로 헤아리던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大內가 그 시절
卿相의 저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唐大明宮圖
장종이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소유하였으니 어찌 누각 하나를 짓지 못하겠는가.”라고 하고, 이에 宮苑使 王允平을 보내 누각을 짓게 하였다.
宦官이 말하기를 “郭崇韜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租稅 문제로 재물 쓰기를 아까워하니 폐하께서 비록 누각을 지으려 하시더라도 이룰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종이 이에 사람을 보내 곽숭도에게 묻기를 “과거에 내가 黃河 가에서 梁나라 군대와 對峙하고 있을 때엔 비록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에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타고 있더라도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깊은 궁궐에 지내면서 큰 집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건만 이 더위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자,
곽숭도가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과거에는 천하를 자신의 소임으로 여기셨는데 지금은 본인 一身만 생각하시니, 힘들 때와 편할 때 걱정하는 사정이 다른 것은 그 상황이 절로 그러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創業의 어려움을 잊지 마시어 늘 마치 황하 가에 있는 것처럼 여긴다면 무더위가 이로 인해 청량하게 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장종이 말없이 듣기만 하였다.
그러다 결국 왕윤평을 보내 누각을 세우니 곽숭도가 과연 간절하게 直諫하였다. 환관이 말하기를 “곽숭도의 저택이 황제의 거처와 다름이 없으니 어찌 폐하가 더위에 시달리시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이간질하는 참소가 점점 황제에게 들어가게 되었다.
河南 縣令 羅貫은 사람됨이 彊直하여 자못 郭崇韜에게 知遇를 받았다. 나관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법대로 공무를 집행하여 權貴나 富豪의 청탁을 접수하지 않았고,
宦官이나 伶人이 요청하는 일이 있어 그 書信이 책상에 가득 쌓이더라도 일절 답장을 하지 않고 모두 곽숭도에게 가져다 보여주었다. 곽숭도가 자주 이 일을 가지고 말하니 환관과 영인들이 이로 인해 이를 갈았다.
河南은 예전 唐나라 때 張全義가 河南尹을 맡은 이래로 縣令들이 그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어 장전의가 하인처럼 그들을 부렸는데, 나관이 현령을 맡고 나서는 장전의를 모시면서 굽히지 않고 장전의를 믿고 不法을 저지르는 縣民들을 모두 國法에 따라 誅罰하였다.
장전의가 크게 노하여 사람을 보내 劉皇后에게 고하니 유황후가 조용히 나관의 일을 황제에게 아뢰었고, 左右에서 모시는 자들이 밤낮으로 함께 나관의 단점을 공격하였으나 莊宗은 이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皇太后가 붕어하자 坤陵에 장사 지내니 곤릉은 壽安에 있었다. 莊宗이 陵墓를 짓고 있는 곳에 거둥할 때 도로는 진흙탕인 데다 다리가 무너져 있었다.
장종이 御駕를 멈추고 이 지방을 누가 맡아 다스리는지 묻자, 宦官이 말하기를 “이곳은 河南縣에 속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급히 羅貫을 소환하니 나관이 이르러 대답하기를 “신은 애초 詔書를 받은 적이 없으니 관장하는 자에게 묻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말하기를 “이곳은 너의 관할인데 다시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 것인가?”라고 하고 곧장 나관을 감옥에 넣자, 獄吏가 그를 매질하여 몸에 온전한 살이 없었다.
이튿날 조서를 내려 그를 사형에 처하려 하자, 郭崇韜가 諫言을 올려 “나관은 다른 죄가 없고 다리와 도로를 改修하지 않은 것이니 법에 비추어볼 때 사형에 처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노하여 “太后의 상여가 출발하려 하여 천자의 수레가 왕래하려 할 때 다리와 도로를 개수하지 않았는데 卿이 그의 죄가 없다고 말하니 이는 그와 朋黨을 이룬 것이다.”라고 하니,
곽숭도가 말하기를 “나관이 비록 죄가 있으나 의당 해당 관사에서 獄案을 갖추어 법을 집행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萬乘의 천하를 다스리는 존엄한 지위에 계시면서 일개 縣令에게 노하여 천하 사람들이 폐하께서 법을 집행하시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수군거리게 한다면 이는 신들의 잘못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말하기를 “나관은 공이 아끼는 자이니 공이 마음대로 裁決하라.”라고 하고는, 이어 일어나 궁궐로 들어가니 곽숭도가 장종을 뒤따르며 쉬지 않고 諍論하였는데, 장종이 직접 殿門을 닫아걸어 곽숭도가 따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관은 결국 사형을 당하였다.
이듬해 蜀을 정벌할 때 大將을 선발하는 일을 논의하니 이때 唐 明宗(李思源)이 總管인지라 마땅히 가야 했다.
그러나 郭崇韜는 참소를 당해 위험한 처지에 빠져 큰 공훈을 세워 자신을 보전하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생각하고서, 이에 말하기를 “契丹이 北邊에서 근심을 끼치니 총관이 아니면 거란을 막을 수가 없지만,
魏王 李繼岌은 국가의 元子이며 아직 큰 공훈을 세우지 못했고 또한 親王이 元帥를 맡는 것은 唐나라 때의 관례입니다.”라고 하였다.
莊宗이 말하기를 “繼岌은 아직 어린아이이니 어찌 국가의 대사를 맡기겠는가? 공이 나를 위해 그 副將을 선발하라.”고 하였다. 곽숭도가 미처 대답하지 못했는데, 장종이 말하기를 “내가 알았다. 卿을 대신할 이가 없다.”라고 하고는,
이에 이계급을 西南面行營都統으로 삼고 곽숭도를 招討使로 삼아 軍政을 모두 곽숭도에게 결정하게 하였다.
唐나라 군대가 蜀에 쳐들어갈 때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영접하며 투항하였는데, 王衍의 아우 王宗弼이 은밀히 郭崇韜에게 투항의 뜻을 보내면서 西川兵馬留後가 되기를 구하니 곽숭도가 節度使를 주기로 허락하였다.
唐나라 군대가 成都에 이르니 왕종필이 왕연을 西宮에 옮기고 왕연의 嬪妓와 珍寶를 모두 차지하고서 곽숭도 및 그의 아들 郭廷誨를 받들었다. 또 蜀人들과 함께 連名으로 글을 올려 魏王을 알현하여 곽숭도를 남겨 蜀을 鎭守하게 해달라고 청하자 李繼岌이 자못 곽숭도를 의심하였는데,
곽숭도가 자신을 해명할 길이 없어 이에 어떤 일을 가지고 왕종필 및 그 아우 王宗渥‧王宗勳을 참수하고 그 가문의 재산을 몰수하니, 촉인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郭崇韜가 평소 宦官들을 미워하여 일찍이 李繼岌에게 이르기를 “親王께서 蜀을 정벌한 공훈이 있으니 군대가 개선하면 반드시 太子가 되실 것입니다.
主上께서 千秋萬歲하시길 기다린 뒤에 〈제위에 오르시면〉 응당 환관들을 모조리 제거하여야 하고 불깐 말조차도 타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계급의 監軍 李從襲 등이 곽숭도가 軍事의 專權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이미 불평스러워하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나서는 마침내 모두 이를 갈면서 곽숭도를 도모하려고 생각하였다.
莊宗이 蜀을 격파했다는 말을 듣고 宦官 向延嗣를 보내 군대를 위로하였는데, 郭崇韜가 蜀의 郊外에서 그를 영접하지 않자 상연사가 크게 노하여 이에 李從襲 등과 함께 일을 꾸며 해치려고 하였다.
상연사가 京師로 돌아와 蜀의 〈兵馬와 재물을 기록한〉 帳簿를 올리니 군사 30만 명, 말 9,500匹, 兵器 7백만 개,
양식 253만 石, 錢 192만 緡, 金銀 22만 兩, 진주‧玉器‧무소뿔‧상아 2만 개, 각종 비단 50만 匹을 얻었다.
장종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蜀은 천하의 富國이라고 말들 하는데 얻은 것이 이것뿐인가?”라고 하자, 상연사가 이에 蜀의 寶貨가 모두 곽숭도에게 들어갔다고 말하고,
또 그가 다른 뜻을 품고서 장차 魏王을 위태롭게 하려 한다고 誣告하니, 장종이 노하여 宦官 馬彦珪를 보내 蜀에 이르러 곽숭도의 去就를 살피게 하였다. 마언규가 이를 劉皇后에게 보고하니 유황후가 마언규에게 거짓 詔書를 꾸며서 위왕에게 내려 곽숭도를 죽이게 하였다.
郭崇韜는 아들이 다섯이었는데 그중 두 명은 蜀에서 곽숭도를 따라 죽었고 나머지는 모두 피살되었으며 蜀을 격파하여 얻은 재물들은 모두 籍沒되었다.
唐 明宗이 즉위하자 조서를 내려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고, 太原에 있는 그의 옛집을 그의 한 손자에게 하사하였다.
郭崇韜가 권세를 잡았을 때에는 宰相 豆盧革‧韋悅 등을 비롯하여 모두 그에게 빌붙었다. 곽숭도의 부친은 諱가 弘이니 두로혁 등이 다른 일을 빙자하여 弘文館을 崇文館으로 고칠 것을 상주하였다.
그의
姓이
郭이었기에 이에
郭子儀의 후손이라고 하였는데 곽숭도가 마침내 이 일을 사실로 여겼다. 곽숭도가
蜀을 정벌할 때 곽자의의
墓에 들러 말에서 내려 통곡하고 떠나가니 이 일을 들은 이들이 자못 가소롭게 여겼다.
郭子儀
그러나 곽숭도는 國家에 충성을 다하였고 큰 智略이 있었다. 그가 蜀을 격파하고 나서 이어 사신을 보내어 唐나라의 威武와 恩德으로 南詔의 蠻族들에게 曉諭하여 이를 통해 그들을 按撫하고 來朝하게 하려 하였으니 큰 뜻이 있었다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