詔撰元勳之文이 當如此니 盛世君臣之際가 如掌이라
至和二年七月乙未
에 하고 已而泣且言曰 臣之先臣旦
이 相眞宗皇帝十有八年
이요 今臣素又得
侍從之臣
이라
惟是先臣之訓이 其遺業餘烈이어늘 臣實無似라 不能顯大하고 而墓碑至今無辭以刻하니
惟陛下哀憐하야 不忘先帝之臣하야 以假寵於王氏하야 而勖其子孫하소서하니
天子曰 嗚呼라 惟汝父旦이 事我文考眞宗하야 叶德一心하야 克終厥位하야 有始有卒하니 其可謂全德元老矣로다
汝素는 以是刻于碑하라하시니 素拜稽首하고 泣而出이라
皇曾祖諱言은 滑州黎陽令으로 追封許國公하고 皇祖諱徹은 左拾遺로 追封魯國公하고 皇考諱祐는 尙書兵部侍郞으로 追封晉國公하니 皆累贈太師尙書令 兼中書令하다
曾祖妣姚氏는 魯國夫人이요 祖妣田氏는 秦國夫人이요 妣任氏는 徐國夫人이요 邊氏는 秦國夫人이라
公之皇考는 以文章自顯漢周之際하고 逮事太祖太宗하야 爲名臣이러라
公少好學有文
하야 太平興國五年
에 進士及第
하야 이라
이 薦其材
하야 任轉運使
하야 驛召至京師
하야 辭不受
라
獻其所爲文章
하야 得試
하야 知制誥
하야 하고 遷
한대
昌言罷
에 復知制誥
하야 仍兼修撰判院事
하고 召賜
라
公爲人嚴重하야 能任大事하고 避遠權勢하야 不可干以私라
若水爲樞密副使
라가 罷
에 하야 問誰可大用者
오하니 若水言公可
라한대 眞宗曰 吾固已知之矣
라하다
咸平三年
에 又知禮部貢擧
라가 居數日
에 拜
知樞密院事
하다
景德元年
에 契丹犯邊
하니 眞宗幸
하고 이 留守東京
이라가 得暴疾
이어늘 命公馳自
하야 代元份留守
하다
二年遷
하고 三年拜工部尙書 同中書門下平章事
하야 監修國史
라
故其爲相에 務行故事하고 愼所改作하며 進退能否하고 賞罰必當이라
眞宗久而益信之하야 所言無不聽하고 雖他宰相大臣有所請이라도 必曰 王某以謂如何오라하야 事無大小히 非公所言이면 不決이러라
公在相位十餘年에 外無夷狄之虞하야 兵革不用하야 海內富實하고 群工百司가 各得其職이라
公於用人에 不以名譽하고 必求其實하야 苟賢且材矣면 必久其官하고 衆以爲宜某職然後遷하니 其所薦引에 人未嘗知러라
爲樞密使
하야 當罷
라 使人私公
하야 求爲
한대 公大驚曰 將相之任
을 豈可求耶
아
準入見에 涕泣曰 非陛下知臣이면 何以至此리오하니 眞宗具道公所以薦準者라
故參知政事
이 有賢行
하야 以
으로 居于家
어늘 眞宗
하야 慰勞之
하고 遷
이러라
眞宗命至中書하야 問王某하니 然後에 人知行簡은 公所薦也라
其後公薨
에 史官修
할새 得內出奏章
하야 乃知朝廷之士
가 多公所薦者
라
其語雖簡이나 而能以理屈人하고 默然終日에 莫能窺其際라가 及奏事上前하야 群臣異同이면 公徐一言以定이러라
今上爲皇太子
에 見公
하야 稱太子學書有法
한대 公曰 諭德之職
이 止於是邪
아하다
趙德明이 言民饑하야 求糧百萬斛하니 大臣皆曰 德明新納誓而敢違하니 請以詔書責之라하야늘
眞宗以問公한대 公請勅有司하야 具粟百萬于京師하고 詔德明來取하니 眞宗大喜하다
明日에 他宰相有袖死蝗以進者하니 曰 蝗實死矣니 請示於朝하고 率百官賀라하야늘 公獨以爲不可러니
眞宗顧公曰 使百官方賀어늘 而蝗如此하니 豈不爲天下笑邪아하다
宦官
가 以忠謹得幸
이러니 病且死
에 求爲節度使
러라
眞宗以語公曰 承䂓待此以瞑目
이라하야늘 公執以爲不可
하야 曰 他日將有求爲樞密使者
면 奈何
오하니 일새라
公任事久에 人有謗公於上者면 公輒引咎하야 未嘗自辯이로되
至人有過失하얀 雖人主盛怒라도 可辯者辯之하야 必得而後已하다
榮王宮火하야 延前殿이어늘 有言非天災니 請置獄劾火事라하야 當坐死者百餘人이라
公獨請見하야 曰 始失火時에 陛下以罪己詔天下하야 而臣等皆上章待罪어늘 今反歸咎於人하니 何以示信이리오
上書言宮禁事
하야 坐誅
라 籍其家
하야 得朝士所與往還占問吉凶之說
이라
公因自取常所占問之書하야 進曰 臣少賤時에 不免爲此하니 必以爲罪인댄 願幷臣付獄하소서하니
公曰 臣爲宰相하야 執國法하니 豈可自爲之幸於不發而以罪人이리오하니 眞宗意解라
旣而眞宗悔하야 復馳取之한대 公曰 臣已焚之矣라하니 由是獲免者衆이러라
眞宗曰 朕方以大事託卿이어늘 而卿病如此라하고 因命皇太子拜公하니
公言皇太子盛德이 必任陛下事라하고 因薦可爲大臣者十餘人이러니
公屢以疾請
하니 眞宗不得已拜公
하야 五日一朝視事
하되 遇軍國大事
면 不以時入參決
하니
公益惶恐하야 因臥不起하야 以疾懇辭하니 冊拜太尉玉淸昭應宮使하다
自公病으로 使者存問이 日常三四요 眞宗手自和藥賜之하고 疾亟에 遽幸其第하야 賜以白金五千兩이어늘 辭不受라
以天禧元年九月癸酉에 薨於家하니 享年六十有一이라
眞宗臨哭하고 輟視朝三日하고 發哀於苑中하며 其子弟門人故吏가 皆被恩澤하고 卽以其年十一月庚申에 葬公於開封府開封縣新里鄕大邊村하다
子男三人이니 長曰司封郞中雍이요 次曰贊善大夫冲이요 次曰素라
女四人
이니 長適
하고 次適兵部員外郞直集賢院蘇耆
하고 次適右正言范令孫
하고 次適龍圖閣直學士兵部郞中
하다
公事寡嫂謹하고 與其弟旭으로 友悌尤篤하야 任以家事에 一無所問하며 而務以儉約으로 率勵子弟하야 使在富貴에 不知爲驕侈라
兄子睦欲擧進士한대 公曰 吾常以大盛爲懼하니 其可與寒士爭進이리오하다
是以로 君明臣賢하야 德顯名尊하야 生而俱享其榮하고 歿而長配於廟하니 可謂有始有卒이 如明詔所褒로다
臣謹考國史實錄
이라가 至於搢紳故老之傳
하야 得公終始之節
하야 而錄其可紀者
에 以彰先帝之明
하야 以稱聖恩
이 褒顯王氏
하고 流澤子孫
하야 與宋無極之意
하노라
원훈元勳을 어찬御撰하는 글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니 성대한 세상에서 군신의 제회際會를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환히 알 수 있다.
지화至和 2년 7월 을미일에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왕소王素가 황제께 상주上奏하고 이윽고 흐느끼면서 말하기를 “신의 선신先臣 단旦이 진종황제眞宗皇帝를 도와 재상을 맡은 세월이 18년이고 지금 신 소素가 또 시종신侍從臣으로 대죄待罪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선신의 말씀은 그가 남긴 사업의 공렬인데 신이 참으로 형편없어 드러내어 광대光大하게 하지 못하고 묘비墓碑는 지금까지 글을 지어 새기지 못하였으니,
오직 폐하께서 가련하게 여기어 선제先帝의 신하를 잊지 말아 왕씨王氏에게 은총을 내려주시어 그 자손子孫들을 권면해주소서.”라고 하니,
천자께서 “아, 오직 너의 아비 단旦이 우리 문고文考 진종眞宗을 섬겨 서로 뜻과 마음이 맞아 그 재상의 직위를 끝까지 마쳐 시종일관始終一貫하니 덕을 온전히 갖춘 원로元老라고 이를 만하다.
너 소素는 이 내용으로 비碑에 새기라.”라고 하시니, 소素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 흐느끼며 나왔다.
다음날 사관수찬史館修撰 구양수歐陽脩에게 명하시기를 “왕단王旦의 묘비墓碑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으니 너는 명銘을 지으라.”라고 하셨다.
신臣 수脩는 삼가 살펴보건대, 고故 추성보순동덕수정推誠保順同德守正 익대공신翊戴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위守太尉 충옥청소응궁사充玉淸昭應宮使 상주국上柱國 태원군太原郡 개국공開國公으로 태사상서령太師尙書令 겸중서령兼中書令에 추증되고 위국공魏國公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인 왕공王公은, 휘諱가 단旦이고 자字가 자명子明이니 대명부大名府 신현莘縣 사람이다.
증조부 휘諱 언言은 활주滑州 여양영黎陽令으로 허국공許國公에 추봉追封되었고, 조부 휘諱 철徹은 좌습유左拾遺로 노국공魯國公에 추봉되었으며, 부친 휘諱 우祐는 상서병부시랑尙書兵部侍郞으로 진국공晉國公에 추봉되었으니, 모두 여러 차례에 걸쳐 태사상서령太師尙書令 겸중서령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증조모 요씨姚氏는 노국부인魯國夫人이고, 조모 전씨田氏는 진국부인秦國夫人이며, 모친 임씨任氏는 서국부인徐國夫人이고 변씨邊氏는 진국부인秦國夫人이다.
공의 부친은 문장文章으로 후한後漢과 후주後周의 시대에 스스로 현달했고, 송宋나라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섬길 때에 이르러 명신名臣이 되었다.
두중위杜重威를 회유하여 후한을 배반하지 않게 하였고 노다손盧多遜이 조보趙普를 해치려는 모의謀議를 거부하였으며 자신의 가솔 모두를 걸고 부언경符彦卿이 죄가 없음을 밝혔다.
그래서 세상에서 왕씨王氏가 음덕陰德이 있음을 많이들 일컬었다.
공의 부친 또한 스스로 뜰에 홰나무 세 그루를 심으면서 “내 후손 가운데 반드시 삼공三公이 될 자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그 표시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문재文才가 있어 태평흥국太平興國 5년(980)에 진사進士에 급제及第하여 대리평사大理評事 지평강현知平江縣 담주은장감관潭州銀場監官이 되었다.
거듭 승진하여 저작좌랑著作佐郞이 되어 《문원영화文苑英華》를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전중승殿中丞으로 옮기고 정주鄭州와 호주濠州 두 주의 통판通判이 되었다.
왕우칭王禹偁이 그에게 재주가 있다고 천거하여 전운사轉運使에 임명하여 역마驛馬로 부르자 경사京師에 이르러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지은 문장을 올려 시험을 보고서 직사관直史館이 되고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誥로 옮겨서 순화淳化 3년(992) 예부시禮部試의 지공거知貢擧를 하였고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 동판이부유내전同判吏部流內銓 지고과원知考課院으로 옮겼다.
그러나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조창언趙昌言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있었기에 공이 조창언의 사위라는 이유로 피혐避嫌하여 면직되기를 청하니, 태종太宗이 가상하게 여겨 예부낭중禮部郞中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으로 개차改差하였다.
조창언이 참지정사를 그만둔 뒤에 지제고知制誥에 복직하여 그대로 수찬修撰 판집현원사判集賢院事를 겸하였고 황제가 불러 금자金紫를 하사하였다.
이 관직에 있을 적에 진종眞宗이 즉위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을 배수하였는데 며칠 만에 부름을 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 지심관원知審官院 통진은대봉박사通進銀臺封駮事가 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근엄하고 중후하여 대사大事를 감당할 수 있고 권세權勢를 피하고 멀리하여 사사로운 일로 청탁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진종眞宗이 더욱 공의 어짊을 알았다.
전약수錢若水가 사람을 잘 볼 줄 안다고 이름났는데 늘 공을 칭찬하면서 “참으로 재상宰相감이다.”라고 하였다.
전약수가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있다가 그만둘 때 황제가 원중苑中에서 그를 소대召對하여 크게 쓸 만한 이가 누구냐고 물으니 전약수가 공이 쓸 만하다고 말하자, 진종이 말하기를 “나도 본래 벌써 그를 알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함평咸平 3년(1000)에 또 예부시禮部試의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가 며칠 지난 뒤에 급사중給事中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배수되었다.
이듬해에 공부시랑工部侍郞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고 거듭 옮겨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
경덕景德 원년元年(1004)에 거란契丹이 변방을 침범하니 진종眞宗이 전주澶州에 행행行幸하고 옹왕雍王 원빈元份이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있다가 폭질暴疾에 걸리자, 공에게 명하여 행재소行在所에서 달려가 원빈元份을 대신하여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도록 하였다.
경덕 2년에는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옮기고, 경덕 3년에는 공부상서工部尙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에 배수되어 국사國史를 감수監修하였다.
이때에 거란契丹이 처음 맹약盟約하기를 청하고 조덕명趙德明 또한 송나라에 우호를 서약誓約하여 하서河西의 옛 땅을 지키기를 원하니 두 변방에서 군대를 풀고 쓰지 않게 되었다.
진종이 마침내 일을 만들지 않는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공은 이제 송宋나라가 개국한 지 3대代가 지나 조종祖宗의 법도가 다 구비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공이 재상이 되었을 적에 고사故事를 따르는 데 힘쓰고 개작改作하는 것을 신중하게 여기며 유능한 이를 등용하고 무능한 이를 물리치며 상벌賞罰을 반드시 합당하게 시행하였다.
진종眞宗이 오래될수록 더욱 공을 신뢰하여 공이 의견 올리는 것을 들어주지 않음이 없었고 비록 다른 재상과 대신이 청하는 바가 있더라도 반드시 “왕모王某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말하여, 논의하는 일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공이 올리는 말이 아니면 결정하지 않았다.
공이 재상의 자리에 있던 10여 년 동안에 밖으로 외적이 침범할 걱정이 없어 군대를 쓰지 않아 해내海內가 부유하고 충실해졌으며 군공群工과 백사百司가 저마다 자기 직책을 잘 수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공을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한다.
공은 사람을 쓸 때 명예名譽를 보지 않고 반드시 그 실제를 살펴서 만약 어질고 재주가 있으면 반드시 그 관직을 오랫동안 맡기고 사람들이 그가 어떤 관직에 맞다고 한 뒤에야 관직을 옮겨주었으니 공이 추천하여 등용한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구준寇準이 추밀사樞密使로 있다가 그만두게 되자 구준이 사람을 보내 공에게 사사로이 청탁하여 사상使相이 되도록 해달라고 하자, 공이 크게 놀라면서 “장상將相의 직임을 어찌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나는 사사로운 청탁은 받지 않네.”라고 하니, 구준이 깊이 원망하였다.
얼마 뒤에 조명詔命이 나오자 구준을 무승군절도사武勝軍節度使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하였다.
구준이 들어가 황제를 뵐 적에 흐느껴 울면서 “폐하께서 신을 알아주시지 않았다면 신이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라고 하니, 진종眞宗은 공이 구준을 천거한 곡절을 다 말해주었다.
구준이 비로소 부끄러워하고 탄식하면서 자신이 공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고故 참지정사參知政事 이목자李穆子 행간行簡이 어진 행실이 있어 장작감승將作監丞으로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진종眞宗이 그를 불러 보고서 위로하고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옮겨주었다.
당초에 사자를 보내 그를 부를 적에 그가 살고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진종이 중서성中書省에 가서 왕모王某에게 물어보라고 명하니 그런 뒤에야 사람들이 행간行簡은 공이 천거한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이 지제고知制誥로부터 재상이 될 때까지 선비를 천거한 일이 특히 많았다.
그 뒤에 공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사관史官이 《진종실록眞宗實錄》을 편수할 적에 안에서 주장奏章을 꺼내어 본 뒤에야 비로소 조정朝廷의 선비들 가운데 공이 천거한 이가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공은 남과 함께 있을 때 말과 웃음이 적었다.
그 말은 비록 간략하였지만 이치를 가지고 남을 승복시킬 수 있었고, 하루 종일 말이 없어 사람들이 그 심중을 엿볼 수 없다가 황제 앞에 정사政事를 상주上奏할 때 여러 신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공이 천천히 한마디 말을 하여 결정하였다.
금상今上(인종仁宗)이 황태자皇太子였던 시절 태자유덕太子諭德이 공을 만나 태자가 서법書法을 배우는 데 법도가 있다고 칭송하자, 공이 “유덕諭德의 직책이 여기에 그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조덕명趙德明이 백성들의 굶주림을 말하고서 백만 섬의 양식을 요구하니, 대신大臣들이 모두 “조덕명이 새로 우호를 서약誓約하였는데 감히 이를 어기니 조서詔書로 그를 꾸짖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진종眞宗이 공에게 묻자 공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경사京師에 곡식 백만 섬을 마련하고 조덕명에게 조서를 내려 와서 가져가라고 하기를 청하니 진종이 크게 기뻐하였다.
조덕명이 조서를 받고 부끄러워하고 절하면서 “조정에 인물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대중상부大中祥符 연간에 천하에 큰 황재蝗災가 발생하였다.
진종眞宗이 들판에 사람을 보내 죽은 황충蝗蟲을 가지고 와서 대신大臣들에게 보였다.
그런데 이튿날 다른 재상 가운데 죽은 황충을 가지고 와서 올린 이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말하기를 “황충이 참으로 죽었으니 조정에 보여주고 백관을 거느리고서 경하慶賀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으나, 공만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며칠 뒤에 정사政事를 상주上奏할 때 날아온 황충들이 하늘을 가렸다.
진종이 공을 돌아보면서 “백관으로 하여금 막 경하하게 하였는데 황충이 이러하니 어찌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환관宦官 유승규劉承䂓가 충근忠謹한 성품으로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는데 병들어 죽을 때가 되자 절도사節度使가 되기를 요구하였다.
진종이 공에게 말하기를 “유승규가 이 직책을 얻어야 눈을 감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공이 불가하다는 주장을 쟁집爭執하면서 “훗날 추밀사樞密使를 요구하는 이가 있으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니, 지금까지 내신內臣들의 관직이 유후留後를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이 오랫동안 정사를 담당하는 동안에 황제에게 공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은 그때마다 자신의 허물을 인책引責하고서 스스로 변명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떤 이가 실수로 잘못한 일이 있는 경우에는 비록 임금이 몹시 노하더라도 변론할 것은 변론하여 반드시 주장을 관철시킨 뒤에 그만두었다.
영왕궁榮王宮에 화재가 나서 불이 전전前殿에 옮겨 붙었는데 “천재天災가 아니니 국청鞫廳을 세우고 화재가 난 경위를 심문하소서.”라고 말한 이가 있어 죄를 받아 죽임을 당할 자가 백여 명이었다.
그러자 공이 혼자 알현하기를 청하여 “처음 불이 났을 때 폐하께서 자신을 탓하시겠다고 천하에 조서를 내리어 신들이 다 소장을 올리고 대죄待罪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남에게 허물을 돌리시니 어떻게 신의信義를 보일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화재가 난 일은 비록 흔적이 있지만 어찌 하늘이 내린 견책이 아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이 때문에 죄를 받게 된 자들이 다 사면되었다.
일자日者가 상서上書하여 궁금宮禁의 일을 발설하여 처형되게 된지라, 그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면서 조사朝士들이 일자日者와 더불어 주고받으며 길흉吉凶을 점친 글들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진종眞宗이 노하여 어사御史에게 맡겨 실상을 심문하게 하려고 하였다.
더구나 그 말들이 조정의 일에는 미치지 않았으니 죄를 줄 것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진종이 분노를 풀지 않자,
공이 늘 길흉을 점치는 책을 스스로 가지고 와서 올리면서 “신도 어리고 비천할 때 이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으니, 굳이 죄를 주시려고 하신다면 원컨대 신까지 아울러 처벌하소서.”라고 하니,
진종이 “이 일이 이미 드러났으니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공이 “신이 재상이 되어 국법國法을 집행하고 있으니 어찌 스스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남에게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그제야 진종의 마음이 풀렸다.
공이 중서성中書省에 가서 발견한 글들을 다 불태웠다.
얼마 뒤에 진종이 후회하고서 다시 급히 사람을 보내 가져오게 하였는데, 공이 “신이 이미 그것들을 태워버렸습니다.”라고 하니, 이 때문에 죄를 면하게 된 자들이 많았다.
공은 누차 승진하여 태보太保에 이르렀는데 질병을 이유로 물러나고자 하여 자복전滋福殿에 들어가 알현하였다.
진종眞宗이 말하기를 “짐이 바야흐로 대사大事를 경卿에게 부탁하려고 하는데 경의 병이 이러하구려.”라 하고 이어서 황태자皇太子에게 공에게 절하라고 명하니,
공이 말하기를 “황태자의 성덕盛德이 반드시 폐하의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고 이어 대신大臣이 될 만한 자 10여 명을 천거하였는데,
그 뒤에 재상에 오르지 못한 자는 이급李及과 능책凌策 두 사람뿐이었다.
공이 누차 질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진종이 마지못해 공에게 태위太尉 겸시중兼侍中을 배수하여 닷새에 한 번 조정에 나와 정사를 보게 하되 군국軍國의 대사大事가 생기면 정한 때에 관계없이 들어와 참여하여 결정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이 더욱 황공하여 병석에 있음을 인하여 나오지 않으면서 질병을 이유로 간절히 사직하니, 황제가 태위太尉 옥청소응궁사玉淸昭應宮使에 책배冊拜하였다.
공이 병들고부터 사자使者가 하루에 늘 서너 차례 문안하였고 진종이 손수 약을 조제하여 하사하였으며, 병이 위급해지자 급히 그 집에 거둥하여 백금白金 5,000냥을 하사하였는데 공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천희天禧 원년元年 9월 계유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진종이 임곡臨哭하고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원중苑中에서 애도를 표하며 그 자제子弟, 문인門人, 옛 하속下屬들이 모두 은택을 입도록 하시고, 이해 11월 경신일에 개봉부開封府 개봉현開封縣 신리향新里鄕 대변촌大邊村에 공을 장사 지냈다.
공은 조씨趙氏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영국부인榮國夫人에 봉해졌고 공보다 5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자식은, 아들은 세 명이니 장자長子는 사봉랑司封郞 중옹中雍이고, 둘째는 찬선대부贊善大夫 충冲이고, 셋째는 소素이다.
딸은 네 명이니 장녀長女는 태자태부太子太傅 한억韓億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직집현원直集賢院 소기蘇耆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우정언右正言 범령손范令孫에게 시집갔고, 넷째는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 병부낭중兵部郞中 여공필呂公弼에게 시집갔다.
공은 과부가 된 형수를 공경히 섬겼고, 아우 욱旭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아우에게 집안일을 맡겼을 때에는 하나도 묻는 것이 없었으며, 힘써 검약儉約으로 자제子弟들을 인도하고 면려하여 부귀하게 된 뒤에도 교만하거나 사치할 줄 모르게 하였다.
조카 목睦이 진사시進士試를 보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늘 크게 현달한 것을 두려워하였으니 어찌 빈한貧寒한 선비들과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다툴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 아들 소素가 아직 관직을 받지 못했는데 은택을 구하지 않는다는 표문을 남겼다.
건흥乾興 원년元年(1022)에 조서를 내려 진종眞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경덕景德과 대중상부大中祥符 연간은 성대합니다.
공이 재상 노릇한 것과 선제先帝께서 공을 등용한 것을 살펴보면 지극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이런 까닭에 임금은 명철하고 신하는 어질어서 덕이 드러나고 이름이 높아 살아서는 그 영화를 함께 누리고 죽어서는 왕묘王廟에 장구히 배향되니 관직에 시종일관함이 성상의 밝은 조서에서 기린 바대로라고 이를 만합니다.
옛날 〈증민烝民〉과 〈강한江漢〉에서 신하臣下를 추숭推崇한 일은 임금이 현명하고 유능한 이를 임명한 공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니, 비록 중산보仲山甫와 소목공召穆公의 시라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선왕宣王의 덕을 노래한 것입니다.
신이 삼가 국사실록國史實錄을 고찰하다가 사대부와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이르러 공의 일생의 절조節操에 대한 이야기를 얻고서 그 기록할 만한 것들을 수록함에, 문득 명시銘詩를 지어 선제先帝의 명철하심을 밝혀서 성상께서 내린 은총이 왕씨王氏를 기리고 자손에게 은택을 끼쳐 송宋나라와 더불어 무궁히 이어지게 한 뜻을 칭송합니다.
어찌 임금에게 반드시 신뢰를 받을 수 있겠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