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之有天下國家者가 其興亡治亂이 未始不以德이요 而自戰國秦漢以來로 鮮不以兵이라 夫兵豈非重事哉아
然其因時制變하야 以苟利趨便하야 至於無所不爲로되
而考其法制
하얀 雖可用於一時
나 而不足施於後世者多矣
요 惟唐立
하야 頗有足稱焉
이라
蓋古者兵法起於井田이러니 自周衰로 王制壞而不復하고 至於府兵하얀 始一寓之於農이요 其居處敎養畜材待事動作休息이 皆有節目하니 雖不能盡合古法이나 蓋得其大意焉이라
至其後世하야 子孫驕弱하야 不能謹守하야 屢變其制하니 夫置兵은 所以止亂이러니 及其弊也하얀 適足爲亂이요 又其甚也엔 至困天下以養亂하야 而遂至於亡焉이라
其始盛時
에 有府兵
하고 府兵後廢而爲
하고 彉騎又廢
에 而
之兵
이 盛矣
러니
及其末也하얀 强臣悍將이 兵布天下하고 而天子亦自置兵於京師하니 曰禁軍이라
其後天子弱하고 方鎭彊하야 而唐遂以亡滅者는 措置之勢使然也라
若乃將卒營陣車騎器械征防守衛凡兵之事는 不可以悉記요 記其廢置得失終始治亂興滅之迹하야 以爲後世戒云이라
구양공歐陽公이 서사敍事를 하는 곳에 왕왕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의 골수骨髓를 얻었다.
그가 지은 《신당서新唐書》 및 《오대사단론五代史短論》에도 모두 태사공의 풍도가 있다.
당唐나라 병사 제도가 세 차례 변화된 것이 마치 손바닥처럼 환하다.
옛날에 천하와 국가를 소유한 이는 그 흥망興亡과 치란治亂이 덕德에서 비롯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와 진秦‧한시대漢時代 이래로는 병사에서 비롯되지 않은 적이 드무니, 저 병사가 어찌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때에 따라 기변機變을 제어制御하여 이익을 탐내고 편리함을 좇아 하지 못하는 짓이 없는 데에 이르렀다.
그 법제를 살펴보건대 비록 한때에는 쓸 만하나 후세에 시행하지 못할 것들이 많았고, 오직 당唐나라는 부병제府兵制를 세워 자못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
옛날에 병법兵法은 정전井田에서 시작되었는데 주周나라가 쇠미해진 뒤로 왕제王制가 무너져 회복되지 못하였고, 부병府兵으로 말하자면 처음에는 오로지 병兵을 농農에다 넣었고 그 거처와 육성, 인재를 길러 일에 대비하는 법, 일을 하고 휴식하는 것들에 모두 절목이 있었으니, 비록 모두 고법古法에 합치하지는 않으나 대개 그 대의大意에 맞았습니다.
이것이 고조高祖와 태종太宗 시대가 융성했던 까닭입니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자손들이 교만하고 나약하여 삼가 지키지 못하여 그 제도를 누차 바꾸었으니, 대저 병력兵力을 두는 것은 난亂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폐단이 생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난亂이 되기에 알맞을 뿐이고, 게다가 심한 경우에 이르러서는 천하를 곤궁하게 하여 난亂을 길러서 마침내 망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대개 당唐나라가 천하를 다스린 지 2백여 년에 병사의 대세大勢가 세 차례 변하였다.
처음 융성할 때에 부병府兵을 두었고, 부병府兵이 뒤에 폐지되자 확기彉騎를 시행하였고, 확기彉騎가 또 폐지되자 방진方鎭의 병제兵制가 흥성하였다.
그러다가 당나라 말엽에 이르러 강성强盛한 신하臣下와 호한豪悍한 장수將帥가 천하에 병사를 펼쳐놓았고, 천자 역시 경사京師에 스스로 병사를 배치하니 명칭이 금군禁軍이다.
그 뒤에 천자天子가 약해지고 방진方鎭이 강해졌으니, 당나라가 마침내 멸망한 것은 조치한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저 장졸將卒, 영진營陣, 거기車騎, 기계器械, 정방征防, 수위守衛 등과 같은 병사에 관한 제반 사항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는 없고, 폐치廢置의 득실得失과 치란흥멸治亂興滅 전말의 자취를 기록하여 후세의 경계로 삼는다.